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Corporation: Joseon RAW novel - Chapter (21)
짱그라
헬로밤
21화발아(發芽)… 발암(發癌)? (14)
“알고 행하는 것과 모르고 행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정책을 만드시고 시행하시는 대신들께서는 그 정책이 왜 만들어졌는지 잘 알고 계시겠지만, 당장 한두 세대만 지나가도 이걸 왜 시행하는지 알지 못하고 단지 ‘관례(慣例)’라는 이유만으로 행하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빌어먹을 관행! 관료주의! 지긋지긋하다!’
21세기에서 향이 우울증까지 앓았던 이유는 그놈의 관행과 관료주의, 탁상행정이었다.
하지만, 대신들의 반대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만들어진 정책은 100년이 지나든 1000년이 지나든 문제없이 운용될 것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습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도 있지요. 세상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는데 100년이고 1000년이고 같은 정책이 이어진다? 그것은 잘 만들어진 정책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멈춰버렸다는 소리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혼자 멈춰 있다면 그것은 퇴보(退步)와 마찬가지입니다.”
“시류의 변화란 덧이 없는 것입니다. 시류의 변화만 따르다 보면 깊이가 없어지고 그러다 보면 근본조차 잊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시류에 따라 부평초처럼 흐르는 정책보다는 초지일관(初志一貫)한 것이 더 이상적인 것입니다.”
성리학적 개념에 충실한 좌의정의 대답에 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시류의 변화가 덧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흐름을 못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전조의 많은 율령(律令)과 제도들을 바꾼 연유(緣由)는 무엇입니까? 짧으면 몇 백 년, 길게는 삼한 시대부터 수천 년을 내려온 법과 제도입니다.”
“그것은···.”
“전쟁을 예로 들어보지요. 좌의정 영감의 말씀대로라면 아직도 장수들의 단기접전(單騎接戰)으로 전쟁의 승패를 정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여러 병과(兵科)들이 한 몸처럼 움직이고 화포와 같은 신무기들이 새롭게 쓰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좌의정 영감의 말은 ‘초지일관의 덕’이 아니라 ‘정저지와(井底之蛙)의 우(愚)’일 뿐입니다.”
“세자 저하! 말씀이 너무 심한 것 아니십니까!”
향의 비난에 좌의정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세종이 끼어들었다.
“그만! 세자의 말에 틀린 것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 산천이 바뀌듯 사람도 달라지고 풍습도 달라지는 법이다. 따라서 이에 따른 대책을 의논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세자! 대책을 말해보라!”
세종이 향을 지지하고 나서자, 대신들은 입을 다물었다. 한편, 세종의 확고한 지지를 등에 업게 된 향은 자신이 생각한 대책을 이야기했다.
“국정을 운영하는 육조(六曹) 모두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실행에 옮기는 정책이건 부결, 유예에 처하는 정책이건 모든 것을 다 기록해야 합니다. 짧게는 월 단위로, 길게는 년 단위로 말입니다. 각각의 정책 모두 만들어진 이유, 실행에 옮겨진다면 실행의 결과, 부결이나 유예로 결정되었다면 무슨 이유로 부결 또는 유예로 결정되었는지 다 기록을 해서 보관을 하는 것입니다.”
향의 말에 좌의정이 바로 따지고 들었다.
“이미 사관의 사초나 승정원일기로 모든 것이 다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는 불필요한 일이 중복되는 것이옵니다.”
“사초나 실록은 국왕조차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승정원일기에 다 기록이 되기는 하나 분류는 전혀 안 되어있지 않습니까? 10년만 지나 보십시오. 정책에 관한 기록을 찾는 일에만 며칠을 소모할 것입니다. 허나, 육조마다 시행하는 정책들이 따로 분류되어 보존한다면 얼마나 시간을 줄일 수 있겠습니까?”
“세자 저하의 의견이 옳습니다.”
“신 역시 세자 저하의 의견이 옳다고 사료 되옵니다.”
향의 설명을 들은 육조의 대신들이 모두 찬성을 하고 나섰다. 대신들의 대부분이 찬성하자, 세종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로부터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다. 허나, 사람은 유한한 존재라 세월이 흐르면 흙으로 돌아가니, 후대가 연유(緣由)를 알고 싶어도 알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것은 필연(必然)이다. 따라서 후대가 길을 잃지 않고 순리를 찾기 위해서 선대인 우리가 수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각 조의 대신들은 세자의 안을 받아들여 기록을 작성하고 나누어 조심히 보관하도록 하라.”
