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Guard RAW novel - Chapter 4
3. 그녀는 4차원. 떠나자! 미지의 세계로
세종은 정말롤 황당했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나? 저거, 진짜 요즘 세상에 사는 사람 맞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아니, 뭐. 좋다. 나한테 좋은 감정 안 가지고 있다고 치고, 그래서 엿 먹으라는 심정으로 바지는 물론 팬리까지 젖게 물을 끼얹은 것까지는 이해한다. 그런데 저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아메바 수준의 단순한 뇌 구조가 아니면 저런 행동이 나올 수가 없다. 저렇게 달려 나가면 안 봐도 될 사이가 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맘 으로 도망을 갈까? 욕실 샤워기가 고장만 나지 않았어도 저 여자한테 이런 걸 시키는 게 아닌데. 시킨 내가 잘못이지.
세종은 어이없어 헛웃음만 지으며 수건을 놓아두었던 곳으로 몸을 돌렸다.
“제길!”
욕설이 튀어나왔다. 몸을 닦으려고 잘 올려두었던 수건은 바닥으로 내팽개쳐져 물기 가득한 흙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누구의 짓인지 알 것 같다.
그의 눈이 다시 열린 대문으로 향했다. 달 밝은 밤에 으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박 순겨영!’
민영은 앞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후 불어 올리고 점퍼를 목까지 끝어 올렸다. 밤도 깊어지고 바닷가에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공기가 제법 서늘했다.
윙, 위이잉. 위이이잉.
짝! 짝!
손바닥에 불이 난다. 찬 공기도 문제지만 이놈의 모기 때문에 돌아가시기 직전이었다. 아니, 무슨 모기들이 단체로 몰려다녀? 모기는 개별 플레이 하는거 아니었나? 이건 뭐, 사이비 종교집단 몰려다니듯이 떼로 덤빈다.
민영은 비좁은 소파에서 몸을 뒤척이며 최대한 맨살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이대로 잠이 들면 모기들에게 살점까지 뜯길 판이다. 아침에는 뼈만 앙상히 남을 것 같은 살벌한 상상이 머리를 스친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윙윙거리는 모기들이 살까지 뜯어먹을지도 모른다는 공상 때문에 그녀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A4용지를 끌어다 얼굴까지 덮었다.
텁텁한 종이 냄새가 코끝으로 확 밀려 들었지만 모기에게 뜯겨서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민영은 겨우겨우, 몸을 움츠리고 잠을 청했다. 피곤하다. 오늘 하루 정말 정신없이 보냈다. 게다가 마직막은 강세종의 성질까지 건드렸으니 내일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 심히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내일은 해수욕장 개장일이니 조만간 시장 사모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아, 나의 공(功). 나의 구세주. 싸모님, 제 앞에서만 빠지셔야 합니다. 제가 아니면 그 누구도 사모님께 손대게 할 수 없어요. 꼭 저여야만 합니다. 싸모님! 싸모님만이 제 인생의 유일한 빛이십니다!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시장 사모를 멋지게 구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달콤한 잠 속으로 깊이 잠식하려는 찰나, 그녀는 시장 사모의 튼튼한 다리를 잡고 놓지 않는 또다른 손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이 씨익 웃으며 속삭인다.
‘이건 내 거야! 박 순경.’
우라질! 지옥에나 가 버려 강세종!
“안돼, 안돼에. 싸모님! 사모님.”
민영은 허공에 대고 헛손질을 하며 소리를 질렸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좁은 소파에서 몸이 기우뚱하더니 그녀는 순식간에 소파 아래로 떨어졌다.
우당탕.
“억“
정말 ‘억’ 소리 나게 아프다. 잠이 덜깬 얼굴로 아픈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잔뜩 인상을 쓰는데 눈앞에 낯선 구두코가 보였다. 그녀는 아직 완벽히 돌아오지 않은 이성으로 ‘왜 저게 보이지?’ 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혁!”
놀라 자빠진다는 말이 이럴때 써먹는 말인가 보다. 그녀는 진정3으로 놀라서 실신할 뻔했다.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를 길치고 팔짱을 척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는……강세종이었다.
으허헉.
민영은 어쩔줄을 물라 눈만 크게 뜬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진정으로 한심하다는 기색이었다. 외계인을 보기라도 하듯 쳐다보는 요상한 눈빛을 받으면서도 민영은 움직일 수가 없 었다.
“안 일어날 거야?”
그가 궁금하다는 듯 묻는다. 민영은 그가 왜 저런 말을 하나? 이해하지 못해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자 그가 한 음절 한 음절 끊어서 또박또박 다시 묻는다.
“그. 러. 고. 있. 을. 거. 나. 고.”
“아…… 저, 그게……”
그녀는 조금씩 돌아오는 이성을 더 빨리 찾으려 머리를 홱홱 저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세종이 멀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
“박 순경, 너 어느 별 사람이야? 너, 해경 뒷문으로 들어왔지? 누가 대리시험 쳐 줬지?”
자다가 흘린 침 때문에 얼굴 한쪽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종이를 때어 내던 민영은 갑자기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이게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예?”
민영이 잔뜩 굳은 목소리로 따져 묻자 그가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하던 말을 다시 한다.
“정상적으로 해경 시험에 합격했을 리가 없지. 그따위 정신 수준으로 어떻게 몇 십 대 일을 뚫어? 분명히부정행위가…”
“야!”
순간, 사무실 안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사무실 안에는 현재 두 사람뿐이다. 어젯밤, 세종의 바지에 물을 끼얹는 만행을 저지르고 도망쳐 나온 후 결국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던 민영과 웬일인지, 사무실로 일찍 출근한 강세종 경사. 둘만 있는 사무실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한 긴장감이 흘렀다.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내 혼신의 노력을 다해 합격한 해경 시험을 부정행위 따위로 치부하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스스로가 가장 자랑스러웠던 때를 꼽으라면 단연 해경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였다. 직장 생활을 청산하고 전문대에 입학했을 때도 그때보다 행복하지는 않았다. ‘내가 정말로 무언가 해냈다’는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시험을 칠 때 경쟁률은 사상 최대였다. 그런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해경이 되었는데 뭐? 뒷 문? 대리? 부정행위? 그에게 ‘야!’ 하고 소리를 지를 때만큼은 강세종의 근육질 몸을 믹서에 박박 갈아서 마서도 시원치 않을 만큼 이성을 잃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성을 아주 떠나보내지 않는 이상, 아무리 미친 이성이라도 그 순간만 지나면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제자리로 찾아온다.
세종의 근거 없는 의심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결국 ‘야!’라고 소리쳐 버린 민영도 스스로의 행동에 놀랐지만 그보다는, 한참 낮은 직급의 순경에게 하극상을 당해 버린 강세종은 남극의 빙하처럼 얼어 버렸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그를 보며 민영은 아주 잠깐 갈등했다. 또다시 도망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지만 민영은 자신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음을 자각했다. 그래서 선택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기로.
천천히 눈을 내리깐 민영은 부스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우천 시에 입는 점퍼들을 하나하나 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작업이 끝나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용지들을 그러모았다. 착착 포개어 원래 있던 자리 에 올려놓고 소파도 정리했다. 그동안 모든 신경은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세종에게 향했지만 민영은 모른 척했다. 지금 시점에서 모른 척하지 않아도 될 방법이 없다. 그러니 그냥 이대로……
뚜벅.
