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Corporation: Joseon RAW novel - Chapter (5)
짱그라
헬로밤
5화아버지가 누구라고? (3)
“역사는 변하지 않았지.”
여전히 저릿저릿한 종아리를 주무르며 향은 동궁전 밖을 바라봤다.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향의 눈에는 나이답지 않게 회한(悔恨)이 서려 있었다.
양녕의 수성(守城)과 충녕의 공성(攻城)으로 요약할 수 있는 세자 결정전은 역사의 흐름대로 충녕이 승리했다.
양녕이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리고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돌잔치에서 보여준 것처럼 야망(野望)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실록에 나온 것처럼 학문을 익히기 보다는 산과 들로 다니며 사냥을 하기를 즐겼고, 주색을 좋아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이가 양녕이었다.
그런 이였기 때문에 경쟁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했다.
결국, 그는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사냥과 주색(酒色)에 빠졌고, 사통(私通)이라는 금기(禁忌)를 범하는 극단적인 사건까지 일으켰다.
결국, 세자결정전에서 양녕이 패배한 것은 충녕대군의 자질이 빼어난 것도 있었지만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자침(自沈)한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 * *
세자결정전에서 충녕대군이 승자가 되었지만, 그 역시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그의 처가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것이었다.
충녕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심온은 실세(實勢) 중의 실세로 부상했다. 그런 심온의 부상(浮上)을 그대로 놔둘 태종이 아니었다.
충녕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함께 궁으로 들어와 태종을 처음 본 날, 향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향의 전생인 진호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한국사를 담당했던 ‘삼천포’-수업 도중에 곁가지로 자주 빠져서 붙은 별명-선생은 태종을 이렇게 평가했다.
“만약에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주장하는 가톨릭 사제들이 태종 시대 때 조선에 도래했다면 태종은 아마 바로 가톨릭을 국교로 삼았을 걸? 물론, 그다음에는 말 잘 듣는 소수만 빼고 모가지를 쓱싹했겠지만.”
삼천포 선생의 말은 ‘IF’였다. 하지만, 충녕대군과 함께 궁으로 들어오게 된 향이 태종을 처음 봤을 때, 향은 삼천포 선생의 말을 인정했다.
‘그 양반이 옳았어!’
노년에 접어드는 태종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 쌓여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세자가 된 충녕 부부의 절을 받은 태종은 의외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제부터 세자는 너다. 나를 이어 이 나라를 다스릴 준비를 철저히 하고, 형제들과 우의(友誼)를 더욱 깊게 하거라.”
“금과옥조(金科玉條)와 같은 아바마마의 말씀 각골명심(刻骨銘心)하겠습니다.”
충녕의 대답이 끝나자 태종 옆에 앉아 있던 중전 민씨가 입을 열었다.
“세자빈, 앞으로 내명부(內命婦)는 세자빈이 다스려야 하네. 절대로 잡음이 나오지 않게 내조에 힘써야 할 것이야.”
“어마마마의 말씀 각골명심하겠사옵니다.”
덕담을 건넨 태종과 중전 민씨의 시선은 옆에 앉은 향에게 쏠렸다.
“아이가 참으로 총명하게 생겼구나.”
태종의 말에 충녕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벌써 소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벌써? 저 아이, 이제 겨우 4살 아니더냐?”
“올 10월에 4살이 되옵니다.”
“참으로 빠르구나!”
“저보다 더욱 뛰어난 자질을 보이고 있습니다.”
충녕의 대답에 태종은 흡족해 보였다.
“우리 조선과 왕실의 축복이로구나!”
태종과 중전 민씨를 관찰하던 향은 자신에게 태종과 중전 민씨의 시선이 모이자,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충녕의 칭찬에 태종 부부가 흡족한 모습을 보이자, 향은 속으로 툴툴거렸다.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양녕과 충녕의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는 동안, 향은 자신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렇게 먹지를 못하지? 유모, 의원을 좀 불러오게.”
“예, 마님.”
자신의 모친인 심씨가 의원을 부를 정도로 고민을 하던 향은 결심을 했다.
