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152
“그···.”
“지금의 성과를 쌓아내기까지, 10여 년 정도를 썼을 뿐이네.
여기서 내가 20년을, 30년을 더 통치하면 어떻게 되겠나? 자네들의 옛 파라오 람세스(람세스 2세를 말함.)처럼 60년을 넘게 재위한다면?”
누구도 예상 못한 지점까지, 이 문명을 밀고 나갈 자신이 있었다.
내 대답이 이런 식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법관의 입이 굳는다.
“나는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이어질 진보를 염두에 두고 이 도시를 설계할 걸세. 자네들의 정치는 바로 이 순간에 만족할 때만 성립할 수 있지.
하지만 나는 달라. 나는 더 원하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법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악수’란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심코 내 손을 마주쥐었다.
“그러니··· 자네들이 나를 돕게. 이 땅에 일어날 새 문명의 기틀을 짜지.
자네들 덕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 외면해왔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생겼어. 아주 크게 치하하지.”
“그러면, 저희의 방안 말고 따로 생각해두신 게 있으십니까?”
“그럼. 물론이지.”
“그게 무엇입니까?”
나는 잠시, 생각한다.
앞으로 3개의 천년기, 30여 개의 세기를 지나며 겪을 인류의 발전사를.
하늘을 보며 던진 뼈몽둥이가··· 인공위성이 될 때까지의 세월을.
“설명해도 자네는 알아듣지 못할 걸세.”
“저는 스스로 문명인이라 자부합니다. 저 카시트인의 지식이든, 네샤인의 지식이든 모두 이해할 수 있으리라···”
“자네.”
나는 그에게 웃어보였다.
“이 세상에는, 자네의 철학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이 있을 거라네.”
침로 설정
턱수염이 풍성한 이들, 화려한 망토를 걸친 이들, 수십 년 동안의 세월이 그 얼굴에 흉터처럼 깊이 새겨진 이들.
젊은이들, 아직 이 상황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 이들, 그러나 다른 모두가 바삐 움직일 때 홀로 여유로워선 안된다는 사실만 아는 이들.
누구랄 것 없이 그 걸음을 바쁘게 옮겼다.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누군가는 거의 달리듯 걸었고, 누구는 발걸음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우아하게 미끄러진다. 누구는 종종걸음치고, 누구는 탁탁 신경질적인 지팡이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그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전부 같았다.
“이집트! 이집트!!”
“맙소사, 왕조가 바뀌었다고? 평화 조약을 뒤집지는 않겠지?”
“그게 문제야? 아카이아 해적새끼들이 얼마나 대놓고 날뛰는지는 못 들어봤나?”
“그 해적새끼들이랑 거래하는 우리 상인들이 또 얼마나 배가 불렀는지는 모르나 보군. 그건 반쯤은 호재야.”
이집트에서의 난리.
그리고 그로 인한 격동.
본래 하나의 변화가 한 가지 효과만 낳는 경우는 없다. 하투샤의 궁정 관리들은 저마다 제각각 마주친 흉보와 낭보에 비명과 환희를 지르며 바삐 달렸다.
그 무수한 손실과 이익의 정도를 서로 감산하다 보면···
“아주 고무적입니다!!”
“테슈브시여! 축복받으소서!!”
“당장 행동해야 하오!”
일단은 제국에 꽤 큰 이익이 남는 듯했다.
드높은 장로들이 흥분하여 저마다 외치는 소리만 들어보면 그러하였다.
물론 이집트가 난리에 빠지자 순식간에 히타이트가 통제하는 지중해 연안 지역에 대한 약탈이 심해졌다.
안 그래도 해적들의 단골 식사거리이던 키프로스가 이제 아카이아의 장난감 수준이 된 것만 보아도 그렇다.
예전에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는 아카이아를 정벌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 따위 누구도 하지 않았다.
다년 간의 경험은 아카이아인이 옹알이보다 해적질을 먼저 배운단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남녀노소 다 죽이지 않는 이상 소용이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외교상의 불안은 말할 것도 없다.
