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117
117화. 공주 (3)
“트로이아와 미케네의 우정 만세!”
“서쪽의 우방 만만세!!”
아이네이아스와 크레우사의 결혼식을 만난 시민들은, 간만의 축제에 즐거움을 느꼈으리라.
그 다음에 나와 이노가 혼례를 올렸을 때는, 다시 돌아온 잔칫날을 만끽했겠고.
그리고 이제 무려 세번째로 돌아온 왕실의 결혼이다.
아예 나와 이노의 결혼식 때 썼던 장식들은 떼거나 옮기지도 않았다. 어느 정도 도시가 휴식기에 돌아갔다 싶을 때쯤 다시 이 새로운 행사를 맞아 왕실 인사들은 분주히 달렸고.
“저기! 나무로 만든 새가 하늘을 난다!”
“저기 저쪽에서는 높이뛰기 우승자에게 안탄드로스산 철전을 뿌린다!!”
그 성과가 오늘의 결혼식이었다.
내가 넌지시 헤라클레스를 언급하며, 아카이아인 왕자비를 시민들이 받아들이겠냐고 묻자 프리아모스는 눈을 꿈뻑이며 대답했었지.
-“우리 시민들은 태반이 무역상들이다. 고객들을 그렇게 미워해서 남는 게 뭐지?”
···하기사, 모두가 아카이아인들 전체에 대한 증오심으로 똘똘 뭉쳤더라면 돌론이 벌써 이 도시의 정권을 장악했었겠지. 거의 그럴 뻔하기는 했다만.
헤라클레스가 아카이아인 전부를 대변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생각해보면 헤라클레스의 손자 에우리필로스도 트로이아의 동맹으로 참전하기도 하고 그랬다.
게다가 지난번에 오디세우스가 방문했을 때도 그 휘하 밀수꾼들은 트로이아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두둑한 돈주머니를 이 도시에 안겨주고 가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런저런 은원과 역사와 이해관계를 묻어두고, 결국 이 결혼식에서 남는 건 뭐냐?
“눈부신 신부 이피게네이아와 아름다운 신랑 데이포보스를 위하여! 잔들을 들어올리시오!!”
“신부와 신랑을 위하여!!”
“새로운 우정과 트로이아의 번영을 위하여!”
축제뿐이다.
내가 주인공의 자리에 서서 한번 겪었던 과정을 통째로 일개 참여자의 입장에서 다시 겪자니 감회가 새롭다.
데이포보스와 이피게네이아 두 사람이 연회 상석에서 어색하게 손님들을 맞이하는 모습이나,
이피게네이아가 아르테미스 신전에 머리카락을 잘라다 바치는 모습들을 볼 때마다 불과 몇 달 전의 우리가 떠올라 나와 이노는 서로를 바라보며 남몰래 키득거렸다.
물론 그 모든 과정이 이전과 같았던 것은 아니다.
“이번에 키크노스의 아들 테네스는 오지 않았나?”
“···예. 그 외에도 레스보스 섬의 지도자들이나, 라리사의 왕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하필.
이번 결혼식은 아가멤논과 프리아모스, 더 나아가 현 아카이아의 맹주와 장래 소아시아의 맹주의 동맹을 굳히는 의식이다.
즉, 이 자리에 참석했는지 여부가 곧 이 결혼동맹에 대한 각국의 태도를 드러낸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트로이아의 패권에 대한 태도도.
고로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참석자들의 명단을 뽑아보면, 내 결혼식에 참석했던 이들 몇몇의 이름이 보이지 않으리라.
우리 대신 하투샤를 택했거나, 우리 주위의 소국으로서 우리에게 흡수통합당할 것을 염려하는 이들이다.
일단 트로이아와 가까우면서 우리의 세력 확대를 아니꼽게 바라보는 이들이, 레스보스 섬, 테네도스 섬, 그리고 라리사 등등.
개중 특히 레스보스 섬과 테네스가 다스리는 테네도스 섬은 각각 안탄드로스와 트로이아 앞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최적의 섬들이다.