“엄마야!”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조그만 기척에도 과하게 놀랐다. 민영은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며 세종을 향해 안안테나를 세웠는데 갑자기 그가 움직이자 너무나 놀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는 자신을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민영은 소파에 널브러지며 공포에 질린 비명을 내질렸다.
“으아아악!”
그가 황당하다는 듯 내려다본다. 아, 쪽팔린다.
“뭐 하는거야? 지금.”
민영은 그가 멈춰 서서 그녀를 광녀 보듯 쳐다보자 얼굴을 붉혔다.
“그러게요. 제가 지금 뭐 하는 걸까요?”
“너, 뭐냐?”
진정으로 궁금하다는 듯 묻는 세종을 보며 민영은 더듬더듬, 대답했다.
“박 순경”
픽.
갑자기 그가 웃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짓는 것이다. 민영은 그의 입이 작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자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박 순경이야?”
“에?”
멍하게 입을 벌리는 그녀를 보며 그가 다시 물었다.
“너, 누구냐고.”
정말로 대답하고 싶었다. 그런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진정 모르겠다. 그가 갑자기 허리를 굽히더니 그녀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놀란 그녀는 더욱 움츠러들며 긴장했다.
“박순경. 너, 나 알지?”
민영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 넌 분명히 날 알고 있었어.”
아니야. 아니라고. 난 네 고교 동창도 아니고, 널 짝사랑하던 둔녀도 아니야. 그냥 기억하지 마. 제발 날 기억하지 말라고!
공포에 질린 그녀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던 그가 잔뜩 인상을 쓴다.
“분명히 어디서 본 얼굴인데…….:
“그, 그럴 리가…….“
그때였다.
쾅!
사무실 문이 세차게 열리더니 김 경장이 뛰어들어 왔다.
“경사님! 어Ⅹ施?박순경이…… 어?”
혁혁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서는 김 경장은 갑자기 입을 쩍 벌리고 말을 멈추었다.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민영과 그녀를 덮치다시피 하고 있는 세종.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그 장면이었다.
눈으로 본 것이 뇌를 스치며 결론에 도달하는 데는 채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 지금……둘이 사귀어요?”
그 순간, 세종이 오뚝이처럼 재빠르게 몸을 바로 세우고 민영도 용수철이 튕겨 올라오듯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외쳤다. 동시에!
“제정신이야!”
“미쳤어요!”
두 사람의 격렬한 반응에 김 경장이 잠시 황당한 듯 쳐다보더니 껄껄 웃었다.
“물론 아니겠죠. 만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사귀겠어요? 아닌가? 요즘은 하룻밤 만에 만리장성도 쌓는다는데 …….“
“쓸데없는 소리 말고 용건이나 말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세종이 거칠게 명령하자 김 경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난 또 박 순경이 없어졌다기에 놀라서 경사님께 보고하려고 했죠. 최 경사님이 박 순경이 여차하면 도망갈 수도 있는 도망갔나 싶었거든요.”
김 경장의 말에 민영이 입을 딱 벌리는 것과 달리 세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충분히 그럴 위인이지.”
그가 그녀를 쳐다본다. 민영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젯밤 도망친 전적이 있으니 발뺌도 못하겠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식으로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최 경사도 알고 있다. 다만, 요 근래 들어 그녀가 몹시 힘들어하니까 그런 생각까지 잠깐 한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한다.
“잘못 아셨어요. 일하다가 순직하는 한이 있어도 내 할 일은 하는 사람 이에요.”
민영은 시큰등하게 내뱉고 문을 향해 걸었다.
“박 순경, 어디 가?”
김 경장이 묻자 민영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화장실 갑니다.”
그리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문을 열고 아침 햇살 속으로 걸어 나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
민영이 나가자 김경장이 물었다. 세종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김 경장이 다시 물었다
“두 사람이 여기서 같이 밤 샜어요?”
세종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김 경장을 노려보았다.
“내가 왜?”
동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야 모르죠.”
세종은 동운을 일별하고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동운이 다시 성가시게 달라붙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왜 그런 포즈로 있었냐고요.”
세종은 흠칫 고개를 들고 동운을 향해 사납게 물었다.
“그런 포즈라니? 어떤 포즈?”
“아까 그 자세요. 박 순경은 저기 소파에 누워 있고 강 경사님은 그 위를 덮치듯이 …….“
“덮치긴 누가 덮쳐!”
버럭 소리를 지론 세종은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씨근덕거렸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저런 이상한 여자를 덮쳐? 엉!”
코까지 벌름거리며 흥분하는 세종의 기세에 동운은 재빨리 뒤로 물러 섰다
“아니면 됐죠 뭐. 하하하. 그런데 그렇게 이상한 여자는 아니던데……“
“뭐?”
찌릿 노려보는 세종에게 동운은 특유의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작년에 순경으로 임용돼서 표창장까지 받았던데요? 시장 와이프 구해 줘서요. 그리고 근면 성실하기로는 그 일대 파출소와 경찰서에서 알아준답니다. 생긴게 딱 선하게 생겼잖습니까. 예쁜 건 아니지만 귀엽게 생긴게, 확 내 스탈인데.”
“뭐? 귀엽게 생겨?”
세종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동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귀엽잖아요. 하는 짓도 귀엽던데. 요 며칠 전경들 데리고 이것저것 교육시키는 걸 보니까 웃기도 잘하고 유머도 많더라고요. 성격 하나는 진짜 좋아요. 게다가 터프하기까지. 하하하.”
“요즘은 귀엽다는 의미가 4차원과 일맥상통하는 건가?”
“예?”
무슨 말이냐는 듯 묻는 동운에게 세종은 손을 휘저었다.
“됐어. 가서 순찰일지나 좀 가져와.”
“예써!”
장난스럽게 거수경례를 하는 동운을 보며 세종은 이맛살을 찌뿌렸다.
뭐? 귀여워? 누가? 그 4차원이?
‘야!’
갑자기 자신을 향해 소리를 지르던 그녀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하극상에 대한 응분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세종은 소파를 슬쩍 쳐다보았다. 소리는 지가 질러놓고 잔뜩 겁에 질려서 몸을 움츠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젠장, 귀엽다고? 그 여자가?
미쳤군. 미쳤어!
치익, 치익.
쪼로록.
높은 곳에 않아 따가운 해에 정통으로 맞서며 고생하는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119에서 운영하는 수상안전구조대원이 음료수를 가져다 주었다. 먹는 건 절대 사양하지 않는 민영은 음료수를 ‘쪼오옥’ 소리가 나도록 빨아먹다가 갑자기 무전기가 칙칙거리자 서둘러 손을 뻗었다.
[망루 3호 응답하라. 망루 3호.]
“본부. 여기는 망투 3호. 말하라.”
[망루 3호, 교체 대원 출발했다. 교대 요망.]
“오케이. 접수 완료.”
민영은 꽤활한 목소리로 대답하고 무전기를 내려 놓았다. 이글거리는 태양 빛을 피해 숨을 좀 돌릴 생각을하니 피로가 일시에 날아가는 듯 하다. 아침부터 망망대(해수욕을 즐기는 시민의 안전을 살피기 위해 모래사장에 세워진 높은 사다리 형태의 전망대)에 올라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눈알이 빠지게 파도만 노려보았다. 아침나절에는 잠시 파도가 높아 입수를 금지하는 바람에 또 누가 혹시 바다로 뛰어들까 봐 눈알을 부라렸고 나중에는 다시 입수 금지가 풀려 혹시 안전 경계선을 넘어가는 사람이 있나 살피느라 한시도 눈을 쉬지 못했다.
