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282
〈 282화 〉 용사, 갈라할(1)
* * *
공기가 떨려온다.
사방에 흩뿌려지는 마기. 기이한 형태로 굽이치는 마나. 마수와 인간이 뒤섞인 피비린내. 코끝을 찌르는 죽음의 향기. 신을 배반한 여인에게선 죽음의 냄새가 났다.
“너희도 곧 구원해줄게.”
나부끼는 새하얀 백발.
빛을 잃은 녹색의 눈동자.
한때 성녀였던 배교자가 미소 짓는다.
그녀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메아리쳤다. 숨이 막혀옴을 느끼며 라니엘은 이를 꽉 깨물었다. 라니엘은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온전한 상태의 배교자다.
그녀의 몸을 옭아매는 제약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떨려오는 공기가, 일대를 찍어누르는 위압감이 밤의 도시 때와는 차원이 다름을 알린다.
틱, 티딕.
그녀의 존재를 견디지 못한 공간이 찢어지기 시작한다. 재앙이란 그런 것이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일대의 섭리를 망가트리는 존재들.
뿌득.
라니엘은 이를 갈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녀가 움켜쥔 주먹을 배교자를 향해 휘둘렀다. 손등에 새겨진 회로가 타오르며, 푸른빛이 점멸한다.
그러나, 그 주먹은 배교자에게 닿지 않는다.
쩌엉!
구정물에 삼켜진 통로.
그 통로를 가로막은 불투명한 막의 너머로 라니엘의 주먹은 나아가지 못한다. 그녀가 발현해낸 주문 또한 마찬가지다. 막에 부딪혀 흩어질 뿐이다.
“소용없어.”
막의 너머에서 배교자가 웃는다.
“알고 있잖니? 이건 별의 시련이란 것을.”
별의 시련.
별을 지닌, 용사에게만 허락되는 시련.
“축복받지 못한 인간이 간섭할 수 있을 리가 없지. 포기하렴, 아이야.”
별을 지니지 않은 이는 통로 너머의 공간에 간섭할 수 없다. 그것이 시련의 절대적인 규칙이다.
배교자는 웃음을 흘리며 라니엘에게서 등을 돌린 채 걸음을 옮긴다. 그녀에게 붙잡힌 클로에가 라니엘을 향해 손을 뻗어보나, 그 손이 라니엘에게 닿는 일은 없다.
꾸욱.
라니엘은 입술을 깨문 채 배교자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그녀의 눈동자에 핏발이 선다. 움켜쥔 주먹에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새어나온다.
이윽고, 통로를 집어삼킨 구정물이 꿀렁인다.
별의 시련으로 향하는 문이 닫혀간다. 라니엘은 손을 펼쳐, 통로를 이루는 골조를 움켜쥐었다. 뿌득, 하고 그녀의 손가락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화륵.
대량의 마나가 타들어 가며, 라니엘의 손가락을 중심으로 공간이 왜곡된다. 닫히려는 통로는 왜곡된 공간에 맞부딪쳐 더이상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통로를 붙들어 둘 뿐 라니엘은 이 통로의 너머로 나아가지 못한다. 별에게 축복받지 못했기에, 별빛을 지니지 않았기에 그녀로선 저 너머의 공간에 간섭할 수 없다.
주문이 닿지 않는다.
이 빌어먹을 시련은 자신의 몸을 거부한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별에게 선택받지 못한 인간이, 별을 품을 방법.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을 손에 넣을 방법.
그 방법을 라니엘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배교자를 이길 수 있는가?
단신으로 배교자를 쓰러트릴 수 있는가. 쓰러트렸다 한들, 지금 붙들어 둔 이 공간을 놓아버리면, 돌아올 길이 사라진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불확정한 요소가 너무나도 많다.
한순간의 고민, 한순간의 망설임.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는다. 우선 행동해야 한다. 라니엘은 이내 각오를 다진 채 남은 한 손을 앞으로 뻗는다.