해전에서 트로이아의 영토를 방어하려면 최대한 우호적으로 챙겨놔야 하는 지역들인데···
‘선물을 조금 보내볼까? 그것도 아니라면, 한번 철쇄대를 통해 무력시위라도···’
“파리스 님? 여기 계셨군요.”
“···아, 트라키아의 히포콘. 만나서 반갑습니다.”
“잠시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당연하지만, 데이포보스의 결혼식에서 보이는 차이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 파리스 님께 보내는 트라키아의 선물입니다. 저 북방의 유목민들에게서 얻은 것이지요.”
“말이··· 총 몇 마리입니까?”
“합해서 100마리쯤 될 겁니다. 저도 80마리 정도까지 세어보고 다 못 새어보기는 했다만 마구간지기가 그리 얘기했으니 그렇겠지요.”
참석자들의 수가 줄어들었다면, 그 대신 그들이 보내는 예물과 정성의 수준이 달라졌다.
지금 여기 트라키아의 사절만 봐도 그렇다.
레소스 왕이 또 다시 찾아오지는 못하더라도 그의 가장 신뢰하는 참모이자 친척인 히포콘을 보냈고, 선물의 규모는··· 뭐, 말할 필요도 없다.
단순 계산으로 따져도 말 100마리면 2마리씩 해서 전차 50대다. 그리고 전차가 50대라면 1000명의 보병과도 맞설 수 있으리라.
“···감사합니다. 양국의 우애의 증표로서 받아두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트로이아 왕실에 보내는 선물은 또 따로 있으니, 이는 안탄드로스의 군주와 트라키아인들의 왕 사이의 우정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
“부담 갖지 마십시오. 왕께서는 일전에 한 제안만 다시 한번 고려해달라 하셨을 뿐입니다.”
···그 말이 더 부담스러운데.
일전의 제안이라면, 트라키아의 통일에 관한 것 아닌가?
나는 히포콘의 예의바른 눈빛을 애써 피한 채 적절한 인사치레를 주워섬기고서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정치적 밀고 당기기에 희생되는 게 나만의 일은 아니었다. 그건 연회장의 저기, 창가 쪽만 둘러봐도 알 수 있다.
“오이노네 님? 비취 팔찌를 한번 차보세요. 눈이 맑아진다고 하더라고요.”
“비취랑 잘 어울리는 색깔 하면 에메랄드죠. 여기, 귀걸이를 새로 차보시면, 아, 잘 어울리시네요!”
“아으··· 잠깐만, 이거 무거운데···요?”
각 도시에서 벼르고 온 귀족 여성들이 이노 한 사람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장신구들을 치렁치렁 매달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이노는 이 연회의 주인공도 아닌데.
무슨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목걸이를 네다섯 개씩 주렁주렁 매단 이노가 울상을 지은 채 내 쪽을 돌아본다.
구원 요청이다.
나도 결국 한숨을 틀어막으며 저 늑대떼에게서 이노를 떼어내려 일어섰는데···
“파리스 님,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아.”
저런.
지금은 안 되겠다.
“파, 파리스? 어디 가···?”
시종의 속삭임에 나는 고개를 돌려 연회장을 다시 빠져나간다. 등 뒤에서 뭔가 이노의 애타는 눈길이 이어지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급한 일이었다.
***
트로이아는 여러번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 도시였다.
그렇기에 어떤 저택의 벽은 아랫 부분이 1세기 반 전의 것이고, 그 중간 부분은 70년 전의 것이며, 맨 윗부분은 헤라클레스의 침공 이후에 복원된 것이기도 했다.
그런 도시에서 규칙성과 정돈된 분위기를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언감생심이리라.
게다가 이 도시의 인구도 인제 3만에 달한다.
3만이 살아가는 집, 3만이 일하는 일터, 3만이 먹는 식당과 3만이 거래하는 시장, 3만이 웃고 떠드는 광장.
