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9
〈 49화 〉 깨달음, 그리고 성장(5)
* * *
아플리아 아카데미의 학장실.
넓은 학장실 중, 한쪽 벽에는 그 어떤 장식물도 붙여져 있지 않다. 그 새하얀 벽에 강의 하나가 투영되고 있다.
“·····.”
그 강의를 보고 있는 두 중년이 있다.
중년과 노년의 간극에 서 있는 둘이다. 서로 간의 나이 차이는 거의 없지만, 둘의 외관에는 큰 차이가 난다.
늙어 보임을 말하는 건 아니다.
그 머리숱의 문제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한 시간 반가량 이어진 강의가 끝이 난다. 로셀은 안경을 벗고 잠시 눈 주변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아론은 텅텅 빈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렇기를 잠시.
다시 안경을 쓴 로셀이 입을 열었다.
“어떤가, 아론.”
“·····.”
“다른 교수들을 휴강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그에 걸맞은 성과를 내지 않았나? 나는 괜찮았다고 보내만.”
아론은 말없이 로셀을 바라보았다.
‘괜찮냐고? 저게?’
지금 느끼는 심정을 표현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론은 길게 한숨을 뱉었다.
“허···.”
벌어진 입 사이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교수 여섯을 휴강시킨 가치가 있는 수업인가?’
아론은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본래, 아론은 교수들간 비교하는 것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저마다 맡은 과목이 다르다. 가르치는 스타일도 다르다.
그러니, 그것을 비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게 생각해왔건만···.’
라니아 반 트리아스.
아론은 저 당돌한 소녀가 강의한 내용을 떠올려 봤다. 방금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았던 것을 정리한다.
‘룬(Rune)문자.’
소녀는 분명 그것을 다뤘다.
그리고, 아론이 기억하기로 룬문자는 그리 쉬운 개념이 아니다. 3학년, 졸업반의 커리큘럼에 넣어놓긴 했지만 그것도 기본적인 문자를 다루는데 그친다.
‘너무 어려우니까. 심화된 과정이니까.’
모든 것의 기반에 깔려있음에도, 룬문자를 가르치지 않은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주문언어에서 룬문자로, 룬문자에서 다시 회로로 이어지는 과정은 너무나도 복잡하다.
가르칠 수 있는 인물도 극히 소수일뿐더러, 이제 막 마학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마법사들이 이해할만한 내용도 아니다.
‘어중간하게 가르쳐주면, 오히려 혼란만 불러오겠지. 그래서 아예 가르치지 않는 것이고.’
룬문자를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다룰 수 있는 건.
수십년을 마학에 바친 아론이나 로셀 같은 노련한 마학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 난해함도 한몫하지만, 어마어마한 시간을 요구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의문이 든다.
‘그러나, 저 아이는 다뤘다.’
고작 스무 살 남짓한 소녀가, 상급의 회로를 룬문자로 해체했다. 그 구성을 설명하고, 그 과정을 학생들에게 보였다.
‘십 년간 마학에 몰두했다고 했던가.’
로셀이 말하기를, 라니아라는 저 소녀는 십 년간 연구실에 박혀 마학만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 연구가 무엇인지 아론으로선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평범한 방법은 아니었을 테지.’
그저, 그렇게 추측할 뿐이다.
“·····.”
아론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 학생들의 시점에서 저 소녀의 수업이 어떤 식으로 들렸을지 상상해 본다.
차라라락.
수십 개의 회로가 허공에서 해체된다.
회로가 룬문자로, 룬문자가 다시 언어로 해체되는 과정을 학생들은 목격했을 테지.
‘그것이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답은 금방 나왔다.
‘···진리의 편린을 마주했으니, 학업에 더욱더 불을 붙이겠지.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마학을 다룰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곧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학생들은 보았다.
모든 것의 기반에 깔린 개념을.
학생들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쓰던 것이 ‘무엇’인지.
그렇게 얻은 깨달음은 일방적이지 않다.
단적이지도 않다. 여태까지 쌓아왔던 것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묶인다.
‘자극.’
그 흐름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자극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마나의 거래학 강좌를 억지로라도 커리큘럼에 집어넣은 이유였지.’
아론은 눈을 떴다.
“음.”
그의 입가에 웃음이 맺혀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는가, 라니···.”
짓궂은 질문이다.
