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116
116화. 공주 (2)
데이포보스의 열렬하다 못해 간절한 눈빛이 나를 향한다.
“부디 형님의 생각을 들려주십시오!”
···아마, 일전에 내게 상담한 것도 그렇고, 나를 존경의 눈빛으로 우러러보는 것도 그렇고, 나를 일종의 ‘모범사례’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데이포보스에게서 일부러 한발짝 거리를 벌리고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분명 네 말도 맞아, 데이포보스. 아가멤논에게 꽤나 막대한 정치적 빚을 지는 것도 부담이고, 또 아트레우스의 자식들과 혼맥으로 연을 잇는다면 아카이아 쪽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도 있겠지.”
그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더 나아가 전쟁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테고, 물론 네 꿈을 이루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만.”
“맞습니다, 형님! 아버지, 어머니, 제가 아가멤논 왕의 도움을 받아 도시를 세운다면 그것도 가문의 큰 이익이 아닙니까?
형님, 그리고 안키세스 님? 제가 도시를 세워서 우리의 힘을 늘린다면 그 또한 적잖은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도시의 건설이 다시 이익으로 돌아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겠다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어차피 도시를 건설하는 데 우리가 직접 들일 노력과 자본은 크지 않다.
오히려 데이포보스가 자기를 따르는 귀족 자제들과 시민들을 설득해 도시를 차리고, 그 근처의 백성과 영토를 포섭한다면 우리는 보잘것없는 투자에 비해 이익을 얻는다.
만일 이러한 제안이 오디세우스에게서 들어왔다면 어땠을까? 물론 신혼인 오디세우스에게 혼인을 약속할 딸은 아직 없겠다만···
아마 나는 반드시 받아들였겠지.
“하지만,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이피게네이아는 오디세우스의 딸이 아니다.
아가멤논의 딸이다.
“너는 아가멤논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상대라 생각하니?”
“아직 만나본 적은 없지만 한 나라의 왕이고···”
“일전에 내 벗인 오디세우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 아가멤논이란 인간은 사람을 도구 보듯 하고 능구렁이 같으니 결코 신뢰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가 우리를 해코지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네게 되묻고 싶은 게 있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데이포보스에게 다시 한발짝 다가서며 말한다. 내 키는 데이포보스보다 아주 살짝 더 큰 수준이지만, 위압감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아가멤논이 이피게네이아를 예고도 없이 우리에게 보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그것도 우리의 모든 동맹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래.”
나는 그의 속내를 몰랐다.
“속을 알 수 없는 이의 손을 움켜잡기 전에는, 그 반대쪽 손에 무기가 들려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반드시.”
“···.”
“만일 아가멤논이 너를 앞세워 우리 가문을 조종하고 분열시키려는 거라면 어쩌지?
만일 우리의 동맹들을 의도적으로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분열된 트로이아를 무너뜨리려고 벼르고 있다면?”
“···파리스.”
“만일 아가멤논의 군세가 이 스카만드로스 평원에 들이닥친다면 넌 어쩔 것 같아? 네 부인이 되었을지 모를 이피게네이아가 그 침략의 주구라면?
우리의 내부에서 정보를 캐내어 제 아비에게 가져다 바치고, 다시 미케네군에 합류한다면?
그러면 넌, 너는 어쩔 거지?
벌떼처럼 모여든 아카이아인들의 편에 붙기라도 할···”
“파리스.”
“···아버지.”
“그쯤 하면 되었다. 파리스, 아가멤논도 한 사람의 왕이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의심하는 건 그에 대한 모욕이다.
다른 모두도, 더 이상 데이포보스를 너무 압박하지 말게.”
“죄송합니다.”
“파리스, 잠시 따라오거라. 나머지는 다들 여기서 기다려주었으면 하네.”