때는 바야흐로 바캉스의 계절이었다. 이른 더위에 해수욕장은 조기 개장을 했고 그 덕분에 해수욕장 안전요원들의 고생도 일찍 시작되었다.
민영은 아까 다 마신 음료수 병을 아쉬운 얼굴로 흔들어 보았다.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마르다. 그도 그럴 것이 살을 태우듯 뜨거운 햇볕 아래 한 시간도 아니고 무려 네 시간을 앉아 있었으니 철인이라도 ‘나 죽었소’ 하고 나자빠질 판이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음료수 병을 놓아두고 민영은 다시 바다로 눈길을 돌렸다. 점심때가 되어서 그런지 바다에는 사람들이 꽤 줄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이럴 때 일수록 더 꼼꼼히 살펴야 했다. 간혹, 점심 거하게 먹고 무작정 바다로 뛰어드는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또 꼬르륵거리며 죽네, 사네 할 둔한 사람이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했다.
민영은 하얀 파독 부서지는 해안선을 따라 그녀가 맡은 구역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가끔 ‘삐익, 삐이익’ 호르라기 소리가 들렸지만 가까운 곳은 아니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망루 3호의 관할 구역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사고는 없었다. 아마, 본격적인 휴가철이 되면 이곳도 몸살을 앓을 것이다. 하지만 해수욕장이 개장하고 일주일이 지난 오늘까지는 주민들이나 가까운 지역 사람들이 방문하는 것이 다인지라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러니 사건, 사고가 일어날 확률도 적다.
삐익! 삐이익!
순간, 민영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는 호루라기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이 방금 스치고 지나온 곳에서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쌍안경을 눈에 대고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세종?
안전대원의 상징인 오렌지색 티셔츠에 남색 수영복을 입고 마찬가지로 오렌지색 모자를 쓴 강세종 경사가 보였다.
‘아니, 저 인간이 왜 저기서 저러고 있어? 제트보트 타고 바다를 누비고 있어야 할 인간이……?’
강세종에게 덤빈 후 받게 된 대가는 서러움 그 자체였다. 고교 동창이지만 경사와 순경이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로 인해 그녀가 감수해야 할 서러움은 여기저기서 시시때때로 밀려왔다. 강세종은 귀찮고 성가신 일은 전부 그녀를 시켰고, 조금만 실수를 해도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핀잔을 주기 일쑤였댜. 오죽했으면 무언가 실수라도 할라 치면 강세종의 힐난하는 눈초리가 먼저 떠오를까.
자꾸만 태클을 거는 사람 앞에서는 실수가 더 많아지는 것처럼 민영도 지금 그런 지경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세종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다 보니 해변 생활이 더 피곤했다.
민영은 자신의 가혹한 처지를 생각하며 한숨을 푹 내쉬다가 다시 그를 향해 초점을 맞추었다.
무슨 일인지 그가 누군가를 향해 호루라기를 불러 대고 있었다. 민영은 그가 쳐다보고 있는 방향을 향해 쌍안경을 돌렸다.
“오호!”
입에서 절로 감탄이 새어 나온다. 저 인간이 뭘 보고 저러나? 하는 마음에 그 방향으로 돌렸는데 기막힌 장면이 포착되었다. 여자인 그녀가 보기에도 몸매가 끝내 주는 여자가 있었다. 소위 글래머라고 불리는 여자였다. 아슬아슬한 비키니 상의 위로 가슴은 터질 듯 비어져 나왔고 삼각 팬티는 골반에 겨우 걸쳐져 있는 모습이었다. 손바닥만 한 팬티 옆쪽에 붙은 가는 끈을 살짝 잡아당기기만 하도 팬티가 쑥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여자의 각선미를 감탄하며 침을 흘리던 민영은 순간, 렌즈에 강세종의 모습이 잡히자 화들짝 놀랐다.
“아니, 저 인간이 왜……헉!”
민영은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쌍안경을 떨어뜨릴 뻔했다. 가까스로 쌍안경을 고쳐 잡은 그녀는 서둘러 다시 그쪽으로 렌즈를 돌렸다.
이제 막 강세종이 쭉쭉빵빵 여자의 팔을 잡고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세종이 호루라기를 분 것도 저 여자를 향해서인 듯하다. 그런데 왜 저러지? 보기엔 별 잘못한 것도 없어 보이는데 이런 젠장!
순간, 민영의 눈에도 보였다. 여자는 손에 맥주 캔을 들고 있었다.
“저런 개념을 상실한 왕가슴 같으니라고!”
민영은 울분을 토해 냈다. 아니, 어떤 미친 인간이 수영하면서 술을 처먹어! 그것도 술을 가지고 아예 물속으로 들어가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먼. 환장을 했어! 아니, 음주 수영은 자살 행위라는 것도 모르나!”
쯧쯧, 혀를 차며 계속 그들을 주시했다. 세종이 물 밖으로 끌어내려고 팔을 당겼지만 여자는 자꾸만 안 가려고 버티고 있었다. 아예 고래고래 고함까지 지른다.
“야!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 지랄이냐? 내가 너 정도 몸매만 되면 난 백 사장에 누워서 오는 남자, 가는 남자 눈요기나 실컷 시켜 주겠다. 물속엔 왜 들어가? 그 좋은 몸매 안 보이게! 야아, 넌 진짜 복 받은겨. 누군 그런 몸 만들려고 일 년, 열두 달 헬스클럽 다녀도 안 만들어지는 몸매를 가졌으면서 왜 죽으려고 용을 쓰냐? 저, 저거 봐라. 저거 봐. 아니, 뭘 잘했다고 소리를 질러? 야! 강세종. 확 밀어 버려. 힘 뒀다 뭐에 써! 걍 어깨에 메고 나와서 모래사장에 꽂아 버리라니까.”
그 순간 정말로 그녀의 말대로 됐다. 여자가 자꾸만 말을 듣지 않자 세종이 허리를 굽혀 여자를 강제로 제 어깨에 걸렸다. 투둑 솟아오른 단단한 어깨에 왕가슴을 매달고 걷기 시작한다. 민영은 그 광경에 입을 딱 벌렸다. 튼튼한 어깨에 여자의 섹시한 몸을 매달고 걸으니까 진짜 야한 동영상이라도 보는 듯 착각이 들었다.
무람한 응의 남자 주인공이 섹시한 여자를 들쳐 메고 물길을 걷는 장면…….
“저것들이 어디서 에로 영화를 찍고 난리야! 아, 경찰들 뭐 하나? 저것 들 확 경범죄로 처넣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내가 경찰이지. 참.
민영은 자신의 혼잣말에 머쓱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다 또 문득 놀란 눈을 부릅떴다. 세종이 걸어 나와 여자를 모래사장에 다소 거칠게 내려 놓고 있었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여자의 친구쯤으로 보이는 또 다른 여자가 뛰어왔다. 그리고 상황은 마무리되기 시작했다. 세종이 친구를 향해 무언가 설명을 하고, 아니, 멀리서 보기에도 설교로 보인다. 친구는 연방 죄송하다는 듯 머리를 조아렸다. 또 다른친구들이 나타나 술 취한 글래머를 부축하고 가자 그제야 세종이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집어서 머리에 쓰는 것이 보였다.
민영은 자리에 털씩 주저앉으며 이죽거렸다.
“지가 터미네이터야? 뭐야? 아니, 왜 여자를 어깨에 메고 난리야? 성희롱으로 고발당하면 어쩌려고.”