‘일단은’ 히타이트의 번국에 속하는 트로이아의 파리스가 피람세스에서 ‘대활약’해버렸으니, 새 파라오가 억지를 부리려 해본다면 얼마든지 히타이트를 압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위협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6분의 1.”
장로 중 왕실 헌주대장이 손가락 6개를 들고서 입꼬리를 드높이 치켜올렸다.
“이전의 6분의 1 가격으로 곡물을 수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조 교체와 함께 이집트의 지방 통제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농작물의 수출입을 통제할 중앙 정부가 다른 데 눈을 돌렸다. 아마 왕조가 제대로 서기 전까지는 이 상태가 유지되리라.
이제 이집트의 무역도시는 그들의 먹잇감이다. (물론 비유적 의미다. 그들은 아카이아인이 아니기에.)
“지금 이집트에서 대량으로 곡물을 수입해오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관료들이 피눈물을 흘릴지 몰라도 이미 히타이트를 몇 달은 먹여살릴 재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소식에 다른 장로들이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있는 것은 단지 돈을 아낄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번 것은 한낱 곡식이 아니라, 시간과 재산이었다.
이 위태로운 제국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산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루하루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절실했다.
장로들, 왕족들과 귀족들 중에서도 가장 드높은 이들이 한 마디씩 희망을 나누었다.
오랜 기근에도 불구, 이집트에서의 곡물 구매라는 길이 열렸으니 대규모 아사 같은 참사는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구휼에 쓸 밀알은 구휼에 쓰고, 그렇게 구제한 목숨들은 제방과 수로를 건설하며 신들께 제사를 지내는 데 쓰면 된다.
“오래··· 가물었소.”
점토판 서기대장이 조용히 읊조렸다.
“신들께서도 갈증에 탄 목으로 침을 넘기실 정도의 가뭄이었소. 사람이 나뭇가지처럼 말라가고, 또 돼지보다 흔하게 죽어나가는 가뭄이었소.”
그의 말에 순간 정적이 일었다.
곧, 서기 대장은 주먹을 세게 쥔다.
“허나 히타이트는 시들어가는 듯하면서도 이슬 한 방울만으로도 난초처럼 되살아났소. 항상 그래왔지. 항상···”
그의 말은 단순한 자위나 격려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말해 하투샤와 그 일대는 풍요로운 땅이 아니었다. 그리고 판돈이 적을수록 판은 역동적으로 돌아간다.
동전 고작 한 닢이 세 닢으로 불어난다면 3배로 불어난 게 되듯, 하투샤의 위세 역시 수 차례 불어나고 쪼그라들기를 반복했으니.
한 계절의 가뭄, 두어 번의 전투, 서너 번의 실정으로도 제국은 휘청일 수 있었다. 제국을 갈라버린 내전은 또 얼마나 많았으며, 제국의 수도가 불탄 적은 몇 번이던가?
그러나 하투샤는 아직도 남아있다. 히타이트의 패권은 여전히 이 땅 위에 드리웠다.
저 서쪽의 트로이아가, 동남쪽의 아시리아가 그들의 살을 먹어간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쉬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반역자들에게 보여줄 때요.”
미시아, 프리기아, 카리아, 리키아 등지에서 이미 하투샤의 동맹 도시들에 대한 공격과 침공이 감행되었다. 각 지역의 충성파 도시들이 위협받고 있다.
“그에 대한 외교적 방책도 이미 실패했고, 보다 급진적으로 미시아의 왕을 교체하려는 시도도 무위로 돌아갔소.”
저 번국들은 이미 새로운 패권을 상정하고 있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가는 힘의 흐름을 감지하고는, 그 흐름을 현실로 만들었다.
트로이아.
그들은 트로이아를 믿고 움직이고 있었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우리의 서쪽 영역 일대를 떠돌며 복수를 외치니···
남은 것은 이제 오로지 힘을 통한 복수뿐이오!”
“옳소!”