프리아모스는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알현실 뒤쪽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나는 프리아모스가 휘날리는 망토자락을 좇아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문을 닫았고, 작은 방에는 금속을 갈아만든 거울이나 간단한 침상 등 생활집기들과 책상과 서판, 갈대펜 등이 놓여 있었다.
아마 간단히 집무를 보기 좋도록 만들어놓은 공간인 듯했다.
“파리스, 이리 와보거라.”
나는 프리아모스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프리아모스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쥐더니 내 얼굴을 거울 쪽을 향하게 돌려놓았다.
“···.”
“네 얼굴을 보거라.”
양쪽 눈의 흰자에 핏발이 서 있다.
미간의 근육이 경련하듯 깊은 골을 만들어 놓았고, 두 눈동자는 불안으로 이리저리 떨렸다.
“너를 봐온 시간이 길다고는 할 수 없겠지. 나보다는 네 양아버지인 아겔라오스가 너를 더 잘 알 테다.
그렇지만 나는 너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게 있다. 너는 이유 없이 행하는 아이가 아니야. 네 결단에는 항상 확신이 있었고, 네 태도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
“그런데 지금 네 얼굴을 보거라. 나는 지금 네게서 확신도, 자신감도 볼 수가 없구나.
···그저,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어린아이가 보일 뿐이지.”
“추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런 사과를 듣고자 너를 불러온 게 아니다.”
내가 뒤돌아보자 프리아모스는 내 이마를 주름진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뭔가 이유가 있는 게지? 언제나 네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으니.”
나는 순간 침묵했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하지? 나는 미래를 안다고? 아가멤논이 트로이아를 불태우고 우리 모두를 죽일 거라고?
그걸 프리아모스가 믿을까?
어쩌면?
그렇다면 내가 말할 수는 있을까?
글쎄.
‘운명’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본다.
“그저··· 저는 불안할 뿐입니다. 신들의 미움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면 가문에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하자 프리아모스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아들아, 미안하구나. 네게 안심을 가져다 주지 못해서.”
“아닙니다.”
“아니다. 나는 네 아버지로서 사과해야 한단다.
그리고 왕으로서는 되물어야 하기도 하지.
너는 데이포보스의 말을 어찌 생각하느냐?”
“···사리에는 맞습니다.”
설령 아가멤논이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무슨 흉계가 저 뒤에 도사리고 있더라도, 혼담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예상되는 이득은 확실하다.
반대로 감수해야 할 위험은 그리 커보이지 않는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아가멤논의 의중이겠죠.”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그래.
중요한 건 아가멤논의 꿍꿍이다.
***
“이렇게 설명하면 이야기하기가 편하겠구나.”
아가멤논은 무언가 문득 생각난 듯 탁자 위에 놓인 바구니에서 과일 두 개를 꺼내든다.
바구니를 새로 채우러 들어오는 스파르타 궁정의 하인을 저 한켠에 서 있던 메넬라오스가 제지한다.
아가멤논은 그 눈치 없는 하인의 얼굴을 기억해둔 뒤, 그가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왼손에는 무화과를, 오른손에는 포도송이를 쥔 채로.
“우리는 양손 모두에 패를 쥐고 있다. 모두 훌륭한 것들이지.”
그는 맞은편에 앉은 한 소년에게 무화과를 내밀며 말한다.
“우선 한 손에는 하투샤가 있다.
우리에게 지금 당장 강철로 된 무기와 온갖 재물들을 군자금으로 내주고 있지. 만일 이들의 편을 든다면 우리는 트로이아를 싸워 무너뜨린 뒤 그 잔해를 조금 가질 수 있을 터다.
···아니면 트로이아에 질 수도 있고. 어쩌면 하투샤가 우리를 적절한 시기에 배신해 아시아 땅에서 아카이아인들을 축출할 수도 있겠지만.”
아가멤논이 바닥에 무화과를 내려놓자 그 근처를 돌아다니던 사냥개가 급히 달고 부드러운 과육을 입에 물고 저 멀리 뛰어간다.
