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73
073 빅토리아 시대(1)
1864년 새해가 밝자 태선은 뉴욕에서 영국 런던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태평양을 건널 때만큼은 아니겠지만 대서양 너머 영국으로 떠나는 여정도 쉽지는 않았다.
철써억──쏴아아아───!
그도 그럴 것이 지금처럼 바다가 평온한 날에도 파도가 연신 배로 부딪혀왔기 때문이다.
하물며 아직 이 시대 배는 증기선이라 유럽에 갈 때 열흘은 걸렸다.
그나마도 바다 사정에 따라 열흘 하고도 사나흘은 더 걸릴 수도 있는 일정.
“저 배는 처음 타봐요.”
다만 샬롯은 그토록 바라던 모험을 하는 기분이라서인지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태선도 태평양을 건너올 때 이랬겠군요.”
“엄밀히 말하면 상선을 빌려 타서 이 배처럼 사정이 좋지는 않았었죠.”
그러고 보니 미국 올 때가 생각났는지 태선은 바다 멀리로 시선을 흘깃 던졌다.
“이제 1864년이니 그날도 이제는 3년도 넘게 지났네요. 뱃멀미를 안 해서 다행이었지···아, 그러고 보니 샬롯도 속이 울렁거리거나 하지는 않아요?”
“울렁거리는···네, 아직 그런 느낌은 없어요.”
“다행이네요. 뱃멀미하면 정말로 힘들다고 그러더라고요.”
“후후, 뱃멀미라도 하면 혹시 태선이 저를 더 챙겨줄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회사의 보배인데 얼마든지 챙겨드리죠.”
그 말을 하며 난간에 기대 가만히 바다를 보고 있으려니 안 그래도 슬슬 어둑해지고 있어 원근감이 자못 모호해졌다.
후우우우웅───!
거기에 슬슬 저녁 무렵이라 한층 차가워진 바람이 불어오자 태선은 샬롯을 봤다.
“안 추워요? 바닷바람 제법 차가운데요.”
“괜찮아요. 오히려 바람소리가 운치 있잖아요. 고동에 귀를 기울이면 바다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들뜬 목소리로 수다를 떨어대지만 실은 팔짱을 낀 채 몸을 움츠리고 어깨는 가느다랗게 떨고 있는 샬롯이었다.
자신이야 워낙 강골이라 상쾌하게 바닷바람이나 맞으러 나왔다지만 저렇게까지 나와서 옆에 있다니.
하지만 그래도 그런 그녀를 자신이 챙겨줘야지 어쩌겠는가.
“자요.”
태선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샬롯에게 걸쳐주었다.
샬롯이 올려다보자 태선은 웃으며 말했다.
“오들오들, 그렇게 떨고 있으면 감기 걸려요.”
“오···들오들까지는 아녜요. 아무튼 외투 고마워요. 태선의 온기가 남아있네요.”
“어차피 앞으로 열흘 넘게 봐야 할 바다인데 슬슬 선실로 들어가면 어때요? 저녁 시간 되기도 했고요.”
“조금 더 있어요. 혹시 저만 두고 먼저 가진 않겠···아앗!”
철썩─구르릉──!
그때 파도가 크게 몰아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배가 좌우로 기우뚱거렸다.
그 탓에 샬롯이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지만, 태선이 팔로 허리를 감듯 번쩍 들어서 다시 내려주었다.
“고···고마워요.”
“방금 봤죠? 혼자 난간에 나와 있으면 위험하거든요. 그러니 절대 혼자서는 나오지 말아요. 알았죠?”
“당연하죠. 제가 혼자서는 뭐하러 여기 나오겠어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샬롯이 생글생글 미소를 띠며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오, 태선! 샬롯 양도 여기 있었구먼. 저거 봤나?”
“조셉, 천천히 가세요. 심정은 이해 가지만 체면도 있는데 자중하셔야죠.”
호들갑 떠는 건 조셉 스완이었고 뒤따라오는 이는 새뮤얼 앤드루스였다.
둘 다 영국 출신이라 이번 여정을 위해 데려가기 제격이라 데려온 이들이었다.
그들로서는 일도 하면서 모처럼 고향에 돌아가 볼 좋은 기회인지라 기뻐하며 응했지만.
“무슨 일인데 그래요? 마치 아이처럼 기뻐하시네요.”
“하하하, 왜 아니겠나. 둘 다 어서 객실로 내려와서 이걸 봐야 한다네.”
“어쩔 수 없죠. 샬롯, 그만 내려가죠.”
샬롯은 별로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일 또 같이 와서 바다 구경할 거죠?”
“아까 몸무게도 가볍던데 파도에 휩쓸리면 어쩌게요. 샬롯 혼자 내보낼 순 없으니 당연히 같이 나와야죠.”