그렇다. 몰락과 파멸은 그 씨앗부터 파내고, 씨앗에서 싹이 났다면 그 싹을 불태워야 한다.
마치 상하고 병든 부분을 잘라내듯이.
이 땅에서 있어온 오랜 분쟁과 다툼의 역사가 그를 증명한다. 그 무수한 불길 속에서 제국은 불타오르고, 또 불태우기를 반복하며 살아남았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않소. 결코 동의할 수 없소.”
“···그게, 무슨 뜻이오?”
“나는 그대의 말이 품은 큰 뜻에는 찬성하오. 결국 거대한 궁전의 대들보도 작은 들쥐들에게 갉아먹혀 무너지고 마는 법. 아무리 작고 하찮은 요소일지라도 파국으로 향하는 씨앗은 남겨둘 수 없소.
허나, 그렇다 하여 화마가 들이닥쳤는데 들쥐나 잡을 수는 없잖소?”
또다른 목소리는 그 몰락과 파멸을 가져올 씨앗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진 모양이었다.
“그대의 모계가 루위인이고, 루위인들의 생존이 위협받는 것 같으니 그리 서쪽의 정세에 민감하게 구는 건 이해할 수 있소.”
“내가 사적인 감정을 위해 제국을 판돈 삼았다는 거요? 모욕적이군.”
“아니. 누구나 고향이 공격받는다면 그럴 수 있지 않소? 나 또한 그대의 애달파하는 마음에는 깊이 공감하는 바요.”
자신을 위로하는 듯 철저히 조롱하는 포도주 제조대장의 말에 점토판 서기대장은 입을 다물었다. 더 입을 열면 자신만 우스워진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침묵을 강요한 것이 썩 만족스러웠는지, 포도주 제조대장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간다.
“허나, 우리의 서쪽 번국들을 다시 정벌해보았자 우리가 무엇을 얻어낼 수 있단 말이오? 고작해야 고통과 한숨과 비어버린 돈주머니뿐이겠지.”
“···.”
“···.”
그의 말에 나머지 장로들이 입을 다문다. 적확한 지적이었다.
“서쪽 땅은, 부유하지 않소.”
척박하기로는 대부분 하투샤와 크게 다르지 않은 땅들이다.
그런 곳은 단순히 따먹은 과실이 없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힘들게 싸우고 얻는 게 없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란 뜻이다.
“병사들은 어떻게 먹일 작정이오? 이제 막 우리는 기근의 영향에서 조금 벗어났는데, 그 역량을 모조리 얻을 것 없는 곳에서 털어낼 작정이오?”
싸우는 것 자체가 더 힘들다.
보급이란 원체 어려운 것이지만, 말의 힘이 약하고 도로가 드문 이 시대에는 더더욱 힘겹다.
결국 고상하게 말해 ‘현지 징발’이라 하든, 또는 ‘약탈 행위’라 적나라하게 뇌까리든 현지에서의 보급이 필요하다.
그런 만큼 보급은 당연히 부유한 지역, 풍요로운 지역에서 더 쉬워진다. 서부와 같이 척박한 땅이 아니라.
“그래서, 움직이는 게 힘들다 하여 발가락을 향해오는 불씨를 외면할 셈이오?”
“그러면 그대는 발가락을 태우러오는 불씨 때문에 바로 머리를 통째로 구워버릴 화마를 외면하겠단 소리요?”
-쿵!
포도주 제조대장이 탁자를 묵직하게 두드린다.
“결국 우리의 위협은 다른 게 아니오. 우리의 구리광산을 빼앗은 이들, 가장 중요한 영토들을 야금야금 삼켜오는 이들이 저 서쪽의 해적들보다 더 큰 위협이 될 것이오!”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명확했다.
아시리아.
“그렇소. 아시리아요. 우리를 죽이려 그들은 지금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소. 여력이 생겼다면 저 사자의 떼를 먼저 죽여야하지 않겠소?
