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Guard RAW novel - Chapter 3
1. 여름해양경찰서? NO! 여름도떼기시장
콰당!
무거운 철 책상이 쑤욱 뒤로 밀려 나갔다. 곧이어 덜컹하며 철제로 만들어진 의자도 넘어진다. 그리고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에 제 성질을 참지 못하고 애먼 책상과 의자에 화풀이를 하는 순경, 박민영이 있었다.
무슨 이런 팔자가 다 있나?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는 없다. 그동안 내가 뭔 죄를 그렇게 크게 지어서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이나!
민영은 또다시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겨우겨우 눌러 참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동안 힘들다면 힘들고, 고생이라면 고생인 인생을 제법 잘 참아내며 살았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남들처럼 대학 갈 엄두를 내지 못해 취업 전선에 뛰어들면서도 ‘나보다 못한 사람도 있는데 뭐‘ 하는 위로를 스스로에게 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 적성에 맞지도 않는 소규모 컨테이너 업체의 경리로 일하며 매일매일 커피 심부름에 전화 받고 전자계산기만 두드리는 것에 신물이나 결국 회사를 때려치울 때도 이 정도로 암울하지는 않았다.
꼬박 1년을 공부해서 지방 전문대에 입학하고 또다시 졸업을 했을 때에는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었다. 게다가 두 번이나 미끄러진 해양경찰 시험에 합격했을 때에는 ‘드디어 내 인생에도 반짝반짝 볕이 드는구나’ 했었다. 그런데 늦깍이 순경이라고 이리저리 채이긴 했지만 ‘어느 인생에든 굴곡은 있는 거니까’ 하며 참아 냈다.
올해, 두 번째로 해변 근무를 서게 됐을 때만 해도 내 인생이 이렇게 암담해질 줄은 몰랐다. 그래도 큰 죄 짓고 산 일은 없으니까 큰 벌 받을 일도 없을 것이라 믿으면 살았는데…….
‘멋진 꼴통.’
대릿속을 스치는 요상한 별명 하나. 민영은 강세종을 생각하며 이상한 별명 하나를 떠올렸다. 멋지다는 단어와 꼴통이라는 단어는 전혀 상반된 어감임에도 불구하고 강세종에게 들이대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강세종은 그렇게 불렸다. 멋지고 잘생겼지만 ‘꼴통’이라고.
그녀가 다녔던 고동학교 선생님들은 객관성을 잃고 세종을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했다. 말 안 듣고 꼴통 짓만 골라 하는 세종을 죽일 듯이 미워했어야 했다. 그런데 ‘너 오늘 죽었어!‘ 하는 심정으로 벼르고 벼르다 한번 날 잡아서 족칠라치면 각종 스포츠로 체전에서 당당히 입상하여 학교의 이름을 빛내 주시는 통에, 화르르 타올랐던 불길은 금상을 받아 쥐고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교문을 들어서는 녀석을 보자마자 한 순간에 꺼져 버리곤 했다.
미워야 했는데 미워지지 않는놈.
학교의 교칙은 어기라고 만들어 놓은 것처럼 안 지키는 교칙이 지키는 교칙보다 더 많은 놈. 공부 못해, 선생님 말 안 들어, 뻑 하면 수업 땡땡이에 싸움질로 하루가 멀다 하고 결석을 해대는 녀셕을 선생들은 ‘꼴통‘ 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교칙을 지키지는 않는데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놈, 공부는 못하지만 돌 머리는 아닌 놈, 수업 땡땡이에 툭하면 싸움질이지만 약한 놈, 모자란 놈은 괴롭히 않는 정의파였던 그놈을 선생들은 ‘멋진 놈’이라고도 불렀다.
그래서 만들어진 별명이 ‘멋진 꼴통‘이었다. 게다가 그 ‘멋진꼴통’은 여학생들의 우상이었다. 남학생들도 그놈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놈이 잘나서 시기를 하기는 했지만 그놈이 멋진 놈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래 그놈을 따르는 추종자도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민영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공부 머리는 지지리도 나쁜데 강세종에 대해서는 세세한 것 하나까지 전부 기억 하는 자신이 처량했다.