“그럼 약속하신 거예요.”
그제야 샬롯이 따라나서자 태선은 앞장서는 조셉을 따라 객실로 갔다.
내려온 김에 저녁 식사를 할 생각이었는데 이내 굳이 설명 없이도 조셉이 왜 그런 호들갑 떨었는지 알아챘다.
예전의 배였다면 복도나 객실마다 등불을 걸어나서 깨작깨작 어둠을 몰아냈으리라.
“하하, 보게나! 우리 전구가 여기서 불을 밝히고 있다네. 대낮처럼 밝지.”
하지만 지금 이 배의 천장에 일정한 간격으로 전구가 있어 하얗게 빛을 내고 있었다.
마침 식당칸으로 들어온지라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볼 수가 있었다.
“엄마, 여기 밝아요. 배에는 밤에 무서울 줄 알았는데 여긴 밝아서 하나도 안 무서워요!”
전구를 가리키며 씩씩하게 말하는 아이도 있고.
“전구가 있어서 너무 좋구먼. 배에서도 서류 검토를 할 수 있어서 런던 도착해서는 한층 여유롭겠어.”
“이를 말이겠나. 스완 제너럴 일렉트릭이었지? 재무부가 투자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지.”
식사 나오기 전에 시간을 쪼개서 서류를 검토하는 신사들의 대화도 있었다.
“아, 전구 있으니 너무 좋다. 서빙하면서도 실수할 일도 줄고 청소도 더 편해졌어.”
“주방장님도 그러시더라. 요리하면서 손 벨 일이 줄어서 너무 좋다고.”
심지어 지나가는 종업원들이 나누는 스몰 토크까지.
하나 같이 전구에 대해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얼마 지나면 이 편리함을 당연하게 여기고 이런 칭찬은 쏙 들어갈지 모르겠지만 그 역시 업적이라면 업적.
‘그만큼 대중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는 뜻이니.’
그 모습을 보자 조셉도 못내 뿌듯한지 흐뭇하게 웃으며 속삭이듯 태선에게 말했다.
“본래 난 이 일에 자부심을 느꼈네만 지금 이걸 보니 더욱 그렇구만.”
“예, 저도 조셉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네요.”
“그렇지? 역시 태선이로군!”
사업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만 위해서 하는 건 결코 아니다.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하면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 가치를 추구하기 마련.
사람에 따라 그건 권력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될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어떤 정신적인 성취일 수도 있다.
‘조셉의 경우에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뭔가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려나.’
그것만 봐도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이 사람과 같이 사업해서 다행이라고 태선은 생각했다.
아울러 새삼 결의를 다졌다.
‘아직 내 머릿속에는 사업 아이템이 무궁무진하게 많아.’
석유를 중심으로 펼쳐갈 수 있는 것들.
그것을 본래 역사보다 더 빠르게, 그리고 부작용을 줄여서 펼칠 수 있다면 자신도 큰돈을 벌겠지만 사람들의 삶도 더 편해지리라.
‘역사 치트로 꿀 빨아서 돈 많이 벌게 될 건데 그 정도 서비스는 해줘야 예의겠지.’
그러고 보면 이번에 자신이 준비한 사업 아이템은 좀 더 특별하기는 했다.
전구는 그나마 본래 역사 흐름에서도 전세계에 뻗어갔다.
다만 지금 전구와 함께 배에 싣고 가는 건 한국에서만 전매 특허로 누리던 것.
‘오히려 내 덕분에 이번 역사에서는 전세계 사람들이 고루 온돌을 누리게 되려나.’
그리고 따스한 겨울을 보낼 수 있게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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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항을 떠나서 열흘하고도 이틀이 더 지나 배는 런던항에 들어갔다.
과연 그 명성처럼 비가 내릴 듯 우중충한 날씨.
‘그러고 보면 산업화 탓에 스모그 현상이 유명했지.’
한국에서 서해 건너온 미세 먼지를 직빵으로 맞는 느낌 몇 배쯤 되려나.
다만 아직 이 시대는 스모그 현상이 없으니 그냥 안개 끼고 날씨가 흐린 것일 터였다.
뭐 태선은 이런 우중충한 날씨도 좋아하기에 런던의 공기가 마음에 들었다.
‘흐음, 런던이라.’
“여기서부터는 내가 안내해주어야겠구먼.”
“조셉, 혼자만 나서신다면 섭섭하죠. 저도 영국 출신입니다.”
그러는 사이 배에서 내리자 서로 안내를 자처하면서 조셉과 새뮤얼이 말했다.
“싸우지들 마시고 사이 좋게 같이 안내해주세요.”
“싸우기는. 우린 절대 싸우지 않았네. 영국 신사는 고작 그런 일로 다투는 일이 없어.”