그리고 남하하는 게요! 저 사악한 약탈자 파리스가 피람세스를 통째로 불태워버리고 그 손아귀에 수천의 노예를 이끈 채 돌아갔다 해서 그의 땅에서 밀알이 마구 샘솟지는 않소!
저 풍요로운 땅으로, 두 개의 강(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이 땅을 적셔주는 곳으로 가야 하오! 그리고 이 기근을 영원히 끝내버릴 수 있도록!”
“···.”
“···.”
동의의 뜻을 표하며 여러 장로들이 침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포도주 제조대장은 여세를 몰아 갈 필요가 있다 느꼈는지 손가락으로 저 궁전의 창밖을 가리킨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제방을 정비하고, 물길을 바로잡는 데 여력을 다해야 하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이 땅에 푸른 빛이 돌아오자마자 적들을 향해 몰아쳐야 하오.
지금으로부터 수 개월 안에!”
낙조가 지는 서방이 아닌, 동이 트는 동방으로.
풍요로운 문명의 땅으로 여력을 다하여 진격해야 한다.
논리적인 문제 제기에 깔끔한 결론까지. 그의 말에 한순간 침묵이 내린 이유가 있었다.
“···나는 반대일세.”
물론 그 상태가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어째서요? 그대도 혹시 저 서방의 빈국들을 잡으면서 힘을 낭비하자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감정적으로 굴지 말게. 자네들 모두, 너무 큰 꿈들을 꾸고 있군.”
이번에 입을 연 것은 장로들의 장(長), 근위대장이었다.
“고작 해야 주린 배를 채웠을 뿐인데 서방의 번국들을 정벌한다느니, 아시리아를 친다느니, 헛물이나 들이키고 있군.”
“그러면 가만히 있자는 말입니까?”
“아니. 그것은 우리의 방식이 아닐세.”
노인은 자신의 허리춤에 찬 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건··· 하투샤의 방식이 아니지.”
“그럼 어쩌자는 말이오?”
“아시리아는 강대하고, 트로이아는 떠오르지. 그런 이들을 치기 위해서 지금의 얼마 안 되는 판돈을 모두 걸어버리고 싶지는 않군.”
근위대장은 천천히, 그러나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될 말일세. 그런 건···.”
“그렇다면.”
“지금 왕조가 막 교체된 나라가 있지 않은가?”
일순간 장로들이 얼어붙는다. 오랜 평화, 깨어지지 않은 교우관계를 생각하느라 미처 선택지에 넣지 못한 곳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집트를 치지.”
“100년 전, 하투샤의 힘이 가장 강성할 때에도 우리는 온힘을 모아 파라오의 북진을 막는 데 그쳤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자니요?”
“그 말이 맞소! 왕조가 교체되었다 한들, 저 약탈자 파리스가 다녀간 뒤 피람세스는 쑥대밭이 되고 무수한 귀족과 신관들이 죽었다 하였소.
그들의 잔해 위에 왕조를 세운 새 파라오의 힘이 약할 리가 없잖소? 외력이 대신 숙청을 해준 꼴이니.”
“그래, 파라오의 힘은 여느 때보다도 더 강할 걸세.”
근위대장은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그래서 치자는 걸세.”
“그게 무슨 언어도단입니까?”
“바보 같은 소리 말게. 파라오의 힘이 강해졌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
···가나안 땅의 족속들이 그 꼴을 보고만 있겠는가 하는 말일세.”
페니키아인들, 유대인들과 다른 여러 족속들.
그들이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복속해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의 지배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힘이 약할 때라면 그들의 상전 노릇이란 그리 고통스럽지 않을 테니.
허나, 반대파랄 것이 사라진 새 왕조의 개창자의 눈에 거칠 게 있을 것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새 파라오가 자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보통, 그 다음 단계는 외부로의 확장이다.
“분명 수 년 안에 가나안 땅을 향해 움직이겠지. 그렇다면 우리가 할 것은 정복이 아닐세.”
그보다는··· 포용에 가까울 테다.
이집트의 ‘폭정’에 반발하여 떠난 이들을 보호 하에 넣는 것.