그 다음에 아가멤논은 오른손을 내밀고서 탁자에 포도송이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트로이아가 있지.
만일, 저들이 제대로 우리의 혼담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꽤 괜찮은 동맹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 테다.
곧 트로이아는 하투샤를 무너뜨릴 테고 우리는 동방의 위대한 제국과 적절한 우호관계를 이어가면서 아카이아를 장악하면 그만이겠지.”
아가멤논은 포도에서 알 하나를 떼어다 입에 넣고는 씨째로 삼켰다.
“물론, 여기에도 위험은 따른다.
만에 하나 트로이아가 하투샤와의 전쟁에서 진다면 우리는 하투샤의 철천지원수가 되겠고, 트로이아가 이긴다 하더라도 대제국이 된 트로이아가 우릴 가만히 놔둘지 모를 일이다.”
아가멤논은 맞은편에 앉은 소년을 향해 조그맣게 속삭인다.
“아들아, 너는 어느 쪽이 좋으냐.”
“···모르겠습니다.”
“왜지?”
“둘 중 어느 쪽을 따르든 운에 맡기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트로이아의 편을 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째서지?”
“···.”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말하거라.”
아가멤논은 아들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포도알 하나를 떼어다 주었다. 아가멤논의 아들은 포도알을 물끄러미 살펴보다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어차피··· 하투샤든 트로이아든 바다 건너에 있으니까요? 우리를 해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트로이아의 편을 들어서 하투샤의 재물을 받고 그냥 입을 다물어버리면 그것만으로도 이득이잖아요?
그 뒤로 저 동쪽에서의 싸움이 어떻게 되든 트로이아가 이기면 큰 이익을 얻게 되고, 하투샤가 이겨도 방어를 준비하면 되니까 크게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너는 얻지 못하는 것보다 이미 얻은 것을 잃는 쪽이 더 두려운 것이구나?”
“네.”
아가멤논은 유일한 아들, 오레스테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들의 배시시 웃는 표정을 보며 공연히 마음 한켠이 울컥하는 것을 느낀다. 그래, 네게는 내가 갖지 못했던 것을 주겠다.
좋은 아버지를.
“그래, 네 말이 맞다. 공연히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그러니 일단은 지켜보자꾸나.”
아가멤논은 아직 어린 아들의 겨드랑이 양쪽에 손을 집어넣고 들어올린다. 오레스테스는 즐겁게 꺄륵거리고 아가멤논은 새 소리를 내며 오레스테스의 몸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즐겁게 웃는 아들을 바라보며 아가멤논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느 쪽이 우리 편이 될 수 있을지, 지켜봐야지.”
***
“···.”
“···.”
프리아모스는 조용히 나를 뜯어보았다. 내 가슴을 열고 심장 속을 들여다 보고 싶어하는 외과의사처럼, 조심스럽게.
침묵을 먼저 깬 것도 프리아모스 쪽이었다.
“헥토르는 내게 동의의 의사를 밝혔다.”
“···네?”
“사실 헤카베도 그렇고, 안키세스도 혼인에 찬성했다. 남은 것은 네 의향뿐이었지.”
“그렇다면 아까는 어째서 다들 그렇게 데이포보스를 압박했던 겁니까?”
“철 없이 굴면 한번쯤 벽에 부딪혀 봐야 하지 않겠니? 그렇지 않으면 제 어깨 위를 짓누르는 의무의 무게를 잊어버릴 테니.”
그러니까 나 말고는 전부 이미 짜고 치는 판 위에서 놀고 있었다, 이 말인가?
아까 괜히 혼자서 얼굴을 붉혔던 기억에 나도 모르게 민망해진다. 그러자 프리아모스는 하하,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인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네 행동에 뜻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저 네 뜻을 밝히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나라의 왕과 왕비가 이미 허락했다면 어째서 제 동의가 필요힌 거죠?”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나도 너를 모르지만, 너도 나를 참 모르는구나.”