자칫 잘못 여자가 고깝게 여겨 경찰이 안전을 핑계로 자신을 유린했다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공무원이 괜히 공무원인가? 공공연하게 아무일 없이 살아야 하는 게 바로 공무원이다. 괜히 그런 지저분한 문제에 발목 잡히면 경찰 인생 쫑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인터넷에 강세종이 떴다는 지연의 말에 그 다음날 바로 인터넷의 바다를 헤엄치다. 헤엄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강세종‘ 하고 치니까 네버 뉴스가 맨 위에 나타났었다. 해경이 전복된 선박에서 생존자를 구해 냈다는 칭찬과 함께 강세종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려 있었다.
뭐래더라? 악천후에서 자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위험한 물속으로 뛰어든 훌륭한 해경특수기동대라고 했었나?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솔직히 그 뉴스를 보고 든 생각은 ‘역시 강세종이‘였다. 고딩때도 그랬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약하고 힘없는 놈 괴롭히는 건 못 참는 놈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해양경찰이 된 건 아주 당연한 수순인 것 같다.
“오지랍 넓은건 예나 지금이나…….“
“원래 아시는 사이세요?”
헉!
민영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함할 듯 놀라 높은 망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리야?’ 하며 놀란 눈을 두리번거리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진짜 놀랐다. 재수 없는 이재섭이다!
민영이 놀라 자빠질 듯 비틀거리는 것과 달리 이재섭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야, 야!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엉! 언제부터 있었냐고!”
흥분하니까 목소리까지 떨린다. 원래 아는 사이냐고 묻는 걸 보니 마지막 말은 분명히 들었고, 그럼 나 혼자 중얼거리던 그 말들도 다 들은 건가? ‘강세종‘ 어쩌고 하는 거랑, 몸매가 어쩌니 저쩌니 한 거랑……그 모든 실없는 혼잣말을 쟤가 들었을까?
“어떤거 말씀입니까? 개념 상실한 왕가슴 어쩌고 한 거요? 아니면 ‘강세종, 밀어 버려!‘ 한 거요? 그것도 아니면 성희롱 어찌고 한 거,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저런! 아, 씨! 다 들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아, 난 이제 전경한테도 존경받지 못하는 순경이 되어 버렸다.
“야! 넌 왔으면 왔다고 기척이라도 할 것이지! 내가 그렇게 만만히! 보여? 엉! 어디서 하늘 같은 상관의 혼잣말을 엿들어! 너 진짜 더러운 맛 한 번 볼래?”
말하면서도 이건 아니지 싶었다. 어르고 달래서 내가 정말로 그런 사람은 아니니까 다른 전경들한테 소문내지 말라고 부탁해도 시원찮을 판에 버럭소리가 웬일인가.
“너, 너 왜 왔어!”
이도 저도 안 되니까 성질만 뻗친다. 우선 이 자식이 왜 내 망루대 밑에 서 있는지부터 알아했다.
“교대하러 왔습니다.”
아, 교대. 그래, 교대 시간이었다. 쪽팔린다. 난 진정 저 뜨거은 모래밭에 무덤이라도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모래밭에 무덤 만들때도 관 짜나?
민영은 더 이상의 우세스러움을 피하기 위해 황급히 사다리를 내려왔다.
“수고해.”
그리고 서둘러 이재섭의 눈길을 피해 발을 푹푹 파먹는 모래밭을 어기적어기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재섭은 아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민영의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귀엽다.’
진짜 귀여웠다. 안전교육이랍시고 전경을 모아 놓고 인명구조시 어떻게 해야 한다면서 잘난 척을 할 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요 며칠 동안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는 동안에도 내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오늘은 더했다. 높은 망루대에 앉아서 쌍안경 들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폼이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동그란 얼굴에 오목조목하게 생긴 얼굴은 예쁘고 섹시하다기보다 귀엽다. 가녀리기보다는 튼튼해 보이는 다소 통통한 몸매도 귀여웠다.
재성은 당황스러웠다. 박민영 순경은 절대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입대하기 직전까지 만났던 영은은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날아갈 듯 가녀린 타입이었고, 그보다 더 전에 만났던 회영은 육감적인 몸매에 성격까지 화끈한 여자였다. 그리고 또 그전에 만났던 여자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박민영 순경처럼 덜렁거리고 터프하지는 않았다.
아, 물론 터프하다는 건 순전히 순경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그랬다. 순수하게 여자로만 본다면…앙증맞고 순진하고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재성은 잠시 잠깐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었다.
“오케이, 박민영. 나, 너한테 작업 들어간다. 각오해.”
재섭은 음흉하면서도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입에 살짝 가져다 땐 뒤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쭉 뻗었다.
‘이 시대의 확실한 킹카, 나, 이재섭이 작업 들어가면 안 넘어오는 여자 없다. 그래서 박민영, 너도 나한테 넘어오는 건 시간문제야!‘
누가 자기에게 손가락을 들이대는지도 모르고 민영은 곧장 경찰서로 향했다. 조금 전의 민망함은 벌써 잊어버리고 그녀의 머릿속은 ‘오늘 점심은 뭘 먹나?’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조금은 다른 생각도 하고 있었다. 생각이라기보다는 장면? 그래, 장면이다. 아까 봤던 세종과 글래머의 모습이 눈앞에서 자꾸 아른거린다,
사실, 그게 딱 여자들 가슴 졸이게 만들 장면이 아닌가. 근육 빵빵한 남자가 나를 가뿐히 들어 올리는 상상. 그건 모든 여자의 로망일 것이다.
아, 물론 아니라고 발뺌하는 여자도 있겠지만 속으로는 아닐걸? 원할 걸? 고상한 척해도 덤비면 넘어가는 게 여자 아닌가. 물론 정말 아니다 싶은 남자는 빼고.
민영은 순전히 혼자만의 토론 끝에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렸다. 그게 순 자기만의 생각이란 건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다. 여자를 모아 놓고 토론할 거 아닌데 내가 무슨 결론인들 내면 어떠랴.
“자식, 멋있긴 했어.”
그동안 강세종과는 만나면 으르렁 대느라 서로를 냉정히 판단할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첫 만남이 비틀려서 그랬는지 그는 늘 그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고, 그녀는 또 그런 그를 피하거나 맞대응하느라 바빴다. 해수욕장 개장 전 나흘과 개장 후 일주일을 합쳐서 총 11일 동안 두 사람이 한 거라고는 싸우고 도망 다니고 째려보는 것밖에 없었다.
부모 죽인 원수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두 사람도 알지 못했다. 경찰서 사람들 전부 그게 바로 ‘앙숙’이라서 그런단다. 사실, 알고 보면 별일 아니었다. 여름경찰서에서 처음 만난 날, 그가 그녀를 요러고 아래로 내려다보지 않았다면, 무작정 상관이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면 그녀도 그에게 이렇게까지 나쁜 감정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녀도 일부러 약도를 엉터리로 그려 그를 골탕 먹이지 않아도 됐을테니니 둘 사이가 앙숙이 될 일이 없었다.
고로! 이 모든 원흉은 바로 강세종이란 결론이 난다.
“그래, 자식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왜 잠자는 원숭이의 코털을 건드리느냐고.”
못마땅한 듯 이죽거리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민영은 다시 나가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꼈다. 사무실에는 강세종, 혼자뿐이었다. 엿 됐다.
“어, 다른 사람들은요?”
괜히 어색해져 아무 별일도 없는 다른 사람들의 행방을 찾았다. 다들 어디 갔겠는가. 점심 먹으러 간 거 아니면 근무 나갔겠지.
