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159)
159_구대륙의 그림자 (6)
“안 가! 안 갈 거야!”
“어… 정말?”
“안 간다니까! 내가 빨갱이 소굴에 왜 가! 투자가 하고 싶거든 너 혼자 가라니까?”
나는… 나는 휴가자라고!
다른 문제도 있다. 모스크바다 모스크바. 20세기 후반을 지배할 악의 성채, 철의 장벽 너머 사탄이 웅거한 요새, 꼬뮤니즘의 심장 모스크바 방문 이력을 찍으라고? 나는 그렇다 치자. 우리 애들은?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매카시즘은 안다. 그 광풍에서 과연 모스크바 방문 이력이 찍혀 있는 게 도움이 될까? 아무리 러시아 관광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다 쳐도 그 아이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을 하기는 싫다.
내 발작에 당황해하던 에젤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전쟁부의 명령을 무시해도 괜찮나?”
“여기 보이냐? 방문해주면 고맙겠다고 돼 있지?! 안 가도 돼. 못 가. 배 째.”
“실은 말이지, 그거 전쟁부만의 의견이 아냐. 국무부에서도 자네의 방소(訪蘇)를 기대하고 있다고.”
“구라치지 마, 이 사기꾼아.”
후버 행정부가 나를 움직여? 웃기고 자빠졌네.
영국, 프랑스 같은 다른 나라들은 몰라도 미국만큼은 아직까지 소련과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성립시키지 않았다. 당장 우유원정군을 빨갱이라며 패죽이려던 후버 행정부가 소련에 사람을 보낸다고? 어디서 약을 팔아.
하지만 에젤의 입에서 나온 사람은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실은 다른 사람의 부탁이야.”
“누구?”
“내년에 백악관에 들어갈 사람.”
어?
당연히 공화당 대선 후보 겸 패전처리 투수 후버 이야기는 아니리라.
그렇다면-
“FDR?”
“그렇지.”
“아니. 아니아니, FDR 이야기가 왜 나와? 그리고 너희 집, 포드 영감님이 민주당이랑 또 무슨?”
뭔가 말이 아귀가 안 맞잖아. 내가 그 엿같은 우유원정군 때문에 미친 듯이 쏘다니는 동안 뭐가 어떻게 된 거냐고.
에젤은 천천히 하나하나, 마치 셜록 홈즈가 으스대며 자신의 추리를 읊듯 하나씩 테이블에 단서를 까뒤집기 시작했다.
“저번 우유원정군 사태로 후버는 사실상 끝났지. 다음 대통령은 무조건 민주당 차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그렇지.”
“루즈벨트, 앨 스미스, 존 낸스 가너(John Nance Garner) 정도가 유의미한 대선 후보였고.”
“그것도 알지.”
그는 테이블 위에 세 잔의 유리잔을 올려놓고 톡톡 두드렸다.
“셋 중 가너는 가장 약하지만, 루즈벨트와 스미스 사이에서 승자를 결정해 줄 정도의 힘은 있었지. 그리고 그 가너는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의 후원을 받고 있고.”
“허스트? 그 신문왕?”
“뭘 그리 새삼스레 놀라? 이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전국구 판매망과 인력을 확보했겠어?”
이게 그렇게 엮인다고?
나도 허스트의 이름이 나온 시점에서 대강 머릿속의 얼개가 그려졌다.
포드와 허스트는 을 매개로 협력 관계가 있었고, 가너는 FDR와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포드 역시 새 대통령이 되실 분과 뭔가 트레이드를 신청했을 테고, FDR은 누가 친소 용공 좌파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소련과의 외교관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그럼 내 몫은?”
“응?”
“씨발, 내가 모스크바에 가면 당연히 내 몫을 내놓으셔야지. 은근슬쩍 명령이네 부탁이네 하면서 어디서 공짜로 귀한 몸을 부려먹으려고.”
“어… 우리가 소련에 제법 많이 투자할 계획인데 그 지분 일부는 어때?”
“좆 까.”
그거 전부 압류당할걸? 모르긴 몰라도 냉전이 시작된 후에도 스탈린이나 그 졸개들이 ‘허허, 미 제국주의자 여러분. 소련에서 배당을 많이 받아 가십시오!’ 하면서 손을 흔들어 줄 것 같진 않걸랑.
그딴 거 말고 제대로 된 뭔가를 내놓으라고.