그리고, 그들과의 동맹을 맺고 아직 이집트의 왕조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을 이용해 그 자리를 꿰찬다.
만일 이집트인들이 전쟁을 각오한다면, 적어도 히타이트 혼자 싸우지는 않을 테다.
하투샤의 권세가 남쪽 해안지대로 길게 뻗어나가며, 그들은 자연스럽게 페니키아인들과 함께 지중해로 뻗어나간다.
잠시 서방에서의 지배권을 잃더라도 그들에게는 여전히 바다로의 길이 남는 것이다.
물론, 이 의견에도 반발은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집트를 건드리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그 이집트입니다!”
“게다가 저들이 새 도읍으로 피람세스를 정했소. 동북쪽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건 곧 우리의 움직임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는데, 저들과의 정면대결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소?”
이어지는 논쟁.
그러나 어떻게 몰락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나아갈지, 그 길에 대해 말하는 논쟁.
실로 오랜만에 달콤한 희망을 붙든 장로들은 쉬지 않고 떠들어 대었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주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 역시 뒤늦게 알아채었다.
“그대들의 의견이 그러하다는 말인가?”
시종들이 한 남자를 양옆으로 둘러싸고 걸어온다. 곧 그가 손짓하자, 도열해 있던 시종들은 모조리 흩어지고 장로들은 일제히 그에게 절을 올린다.
히타이트의 대왕, 수필룰리우마 2세가 말했다.
“트로이아를 치거나, 아시리아에 설욕전을 벌이거나, 이집트의 앞마당을 헤집어놓는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소리로군.”
“그러합니다.”
어차피 대화는 이미 진행될 대로 진행되었고, 상호간의 이해득실을 따져본 결과 제 4의 결론 따위 나오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장로들은 쉬이 대답했다.
서쪽, 동남쪽, 서남쪽.
셋 중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만이 남았다.
확실한 것은, ‘나아가야 한다’라는 사실 하나뿐.
“···아니, 거기에 나는 한 가지를 더하고 싶군.
나아갈 길을 정해야 할 것도 맞지만 그와 동시에 빼놓지 않고 행해야 할 것이 있네.”
수필룰리우마가 조용히 금반지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장로들은 고개 숙인 채 귀를 열었다.
대왕은 말했다.
“서쪽에서의 야합을 막아야 하네.
우리가 어디를 치든, 아카이아와 트로이아가 연대하는 순간 저 서방에는 단순히 저항하는 번국 이상의 것이 탄생하겠지.”
아카이아, 그리고 트로이아. 그 둘을 아우르는 대세력.
새로운 패권국이 외교무대에 등장하게 되리라.
모두가 바라지 않는 일이다.
“허면···.”
“아트레우스의 차남에게는 이야기가 얼마나 진행되었나?”
“아직은 설득 단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래. 아직은 그렇겠지.”
수필룰리우마는 눈을 빛냈다. 실로 오랜만에 야심에 찬 눈이었다.
“···메넬라오스라고 했던가? 그 차남이 말일세.”
“그러합니다.”
“우리가 너무 소극적으로 나섰네.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움직이고 거래하려면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알았어야 했는데.
사람을 풀게. 그리고 메넬라오스를 움직이게.”
권력은 피를 마시고 자란다. 강한 권력일수록, 더 많은 이들의 희생을 요한다.
그렇다면 수십 개 도시를 지배하는 왕중왕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을까.
“그리고, 단지 아카이아와 트로이아 사이의 관계를 흩어놓는 것만으로 되겠나?”
“···.”
“···.”
“트로이아를 어떻게든 견제하려 한다면··· 저 아카이아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만들 필요가 있지 않나?”
허나 수필룰리우마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흘린 피는 아직 그리 많지 않았다. 형제를 죽이고,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죽이고, 그보다 많은 무고하지 않은 이들을 죽였어도 모자랐다.
“자네들에게 묻겠네.
아카이아가 트로이아를 파멸시킬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가 보기에, 지금부터 흘릴 피는 트로이아의 것이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