아론은 로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지금만큼은, 아론도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군.”
2.
4월의 중순,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는 날씨.
본래, 중간고사의 준비로 바빠야 할 아플리아는 때아닌 방학을 맞이했다.
대략 열흘간의 휴일.
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아플리아의 실무진들은 피눈물을 흘릴 일이다.
고작 한 달 사이에 단기 휴일만 세 번째다. 한번은 공개 강연, 두 번째는 테러 사건, 그리고 이번에는 교수들의 단체 휴강이다.
커리큘럼은 꼬이고, 시험 일정도 덩달아 꼬인다. 잡아놨던 행사 일정도 함께 밀리니, 실무진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업무, 서류, 마감···.
회의··· 어? 또 있네?
대뜸 휴강을 한 본 교수들을 대신하여 날밤을 새우는 건 조교수들의 몫이다. 휴일에 신나하는 학생들과 달리, 대부분의 조교수가 언데드나 다름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당최 어떻게 한지는 모르겠지만, 휴일 첫날에 모든 일을 끝내놓고 학생들과 함께 휴일을 즐기는 조교수도 있다.
그 조교수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교수들의 단체 휴강사건의 중심에 있는 소녀.
조교수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그 이름을 곱씹었다.
*
나른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날의 정오.
로셀은 학사 일정을 살피고 있다.
그러나, 썩 집중이 되진 않는다.
“흐읏, 힛···.”
귓가에 스며드는 웃음소리.
“·····.”
로셀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때아닌 휴일에 소파를 굴러다니는 제자가 있다. 입가를 파르르 떨며,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의 손에는 한 권의 책이 들려있다.
‘···방랑 검객 활극담.’
눈에 익은 책들이다.
저 책이 어디서 왔는지는 로셀도 알고 있다.
뭐? 재밌게 읽었다고 했나?
그렇지! 뭘 좀 아는구만! 이 무와 협에 깃든 감성을 이해해주는 마법사가 또 있었다니···!
내 더 빌려주겠네!
전부 아론이 빌려준 책들이다.
“···그렇게 재밌느냐?”
“흣, 쓰읍. 네, 스승님도 한번 읽어보실래요? 진짜 재밌는데.”
“그런 서책은 취향에 맞지 않더구나.”
“재밌던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라니엘은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빌린 책을 다 읽은 모양이었다.
“흣···.”
그녀는 늘어져라 기지개를 피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잿빛 머리칼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출렁인다.
“아, 맞다.”
멍한 눈초리로 소파에 앉아있던 라니엘이 휙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왜 그러느냐, 라니엘.”
“이번에는 왜 방학이래요? 테러 사건으로 쉰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요?”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로셀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 눈치라곤 엿바꿔 먹은 제자 놈이라면 진짜 모를 것 같기도 했다.
“···교수들이 단체로 휴강했다더구나.”
“그래요?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바로 너 때문이란다.
로셀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달력을 덮었다.
“라니엘, 오늘 할 일은 따로 없느냐?”
“음, 네. 없는 것 같아요. 빌려온 책도 다 읽었고···.”
“그럼 옷이나 갈아 입어 보거라.”
“네? 옷은 왜요?”
로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외식한 지도 꽤 되지 않았느냐. 오랜만에 외식이나 하자꾸나.”
“오···.”
“먹고 싶은거 있느냐? 수업도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원하는 가게가 있다면 그리로 가자꾸나.”
라니엘이 턱을 매만졌다.
“으음···.”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하나 있네요.”
3.
왕도의 어느 카페.
햇살이 잘 들어오는 창가의 자리.
“음···.”
로셀은 눈앞에 놓인 음식들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메뉴가 이상한 건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하다.
‘수프에, 빵··· 뿐이지 않은가?’
케익도 조금 놓여있긴 하지만···.
일단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브런치 카페다.
식사를 위한 가게라기보단, 가볍게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눌만한 가게였다.
“···진짜 이걸로 괜찮겠느냐?”
“네? 제가 먹고 싶어서 온 건데요 뭘. 스승님은 괜찮으세요?”
“아니, 안될 건 없다마는···.”
모처럼의 외식이지 않나.
로셀이 기억하기로, 5년 전의 라니엘은 외식을 하러 가자 하면 무조건 비싼 가게를 불렀었다.