그가 인상을 쓰며 쳐다본다. 그딴 걸 왜 물어보냐는 식이다.
인마! 그냥 아무렇게나 대꾸해 주면 덧나나?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오만인상은!
민영은 강세종에게 대답을 기대한 자신을 탓하며 책상으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할 일도 없으면서 괜히 이것저것을 꺼냈다가 집어넣었다.
‘아, 나지금 뭐 하는거지? 밥 먹으러 왔잖아.’
괜히 헛손질을 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녀는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그가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점심 먹었나?”
나? 나한테 묻는 거야?
민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그녀가 모르는 새에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하려는 제스처였다.
“어딜봐? 너 말이야, 박순경.”
저건 말끝마다 순경이야! 그래, 나 순경이다. 그래서 뭐?
또 열이 확 차올라 민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멈을 젖히더니 의자에 떡하니 기대앉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 하나만 묻자.”
‘뭔데?’ 하는 얼굴로 그의 눈을 마주 보자 다시 묻는다.
“넌 왜 내가 널 부를 때마다 떨떠름한 표정이야?”
진짜 몰라서 묻는 것 같았다. 민영은 코를 벌름거리며 콧김이 새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뭐라고 할 말이 없다. ‘네가 나더러 순경, 순경 할 때마다 기분 나빠!’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순경더러 순경이라는데 뭐.
“그런 적 없는데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할 말 못하는 심정이 어떤지 저 인간은 알까?
“솔직한 성격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군. 기회를 줘도 못 잡고.”
민영은 사납게 눈을 치떴다.
저게 지금 나하고 한판 하자는 거야? 뭐야?
“무슨 말입니까?”
“나한테 불만 있으면 말해 보라고 기회 주는 거야.”
봤다! 난 봤다.
민영은 그가 말끝에 입 모양으로만 ‘맹꽁아‘ 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비록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맹꽁‘이라고 했다. 맹꽁? 맹꼬옹!
그녀가 정말 고쳐야 하는 게 하나 있었다. 욱하는 성질머리. 성질이 확 뻗치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는 것 없이, 이것저것 재는 것 없이 폭발하는 거. 뒷감당은 할 수도 없으면서 그저 저지르고 보는 것. 그게 바로 그녀의 최대 약점이었다, 그리고 그 약점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야! 강세종!”
콰당.
의자 등받이가 젖혀지도록 한껏 몸을 기대고 있던 강세종은 민영이 부르르 몸을 떨며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민영도 너무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의자는 뒤집어지고 그 옆에 우람한 강세종이 나뒹굴고 있었다.
“다, 다쳤어?”
“반말하지 마!”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다. 민영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너무 경황이 없어서 자신이 반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 죄송. 다쳤어요?”
그런데 진짜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웃음이 난다. 아, 진짜 참아야 하는데. 여기서 웃으면 진짜 저 인간이 날 죽이려고 들 텐데. 참을 수가 없다.
“큭”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용을 썼지만 한번 솟아오론 웃음보따리는 입술을 비집고 결국 터져 나왔다.
“푸핫! 크크크큭. 쿡쿡. 큭큭큭“
웃음을 참으려다 보니 마치 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세종도 처음엔 ‘저 여자가 우나?’ 하는 얼굴로 쳐다보다가 그녀가 웃는 것을 알고 얼굴이 시뻘게졌다.
“박순겨영!”
천둥 같은 고함 소리가 경찰서 지붕을 날려 버릴 듯 울렸다. 그녀는 고막을 찢을 듯 달려드는 고함 소리를 듣는 순간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런데……
“윽”
이번엔 딸꾹질이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윽. 윽”
딸꾹질이 내 의지로 멈춰지는 건 아니잖아!
‘경사님하고 같이 밥 안 먹었어? 그럼 경사님, 밥
C었겠네. 혼자선 밥 안드시는데.’
민영은 앞서 걷고 있는 세종의 등을 흘깃 쳐다보았다. 사무실에서 그 난리를 치고 난 후 그녀는 줄행랑이라도 치듯 서둘러 경찰서를 나와 자주 가는 해장국집으로 가서 거하게 점심을 해결했다. 밥을 다 먹어갈 즈음, 최 경사님의 연락을 받았다. 급히 진지한과 교대를 하라는 연락이었다. 수상오토바이를 타고 순찰 중이던 조용언이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는 바람에 진지한이 조용언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니 민영에게 대신 수상오토바이를 타라는 지시였다. 게다가 조용언 대신이라는 세종과 함께.
다존 사람들은 전부 다른 일들이 있었고 근무를 뺄 수 있는 사람은 세종과 민영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세종과 함께 수상오토바이가 정박되어 있는 장소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혼자서 밥을 안 먹어? 나, 참. 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하네.‘
급하게 경찰서로 들어서는 그녀가 혼자란 것을 알고 김 경장이 ‘경사님은?’ 하고 물었다. 당연히 그녀는 모른다고 했고 김 경사는 ‘그럼 경사님과 같이 밥 먹으러 간 거 아니었어?’라고 물었다. 물론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인간은 잘 모르겠고, 난 나 혼자 밥 먹으러 갔다고 했더니 김 경장의 눈이 비난하는 투로 좁아졌다.
참나, 그럼 어쩌라고? 그리고 내가 그 인간이 혼자 밥 못 먹는 거, 알았나?
‘점심 먹었나?‘
그래서였나 보다. 갑자기 밥 먹었냐고 물어봤던 이유가. 아까 사무실에서 그가 갑자기 그렇게 묻는 바람에 그 사딜이 났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혼자 밥 못 먹어서 나보고 같이 먹자는 거였네.
민영은 조금 어이없는 눈길로 저만치 앞서 가는 세종을 쳐다보았다.
“덩치는 산만 해가지고 밥도 혼자 못 먹어? 아침도 안 먹었다면서 점심까지 못먹었으니 배 좀 고프겠네.”
고소하다는 듯 웃으며 중얼거렸지만 가슴 한쪽에서는 조금 안 됐다는 동정심이 일었다.
‘아, 난 이래서 안 돼. 이렇게 마음이 좋아서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려고.’
그때였다. 민영은 길 한쪽에 커다란 고무 대야를 내려놓고 덮고 있던 보자기를 걷어 내는 할머니를 보았다. 김밥이었다. 그녀는 벌써 꽤 멀리 걸어가고 있는 세종을 한 번 보고, 또 장사 준비를 시작하는 할머니를 한 번 보았다.
‘그래. 까짓 내가 인심 썼다. 비록 우리가 좋은 사이는 아니지만 내가 너 보다 그릇이 크다는 걸 보여 주마. 난 원수한테도 인심을 베푼단 말이지. 캬! 난 부처다, 부처.’
민영은 스스로의 높은 덕에 갈채를 보내며 할머니에게 걸어갔다.
“할머니, 김밥 한 줄에 얼마예요?”
“응? 아, 김밥? 한 줄에 이천 원. 한 줄만 줘?”
“아뇨. 두 줄 주세요.”
“아이고, 그래. 두줄은 먹어야 힘을 쓰지. 덩치도 큰데.”
아, 진짜! 내가 덩치가 뭐가 크다고! 어디 가서 덩치 크다는 말은 안 듣는데.
그녀의 불편한 속이 드러났는지 할머니가 웃었다.
“에이, 뚱뚱하다는 말이 아녀. 아가씨가 훤칠하니 키도 크고 시원하게 생겨서 그래.”