“천칭(Balance).”
백금색의 천칭이 떠오른다.
라니엘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것을 향해 라니엘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다.
콱.
누군가 라니엘의 손목을 붙잡았다.
* * *
“···갈라할?”
라니엘이 제 손목을 붙잡은 갈라할을 노려봤다.
“이거 놔.”
라니엘이 다급하게 외쳐보나, 갈라할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라니엘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넌 안돼.”
고개를 숙인 채 라니엘이 말을 이었다.
“가면, 너는 죽어.”
살아돌아올 가능성이 미약하게나마 있는 자신과는 다르다. 갈라할은 저곳에 들어간 순간 무조건 죽는다. 단순히 남은 수명이 적기 때문만은 아니다.
갈라할에게는 잔인한 말이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말을 전해야 한다.
“너로는 부족해.”
부족하다.
갈라할이 가진 힘으론 턱없이 모자라다.
그리 말하는 라니엘을 보며 갈라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여전히, 갈라할은 라니엘의 손목을 놓지 않는다.
“내 말 못 들었어? 넌 가면 죽는다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그럴지도 모르는 게 아니야. 가면 넌 반드시 죽어. 그러니까, 이거 빨리 놔. 갈라할.”
갈라할이 쓰게 웃었다.
“라니엘.”
라니엘이 고개를 든다.
그리하여 갈라할과 시선을 마주한 라니엘은 불현듯 깨닫고 만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던, 눈앞의 갈라할에겐 닿지 않는다.
“저는 용사입니다.”
저건 이미 결정을 내린 눈동자다.
“용사는, 도움을 바라는 이를 외면해선 안 되는 법입니다.”
라니엘의 머릿속에 수많은 단어와 문장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미 꿈을 이뤘다면서.
네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서.
죽음이 두렵다면서.
수많은 문장이 떠올랐지만, 그것은 갈라할이 다음에 내뱉은 한마디에 전부 가로막히고 만다.
“저는 마지막까지 용사로 있고 싶습니다.”
라니엘이 제 팔을 떨궜다.
천칭이 사라지고, 그제서야 갈라할이 라니엘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 자리를 대신하듯 갈라할이 통로의 앞에 바로 섰다.
그가 성창을 움켜쥔 채 자세를 잡는다.
동화 속 영웅과도 같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라니엘이 갈라할에게 물었다.
“죽으러 가는 거냐.”
“아뇨.”
갈라할이 웃었다.
“구하러 가는 겁니다.”
2.
배교자는 지금 이 순간 더할 나위 없이 즐겁다.
별이 선택한 아이를 더럽힐 수 있기에, 그로 하여금 별에게 복수할 수 있기에, 그토록 재회를 고대했던 카르디와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그 모든 사실이 기뻐서 배교자는 웃는다.
웃음을 머금은 채 배교자가 입을 열었다.
“너는 모를 거야, 불쌍한 아이야.”
배교자는 클로에를 향해 속삭인다.
“별이 너와 내게 무슨 짓을 저질러놨는지.”
겁에 질려 자신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클로에를 향해 배교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와 내가, 그리고 최초의 인도자가 어떤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그 영혼이 무슨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너는 알 수 없겠지.”
별을 배반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진실을 마주한 배교자가 느낀 것은 지독한 배신감이었다. 그 배신감은 곧 그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졌다. 최초의 성녀는 더이상 별을 섬기지 않는다.
“잘못된 신, 아득한 태초의 시절 인간의 손에 의해 끌어올려 졌을 뿐인 낡아빠진 신. 그 신을 믿지 말렴 아이야. 너는 믿음으로서 배신당한 거란다.”
눈앞의 이 아이는 모르겠지.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 그 사실이 가여우면서도 또 기쁘다. 미지는 최고의 행복일지도 모르는 법이니.
배교자는 드넓게 펼쳐진 공간을 걷는다.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진 이 새하얀 공간은, 한때 자신이 신의 시련을 치렀던 곳이다. 신께서는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셨고, 그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글레리아는 신에게 제 가치를 증명했다.