“신임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는 어때? 자네 솔직히 후버랑 잘못 엮여서 한참 쫄았잖아. 그러니까-”
“미안한데 그 사람이랑 나 사이에 딱히 중개인을 끼울 필요는 없어.”
크, 크흐흐. 크흐흐흐흐!
내가 마! 루즈벨트랑 술도 마시고! 싸우나도 가고! 다 해 봤다 이거야. 어디서 그딴 거로 사기를 치려고 그래. 벌써 못된 것만 배워가지곤.
에젤의 표정이 썩은 호박처럼 뭉개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훅 깨달음이 찾아왔다.
애초에… 그냥 내가 안 간다고 하면 고개 끄덕이고 끝내면 될 에젤이 왜 저리 난리란 말인가?
“너 이 새끼, 날 팔아먹었구나!”
“응? 무슨 소리야.”
“나 설득해서 모스크바로 보낼 수 있다고 입 털었지? 그래서 콩고물 좀 받아먹었구만?”
“유진, 내가 친구를 팔아먹을 놈으로 보여?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라면 팔았거든.”
“그렇지? 당연히 팔았, 컥!”
배빵 한 대만 맞자. 이 개같은 친구야.
정말 내가 인덕이 없구나. 어째서 내 주변엔 정상인이라곤 하나도 없는 걸까? 미합중국 육군 최후의 양심으로서의 역할이 너무나도 막중해 어깨가 무겁다.
“그래서 뭘 받아 챙겼길래 날 그리 모스크바에 못 보내 안달이야? 아니다. 이건 죽어도 못 말해주겠지. 그럼 다른 거나 물어보자. 왜 난데?”
“소련 쪽이랑 안면 있는 사람이 없잖아. 정확하게 말하면 소련이랑 안면 튼 사람들은 죄다 빨갱이라 정보 신뢰도가 허접하대.”
그럼 나는? 나도 빨갱이랑 안면 같은 거 없다고!
내 눈깔에서 레이저 빔이라도 나가는지 에젤이 크흠거리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너한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었어.”
“누구? 스탈린?”
제발. 이 이상 미친 독재자랑 엮여버리면 나는 3회차로 떠날 수밖에 없다고.
천만다행히도, 에젤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의외지만 당연한 인물이었다.
“아니. 투하체프스키.”
“그 정도면 뭐어… 이해 못 할 건 아니네.”
“우리 최대 물주라고. 그놈들이 전차를 무슨 수로 만들겠어? 당연히 우리한테 위탁하지 않을까?”
에젤아, 에젤아. 그 사람도 숙청 대상이야. 너는 왜 그리 망하는 줄만 붙잡고 있니….
“내 몫은?”
“응?”
“내가 모스크바 가주는 대신에 내 몫이 있어야 할 거 아냐, 이 자식아.”
“그럼 가는 건 확정이고?”
그럴 리가.
“도로시랑 이야기해 보고 결정할게.”
“이 공처가.”
“애처가다, 이 자식아. 남의 휴가를 이 따위로 날려먹고도 주둥이가 움직이냐? 개평 마음에 안 들면 모스크바 안 가. 내 배를 째라, 그냥.”
정말이다. 내가 받아낼 것도 없으면 왜 거길 기어 가겠나.
에젤은 한참 끙끙대며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이야길 꺼냈다.
“돈은-”
“그딴 거 말고.”
“그럼 뭐. 너무 얼토당토않은 건 안 되는 거 알지?”
“너네 항공 사업부. 그거 내놔.”
포드사는 아직 항공기를 제조하고 있었지만, 이제 거의 망조가 든 지 오래였다.
제조 공장은 관심 없다. 내가 아는 헨리 포드는 자기 피땀 어린 공장을 그리 쉽게 넘길 사람이 아니거든. 다만 설계진과 핵심 인력은 내가 좀 챙기고 싶다고.
“그거 망조가 단단히 든 거 알고 있지?”
“그러니까 내놓으라는 거잖아. 멀쩡한 물건이면 내가 달라고 한다고 주지도 않을 거면서.”
“거… 서로 적당히 네고 쳐서 금액 맞추고 가져가면 되겠네. 우리 영감쟁이도 조만간 비행기 장사 접으려고 했으니까.”
돈이 안 된다고? 그러면 노오력이 부족한 거다.