시원하게 생겼다는 뜻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뚱뚱하다는 말은 아니라는 말씀에 그녀의 얼굴은 다시 펴졌다.
민영은 할머니가 주섬주섬 검은 봉지를 꺼내 김밥 두 줄을 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할머니, 여기서 장사하시면 안 되는데. 저번에도 어떤 대학생이 여기서 샌드위치 팔다가 해수욕장 운영요원한테 쫓겨났어요. 그러니까……“
“할머니!”
민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딘가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둘렸다. 그녀와 할머니의 눈길이 동시에 화단 너머로 향했다. 붉은색 조끼를 입은 해수욕장 운영요원이 빨간색 경광봉(조심하거나 삼가도록 미리 주의를 줄 때 사용하는 빛을 내는 방망이)을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거보세요, 할머니. 어서 정리하세요.”
“아유, 다른데 가도 마찬가지여.“
“저기, 노점상들 모여 있는데 있잖아요.”
“거긴 벌써 임자들이 다 들어차 있지. 거기 자리가 있으면 내가 이리 왔겠어?”
“그럼 저리로 가세요. 저기엔……“
“거긴 자릿세 달라고 해서 안 돼. 김밥 몇 줄 팔아서 자릿세 내고 나면 뭐 남누.”
민영은 난감했다. 하긴, 해수욕장이 개장하면 여기저기서 온통 전쟁이다. 여름 한철 붐비는 동네다 보니 그 짧은 시간에 장사 좀 해 보려고 지역주민들뿐 아니라 이 동네, 저 동네 할 것 없이 죄다 이리로 몰려온다. 그러니 장소는 협소하고 장사를 하려는 사람은 많다. 해수욕장 운영팀에 서는 ‘다시 찾고 싶은 해수욕장’을 만들기 위해 되도록 노점상을 근절하고 단정하고 깨끗한 해변을 만드는 데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그러니 할머니처럼 자릿세조차 낼 형편이 아니면 매번 이렇게 쫓겨 다녀야 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운영요원이 버럭 소리를 절렀다.
“할머니! 여기서 또 이러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아까 저기서도 안 된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여기서 또 이러고 계시네!”
“아이고, 아저씨. 좀 봐주구려, 딱 두 시간만 팔고 갈게. 얼마 말아오지도 못해서 금방 팔 수 있어. 아까 점심시간에 좀 봐줬으면 벌써 팔고 갔지.”
“아니, 이 할머니가 근데! 그래서 내가 안 봐줘서 지금 이러고 있단 말이야! 뭐야! 안 된다고 한번 말했으면 그런 줄 알아야지, 할머니 같은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그 사람들 다 봐주다가는 해수욕장이 쓰레기가 될 게 뻔한데! 아! 빨리 챙겨요. 어서!”
그러더니 김밥이 든 대야를 거칠게 발로 찬다. 민영은 인상을 썼다. 좀 너무한다 싶었다. 자기 어머니뻘은 된 할대니한테 말끝마다 반말하는 것도 모자라 먹는 음식이 든 대야를 발로 차다니!
“아저씨, 내 오늘만 팔고 안 오께. 응? 이 김밥 오눌 안 팔면 쉬어서 못 먹어. 서울 사는 우리 손녀가 방학했다고 내일 온다는데 오늘 이거 팔아서 장이라도 봐야 한단 말이지, 그러니까……“
“아, 진짜! 할머니,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먹어! 시끄럽고, 어서 빨리 챙기라니까!”
또! 또 발로 찬다. 민영은 너무나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어떤 장면이 생각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시장에서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던 엄마가 떠올랐다. 그 알량한 붕어빵 장사를 하면서도 자릿세니 뭐니 번듯한 가게를 가진 사람들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 그 앞자리 하나 차지해 보려고 애를 쓰는 엄마가 지금 눈앞에서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는 할머니와 오버랩 되었다.
“빨리 챙겨요! 빨리!”
“아저씨!“
결국 참지 못했다. 민영은 그때까지 몇 걸음 물러나 방관하는 자세를 버리고 힘차게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이 인간, 아직 사태 파악을 못하고 그녀의 등장을 얼씨구나 반긴다.
“아, 여기 경찰도 있었네. 순경님, 여기 할머니 좀 어떻게 해 봐요. 여기서 장사하면 안 된다고 말을 했는데도 도저히 말을 안 들어먹어! 말을!!”
“거, 말 좀 조심합시다!”
민영의 사나운 말투에 운영요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멍하게 쳐다보는 눈길이 바보 같았다.
“지, 지금 나보고 한 말이요?”
진짜 몰라서 묻는다는 듯 아저씨의 얼굴은 맹했다. 민영은 씩씩거리며 본격적으로 할머니 편에 섰다.
“아저씨한테 못해도 어머니뻘은 되는 할머닌데 말 좀 부드럽게 하면 혀에 바늘이라도 돋는대요? 아니, 왜 그렇게 험악하게 인상을 써요? 그리고 이것도 다 먹는 음식인데 발로 차면 죄받아요! 그냥 좋은말로……“
“좋은 말로 했지!'”
드디어 상황 파악이 끝난 운영요원은 할머니에게서 방향을 돌어 그녀룰 향해 죽일 듯이 덤비기 시작했다.
“아니, 경찰이라는 사람이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지금! 엉! 말 좀 조심하라고? 내가 지금 말조심하게 생겼어! 아까부터 이 할머니가 내가 가는 데 마다 앞서 와서 신경질 나게 하는데 말이 좋게 나가게 생겼냐고! 아, 이 순경, 이거 홀딱 깨네. 어머니뻘? 난 이렇게 말귀 못 알아먹는 어머니 없어!”
“뭐라고요! 말 다했어요? 홀딱 깨? 진짜 홀딱 깨는 거 한번 보여 줘? 내가 아저씨한테 반말하면 좋겠어? 아저씬 뭐, 엄마도 없어? 아저씨 어머니가 이걸 보면 뭐라고 하겠어! 엉!“
“뭐,이런 싸가지 없는게 다있어! 경찰이면 다야? 어린게 누구한테 바락바락 기어올라! 정당한 책임을 다하는 선량한 시민한테 경찰이 이래도 돼? 생긴 건 야리야리하게 생겨가지고 성질은 거지발싸개보다 못하잖아“
“뭐라고요! 아저씨, 말 다했어!”
야리야리하게 생겼다는 말에 잠시 기분이 풀리려 했지만 그다음에 나온 거지발싸개라는 말에서 홱 돌아 버렸다. 드디어 분을 참지 못한 민영이 앞으로 홱 다가서자 아저씨도 지지 않고 성큼 다가왔다. 두 사람은 당장에라도 폭력을 휘두를 듯 불꽃을 튀기며 이를 갈았다. 그때였다.
“박민영!”
민영은 자신을 부르는 세종의 목소리도 무시하고 운영요원과 당장에라도 한판 붙을 듯 으르렁거렸다.
“박민영 순경!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순경이라는 단어가 들리는 순간, 민영의 의식 사이로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직책이라는 것이 참 웃긴다. 보통 시민일 때는 무슨 짓을 해도 거리낄 것이 없는데 대한민국 경찰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이 ‘순경’이라는 자각이 드는 순간, 민영은 깨갱하고 꼬리를 내렸다.
운영요원에게 향했던 거친 눈길을 내리고 험악한 표정으로 서 있는 세종을 쳐다보았다.
“뒤로 세 발자국 물러서!”