그래! 까놓고 말해서 좀 좋아했다.
‘에이, 박민영, 많이 좋아했잖아.’
박민영은 자신의 양심이 지난 일을 들춰 내자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래그래. ‘좀’보다는 더 많이 좋아했다.”
솔직히 말하면 고교 1, 2학년 동안 내내 혼자서 몰래 짝사랑했었다. 처음엔 ‘뭐 저런 놈이 다있나?’했다가약한 남자아이를 괴롭히는 개날라리놈을 때려눕히는 걸 본 이후 ’괜찮은 놈‘으로 방향 조정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날 운동장에서 웃통을 벗고 농구하는 걸 보고 턱으로 흘러내리던 침을 닦으며 깨달았다.
‘나, 박민영이 놈을 좋아한다.’
그렇게 점점 시선을 빼앗기고 관심을 가지다가 결국 눈처럼 순진한 첫 순정까지 주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학창 시절에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않는 여학생이었다. 아니, 더 자세히 말하면 전혀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다. 공부도 썩 잘하지 못했고, 운동은 그저 그랬고 남들 다 있는 특기도 하나 없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활발한 것도 아니어서 친구 사귀는 데에도 젬병이었다. 늘 한쪽 구석에 처박혀서 연습장에 뭔가를 끼적이거나 남들 수다 떠는 걸 구경하는 아이, 수업 시간에는 자신의 번호가 불릴때 외에는 발표도 하지 않는 아이가 바로 나였다.
아마도 1, 2학년을 통틀어 60명가량의 동창들 중 나를 기억하는 이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동창들 중 하나가 바로 강세종이다. 그러니 나의 첫사랑은 혼자만의 삽질이요, 청승이었을 뿐이었다.
그걸로 땡이었다. 혼자 좋아하다가 전학을 가면서 잊었다. 금방 잊은 건 아니지만, 가끔은 그 학교 교문 앞을 찾아가 그를 보려고 얼쩡거린 적도 있었지만 맹세코 거기까지였다. 지금은 싹, 깨끗이, 티끌 하나 없이 완전히 정리되었다.
그때 이후로는 ‘멋진 꼴통‘ 강세종에 대해 요만큼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다. 맹세코!
“죽여주시는구먼.”
맹랑한 여순경에게 속아서 볼 것도 없는 시내 구석구석을 헤매는 것도 모자라, 뚱하다 못해 시니컬하기까지 한 시골 아저씨를 만나 있는 대로 무시를 당했다. 서울에서 동해까지 밤새 달려 도착했는데 관심도 취미도 없는 시내 관광을 한 것은 그렇다 치자. 그런데 겨우 도착한 숙소라는 곳이 여기다. 차라리 못 찾았다고 하고 이대로 서울로 상경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남자는 낡고 허름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주변은 온통 논과 밭이었고 어디선가 구수한 똥 냄새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고 있었다.
‘망망하늘정원 펜션.’
사기다!
이름 자체가 사기였다. 저 건물 어디에 ‘하늘‘이니 ‘정원’이니 하는 단어와 어울리는 곳이 한군데라도 있단 말인가. 그래. 망망하기는 하다. 막연하고 아득한 심정이 딱 지금 두 남자의 심정이었다.
척 보기에도 고친 티가 확확 나는 푯말은 솜씨도 지지리 없는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뭐했더라? 하늘민박? 그 시니컬한 아저씨가 말했던 ‘하늘민박’조차도 이 건물에 어울리는 명칭이 아니었다. 그저 이 건물과 어울리는 단어는 딱 하나였다.
민박.
그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민박’ 한 음절이면 되었다. 이건 민박 수준 이상은 절대 볼 수 없는 구조물이었다.
“설마 여기는 아니겠죠?”
동운은 믿을 수 없는, 아니, 믿고 싶지 않은 어투로 중얼거렸다.
