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98
최강의 용사, 카일 토벤.”
승리의 상징이라 불리던 전(前) 용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데스텔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내 눈에는 네가 더 낯설다, 데스텔.””
“그러냐?””
“내가 알던 너하곤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누가 할 소리를.””
데스텔이 헛웃음을 흘렸다.”
나도 많이 변하긴 했지만, 어디 너만 할까. 그런 데스텔의 중얼거림에 카일은 피식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전장을 오가며 무던히도 마주했던 두 사람이다.”
한 명은 기대를 한몸에 받는 최강의 용사였고.”
한 명은 손가락질받는 비굴의 용사였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용사는 데스텔이었다. 더는 용사가 아니게 되어서, 평범한 옷을 입은 자신과 달리··· 여전히 용사의 정복을 입은 데스텔을 흘겨보며 카일은 무심코 입을 열었다.”
“정복, 잘 안 입지 않았나?””
“너까지 은퇴하고 나니까 이전 세대는 나 혼자뿐인데, 정복이라도 입고 다녀야 할 거 아냐. 사실 그것 말고도 이유가 좀 더 있긴 한데··· 아무튼.””
데스텔이 길게 숨을 뱉었다.”
잡담은 이 정도면 됐다. 본론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너. 나랑 해야 할 말이 있지 않냐?””
그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카일을 흘겨봤다.”
“여신의 첫 번째 사도, 그거 너잖아.””
재의 여신의 두 번째 사도가 첫 번째 사도를 바라봤다. 카일은 침묵했고, 침묵으로서 긍정했다. 데스텔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처음엔 미래에서 온 내가 첫 번째라서 내가 두 번째 사도가 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미래에서 온 자신은 사라졌다.”
그렇기에, 자신은 두 번째가 아닌 첫 번째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은 두 번째였고, 그 이유는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있었던 거지.””
이 시간대에서 재의 여신의 유지(遺志)를 받은 이가. 자신보다 먼저 재의 여신에게 잿가루를 받은 이가, 이미 이 시간대에 존재했던 것이다.”
“언제였냐?””
“마왕을 베고, 마왕에게 먹혔을 때였을 거다.””
카일이 담담히 말했다.”
“그때 나는 검을 쥐게 해달라고 빌었고, 그 바람을 미래에서 온 그 녀석이 들어줬다. 아마 그때가 아닐까 싶다.””
소원을 빌었고, 소원에 재의 여신은 답했다.”
단지 그것만으로 카일은 그녀의 사도가 됐다.”
“그럼 너도 봤겠구만.””
“······.””
무엇을, 하고 카일은 묻지 않았다.”
질문 대신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에 들어 있는 동안 카일은 보았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게 된 미래에서 펼쳐진 일들을. 그날,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무릎 꿇은 채 울부짖었던 악몽들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됐다.”
그것은 딱히 재의 여신의 의지가 아니었으리라. 그녀의 파편에 남은 기억의 잔재가, 그 풍경을 자신의 눈에 보여주었을 뿐이겠지.”
그 기억으로부터 카일은 완성된 자신을 보았다. 재의 여신이 경험한 시간 선에서, 자신은 완성된 신(神)으로서 존재했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재앙이 되어 세상을 휩쓸었다.”
“끔찍하더군.””
“내 말이.””
데스텔이 쓰게 웃었다.”
“그래서 내가 이 옷을 못 벗는다, 못 벗어.””
웃으며 그가 용사의 정복을 매만졌다.”
전쟁은 끝이 났다. 기사들은 투구와 갑옷을 벗었다. 마법사들은 지팡이를 내려두었다. 모두가 전장에서 걸쳐왔던 것들을 풀어 둔 채 일상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데스텔은 여전히 용사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부러진 성창을 놓지 않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모든 전쟁이 끝이 났음에도, 자신의 투쟁이 끝나려면 아직 하나의 전장을 건너야 함을 데스텔은 망각하지 않았다. 그건 비단 데스텔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너도 그래서 검을 안 놓는 거 아니냐?””
“비슷하지.””
카일 토벤 또한 마찬가지다.”
용사의 정복이 아닐 뿐이지, 그 역시 전투를 위한 장비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여전히 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재의 여신의 사도라 해봐야 별것 없더라.””
데스텔이 숨을 뱉으며 말했다.”