“명을 받드옵니다.”
“자, 그리고···.”
“아바마마, 또 다른 청원이 있사옵니다.”
향의 청원이 끝난 줄 알고 다른 안건을 의제로 올리려던 세종은 말을 멈추었다. 잠시 향의 얼굴을 바라보던 세종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허락했다.
“어디 말해 보거라.”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의 증보(增補)에 관해 말씀을 올리다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조선 전체를 살피면 이순(耳順, 60세)은 물론이고 고희(古稀, 70세)를 넘긴 농부들도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들을 찾아 농사에 관해 묻고 기록을 해야 합니다.”
향의 제안에 세종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농사에 관해 묻고 기록한다? 흐음···.”
콧소리를 내며 잠시 생각을 하던 세종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구나! 그들이 살아온 세월만큼 경험한 것도 많을 터! 풍작(豐作)에 대한 비법을 아는 이들도 많겠구나! 마치 쇠돌이가 우두침의 비술(祕術)을 알고 있던 것처럼 말이야!”
세종의 말에 향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단순히 농사의 비법만이 아닙니다. 그들이라면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의 전조(前兆)도 알 것입니다! 각각으로 보기에는 작은 징조들이지만 그런 징조들을 모아 사례집을 만든다면···.”
“미리 준비를 할 수 있지!”
세종은 무릎을 치며 향이 할 말을 미리 말했다. 세종의 말에 향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홍수와 같은 수재(水災)는 보와 저수지를 손보고 준설(浚渫)하는 것으로 줄일 수 있지만, 가뭄은 미리 알고 대비를 하지 않으면 크나큰 피해를 불러오는 일이옵니다.”
“너의 말이 옳다! 이조판서는 관상감(觀象監)에 명하여 자료가 올라오는 즉시 정리해 책을 만들라 하시오!”
“명을 받드옵니다.”
“또 있습니다. 춘궁기(春窮期)는 물론이고, 가뭄이 들거나 물난리가 난 후에는 반드시 돌림병이 돕니다. 하지만, 미리 징조를 알게 된다면···.”
세종은 무릎을 치며 향의 말을 끊었다.
“미리 약재를 준비해 대비를 할 수 있겠구나! 과연!”
‘과연 세종! 머리 회전은 진짜! 하지만 깜빡이 좀 키고 들어오십쇼! 그리고 무릎 좀 살살 치십쇼! 멍듭니다!’
감탄 반, 짜증 반의 감정을 섞어 작게 혀를 찬 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혜민국(惠民局)과 제생원(濟生院),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이 미리 앞서서 준비를 할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지방 관아에서도 미리 앞서서 준비를 할 수 있다면 병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의 수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자의 말이 옳다! 이조판서는 이 또한 실행에 옮기도록 하시오!”
“명을 받듭니다!”
세종의 명령에 반대를 표하는 대신들은 보이지 않았다. 농본주의(農本主義) 국가에서 풍작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고, 백성들이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일 또한 성리학적인 관점에서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세자인 향이 내놓는 청원이 천금(千金)의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거기에 세자가 무슨 안건을 내놓을 때마다 반대부터 하고 보던 대신들도 이번에는 별다른 반론을 내놓지 않고 화답(和答)하고 있었다. 세종은 밝은 얼굴로 향을 바라봤다.
“또 다른 청원(請願)이 있느냐?”
세종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향의 입이 열렸다.
“예. 우리 조선은 물론이고 전조(前朝)를 살펴봐도 제대로 된 지리지(地理志)가 없습니다. 우리 조선에서 나는 물산이 적다고 하나, 이는 명과 비교해 적은 것이지 절대적인 면에서는 결단코 적은 것이 아니옵니다. 이에 조선의 강역을 제대로 살펴 지리지를 만들어야 하옵니다.”
“지리지라··· 공역(公役)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세종과 대신들의 지적에 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지리지를 제대로 만든다면 백성들의 고초를 줄일 수 있습니다.”
“지리지로 백성들의 고초를 줄인다? 세자는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예. 정확한 지리지를 만든다면 전국의 고을에서 나는 물산을 정확하게 알 수 있고, 이는 공납(貢納)의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공납으로 큰 고통을 받는 것은 전조부터 이어진 가장 큰 문제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 고을에서 나는 물산부터 정확히 알아야 하옵니다.”
“그건 그렇다만···.”
세종은 말을 흐렸고, 사행을 떠난 호조판서를 대신에 자리에 참석한 호조참판이 입을 열었다.