‘나를 갈고 닦는다! 최악의 경우에도 최소한의 지적, 육체적 기반을 갖춰야 한다! 아니, 육체적 기반은 시간문제로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지적 기반은 갖춰야 한다!’
결심을 굳힌 향은 두 돌이 지나 말문이 트이자마자 바로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아이, 신동(神童)인 듯합니다!”
“그렇구려!”
혀 짧은 소리를 하면서도 천자문을 외우는 향의 모습에 충녕 부부는 흐뭇했다. 그런 부부의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지 향은 열심히 천자문을 익혀 갔다.
‘다행히 하드웨어가 좋아! 역시 문종이라 그런 건가?’
실제 역사에서 문종이라는 이의 신체였던 덕인지 기억력과 이해력 등의 하드웨어(?)가 우수한 덕에 향은 남들보다 한참 어린 나이에 천자문을 떼고 통감절요(通鑑節要)로 넘어갔다. 그리고 충녕이 세자로 확정되었을 때에는 소학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눈이 참 초롱초롱하니 참으로 보기가 좋구나!”
태종의 칭찬에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도 향은 태종 부부의 분위기를 살폈다.
‘역시 분위기가 좀 미묘하네.’
– ‘전생의 원수가 현생의 부부가 된다.’라는 속담이 있지? 태종 부부의 예를 살펴보면 그 속담이 그대로 맞아 들지. 애증의 부부랄까?
삼천포 선생의 이야기를 떠올리던 향이는 태종이 자신의 모친에게 말을 걸자 현실로 돌아왔다.
“국구(國舅, 세자의 장인)께서 참으로 공사다망(公私多忙)하시다고 들었다.”
“제가 방 안에만 있다 보니 잘 모르옵니다.”
“그러냐?”
짧게 되물은 태종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워져 있었다.
“국구의 나이도 있으니 이제는 좀 여유를 갖고 생활하셨으면 좋겠다고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좋은 시절도 건강을 잃으면 모두 허망한 것 아니겠느냐?”
뼈있는 태종의 말에 세자빈은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예. 반드시 전하겠사옵니다.”
태종의 경고였다.
* * *
하지만 역사는 그대로 흘러갔다.
충녕대군이 세자의 자리에 오르고 4개월 뒤인 9월 9일. 태종은 세자에게 왕위를 이양했다. 왕위를 이양하는 것을 알리는 교서에서 태종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주상이 장성하기까지 군사는 내가 친히 청단(聽斷)하겠고, 또 국가의 결단하기 어려운 일은 의정부와 육조에 명령하여 각기 가부를 들어 시행하겠지만, 나도 마땅히 가부의 논의에 참여하겠다.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노회(老獪)한 신하들에게 밀릴 것이 확실한 아들을 보조하고 아직은 확고하지 못한 국기(國基)를 단단히 다지겠다는 확고한 의사표명이었다. 아니 의사만 표명한 것이 아니라 의건부(義建府)를 두어 병권을 계속 손에 쥐고 있었다.
이렇게 태종이 병권친장책(兵權親掌策)을 단호하게 표명했음에도 잡음은 발생했다.
사건의 시작은 병조판서였던 강상인이었다. 강상인은 태종이 병권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에게만 직접 보고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동생인 강상례를 불법으로 정5품의 무관직인 사직(司直)에 제수시켰다.
이런 행사의 결과로 태종은 강상인을 국문하게 되었다. 강상인을 중형에 처하라는 대간의 상소가 줄지어 올라왔지만 태종은 강상인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이고 그동안의 공을 참작해 전리귀향(田里歸鄕, 죄인의 고향으로 강제 귀환시킴)시키고 공신녹권(功臣錄券)과 직첩을 몰수하는 것으로 끝냈다. 이것이 8월에서 9월에 걸친 ‘강상인의 옥(獄)’사건의 1차 처리였다.
하지만 이 사건이 심온의 몰락으로 연결된 것은 왕위이양(王位移讓)에 대한 명국의 승인을 얻기 위한 사은사(謝恩使)로 영의정인 심온이 떠나면서였다.