성난 목소리가 명령했다. 민영은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그걸 지켜보던 운영요원이 신이 난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나 참, 높으신 분 오니까 이제야 제정신을 찾나 보지? 순경 주제에 말이야. 너, 어디 소속이야?”
“소속은 알아서 뭐 하실 겁니까?”
자기편인 줄 알았던 세종이 무뚝뚝하게 묻자 운영요원이 다시 헷갈린 다는 표정을 짓는다. 민영도 헷갈렸다.
강세종, 너 누구 편이냐?
“순경 주제? 순경 주체가 어떤 주제입니까? 어디 소속이냐고요? 내 직속 부합니다.”
“아니, 이 여자…… 이 순경이 먼저 나한테 반말을 하고, 또 이 할머니 편을 들면서……“
“이번 해수욕장 운영위원회에서 내건 슬로건이 친절. 봉사, 협동, 단결인 걸로 아는데요?”
말끝을 똑똑 잘라 먹어 가며 세종은 운영요원의 기를 팍팍 누르고 있었다. 세종의 눈길이 김밥이 든 대야와 풀 죽은 할머니, 그리고 아직도 헷갈린다는 듯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민영을 차례로 ?었다. 그러더니.
“이건 뭐, 슬로건 중에 하나도 지키는 게 없구먼. 친절도 안 돼, 봉사도 안 돼. 협동, 단결? 지키는 게 Ⅴ歐?”
운영요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렸다. 확실히, 세종의 카리스마에 주눅이 든 것 같았다.
‘강세종, 파이팅!‘
세종이 확실히 자신의 편이라는 확신이 든 민영은 쾌재를 부르며 힘껏 그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엄밀히 말하면 고, 공무집행방해라고요, 난 지금 여기 해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용기를 낸 아저씨가 다시 반격을 시도했지만 어김없이 세종의 방어에 밀려났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지금 아저씨는 현재 해양경찰 소속 안전요원의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예? 제가요?”
자신이 공무집행 방해를 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운영요원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박순경, 앞으로“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민영은 화들짝 놀라 앞으로 나섰다.
“네?”
대답이 시원찮았는지 그가 다시 그녀를 째려보았다.
“박 순경이 먼저 할머니가 여기서 장사하시는 걸 알고 좋은 말로 다른 장소로 옮기라고 권유하고 있었을텐데? 내가 그렇게 지시하지 않았나?”
엉? 네가? 네가 언제 나한테 그런 지시했어? 아, 좋아. 어쨌든 그랬다 치고.
“아, 예. 그렇습니다.”
아, 진짜. 미리 짜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손발이 착착 맞냐? 내가 천재나? 네가 천재냐? 우리 둘 다 천잰가?
“무슨 소립니까? 내가 아까 다 봤는데! 여기, 이 순경이 할머니한테서 김밥 두 줄 받고 돈까지 주는 걸 봤다고요.”
하! 그 아저씨, 눈도 밝다. 그런데 어쩌지? 다 봤다잖아.
민영은 세종을 흘끔거렸다.
“사실이야?”
“예?”
민영은 세종의 눈을 마주 보았다. 아주 잠깐 그의 한쪽 눈이 살짝 감겼다가 띠지는 것을 본 것도 같았다.
어, 이거 신호 같은데?
민영은 할머니를 돌아보았다. 할머니도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민영은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그를 보았다.
어! 이번엔 진짜 왔다. 분명히 그가 웡크 비슷한 것을 보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요. 그런 적 없는데요.”
시작이 어렵지, 시작만 하면 술술술. 이것이 바로 거짓말의 법칙이다.
“아뇨, 전 절대 그런 적 없어요. 누가 돈을 줘요? 나 참. 아저씨 눈이 너무 안좋은 거 아니에요? 이건, 할머니가 빨리 움직이시라고 들어드린 거라고요. 그죠, 할머니?”
손에 든 김밥까지 자랑스레 들어 보이며 민영은 할머니를 돌아보았다.
너무 오버했나? 할머니는 끌어들이지 말 걸 그랬나?
민영은 너무 거짓말에 심취해서 그만 할머니까지 이 거짓된 세상에 끌어들인 것을 곧바로 후회했다. 하지만.
“맞아, 순경 말이 맞아. 난 이 순경 한테 돈 안 받았어. 저 김밥도 순경이 내 짐이 무겁다고 들어준 거야.”
우와! 할머니 진짜 캡짱이시다! 손에 돈까지 쥐고 계시면서 눈 하나 깜짝 안 하시고 거짓말을 하신다.
“그, 그럼 손에 쥔 그 돈은 뭐예요!”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운영요원이 소리였다. 민영은 한 걸음 나서며 할머니를 옹호하려는데 할머니가 더 빨랐다.
“이거? 아까 저기서 판 거지. 왜? 이것도 뺏으려고?”
상황 종료
그 누가 말하지 않아도 이 싸움은 누구의 패로 끝났는지 분명했다. 운영요원이었던 아저씨는 괜한 화풀이를 하며 성질을 내다가 세종의 포스에 눌려 결국 뒤돌아서 쓸쓸한 퇴장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남은 건 세종과 할머니, 민영이었다.
세종이 민영을 사납게 노려보다가 할머니를 향해 공손히 말했다.
“여기서 장사하시는 건 안 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할머니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래, 그런 것 같구먼. 젊은 사람들 애먹이면서까지 장사를 해서야 쓰겠나“
힘없이 중얼거리는 할머니를 보며 민영은 가슴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방학이라고 놀러 온다는 손녀를 위해 맛있는 거라도 사 주시려고 김밥을 팔러 나오신건데 겨우 두 줄 팔고 되돌아가시게 생겼으니…
민영은 흐트러진 김밥을 다시 쌓고 보자기를 덮는 할머니의 옆에 쪼그려 않았다.
“할머니, 저기 가서 제가 말씀드릴 테니까 자릿세 내지 말고 그냥 파세요. 제가 말만 잘하면 자릿세 안 내도 될 거예요.”
자릿세를 대신 내줄 요량이었다. 아예 김밥을 다 사 주고 싶었지만 이 많은 김밥을 처리할 방법도 없으니 사 주지는 못하고 아예 자릿세를 대신 내주고 할머니가 김밥을 파시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권력 남용하지 마.”
민영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엄한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뭔 남용? 아니, 내가 남용할 권력이 어딨다고 저런 소릴 한대?
하지만 세종은 그녀가 세모꼴로 뜬 눈을 쳐다보지도 않고 할머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 경찰서 깃발 보이시죠?”
할머니가 세종이 가리키는 깃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어. 저기 펄럭이는 거?”
“예. 거기 가셔서 강세종 경사가 저녁 쏘는 거라고 말씀하세요. 이거 다 두고 가세요. 제가 거기 있는 전경한테 대신 계산해 놓으라고 할 테니 그렇게 하세요“
“이 많은걸?”
할머니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세종이 싱긋 웃었다. 민영은 순간, 입을 딱 벌렸다. 할대니를 위해 저녁을 쏜다는 핑계를 대며 김밥을 팔아 주는 것도 놀라운데 저런 표정까지.
저 자식도 저렇게 웃을 수 있네.
“안 많습니다. 경찰 넷에 전경 넷이 먹는 건데 이 정도는 먹어야죠. 장정 여덟이 배고플때는 소도 잡는다고 하잖습니까.”
“그야, 그렇지. 여기 이 순경도 같이 먹으면 총 아홉 명이구먼.”
민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사무실 인원이 전부 아홉인가?