“신 역시 세자 저하의 말씀이 옳고, 당연히 행해야 함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들어가는 공역이 만만치 않습니다.”
호조참판의 지적에 향은 대신들이 잊고 있던 것을 지적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향약제생집성방의 중보를 위해, 그리고 농민들의 지식을 채록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움직이는 상황입니다. 어차피 중앙에서 전국으로 인원을 파견하는 김에 업무를 하나 더 맡기면 되는 일입니다.”
‘1+1이 별거냐!’
“아!”
향의 지적에 세종은 물론이고 대신들이 동시에 감탄사를 뱉었다.
“신들이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과인 역시 생각을 못했었소!”
“예산을 대폭 줄일 수 있습니다!”
세종과 대신들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차려던 향의 머릿속에 삼천포 선생의 말이 울렸다.
‘과거인은 모조리 저능아고, 현대인이 모조리 천재인 것은 아니야! 단지 과거인은 정보의 유입량이 적었을 뿐이고, 절대적으로 정보량이 많은 현대인의 시야가 좀 더 넓어졌을 뿐이야! 예를 들어볼까? 지금은 기본 중의 기본인 멀티태스킹이 일상화 된 것도 1990년대 중반이 지나서였어! 그전까지는 그 대단한 컴퓨터 나리도 한 번에 하나의 일만 수행했고, 사람들은 그것에 만족했지!’
세종과 대신들이 일종의 대오각성(大悟覺醒)을 하면서 향의 청원은 바로 공식적인 정책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 유명한 ‘불야성(不夜城)의 육조거리’가 시작되었다.
* * *
그날 밤.
“사관들은 따라오지 말라.”
“하오나, 전하.”
“아비와 아들 사이의 사담(私談)이다.”
세종이 단호히 말하자, 사관은 뒤로 물러섰다. 사관을 뒤로 물린 세종은 내관들을 이끌고 동궁전으로 향했다.
“아직도 깨어 있구나.”
불이 환하게 켜진 동궁전의 방을 보며 세종이 말하자, 뒤따르던 상선이 말을 받았다.
“가장 일찍 주무실 때가 2경(밤9시~11시)과 3경(밤11시~새벽1시) 사이이고, 4경(새벽1시~새벽3시)까지 깨어계신 적도 자주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아직도 어린아이인데, 어찌 그리도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건지.”
향에 대한 걱정을 감추지 못한 채, 세종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주상 전하 납시오!”
향의 방 밖에서 시립하고 있던 내관은 세종의 모습을 보고는 향을 향해 고하고는 바로 방의 문을 열었다.
내관이 고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물러서 있던 향은 세종이 들어서자마자 허리를 숙였다.
“야심한 시간에 어인 일이시옵니까?”
“잠시 바람을 쐬던 중에 불이 켜져 있어서 들렸다. 너야말로 이 시간까지 아니 자고 무얼 하던 것이냐?”
“잠시 책을 좀 보고 있었사옵니다.”
“그래? 우선 앉자꾸나.”
향의 자리에 앉은 세종은 서안에 펼쳐진 책을 보며 눈을 빛냈다.
“서이(西夷)의 책이로구나? 무엇에 관한 책인고?”
“‘연금술(鍊金術)에 대한 소고(小考)’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제목 그대로 연금술에 대한 비판서적입니다.”
“연금술은 무엇이더냐?”
“납이나 철 같은 금속에 여러 가지를 첨가해 금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연구이옵니다.”
향의 말에 세종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가능한 것이냐?”
“저자(著者)가 쓴 글에 의하면 서이들도 수백 년간 연구를 해왔으나 답이 안 나왔다고 하옵니다. 저자가 쓴 서두(序頭)를 보면 ‘연금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를 좀 더 연구하여 생활에 도움이 되는 합금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연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합금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연금이다.’라···.”
향의 말을 음미하던 세종이 짧게 결론을 내렸다.
“현자(賢者)로구나.”
“소자 또한 그렇게 생각하옵니다.”
그런 향의 모습에 미소를 짓던 세종은 펼쳐진 연금술 서적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번역한 것이 있는데 같이 보시겠습니까?”
“아니다, 단지, 서이들의 문자는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보는 것이니라.”
하지만, 세종은 한참이 지나도 손에 든 책을 내려놓지 않았다. 시립하고 선 향의 허리가 슬슬 뻐근해지기 시작할 무렵, 책을 내려놓은 세종이 입을 열었다.
끝
ⓒ 국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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