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70
칼트가 한숨을 내쉬며 라니아의 뒤를 따라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오랫동안 수직적인 구조의 직장에서 구르다 보면 주어진 운명에 수긍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법이다. 칼트 또한 그랬다.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는가.
‘때려치우고 싶다.’
그 속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 * *
“선배님, 그거 아십니까?”
“뭘.”
“제가 선배님을 상관으로 모신지 벌써 8년이 됐다는 사실을요. 선배님께 비 오는 날 개처럼 처맞았던 게 벌써 8년 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널 팼어? 언제?”
“그 왜, 있잖습니까. 제가 선배님께 동정···.”
빠악!
“······.”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칼트의 볼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렀다.
“조금 눈물이 날 것 같군요.”
“이미 흘린 것 같은데?”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말이.”
8년의 시간.
20대 초반부터 시작해 30대에 접어들 때까지 한 명의 상관 아래서 칼트는 계속 일하고 있었다. 제 상관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명성을 고려해보면 영광스러운 일일지도 모르나, 8년째 노예처럼 부려지다 보면 생각이 제법 바뀌는 법이다.
칼트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라니아를 흘겨봤다.
“거 선배님, 저 말고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왜 나한테만 그래요, 하고 넌지시 칼트는 질문했고··· 그 질문에 라니아는 이렇게 답했다.
“최근에 한 명 들이긴 했지. 일을 참 잘하긴 한데, 애가 빠릿빠릿하지가 않더라고. 굴리다 보니 네 생각이 좀 나더라.”
굴려봤는데 네가 제일 낫더라.
“너만 한 인재가 또 없더라니까?”
너만 한 노예 찾기가 힘들던데?
라니아의 밑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말에 숨은 속뜻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게 된 칼트다. 저걸 칭찬으로 받아들여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한동안 고민하던 칼트는 그냥 칭찬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 그러니까 일이나 하자.”
라니아가 절벽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칼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라니아를 따라 절벽의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곳이 배교자의 공방입니까?”
“그래. 저기 흐르는 검은 물 보이지? 저거 다 공방에서 흘러나오는 거야. 저런 구정물 쓰는 건 배교자 그놈 밖에 없고.”
탁, 하고 바닥에 착지한 라니아가 고랑을 타고 흐르는 구정물을 가리켰다. 칼트는 제 코를 움켜쥐며 인상을 구겼다.
“악취가 진동하는군요.”
안 그래도 후각이 예민한 칼트다.
코끝을 찌르는 악취에 칼트는 인상을 구긴 채 구정물을 흘겨봤다. 인간을 녹여 만든 구정물. 사념이 잔류한 구정물은 배교(背敎)의 흔적이다.
물줄기를 따라 걷던 두 사람은 공방의 입구에 섰다.
마치 신전을 닮은듯한 공방. 델로힘 교단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문을 보며 ‘악취미군요’ 라고 칼트는 중얼거렸고, 라니아는 침묵을 지켰다.
“제가 열겠습니다.”
“내가 안 하고?”
“또 부숴 먹으실 거잖습니까.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요? 깔끔하게 벨 테니 비키십시오.”
라니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고, 칼트가 허리춤에 매어둔 검을 발도 했다.
스릉.
은백색의 도신이 칼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를 잠시, 칼트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휘두른 칼끝이 부드럽게 석문에 파고들고 그대로 선을 그었다. 조금의 결림도 없이 칼트는 석문의 한 부분을 도려냈다.
후웅.
석문을 도려낸 칼끝이 바깥으로 빠져나올 때 작은 돌가루 하나 튀지 않았다. 가히 묘기라 불릴만한 검술이었다.
“오, 많이 늘었다?”
“초인이 된 지 제법 시간이 흘렀지 않습니까.”
짐짓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칼트가 도려낸 석문을 발로 걷어찼다. 쿠웅, 소리를 내며 잘린 석문이 넘어지고 사람 두 세 명이 지나갈 만한 구멍이 생겼다.
구멍의 너머에서 악취가 풍겨왔다.
인상을 찌푸린 채 칼트와 라니아는 배교자의 공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방의 내부는 고요했다.
“역시 이미 알고 뺀 모양이군요.”
