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91
하지만 여왕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찬사는 충분히 받았다. 좋은 이야기도 차고 넘칠 만큼 들었지. 내 인생이 이리도 아름다웠음을 깨달았으니, 나는 그걸로 족하단다 아이야.””
아르카디아 최초이자 최후의 여왕.”
엘프보다 오랜 삶을 살아온 인간이 말했다.”
“구원받은 거야, 네게, 내가 이곳까지 인도해 온 나의 신하들의 뜻에, 그 모든 것에···.””
그녀가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러니, 이젠 나의 의무를 다해야 할 시간이지.””
마(魔)를 멸했던 아르카디아의 여왕으로서.”
버림받은 이들의 저주를 담은 왕(王)으로서.”
“그대는 그대의 길을 걸어라.””
아크리엘이 라니엘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길의 끝에, 그대가 원하는 답을 얻기를 바라마.””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불의 경계선을 건너서, 원혼들이 득실거리는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라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아르카디아의 여왕에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책무를 다한 이에게.”
아크리엘은 걸었다.”
손에 불길을 담은 채, 불길이 흐르지 않도록 손에 힘을 준 채 그녀는 걸었다. 사방에서 꿈틀거리는 원혼들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크리엘을 차마 할퀴지는 못했다.”
자신들의 주인이니까.”
자신들의 하나뿐인 왕이니까.”
할퀴는 대신 그녀의 곁을 맴돌며 속삭였다. 그 속삭임은 그 누구도 알아듣질 못할 언어다. 그저 소음으로 들릴 뿐인 언어이지만··· 아크리엘 만큼은 그 목소리를 선명하게 알아들었다.”
죽음을, 다만 죽음을.”
이 고통을 모두가 느꼈으면.”
아프다고, 너무나도 아프다고.”
그것은 비명이었다. 그저 하염없이 고통받아 온 것들이 내지르는 비명. 때로는 다른 이들을 비명 지르게 만들었고, 때로는 누군가의 영혼을 검게 물들였던 비명에 귀 기울이며 여왕은 쓰게 웃었다.”
“그래.””
아크리엘은 제 손에 담은 불길을, 천천히 제 가슴팍을 향해 가져다 댔다. 그녀의 심장에 불길이 옮겨붙었다. 그녀가 하나의 불이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했구나.””
불길이 되어 여왕은 걸었다.”
그녀의 곁을 맴도는 이들이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여왕은 그들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을 적 원혼은 불타 사라졌다.”
“내 너희의 아픔을 안다.””
알 수밖에 없지.”
너희와 하나가 되어 얼마만큼의 시간을 떠돌았는데.”
“나는 너희의 손이 되어 세상을 할퀴었다. 너희의 발이 되어 세상을 내달렸지. 너희의 분노가 되어 노래했고, 너희의 눈물이 되어 다만 흘렀다.””
그렇기에.”
“나는 너희의 왕이었다.””
나는 너희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단다, 아이들아.””
여왕이 원혼들을 쓰다듬었다.”
더욱 많은 원혼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어쩌면 여왕은 저들의 주인이 아닌 어미였다. 비명밖에 지를 줄 모르는 아이들을 여왕은 부드러이 쓰다듬었다.”
“끝이 다가오는구나. 따스한 끝이.””
고통도, 원한도, 저주도 불길에 타들어 갔다.”
타들어 갈 적 원혼들은 여왕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다른 이가 아닌 자신들의 주인이었으니. 수많고 수많은 것들 중, 유일하게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준 존재였으니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원혼들은 선택할 것이다.”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이 땅에 태어날지.”
혹은 모든 것을 거부하고 안식에 들지. 수많은 이들이 후자를 선택하나··· 그 중 몇은 전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든 좋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여왕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선택을 도우며.”
여왕은 하나의 불길이 되어 어둠 속을 걸었다. 외롭지는 않았다. 지독하지도 않았다. 미련은 없었다. 자신이 걸었던 길들을 되돌아보며 그녀는 웃었다. 마지막에는 웃을 수 있었다.”
자신을 위해 삶을 바친 신하들이 있다.”
자신을 위해 나라를 세운 신하가 있다.”