사신으로 떠나는 심온을 환송하기 위해 백성들은 물론이고 많은 고관대작들이 모였다는 것을 보고받은 태종이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었다.
-다음 왕위를 이을 세자의 장인이자 영의정. 그리고 그의 동생 심증은 의흥삼군부 중군 동지총제(義興三軍府 中軍 同知摠制)라는 군부의 요직(要職)에 자리하고 있다!
태종의 의심이 점점 깊어지고 있을 때, 의심이 확신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
11월 26일. 병조좌랑(兵曹佐郎) 안헌오가 태종에게 보고를 했다.
“강상인, 심증, 박습이 일전에 사적으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말하기를 ‘요사이 호령(號令)이 두 곳에서 나오는데, 한 곳에서 나오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습니다.”
안헌오의 보고에 태종은 팔걸이를 내려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
‘강산인의 옥’이 다시금 수면 위로, 더욱 크게 떠오른 것이었다.
* * *
‘강상인의 옥’이 재차 점화하면서 향의 외가는 날벼락을 맞았다.
강상인은 거열형에 처해졌고, 박습과 심증은 참살당했다. 명에서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심온은 모진 국문을 받고 사사(賜死)에 처해졌고, 일족은 모조리 노비가 되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궁궐 안에도 폭풍이 몰아쳤다.
“나도 모자라 며느리의 집안까지 이리 만드셔야겠소!”
자신에게 벌어졌던 비극이 또다시 벌어지는 것을 본 원경왕후 민씨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태종은 숙청작업을 밀어붙였다.
그런 혼돈의 시기, 향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내가 몸만 아이라는 것이 엿같다!’
환생이 아닌 보통의 4살짜리 아이였다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넘어갔겠지만, 30대 중반까지의 기억과 인격을 가진 향으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적당한 외척이 있다면 오히려 든든한 방벽이 되어 줄 수 있다. 만약 내가 나서서 외가에 닥친 화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훗날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궁에 들어온 이후로 태종이 자신을 매우 귀여워했다는 것과 미래의 일을 생각하며 저울을 조율하던 향은 결과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아냐. 가만히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실제 역사에서도 그렇게 흘러갔어. 내가 ’눈물의 똥꼬쇼‘를 해서 성공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4살짜리 어린아이를 이용했다고 더욱 일이 커질 수 있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아버지란 양반이···.’
자신의 처가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나고 있는데도 세종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부왕인 태종의 위세가 폭풍과 같았다고 하더라도 아예 무반응이라는 것은 정도를 넘은 것이었다.
부왕의 반응에 향은 행보를 결정했다.
‘태종과 세종은 무언의 합의를 본 것이다! 그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최고의 상책(上策)이다!’
그 결과, 향은 자신의 어미가 며칠 밤낮 동안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강산인의 옥’으로 세종의 처가가 박살이 나버렸지만 그 후폭풍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역적의 딸이 왕비의 자리에 있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폐비(廢妃)를 해야 합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이 폐비를 주장하고 나섰지만, 세종은 자신의 왕위를 걸고 극력반대(極力反對)를 하고 나섰다.
결국, 태종은 다음과 같은 말로 ‘폐비논쟁’을 종결시켰다.
“투기도 안 하고. 이미 왕의 적자를 셋이나 낳은 이를 폐한다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세종의 반대와 태종의 결단으로 소헌왕후 심씨는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폐비논쟁’의 종결과정을 보면서 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나서기를 잘했어.”
스스로를 칭찬하며 향은 스스로를 칭찬했다. 한창 자화자찬하던 향은 정전(正殿)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역시 가문의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무가(武家)의 핏줄을 타고나서인지, 태종은 물론이고 세종도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매우 냉정하지.
“역시나 최종 목적은 ’왕권강화‘였어.”
실시간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본 향은 태종과 세종의 목적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왕이라는 것이 쉽지가 않구먼···.”
끝
ⓒ 국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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