“모시는 여신은 이미 바스러져 죽음을 맞이했고, 자신들의 사도에게 특별한 권능을 내려줄 힘 같은 것도 남겨두지 않았지. 그저, 그녀는 남겼을 뿐이야.””
무엇을?”
“그녀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그녀가 존재함으로써 바뀐 이들을, 바뀌어버린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를.”
“그렇기에 재의 여신의 사도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겠지.””
그녀가 남긴 것들을 그러모아서.”
그녀가 도달하지 못했던 곳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여신의 사도로서 해야 할 일의 전부였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 두 사람은 알았다.”
“설명은 들었냐? 그 녀석에게.””
“들었지.””
“말도 안 되는 일을 생각하고 있던데.””
“그렇게 말이 안 되는 일은 아니던데.””
“그게?””
“녀석이 할 법한 일이잖냐.””
카일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검을 갈무리하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슬슬 시간이 됐군.””
카일이 오두막 밖을 눈짓했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데스텔 또한 성창을 손에 움켜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닥불을 꺼트린 후 두 사람은 오두막 바깥으로 나섰다.”
별자리가 빛나는 밤하늘 아래.”
라니엘 반 트리아스가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 역시 용사의 정복을 걸치고 있었다. 이윽고 탁, 하고 오두막 앞에서 걸음을 멈춘 그녀가 말했다.”
“가자.””
그녀가 하늘을 가리켰다.”
“별 떨구러.””
깊은 밤, 세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재의 여신의 첫 번째 사도, 카일 토벤.”
재의 여신의 두 번째 사도, 데스텔.”
그리고 그녀의 뜻을 잇는 이, 라니엘 반 트리아스.”
그들은 재의 여신으로 하여금 도움을 받았고, 그녀로 하여금 변화를 경험한 이들이다. 그들은 실패한 미래를 안다. 망가진 세상을 알고 있었으며, 멸망해버린 어느 시간에서 누군가 지른 비명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에 그들은 걷는다.”
모두가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지금, 그들의 꿈이 다만 영원할 수 있도록. 이제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그들이 그리할 수 있기를 라니엘은 간절히 바랐다.”
일천 년 만에 잠을 잘 수 있게 된 어느 엘프가, 미련 없이 은퇴를 결정한 어느 늙은 기사가, 낯섦 속에서 내일을 이야기하는 어느 기사가, 축제를 준비하는 수많고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제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기를 그녀는 바랐다.”
“별은 너무나도 오래 세상을 붙들어놨어.””
라니엘이 말했다.”
“태초의 시대에는 별과 같은 존재가 필요했겠지. 그래, 그때의 인간은 일어설 수조차 없는 존재였으니까. 인간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워줄 존재가, 인간을 붙잡아 지탱해줄 존재가 필요했겠지.””
말하며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녀가 길게 숨을 뱉었다.”
“인류는 스스로의 힘으로 나아가. 더는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지. 이제는, 독립(獨立)할 때가 온 거야.””
그렇기에.”
“그 사실을 알려야겠지. 인류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 되는 존재에게. 이제 더는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이제는, 우리를 그만 놓아주라고.””
그녀가 가벼운 숨과 함께 말했다.”
“그냥, 그걸 이야기하러 가는 거야.””
“그런 것치곤 분위기가 제법 살벌한데?””
“아, 그냥은 말을 안 들으시겠다잖아.””
라니엘이 피식 웃으며 손목을 풀었다.”
카일은 제 등에 칼자루를 메었고, 데스텔은 부러진 성창을 늘어트린 채 성의를 펄럭였다. 어둠이 짙게 내리 앉은 밤길을 그들은 걸었다. 길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길이 있었으니까.”
빛나는 별자리가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늘에 수놓아진 별자리가 흐르는 곳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도시다. 옛 도읍, 고룡의 도시. 고룡의 마법사 요르문 반 드라고닉이 있을 그곳을 향해 그들은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말한다.”
용사는 별의 대행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인류의 대변자에 가깝다고. 인류를 대표하여 가장 앞에 서는 이야말로 용사라고. 누군가가··· 최초의 용사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은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네 명의 용사가 있다. ”
용사, 라니엘 반 트리아스.”
용사, 카일 토벤.”
용사, 데스텔.”
용사, 갈라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