“그럴 것 같더라. 그 미친년, 유난히 나를 피해 다니는 느낌이거든.”
라니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쯧, 혀를 찼다.
“흔적을 잡았다 싶어 달려가 보면 이미 자리를 뜨고 없어. 그년이 가지고 놀다 버린 구정물만 가득하지.”
“그럴만하죠.”
“뭐가?”
“저라도 선배님이 눈 뒤집혀서 쫓아오면 도망치고 싶을 것 같습니다. 이젠 별빛까지 가지셨잖습니까.”
고대 리치, 스케발이 별빛을 사용하는 라니아를 처음 마주했을 당시 비명을 내질렀다는 이야기는 기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다.
“배교자라고 뭐 별수 있겠습니까.”
머리채 잡혀서 두들겨 맞기 싫으면 튀어야겠죠.
그리 중얼거리며 칼트는 칼자루를 매만지며 걸음을 옮겼다. 한계까지 곤두선 감각으로 칼트는 주변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절벽의 위에서 내려다봤던 공방은 거대했다.
어지간한 신전을 방불케 하는 규모의 공방에는 숨겨진 장소가 많을 것이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닐 것이다. 칼트는 칼끝으로 가볍게 바닥을 툭툭 두들겼다. 일정한 간격으로 검기를 방출해 주변의 지형을 읽어 들였다.
“데려오길 잘했어.”
라니아는 뿌듯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잠시, 칼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선배님.”
칼트가 검으로 어느 벽면을 가리켰다.
짙게 어둠이 깔려 보이지 않는 벽.
“광원 좀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저 벽이 뭔가 이상합니다. 벽에 뭐가 걸려있는 것 같습니다.”
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수십 개의 광구(光球)가 허공으로 떠올라 주변을 환히 밝혔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공방의 풍경에 라니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랄 맞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던 벽.
벽에는 시체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가죽이 벗겨진 인간. 뼈를 뽑아낸 인간. 인간, 인간, 인간의 시체. 줄줄이 걸려있는 시체의 아래에는 인간의 뼈로 만들어진 모형이 놓여 있었다.
4m 크기의 모형.
인간의 뼈로 만들어둔 그것은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선 짐승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설계도와도 같았다. 본격적으로 마수를 만들어내기 전에, 시험 삼아 만들어 본듯한 모형.
‘어디서 본듯한···.’
그것을 바라보던 라니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뭡니까? 늑대? 라이칸슬로프? 아니, 그런 거랑은 느낌이 좀 다른 것 같기도···.”
모형을 바라보며 칼트는 그리 중얼거렸다.
왕도의 연구자들을, 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그 누구를 데려놔도 칼트와 똑같은 반응을 하리라. 이것은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수일 테니. 하지만 라니아는 그들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그녀는 알고 있다.
이 모형이 무엇을 흉내 낸 것인지.
최초의 용사가 걸었던 긴 여정을 엿봤던 그녀만큼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라니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녀가 보기에 이건 분명한 변수였으므로.
「저주를 비추는 해를 떨어트렸다. 저주에 잠식된 호수를 정화했다. 저주를 품은 토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그놈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지.」
언젠가 카르디가 말했다.
「영악했다. 영리했다. 이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학습했다. 인간을 이해하고자 했으며 대화를 시도했고, 인간을 질투하며 또한 사랑했지.」
가장 까다로웠던 적.
「마수이자 인간이었다.」
「마지막에는 초인의 자리에 오른 마수.」
마수로 태어나 인간이 된 존재.
「마수의 왕.」
「세계수를 불태우고 내 동족을 찢어발겼던 녀석이기도 하지. 지금은 가니칼트 녀석의 몸 절반을 이루고 있는 녀석이기도 하고.」
마수의 왕.
기억에서 보았고, 카르디가 그림을 통해 보여줬던 마수의 왕의 형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형이 눈앞에 있었다. 더 가까이서 확인하고자 라니아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딘 순간이다.
쿠웅.
공방이 흔들렸다.
천장이 흔들리며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끽 끼긱 하고 무언갈 긁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칼트는 황급히 자세를 잡았고, 라니아는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쿠구구구궁.