자신을 구하고자 천 년을 견딘 신하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의지를 전하고자 이곳까지 온 후인이 있었다.”
그리 수많은 이들이 자신을 위해 살아왔음을 그녀는 알게 됐다.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자신은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으리라.”
“가자꾸나.””
만마의 주인이 걸었다.”
걸음을 내딛는 것은 아르카디아의 여왕이었다.”
“끝으로, 혹은 또 다른 시작으로.””
불길이 타올랐다.”
불길을 끌며 여왕은 걸었다. 불길에 바스러지는 영혼이 택한 것은··· 영혼이 최초로 새긴 제 삶의 목적과 같다. 군주로서 책임을 다하는 길. 왕도(王道).”
시작과 끝은 같다.”
왕으로서 살아왔던 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왕으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을 따라왔던 이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은 채 그녀는 하나의 불길이 되어 타올랐다.”
화륵.”
불이 어둠을 감쌌다.”
원혼들은 제 어미를 찾는 아이처럼, 불나방처럼 불길을 향해 다가섰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타들어 간다. 천년의 세월 동안 비명 질렀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것은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아아, 아크리엘···.”
우리들의 주인이시여.”
왕이였으며, 어미였고, 주인이었던 이의 이름을 외치며 원혼들은 불길에 타들어 갔다.”
그늘이 타들어 갔다.”
부드러운 불길에 휘감겨 마왕이 타들어 갔다. 카일은 넋을 놓고 타들어 가는 불길을 보았다. 불길은 거세지 않았다. 부드러웠으며 아름다웠다.”
화륵.”
솟아오른 불길은 하늘에 닿았다.”
하늘을 가린 그늘들이 타올랐다. 어둠이 사위고 하늘은 서서히 본래의 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흩날리는 잿가루 사이로 푸르른 하늘이 모습을 내비쳤다.”
“아···.””
카일이 탄식했다.”
푸르른 하늘 사이로 해가 비추었다. 일천 년의 세월 동안 어둠에 삼켜졌던 저주받은 땅에 햇살이 드리웠다. 드리운 햇살과 함께 그늘은 타올랐다.”
■■, ■■■■···.”
■■■■ ■■■■■■.”
불에 휘감긴 채 그늘이 속삭였다.”
그 속삭임을 카일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비명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잿가루가 흩날렸다. 새하얀 잿가루가.”
새하얀 잿가루. 내리쬐는 햇살. 아름다운 불길.”
일천 년의 세월 동안 세상을 검게 물들였던 그늘의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웠다.”
검은 하늘이 붉게 타올랐다.”
일천 년의 세월 동안 검었던 하늘은 한 명의 인간에 의해 붉게 물들었다. 그을음이 벗겨지듯, 녹이 떨어져 나가듯, 불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구정물은 바스러졌다. 바스러진 구정물은 재가 되어 눈처럼 내렸다.”
사락.”
타오르는 하늘 아래 재가 흩날렸다.”
흩날리는 잿가루 사이로 카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길은 오직 구정물만을 태웠고, 자신이 지나간 길에 불길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불길이 퍼져 나갈수록 하늘은 본래의 색을 되찾아갔다.”
푸르른 하늘,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
한동안 어둠에 익숙해졌던 시야에 햇빛은 과연 낯선 것이어서, 카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눈살을 찌푸린 채 카일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모든 게 녀석이 성공했음을 의미하고 있었으므로.”
“······.””
카일이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재가 되어 흩날리는 마왕의 진체(眞體)의 한복판, 그곳에 녀석은 서 있었다. 녀석은 하늘을 올려다본 채 씁쓸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시원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우.””
감상에 잠긴듯한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짧게 숨을 내뱉는 걸로 감정을 갈무리한 듯,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눈동자로 자신이 디디고 있는 땅을 보았고, 이어서 고개를 돌려 카일을 바라봤다.”
사락.”
푸른 하늘, 불어오는 바람, 새어드는 햇살.”
그리고 흩날리는 잿가루 사이로 잿빛의 머리칼이 너울 쳤다. 카일을 마주 바라본 채 라니엘이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내가 뭐랬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농담을 던지듯이, 혹은 조금은 진심을 담아서.”
“하면 된다 했잖아,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