내가 괜히 아놀드에게 그리 물을 쳐놨겠나. 적당히 공황으로 맛탱이 간 업체 한두 개만 더 인수한 뒤에, 멀쩡한 민항기 모델 하나 뽑아서 팬암에 팔아먹기만 해도 굶어 죽진 않을걸? 그렇게 버티기만 하면 2차대전이고.
이제 기쁜 마음으로 모스크바에 갈 수 있겠어.
***
우리 가족의 휴가 계획에 대대적인 조정이 발생했다.
도로시가 아이들을 데리고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에젤을 따라 행복이 가득한 로동자 농민의 지상락원 쏘오비에트 련방으로 가게 되었다. 와, 너무 행복해!
나는 미국 대사관으로 가 간단하게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극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으로 인해, 저희 또한 소련과의 접촉을 앞당겨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습니다.”
“극동이요?”
여기서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와.
“예로부터 소련은 중국 정부의 강력한 후원자인 동시에, 중국의 여러 공산주의자들에게도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일본이 만주를 무력으로 갈취한 지금,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우리나라는 아무 것도 못 하고 있잖습니까?”
그야… 돈이 없으니까.
중국은 굉장히 중요하다. 감히 잽스 따위가 저 광활한 억단위 인구 시장을 통째로 잡아먹으려 든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잽스의 강냉이를 추수할 정도로 중요하다.
근데 만주는 좀 애매하다. 지금 파산 직전에 몰린 우리가 만주 하나 때문에 일본이랑 전쟁을 해야 하나? 라는 계산이 서는 거지.
“그래서, 소련을 통해 일본을 견제한다?”
“비슷합니다. 킴 중령께선 그냥 가서 인사만 해주시고, 개인 감상 정도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그거면 됩니까.”
“문외한에게 무언가 거창한 첩보나 정보수집 임무를 지시해봐야 그 어설픔이 티날 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그냥 여행기 쓴다는 느낌 정도면 됩니다.”
그래.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어.
얼마 후, 우리 둘은 모스크바에 당도했다.
“어서 오십시오, 동무들!!”
딱히 대단한 환영인파가 있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야 미국과 소련은 아직 외교관계고 뭐고 없는걸.
우리의 안내인으로 나온 사람은 그래도 이것저것 나름대로 설명을 해주었다.
“알음알음 많은 미국인들이 소련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미합중국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에 이르러 파국을 맞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노동자, 농민의 나라인 소비에트 연방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 보려는 분들이 무척 많지요.”
“흐으음….”
“저희 연방은 모든 면에서 평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합중국의 여성 멸시에 지친 동무들 또한 잔뜩 모스크바로 오고 있지요. 어떻습니까, 동무? 혹시 사회주의에-”
“일 없습니다.”
어… 성차별 때문에 소련으로 간다구요? 러시아에?
100년 뒤에도 영원히 회자될 이야기에 따르면 보드카와 가정폭력이 없는 남자는 러시아 남자가 아니라던데. 이거 완전 자유를 찾아 월북하는 사람들 보는 느낌인걸.
에젤은 에젤대로 공장 시설을 실사하기 위해 떠났고, 나는 T형 포드에 탑승한 채 웅장하기 그지없는 크렘린궁에 입성했다.
그리고 그곳에, 지옥의 대마왕이 있었다.
“반갑소. 스탈린이오.”
“유진 킴입니다.”
제대로 된 소개도 없냐고, 이 예의라곤 엿바꿔먹은 인간아.
하긴, 어차피 나를 보고 싶어 하는 건 투하체프스키였다 했었지. 국가원수가 일개 중령을 만난 것부터 그의 입장에선 나름대로 신경을 쓴 거라고 생각하면 딱히 할 말도 없다.
나는 그 뒤로도 몇몇 소련의 관료들을 소개받았는데, 이상하게도 군부 인사들보다 외교관이 더 많았다. 뭐지?
“우리 붉은 군대의 핵심, 투하체프스키 장군이 킴 중령을 만날 날을 무척 고대하고 있었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와 약간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주면 고맙겠소.”
“저는 평생 군인으로 산 몸인지라 군 이외의 일에는 문외한입니다. 제가 괜한 이야기를 해서 실례를 범하진 않을지 걱정되는군요.”
“아, 그럴 일 없소. 그대가 아주 잘 아는 일이거든.”
그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태연스럽게 말했다.
“예브게니 킴. 우리와 함께 조선인의 미래에 대해 논해 봅시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