진동과 함께 천장이 뒤집혔다. 뒤집힌 천장에는 무언가 매달려 있었다. 천장에 발톱을 꽂아넣은 채 매달려있는 것은 짐승.
짐승은 한 마리가 아니다.
수십 마리의 짐승이 천장에 매달린 채 라니아를 내려 보고 있었다. 후두둑, 하고 그들의 몸에서 떨어진 구정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들 중 하나가 쩌억, 아가리를 벌린 채 괴성을 내질렀다.
“————————!”
수십 마리의 짐승이 차례로 울부짖었다.
공기가 떨리고 공방이 진동했다.
콰앙!
괴성과 함께 그것들이 천장을 박차고 라니아와 칼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짐승들을 바라보며 라니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팔이 없는 짐승.
머리가 반으로 쪼개진 짐승.
육체의 태반이 흘러내린 짐승.
수많은 짐승들은 어딘가 망가지고 결여된 실패작들이다. 저것들이 무엇을 위한 실패작인가? 그 대답은 간단했다. 저들 모두가 마수의 왕과 유사한 형상을 띄고 있었으므로.
“미친년.”
라니아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마나가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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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매달려 있던 짐승들이 추락했다.
그 뼈대는 인간과 마수의 유골이요, 살갗은 인간을 녹여 만든 검은 구정물이다. 오직 배교자 글레투스만이 다룰 수 있는 물질로 이루어진 사역마.
쿵, 쿠웅!
그들이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사방으로 검은 구정물이 철퍽, 하고 튀어 올랐다.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서기에 충분함에도 짐승들은 제 두 팔마저 땅을 짚는 데 쓰고 있었다.
마수의 왕을 닮았다 하나, 저것들은 짐승이다.
긍지도 고고함도 이성도 느껴지지 않는 짐승. 수백 년 전의 재앙을 흉내 내 만들어낸 사역마를 보며 라니아는 짧게 혀를 찼다.
“쯧.”
그녀가 가볍게 손목을 털었다.
기괴한 울음과 함께 사방에서 달려드는 짐승들을 향해 라니아가 팔을 들어 올렸다. 쭉 뻗은 팔이 아가리를 벌린 채 다가오는 짐승과 일직선을 이루었다.
“——————!”
괴성을 내지르며 땅을 박차고 달려드는 거구의 짐승에 비해, 팔을 쭉 뻗었을 뿐인 그녀의 모습은 초라해 보였으나···.
콱.
모든 걸 때려 부술 기세로 달려들던 짐승은 쭉 뻗은 라니아의 손에 너무나도 쉽게 붙잡혔다. 제 체구의 절반도 안되는 인간에게 너무나도 쉽게 붙잡힌 짐승은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으득, 으드득.
라니아에게 붙잡힌 짐승의 아가리가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아가리를 움켜쥔 라니아의 손가락 사이 사이로 검은 구정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야, 칼트.”
아가리가 붙잡혀 괴성조차 내지르지 못하는 짐승을 힘으로 무릎 꿇리며 라니아가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뒤에선 검을 휘둘러 이미 짐승 하나를 무릎 꿇린 칼트가 칼날을 가볍게 털고 있었다.
“예, 선배님.”
“죽이지 마라. 확인해야 할 게 있으니까.”
“노력해보겠습니다.”
빙글, 검을 한 바퀴 돌린 칼트가 짐승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라니아는 무릎 꿇린 짐승의 아가리를 군화로 짓밟았다. 땅에 짐승의 머리를 처박아둔 채, 그녀가 짝하고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쩌어억.
손바닥과 손바닥 사이에 거미줄처럼 방대한 양의 마나가 끈적하게 늘어났다. 늘어나는 마나의 중심에서 틱, 티딕하고 백금색의 빛이 튀어 올랐다.
강타(Smite).
역전(Reversal).
주문 다발(Spell-Bunch).
주문을 새긴 채 그녀는 다시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끈적하게 늘어진 마나가 하나의 점으로 합쳐지며 세차게 점멸했다. 마법사들이 극점이라 부르는 현상.
콰릉!
직후,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땅 아래서부터 하늘을 향해 수십 다발의 빛줄기가 치솟았다.
2.
북방의 수호자라 불리는 공자님이 계시는데, 그 외모가 상당하다더라. 왕도에선 볼 수 없는 야수성을 간직한 공자님이라 카더라···.