“아님니다. 장정 여덟에 저 순경도 포함입니다. 장정 못지않게 먹거든요.”
아 씨!
“아, 하하하. 아이고, 잘 먹으면 좋지. 안 그래도 아가씨가 튼튼하게 생겼다 했어. 고마워요. 다른거, 맛있는거 먹어도 되는데 나 때문에 김밥으로 저녁을 때워 쥐서.”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할머니를 김밥과 함께 보내고 세종과 민영만 남았다.
“박 순경”
“네!”
목소리 심각하다. 즉각 대답하고 순하게 굴자.
민영은 잔뜩 긴장한 채 순순히 대답했다. 그런 그녀가 이상했는지 그가 슬쩍 돌아본다.
“지은 죄가 뭔지는 아나 보지?”
죄가 많아서 뭘 말해야 할지 몰라 가만있었다. 그에게 지은 죄부터 나열하자면 날밤 새워야 할 것이고 ‘할머니 김밥 사건’만 들자면 성질 못 참고 경찰의 위신을 깍은 것, 장사하면 안 되는 곳에서 장사하는 할머니 김밥 팔아준 것, 시민의 안전을 위해 봉사해야 할 경찰이 시민과 싸우자고 덤빈 것, 등등. 채 생각나지 않는 죄까지 세면 너무 많아서 아예 대꾸하기를 포기했다.
“그 김밥은 어쩔 겨야?”
자기가 생각해도 물어야 할 죄가 너무 많은지 세종은 귀찮다는 듯 손에 든 김밥으로 관심을 돌렸다. 민영은 그제야 자신의 손에 밥 두 줄이 들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
더듬더듬 김밥을 내밀었다. 막상 주려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그가 뭐냐는 식으로 쳐다본다.
민영은 괜히 머쓱해져서 얼른 그의 손에 김밥을 쥐어 주었다.
“점심 굶었다면서요. 오토바이 타고 순찰 돌려면 힘 많이 들어요. 아까 괜히 저 때문에 식사도 못하신 것 같아서요. 엉덩방아 찧게 한 죄로 드리는 겁니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래서 민영은 재빨리 몸을 돌려 뛰었다.
“야! 박 순경 순찰 안 돌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춘 민영은 자신이 방향을 잘못 잡고 뛰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쪽팔린다.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쏜살같이 뛰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신나게 달렸다. 수상오토바이가 정박된 곳까지.
이러다 진짜 포레스트 검프 되겠다!
세종은 은박지로 싸인 김밥 두줄을 쥔채 빠르게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정말이지, 이해 불능이다. 무슨 여자가 저렇게 밤낮 없이 뛰어다니길 좋아해?
그런데 웃음이 난다. 약도 사건 이후로 타도 대상 1호로 낙점 짓고 꽤 괴롭혀 댔는데 여?渼?꿈적도 않고 여전히 생기발랄, 쾌활 모드다. 찌르면 좀 아픈 시늉도 해야 찌르는 사람이 재미가 있는 법인데 어떻게 생겨 먹은 여차가 아무리 찔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도리어 ‘야!‘를 남발하며 상관을 타고 넘으려고까지 한다.
그럼 이쯤에서 저 버릇없는 하극상을 자근자근 밟아서 혼적조차 없게,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해 줘야 하는데 세종은 그렇게 하지 않는 자신이 이상했다. 분명히 화가 나야 하는 시점에서 웃음이 나고 당연히 밟아줘야 하는 상황에서 맥이 빠진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환가?
세종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이제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그녀의 흔적을 향해 황망한 눈길을 고정시켰다.
부아아아앙!
수상오토바이가 물살을 가르며 시원한 굉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해수욕을 즐기는 인파가 많은 곳에서는 안전 경계선을 설치해 놓고 순찰정이 그 일대를 왔다 갔다 하며 혹시 경계선을 넘어오거나 위험한 돌출 행동을 하는 피서객이 없나, 감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인적이 드문 밤이나 으쓱한 바위 근처 같은 곳에서 한적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과 수영 금지 구역에서 수영을 하려는 사람들은 살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는 수상오토바이가 유용하다. 빠른 속도감과 좁고 후미진 곳도 샅샅이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수상오토바이는 경계용 순찰로 딱이었다.
바아아앙, 싸아아아!
물보라를 튀기며 쏜살같이 튀어나가는 세종의 오토바이를 따라 민영의 오토바이도 속력을 높였다. 그녀의 눈에도 저 멀리 돌 바위 위에 위험하게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거친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로 뛰어들 태세였다.
‘꼭 하지 말라면 더 하는 인간들이 있다니까.’
민영은 세종이 지나간 물길을 따라 속도를 높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바위와 바위 틈 사이로 흐르는 물은 그 세기가 보통의 물살과 다르다. 넓게 흐르던 물살이 좁은 구석으로 갑자기 몰릴 때는 세찬 소용돌이를 만들기도 하고, 거친 바위에 부딪쳐 튕겨 나오면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파도를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수영 금지 구역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저런 안전을 생각해서 금지 구역을 만들어 놓으면 뭐 하나? 저렇게 지지리도 말 안 듣는 인간들이 있는 걸.
파아아앗!
수상오토바이의 브레이크를 잡으며 세종이 세찬 물보라를 일으켰다. 핸들을 반 바퀴 회전시키며 능숙하게 오토바이를 세우는 세종을 따라 민영도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가 마이크를 꺼내 놓고 바위 쪽을 향해 경고음을 보냈다.
삐이이!
“금지 구역 밖으로 나가십시오. 수영 금지 구역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위험한 지역이니 물러서십시오.”
어찌나 딱딱거리며 말하는지 그녀가 보기에도 거부감이 심하게 들었다. 저 인간은 뭘 해도 친절하고는 거리가 멀다. 아까 할머니한테 한 건 정말 기적에 가까웠다. 그런데 목소리 착 깔고 경고하니까 먹히긴 잘 먹힌다.
바위 위에 서서 시시덕거리던 청춘남녀들이 세종의 경고 방송에 놀라서 얼른 바위 저쪽으로 뛰어갔다. 그런 그들을 보는 세종의 눈은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웃음이 났다.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더니 ……아닌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건가? 어쨌든! 똥이 먼저든 겨가 먼저든 뭐가 먼저든 간에, 강세종은 저들을 뭐라 할 입장이 아니었다.
자긴 안 그랬나? 지금 도망가는 저들보다 훨씬 어릴 때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짓은 죽어라 하는 말썽꾸러기였으면서. 지가 지금 경찰 됐다고 저런 표정 지어도 돼?
민영이 그의 이중성에 혀를 차고 있을 때 세종이 갑자기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녀의 표정을 딱 알아채고 떨떠름하게 묻는다. 민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올챙이가 개구리 시절 모르는 것 같아서요.”
“뭐?”
황당하게 바라보는 세종을 일별하고 민영은 오토바이의 출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어이없게 쳐다보는 세종을 눈 끝으로 스치며 당당히 물 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세종은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저게 무슨 말이야? 저거, 속담 말한 거야?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모른 다지, 올행이가 개구리 시절을 어떻게 알아? 무식한 여자 같으니라고.”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무식이 왕창 드러나는 속담 인용에 세종은 정말 할 말을 잃었다. 그래 놓고 뭐가 잘났다고 자신을 저렇게 한심하게 보는가 말이다.
아, 저 여자하고 같이 있다가는 나까지 4차원의 세계로 끌려 들어갈 것 만 같다.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