수백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또다시 증명의 시간이 왔다.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배교자는 공간을 걷는다.
‘얼마 안 남았어.’
이 아이의 몸을 빼앗는다면 자신은 모든 제약으로부터 해방된다. 수백 년 동안 그리워했던 최초의 잿빛과 다시 마주할 수 있다.
“기다려요, 아르미엘.”
미소를 머금은 채 배교자가 걷는다.
그렇게 몇 걸음을 내디뎠을까.
배교자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공간에 새로운 누군가 발을 디뎠다.
그 침입자의 모습은 아직 보이질 않으나, 보지 않더라도 예상할 수 있다.
“잿빛.”
별빛을 타고나지 못했음에도, 별을 향해 손을 뻗는 가련한 아이. 제 수명을 태움으로써 찬란히 빛나는 인간. 또다시 그 찬란한 광채를 자신에게 보여줄 생각인가?
환희에 젖은 채 배교자는 침입자를 바라본다.
그리고,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배교자의 시선이 단번에 차가워졌다. 그녀가 바라던 존재는 그 자리에 없었다.
“···너는 뭐니?”
기억에 없는 인간이다.
언젠가 마주쳤을 테지만,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인물이라 그만 잊어버리고만 인간.
“갈라할.”
한낱 인간이 말했다.
“용사입니다.”
3.
갈라할은 걷는다.
그 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볍다. 언제나 무겁다고만 느꼈던 성창이 지금은 가볍게만 느껴진다. 가벼움 속에서 갈라할은 계속해서 걸었다.
“······.”
그런 갈라할을 바라보는 배교자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이곳에 나타난 건 잿빛이 아니다. 특별한 것 하나 없는 인간이다.
그가 별에게 선택받은 용사라곤 하나··· 배교자는 그 사실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용사를 봤고, 그들을 제 앞에 무릎 꿇린 배교자다. 그녀에게 있어 용사란 별에게 저주받은 한낱 인간일 뿐이다. 별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
그녀가 인정하는 용사는 단 한 명 뿐이다.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별 없이도 찬란히 빛나던 용사를 알고 있는 배교자의 시선에, 다른 용사들은 성에 차지 않는다. 배교자는 귀찮다는 듯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허공이 찢어지고 수많은 마수가 튀어나온다.
수십의 마수가 파도를 이룬 채 갈라할을 덮친다. 파도에 집어삼켜져 그 모습은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배교자가 등을 돌리려는 순간이다.
번쩍.
검은 파도 속에서 빛이 번뜩였다.
섬광과 함께 마수들이 떨어져 나간다. 마수의 시체를 밟은 채 갈라할이 앞을 향해 다시 걷는다. 그 몸에선 피가 흐르고 있다.
찢어진 공간에선 계속해서 마수가 쏟아져 나온다. 그 수는 계속해서 늘어만 간다. 허나, 갈라할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계속해서 나아간다.
한걸음, 다시 한걸음.
쓰러지고, 뒤로 밀려나고, 몸에서 피를 쏟으면서도 갈라할은 걷는다. 어느 순간부터 배교자는 걸음을 멈춰선 채 갈라할을 바라보고 있다.
“······.”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마수들에게 물어뜯기고, 시체 수확자의 손아귀에 붙잡힌 채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갈라할이 그곳에 있다. 몇 번이고 내던져진다.
그러나,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선다.
피를 쏟아내며 일어서서는 자신을 향해 걸어온다. 찢어진 공간에서 튀어나오려는 갑각룡을, 배교자는 손을 뻗어 가로막았다.
“아이야.”
배교자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바라여 계속해서 일어서는 거니?”
그 눈동자에는 흥미가 깃든다.
“너는 나에게 닿지 못해. 닿지 못함을 너 또한 알고 있지 않니? 그런데 왜 계속해서 일어서지? 불가능을 알면서도 어째서?”