라크 반 그레이스.
나티다는 북부의 공자라 불리는 이 청년에 대한 소문을 참 많이도 들었다. 그녀의 곁에 소문을 모으는 것이 업무인 기사, 테프란이 있는 것도 한몫했겠지만··· 개인적인 흥미도 있었으므로.
‘저 사람이 용사님이 가르친 분이란 말이지···?’
자신의 은인이자 상관이 직접 가르친 사람.
나티다는 라크와 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악수를 풀려는 라크의 손을 붙잡은 채 나티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라크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는 순간 그녀의 녹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움찔, 하고 라크가 고개를 뒤로 뺐다.
나티다는 눈살을 찌푸린 채 조금 더 고개를 들이밀었다. 전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랑이를 벌이기를 잠시, 나티다가 ‘아’ 하고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거 실례.”
멋쩍은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라크의 손을 놓았다. 그녀가 제 눈가를 툭툭 건드리며 웃어 보였다.
“눈이 좀 안 좋아서. 가까이에서 보아야 얼굴이 제대로 보이거든요.”
역시 소문대로 잘생겼네.
그리 중얼거리며 나티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라니아 용사님의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여기, 용사님께서 보내신 서신이고···.”
편지를 건네며 나티다가 덧붙였다.
“북부에 머무르는 동안 협조 부탁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히죽, 하고 나티다가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서 라크는 섬뜩함을 느꼈는데, 왠지 모르게 익숙한 섬뜩함이었다. 옛날에는 제법 자주 느꼈었던 것 같은 섬뜩함.
‘저런 웃음을 어디서 봤더라···.’
라크가 기억을 더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크는 익숙함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에헤이, 별일 없어.」
「문제없다니까? 나 못 믿어?」
위대하신 라니아 교수님.
그분이 저렇게 웃곤 했다. 그리고, 저 웃음을 본 다음에는 꼭 라크에게 ‘제법 위험한’ 일이 닥치곤 했다. 학습된 공포에 라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라크의 반응에 나티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단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처세술’을 가르쳐준 것이 바로 라니아였다.
「뭔갈 부탁할 때는 이렇게 웃어.」
「잘 부탁한다는 의미지.」
라니아는 나티다에게 어느 상황에서든 미소를 잃지 말라고 조언하며 예시를 보여주었고, 나티다는 그 예시를 훌륭히 학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웃음을 지을 때마다 상대는 호의적이긴커녕 부르르 하고 어깨를 떨곤 했다.
‘대체 왜?’
그녀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성녀, 나티다가 북부에 도착한 이후 하루의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자신을 따라온 사제를 쫓아내고 홀로 북부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고, 라크는 어느 때와 같은 하루를 보냈다.
“후우···.”
성지에서의 수련을 마친 라크가 길게 숨을 내뱉으며 성지의 바깥으로 나왔다.
설원의 서늘한 바람에 몸을 식히며 호흡을 하기를 잠시, 라크는 들려온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설원의 한구석에 누군가 쪼그려 앉아 연초를 태우고 있었다.
“오.”
성녀, 나티다.
그녀가 라크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태우던 연초를 바닥에 쌓인 눈에 비벼 끈 뒤, 나티다가 읏챠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크가 눈을 깜빡이며 질문을 던졌다.
“왜 여기에?”
“말했잖아요.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티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상한 흔적을 발견하셨다던 곳. 마왕군을 뒤쫓아 달렸다던 길. 그 길 안내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요.
그 물음에 라크는 고개를 끄덕이곤 앞장섰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설원을 걸었다. 사박, 하고 눈 밟히는 소리가 울리기를 한참.
“여기서부터 추적했습니다.”
라크가 멈춰 섰다.
그가 멈춰선 곳은 라크가 지키고 있는 설원이었으며, 설원에는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나티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주변을 쓱 훑어봤다.
“쫓아간 방향은요?”
“이쪽.”
라크가 방향을 가리키며 걸었다.
그 뒤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설산의 초입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라크가 흔적을 발견한 곳이 있었으나··· 그쯤에서 나티다가 걸음을 멈춰 섰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라크가 눈을 깜빡이며 뒤를 돌아봤다.