그 집과 일터와 식당과 시장과 광장을 연결하는 도로는 또 얼마나 꼬이고 꼬였겠나?
130년 전에 지은 격자형 도로는 50년 전에 복원된 방사형 도로나, 그 이후로 지렁이가 파먹은 땅처럼 증축된 이런저런 골목길과 누더기처럼 기워져 원래의 반듯함을 잃었다.
그만큼 트로이아의 시내는 복잡했다. 오래 드나든 이들이 아니라면 쉽게 길을 잃기 십상이었고.
“젠장, 여기가 맞소?”
“맞지. 자, 여기 은화부터 받고 시작하지. 헤파이스토스의 신관들과 자주 밤을 같이 보내는 소년들이··· 바로 이곳에서 지낸다더군. 들어가 보시오.”
“···많이 버는 것 치고는 개구멍 같은 곳에서 사는군.”
그만큼 비밀도 많았다.
마치 갈변되 사과나 오래된 고기에서 벌레가 들끓어오르듯 비밀은 어디에서나 자라났고, 어디서든 따먹을 수 있었다.
“잠깐.”
“왜 그러시오? 여기가 맞다니까?”
물론 외지인들이라면 이 복잡한 도시의 비밀들 중 어느 것이 쓸모 있고 어느 것이 쓸모 없는지를 분별하기 어렵겠지만.
“여기가 맞다니? 막다른 길이잖소?”
“그러니까.”
-피슉.
소리 없이 날아온 짧은 화살.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자 사내가 마주한 것은 그것이었다. 요사이 이 도시에서 사냥용으로 유행하는 ‘석궁’에 쓰는 물건이었다.
그는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펠레폰네소스 지방 특유의 방언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의 눈을 감겨주며 암살자는 입을 틀어막아 소음을 완전히 없앴다.
사내는 죽었고.
“···처리는 되었나?”
“예, 파리스 님.”
높으신 분이 찾아왔다.
암살자는 방금 죽은 사내의 몸에서 이것저것을 뒤져보고는 별 쓸모 없어 보이는 나무토막이나 붕대 사이의 암호문을 식별해 받아적고는 파리스에게 넘겼다.
“우리 지역에서 쓰는 것과는 달라서 해독이든 뭐든 어려웠습니다. 아카이아 각지의 방언에다, 뭔가 기묘한 북방의 말들을 섞어놔서 말입니다. 이놈이 여기까지 이 자료들을 들고 오게 유도하는 것도 힘들었고요.”
“그리 말 안해도 자네의 노력한 값은 쳐주겠네.”
파리스는 잠시 자신의 손에 놓인 이런저런 문서들을 훑고는 옆에 있던 시종에게 넘겼다.
“다 외웠다. 태워버려.”
“알겠습니다.”
이번이··· 두번째.
아가멤논이 이피게네이아를 보냈다면, 그녀와 그 주변인들로부터 거미줄이 뻗쳐나오는 건 당연지사.
그것도 결혼식 기간 같은 혼란기를 노리는 것도 불이 뜨거운 것처럼 자연스럽다.
당연히 그 미숙해 보이던 이피게네이아는 이 일을 알고만 있는 수준이겠고, 실무는 그녀에게 딸려온 이런저런 신하들의 몫이겠지만 말이다.
파리스는 방금 불태워버린 밀서들의 내용을 떠올리다 미간을 찌푸린다.
트로이아 내부에서 이런저런 정보들을 취합하는 것까지는, 괜찮다.
그 정도 끄나풀 심기야 트로이아 왕실도 주변국에 해놓지 않던가? 지금도 파리스는 하투샤에 돌론을 심어놓은 채고.
그러나 소문을 퍼뜨리고, 고위인사의 약점을 캐며, 여론을 조작하려는 시도는 금물이었다.
그건 선을 넘는 일이다.
하지만, 이 또한 초기의 시행착오일 뿐이리라. 서로의 역치값을 알아보기 위한 시도일 뿐이고.