“그럼! 자네와 샬롯 양을 잘 안내해주려고 잠깐 의견 교환을 했을 뿐이지.”
둘의 대답을 들으며 태선은 잠시 생각해봤다.
‘그러고 보니 샘은 아예 미국으로 이민을 왔었고.’
조셉 스완은 사업이나 과학협회의 회의에 참가하러 종종 런던으로 방문하기는 했어도 본가는 영국 북동부에 위치해 있었다.
“조셉, 혹시 본가에 가보실 생각이세요?”
런던항에서 거리로 나오면서 묻자 조셉은 안 그래도 그걸 생각해봤다는 듯 답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지금 내 본가가 뉴캐슬에 있는데 다른 일 없으면 가보고 싶네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더 중요한 일이 있잖나.”
‘하기야 화이트하우스 씨와 만나고 영국 왕실과도 교분을 쌓아둘 계획이니.’
조셉도 거기 더 집중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제 종종 영국에도 오게 될 건데 나중에 조셉이 뉴캐슬에 돌아가서 직접 전구를 설치해주시죠.”
“하하, 그거 좋은 생각이군. 만약 왕실과 인연을 쌓고 내가 훈장이라도 받게 되면 훨씬 더 명예로운 귀환이 되겠어.”
그렇게 잡담 나누며 일행은 마차를 잡아탔다.
“샬롯, 호텔은 미리 예약해두었다고 했죠?”
“네. 최고급으로 준비했죠.”
태선은 화이트하우스에게 부치는 편지와 함께 샬롯에게는 영국에 도착해서 묵을 호텔을 예약해두었다.
사실 그냥 호텔이라면 와서 방을 잡아도 됐겠지만 이제는 사업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뿐더러.
‘영국에서는 특히 체면이 중요하지. 내가 머무는 곳이 내 명예가 된다.’
비록 영국에 인도인도 있고 흑인도 있다지만.
그래도 검은머리에 선입견을 가질 이들이 없지 않기에 다른 부분에서 최대한 점수를 당기는 편이 좋았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에 전구 헌상을 계기로 왕실과 친분을 노리고 있는만큼 말이다.
“브라운스 호텔로 가주세요.”
그런 이유로 샬롯이 예약한 곳이자.
방금 마부에게 말한 목적지야말로 바로 그런 곳.
“허허허, 미리 듣기는 했지만 정말로 우리가 브라운드 호텔에 묵는군요.”
“제가 듣자 하니 여왕 폐하께서도 브라운스 호텔에서 종종 티타임을 가진다고 하시던데 운이 좋으면 혹시 뵐 수도···?”
영국 출신인 조셉 스완과 새뮤얼 앤드루스도 몹시 기대하는 반응이었다.
럭셔리한 것으로 유명한 호텔이니 그럴 만했다.
그리고 잠시 후 호텔에 도착해서는 태선 역시 그 위용에는 자못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영국이네.’
아니, 그보다는 영국이 가장 빛날 시기인 빅토리아 시대라서 그런 것이려나.
그중에서도 1837년 설립된 브라운스 호텔은 이 빅토리아 시대의 세련미를 잘 담아낸 건축물이었다.
체크인 하고 복도를 거닐어 방으로 들어가며 태선은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와, 이런 데서 묵다니···저 자신이 더 높은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요.”
이심전심인지 마침 샬롯도 똑같은 생각을 했나보다.
“오, 샬롯 양도 그랬나? 나도 그랬다네.”
“여왕 폐하가 쓰시는 호텔과 같은 공간을 쓰다니···제게 이런 날도 오는군요. 태선과 같이 사업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셉 스완과 새뮤얼도 그랬다.
“다들 같이 열심히 일한 덕분으로 이런 호사도 누리는 거죠. 아무튼 짐 풀고 로비에서 다시 만나죠.”
“네, 금방 나올게요.”
아무래도 샬롯은 여자인지라 방을 따로 잡았다.
그 맞은편에는 태선, 조셉, 새뮤얼이 같은 방을 쓰기로 해서 짐과 함께 전구 등을 놔두고 로비로 나왔다.
샬롯은 시간이 조금 더 걸렸는데, 태선은 기다리는 김에 카운터 직원에게 갔다.
“실례합니다만 이 편지를 좀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건 팁입니다.”
“팁을 이렇게 많이! 예, 맡겨주십시오!”
환전한 파운드와 함께 건넨 편지 수신자는 화이트하우스.
“답신이 오면 저한테 전달 부탁드리고요.”
“그럼요, 물론이지요!”
영국에 간다 말은 해뒀지만 그냥 찾아가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 터.
그래서 호텔에 머물고 테니 만나기 편한 날을 정해 답신 달라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