“여기서 조금 더 가야··· 어?”
사락, 하고 나티다가 로브를 벗고 있었다.
로브를 벗은 그녀는 얇은 셔츠차림이었고, 영하까지 떨어진 설산의 추위는 북부의 사람이 아니라면 견디기 힘든 환경이었다.
“어으, 추워라.”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나티다는 벗은 로브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두었다.
“지금 뭐 하시는···.”
“아, 공자님 잠깐만 고개 돌려주실래요?”
나티다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썩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라서.”
라크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초인의 영역에 발을 디딘 라크다. 라크의 예민한 청각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음들을 모조리 포착했다.
콰작, 그리고 후두둑.
무언가를 헤집고 바닥에 쏟아내는 소리. 그 소리가 잦아들 쯤에 나티다가 입을 열어 말했다.
“보셔도 돼요.”
라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붉게 물든 눈밭 위에 선 나티다가 있었다. 새하얗던 셔츠는 붉게 물들어 있었으며, 그녀의 입가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녀는 눈밭에 던져두었던 로브를 주워들었다.
사락.
주섬주섬 로브를 차려입고,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낸 뒤 나티다가 연초를 꼬나물었다. 꺼내 든 점화석으로 연초에 불을 붙이며 나티다가 말했다.
“이곳이네요.”
그리곤 어느 방향을 가리켰는데, 흔적이 남은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그 방향을 가리키며 나티다가 빨아들인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흔적이 이어진 곳.”
확신하는듯한 말투였다.
3.
“나티다 데려왔으면 편하긴 했겠네.”
“새로 보좌관으로 삼았다던 그 성녀 분?”
“어. 걔가 능력이 좀 독특하거든.”
딱 이럴 때 좋은 능력이지.
그리 중얼거리며 주변을 쓱 둘러본 라니아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사방에는 짐승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팔다리를 잘라내 짐승을 제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제대로 조사를 하기도 전에 짐승들은 죽어버렸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겠지.’
괜히 이것들을 여기에 남겨둔 것이 아니리라.
“이것들, 죄다 실패작이야.”
몸을 이루던 점액질이 모조리 흘러내려, 뼈대만 남은 짐승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라니아가 말했다.
“천장에 보면 저기 호스 연결된 거 보이지? 저 호스를 떼버리면 얼마 못 가서 허물어지는 실패작인 거지. 그러니까 여기에 버려둔 걸 거고.”
“그렇습니까?”
칼트가 칼에 묻은 점액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별 볼 일 없긴 하더군요. 기세가 사납긴 하지만 정말 그것뿐이라서.”
썩 까다로운 축에도 못 끼는 적이었다.
오히려 배교자가 만들어냈던 마수 중에서는 약한 축에 속하는 마수. 그것이 짐승을 베어내며 칼트가 느낀 감상이었다.
“이게 실패작이면··· 성공작도 있는 겁니까?”
“그게 문제다. 그게.”
라니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보란 듯이 여기에 실패작을 방치해 둔 걸 보면, 뭔가 의도가 있을 같은데···.”
정말로 마수의 왕을 완성했다면.
성공작이라 할만한 것을 만들어냈다면.
“최악이지. 전황이 뒤집힐 테니까.”
“···성공작이면 뭐가 다른 겁니까? 실패작들만 봐서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데.”
뭐가 다르냐, 라.
제약에 걸려 마수의 왕에 대한 정보를 발설할 수 없는 라니아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하던 라니아가 이내 입을 열었다.
“재앙이 하나 더 나타난다고 보면 돼.”
“···예?”
“그것도 더럽게 까다로운 재앙이.”
용사,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그와 호각으로 싸웠다던 마수의 왕. 짐승의 육체로 초인의 경지에 올랐다던 그것의 강함을 라니아는 감히 추측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수백 년 전에 죽은 존재인데, 그걸 되살려 낼 수가 있나?’
라니아는 제 턱을 매만지며 주변을 흘겨봤다.
인간의 골조로 만들어진 뼈대는 조잡했다. 이곳에 놓인 실패작들 모두가 조잡한 것들투성이였다.
가짜들밖에 없다.
시행착오를 거친 흔적만이 가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