프리아모스는 내게 따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로, ‘아버지’ 같은 미소였다.
“나는 네게 조언을 구하고 하는 게다.
어떠냐. 네가 보기에 이 혼담은 어떻느냐?”
“···.”
나는 잠시 얼굴을 찡그릴 뻔했다.
당연하다. ‘그 아가멤논’과의 혼담이다.
그는 분명히 트로이아를 파멸시킬 것이다.
왜 그는 트로이아를 파멸시키는가?
내가 헬레네를 납치할 테니까.
그렇다면 왜 나는 헬레네를 납치하는가?
이노를 버렸으니까.
···.
역사가 뒤틀렸다.
호메로스의 노랫말 속에는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던, 성경 글줄 속에서나 조금 이야기되고 말던 히타이트가 저 동방에 굳건히 서 있다.
나는 중세 후기의 야금술과 농법을 퍼뜨렸고, 안탄드로스 인근의 소출은 몇 해 전부터 꾸준히 급증하고 있다. 그렇다. ‘꾸준히 급증’한다.
오디세우스는 파리스와 벗이 되었고, 이피게네이아는 데이포보스와 결혼하기 위해 아시아 땅을 밟았다.
그리고 나는··· 한 요정과 결혼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가멤논은 적인가?
파리스에게 지워진 멸망의 운명은 아카이아와의 전쟁을 통해서밖에 실현될 수 없는가? 그렇다면 그냥 내가 지금 스카만드로스 강물에 뛰어들면 되는 일 아닌가?
나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역시 다행이었다. 지금도 이러한데 헤라나 아테나를 선택했더라면 어떤 혼란에 빠져 허우적댔을지···.
아무튼 내게는 오로지 지금뿐이다.
호메로스의 노래는 내 변치 않는 기준점이 되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입을 열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
“이피게네이아 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음? 손님?”
한낮의 햇볕을 받으며 꾸벅거리던 이피게네이아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입가의 침자국을 지운 뒤 하녀가 가져온 세숫물에 얼굴을 씻는다.
트로이아 궁전의 정원 쪽으로 창문이 난 손님 방은 딱, 비스듬히 들어오는 태양광을 즐기며 낮잠을 자기 좋은 구조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침까지 흘리며 정신없이 잠에 빠졌다는 사실에 민망함을 느끼며 이피게네이아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손님이라면 어떤 분이시지?”
“후후, 보면 아실 거예요.”
“응?”
“공주님께서 준비가 되셨답니다!”
시녀들은 자기들끼리 속닥거리고 즐겁게 웃으며 이피게네이아 쪽을 곁눈질했다. 그녀로서는 영문을 모르겠는 채 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 보는데···
아.
단단한 몸을 가진 소년.
눈동자는 언듯 보면 차분한 검은빛이지만, 그 위로 짙은 눈썹은 이 남자의 의지랄까, 투지랄까, 그 비슷한 것을 드러내주는 것 같다.
잦은 야외활동으로 군데군데 그슬린 피부는 건강한 혈색을 띠고 있고.
남자가 멋쩍게 웃을 때는.
···꽤나 잘생겼다.
“이미 여러 번 만났지만, 프리아모스의 아들 데이포보스입니다.”
특히 이제껏 본 적 없는 화려한 차림새와 화장으로 한껏 꾸미고 왔다면 더더욱.
“부왕께서는 나중에 소식을 전할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 하셨지만, 먼저 전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아, 아··· 네, 그런데 무슨?”
남자는 다시 웃는다. 이번엔 미소를 넘어, 이를 환히 드러내고 크게 터뜨리는 웃음이다.
“저와 결혼하시겠습니까?”
순간, 이피게네이아는 정략 결혼도 생각보다 괜찮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가슴을 스치고.
데이포보스는 그 모습을 보며, 파리스와 요정들이 꾸며준 대로 하고 오길 잘했다 생각한다.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