스승님이 사시는거죠?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던 제자의 얼굴이 훤하다.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지만, 짓궂게 웃으며 귀족들이 행사 때나 들르는 식당을 가리키던 제자의 모습을 로셀은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로셀은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원래, 내가 사준다고 하면 무조건 비싼 가게를 부르지 않았더냐? 그, 왜 인프런트 스테이크 같은···.”
그 물음에 라니엘은 쓰게 웃었다.
“글쎄요, 그냥 이런 게 그리워서요.”
“그리워?”
“옛날에, 마탑에서 밤을 새우고 가끔 스승님이랑 이런 브런치 카페에 왔었잖아요?”
“···그랬었지.”
“그때 생각이 많이 나더라구요.”
로셀은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왜인지 조금 지쳐 보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제가 5년동안 전장에 있었죠, 아마?”
“···그렇지.”
“전장, 그것도 최전선에서는 눈코 뜰 새 없이 회로를 그리고, 마족들 때려죽이고 하다 보면 날밤 까는 건 기본이거든요.”
라니엘은 빵 귀퉁이를 찢는다.
그것을 적당히 식은 수프에 찍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싸우다 보면, 어느새 아침 해가 떠요. 해가 뜨기 시작하면 마족들도 후퇴하고요.”
“·····.”
“지평선 너머로 해는 뜨는데, 치울 건 더럽게 많죠. 지랄맞은 주술사들이 시체로 지랄 못 하게 시체는 다 치워야 하지, 난장판이 난 결계들도 손봐야 하지. 기사들이 해주긴 하는데, 마냥 놀기도 좀 뭣하거든요, 이게.”
축축해진 빵을 입안에 넣는다.
“그렇게 기사들 도와 치우다 보면 시간은 시간대로 흐르고··· 또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하고. 수프 같은 건 마실 여유도 없죠. 보존 식량이나 입에 밀어 넣고 다시 전장에 서야 하니까요. 저희 파티가 좀 바빴어요.”
두년이 쳐 놀아서 말이에요.
그렇게 중얼거린다.
“그러다 보면 말이에요?”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라니엘은 미소 지었다.
“아, 미지근한 수프에 부드러운 빵이나 찍어 먹고 싶다. 그런 생각이 자주 들더라고요.”
“·····.”
“이런 커피도 한 잔 있음 더 좋고요.”
과장된 손짓으로 커피잔을 들어 올리는 제자의 모습에, 로셀은 쓰게 웃었다.
“그러더냐?”
“네, 뭐. 그냥 왕도 오니까 생각나더라구요.”
커피 한 잔의 여유.
자꾸만 자신의 제자가 그것에 집착하며, 카페에 들리는 이유를 로셀은 알 것 같기도 했다.
‘괜찮다, 별일 없었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전장에서의 5년은, 이런 사소한 것 조차 그립게 만들었을 테지.
“···앞으론 자주 오자꾸나.”
“오, 정말요?”
“어차피 교수들은 출근을 좀 늦게 해도 된다. 너나 나나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니,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그거 좋네요.”
라니엘은 기쁜 듯이 웃는다.
“우음.”
작은 입으로 열심히도 빵을 오물거리는 제자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 로셀은 문득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과제를 안 내 줬더구나. 별다른 이유가 있더냐?”
“네? 아, 저번에 수업 참관을 했을 때 샤를롯 교수님의 수업에 들어갔었거든요.”
“알고있다.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교수지.”
“네, 그 교수님이 과제 많이 내주는 교수는 나쁜 교수라고 그러더라고요. 과제는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고.”
“흐음.”
로셀은 턱을 매만졌다.
그리곤 짤막하게 답했다.
“다 헛소리다.”
“예?”
“과제는 좀 내줘도 된다.”
라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제 내주면 학생들이 싫어하던데요?”
“미움을 받더라도,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는 게 교수의 본분 아니겠느냐?”
“어···그렇죠?”
“과제가 많아야 학생들이 적당히 긴장을 한다. 게다가 복습을 따로 하지 않아도, 과제를 하다 보면 복습이 될 테니 학생들에게도 좋은 일이겠지.”
“어, 으음···.”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라니엘에게 로셀은 딱 잘라 말했다.
“과제는 있어야 한다.”
그리곤 덧붙였다.
“많을수록 좋지.”
“그런가요?”
“그렇다.”
‘스승님이 그렇다면 그런거겠지.’
라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