이렇게 몇 번 충돌이 오가다 보면 아마 이피게네이아 주위에 붙어 있는 인사들 사이에서도 나름의 선을 긋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말단 중의 말단이 몇 명 죽는 소소한 해프닝 역시 점차 줄어들고 미케네인들과 트로이아인들 사이의 평화가 다가올···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아가멤논을, 어떻게 온전히 신뢰하겠나?
파리스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아가멤논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면, 이피게네이아는 심장 속에서 자라나는 암세포나 다름없다. 적어도 그 안에서는 적출해내야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피게네이아를 트로이아 바깥으로 빼낸다는 소리는 곧 데이포보스까지 함께 왕도 바깥으로 나가게 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데이포보스를 왕도 바깥으로 나가게 한다는 소리는 둘 중 하나다. 데이포보스를 무슨 죽을죄를 짓게 해서 추방하든가, 아니면 그가 그토록 바라던 대로 자신만의 도시를 건설하도록 하든가.
그러나 그 도시가 트로이아 인근에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는 왕도에서 미케네인들의 어두운 손길을 제거한다는 측면에서 별 다른 의미가 없다.
데이포보스의 도시는···
“···멀리 있어야지. 되도록이면 바다 너머 멀리.”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이 시신은 그대로 남겨놓고 가지. 웬만하면 미케네인 동료가 먼저 발견하도록 하게. 우리의 정중한 의사표현을 저쪽에서 받아들여줬으면 하는군.”
여기서부터 파리스는 뭔가, 머릿속에서 새로운 해답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바다 너머 멀리라···.
하투샤와의 전쟁을 상시 대비해야 하는 만큼, 트로이아 본국 차원에서 큰 자원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땅, 그러면서도 충분히 먼 땅.
멀면서도 자원을 들이지 않으려면 데이포보스가 정착할 때 다른 현지 세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파리스는 근처의 우물에서 물을 퍼내어 피 묻은 발바닥을 씻고 샌들을 갈아신었다. 위장용 외투 아래 갖춰 입은 옷에 한 방울 피도 튀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머리를 정돈하고 다시 궁전으로 천천히 걷는다.
그리고, 연회장에 돌아왔다.
여전히 이노는 곤란에 처한 상황이다. 탈진 직전이라 시종들이 겨우 안락의자에 앉혀놓고 언니들이 이마의 땀을 닦아주며 기운을 차리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리고 프리아모스와 헥토르, 안키세스 역시 이리저리 바쁜 상황이다.
그 상황에서 파리스는 이 연회의 상석을 향해 걸어간다.
“파리스 님? 어쩐 일이십니까?”
“데이포보스, 잠시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을까?”
존경하는 형님의 말인 만큼 데이포보스는 그대로 따랐다. 공교롭게도 파리스가 본인의 결혼 연회 때 피곤함에 피하러 왔다가 데이포보스를 마주했던 그곳이다.
그곳에서 데이포보스는 앞서 걸어가던 파리스의 뒤통수를 유심히 지켜보다, 그가 뒤돌아섰을 때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흠칫 놀랐다.
“동생아, 네 결혼식이잖니. 나도 막 결혼한 처지라 이런 말하기 부끄럽지만 네가 어른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고.”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아직 선물 얘기는 하지도 않았는데 뭘 벌써부터 감사까지 하고 그래?”
“선···물이요?”
데이포보스는 약간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고작 선물이라니, 반짝이는 금붙이나 이런저런 예물 때문에 여기까지 은밀히 불러냈느냐는 듯한 표정이다.
그래서 파리스는 웃으며 말했다.
“네 꿈 말이다.”
그 한 마디에 데이포보스의 안색이 일변한다.
“···트라키아 땅에서 이뤄보는 건 어떻게 생각하니?”
파리스의 머릿속을 스친 새로운 해답이 바로 이것이었다.
레소스가 그토록 애원하던 트라키아 통일이든, 귀찮은 미케네인들의 처리든, 아니면 데이포보스의 염원이든.
단숨에 처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