갈라할은 답하지 않는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딤으로써 그 답을 대신한다.
“잔챙이들을 내보냈을 뿐인데, 벌써 만신창이잖니.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려 하지마렴.”
찢어진 공간은 커져만 간다.
공간 안에서 꿈틀대는 것은, 초인조차 버거워하는 배교자의 정예군이다. 다섯 마리의 갑각룡이 공간을 찢고 나타난다.
“그러다 죽어.”
다섯 마리의 갑각룡이 배교자의 주위를 감싼다.
“계속해서 올 거니?”
갈라할은 말없이 걷는다.
그 모습에 배교자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부서진 세상이다.
낡은 신이 지배하는 망가져 버린 땅이다.
그런 세상에 바로 선 채, 다가오는 죽음 앞에 발버둥치는 인간은 어찌나 아름다운가? 한때 성녀였던 그녀는 그런 인간을 사랑해 마지않는다.
“아이야.”
배교자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니?”
갈라할이 멈춰 섰다.
내뱉은 숨은 거칠다. 물어뜯긴 발목이 욱신거린다. 자신이 자랑하던 네 갈래의 망토는 마수에게 물어 뜯겨 본래의 형태를 잃었다.
무너지고 있다.
피어오르는 별빛이 갈라할의 육체를 감싸나, 옅어진 별빛으론 몸에 남은 부상을 치료할 수 없다. 그것을 가리키며 배교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별빛, 가증스러운 별빛.”
일찍히 별에게 배신당한 여인은 비웃음을 흘린다.
“아이야, 너는 축복 받은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너는 별에게 저주받은 거야.”
비웃음. 조롱. 그리고, 동정.
“그건 저주란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저주.”
「이건 저주야. 우리는 별에게 농락당한 거야.」
언젠가 제 동료 또한 속삭였던 말.
별에게 선택받았기에 의무를 강요받았고, 별에게 선택받았기에 이런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는 동료의 말이 갈라할의 귀에 맴돌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용사로서 살았기에 수많은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동료를 잃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수많은 상실을 맛보았으며, 참혹한 전장 속에서 심신은 피폐해졌다.
확실히, 힘든 삶이었다.
“별에게 선택 받았기에, 너는 이런 삶을 강요받은 거란다. 그 최후마저 고통스럽지. 너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죽게 될 거야.”
힘든 삶이었지만.
“그러니, 이게 저주가 아니라면···.”
그렇기에 의미가 있었던 것이리라.
쿵.
갈라할이 창대를 내려찍었다.
창대가 땅을 찍는 소리에 배교자의 말소리가 파묻혔다. 창대에 의지한 채 갈라할은 똑바로 선다. 언제부턴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다.
“단 한 번도.”
갈라할이 말했다.
“저는 단 한 번도 별이 제게 준 이 힘을 저주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축복이다.
“별의 축복이 있었기에.”
너무나도 무거웠지만.
이 축복이 있었기에, 이 힘이 있었기에.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은 용사가 될 수 있었다.
동경하던 영웅이 되어,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이게 축복이 아니라면 뭐겠습니까.”
갈라할이 웃었다.
피를 흘리면서도 그는 웃는다.
그 어느때 보다 가볍게, 그리고 편안하게.
“···너.”
그 웃음 앞에 배교자가 당황한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더이상 물음에 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갈라할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강하게 창대를 움켜쥐었다. 움켜쥔 창대는 백금색으로 찬란히 빛난다.
갈라할은 직감한다.
이곳이 자신의 마지막 무대임을.
남은 삶을 불태울 자리임을.
각오를 마친 갈라할이 허공에 외쳤다.
“별이여.”
천칭이 갈라할의 앞에 떠올랐다.
“바치겠습니다.”
대가를 묻는 별에게 갈라할은 외쳤다.
“제 전부를.”
마지막 거래를 마친 천칭이 박살 난다.
별은 인간의 바람에 답한다.
별빛이 범람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