“언제나 설마가 사람을 잡지.”
세종의 음울한 대답에 동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설마가 사람 잡는다. 설마, 그 여순경이 상관 둘을 이렇게 엿 먹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쨌든 겁대가리는 달나라로 보낸 것이 분명한 여자였다.
두 남자가 잠시 넋을 잃고 황망하게 서 있는데 누군가 건물에서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꽤 어려 보이는 남자가 오렌지색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오고 있었다.
동운과 세종은 그 남자를 보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전경이었다.
오렌지색 티셔츠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해경 마크를 보는 순간, 동운과 세종은 해군에서 차출된 전경임을 알아차렸다.
“어!”
족제비같이 생긴 놈이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 둘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니, 전경임을 한눈에 알아차린 동운과 세종은 ‘어서 끊어!’라는 식의 눈치를 마구 쏘아 주었고 어리바리, 어린 전경은 잠시 머뭇거리며 현 상황을 점검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충성.”
좀 느려도 눈치가 아주 없는 놈은 아니었다. 두 남자의 심상찮은 포스를 눈치 챈 전경이 재빨리 차렷 자세를 하며 거수경례를 했다.
“쉬어.”
세종이 귀찮다는 듯 툭 내뱉었는데도 전경은 쭈뼛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마도 제대까지는 한참 먼 놈인 듯했다. 동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해변 차출 전경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름은?” “전협입니다!”
“전협? 왜자야?”
“예. 그렇습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를 보니 역시 입대한 지 일마 안 된 전경이다. 동운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쉬어, 괜찮아. 긴장 풀고. 여기가 여름 해경 지정 숙소 맞나?”
“예. 그렇습니다.”
힘은 좀 빠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굳어 있다. 동운은 다시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보는 것만큼 안도 후지냐?”
동운이 뭘 말하는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 전경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세종이 짜증나는 목소리로 툭 끼어들었다.
“이 건물 안 무너지겠냐고?”
“예? 아, 예. 안 무너집니다.”
그러더니 영 자신이 없는 듯 건물을 힐끔 돌아본다. 그리고 재빨리 덧붙였다.
“저희도 어젯밤에 도착해서 잘 모룹니다. 그래도 잠자는 동안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세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동운은 얼른 다시 물었다.
“저희? 몇 명이나 왔는데?”
“저까지 포함해서 전경은 4명이고, 해경에서 파견된 두 분이 계십니다.”
순간, 세종의 눈이 찌릿 빛이 났다.
“해경?”
“예. 그렇습니다.”
대답은 잘해 놓고 갑자기 전경은 ‘그런데 당신들은 누구죠?’라는 물음표를 잔뜩 그린 채 동운과 세종을 번갈아 보았다. 조금 전 ‘충성’까지 외쳐 놓고 이제야 동운과 세종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역시 좀 덜떨어진 놈이다.
“우린 대한해경에서 왔다. 이분은 강세종 경사님, 난 김동운 경장.”
“충성 ”
정체를 밝히자마자 또 충성이란다. 진짜 좀 모자란다.
“됐어. 충성은 아까 했으니까 그만해. 안에 해경에서 오신 분들 계신가?”
“예. 아니,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제 일어났습니다.”
전협의 대답에 세종은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아직 일곱 시도 안 된 시간이었다. 그럼, 그 망할 박 순경은 뭐야? 새벽 여섯 시부터 경찰서에 출근한 그 맹랑한 여자는 뭐냐고?
“그 해경에 여순경도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왜 몰라?”
세종이 신경질적인 어투로 묻자 전협은 다시 쫄았다.
“그게…… 저희가 어제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방 배정만 받고 인사는 생략했습니다. 최 경사님께서 그러라고 하서서……“
“최 경사님?”
“예. 이번 여름해양경찰서를 맡아서 운영하실 분이라고……”
동운과 세종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겁대가리를 상실한 여순경이 말했던 ‘최순황 경사‘가 바로 ‘최 경사’와 동일 인물인 듯했다.
“안에 계신가?”
“예. 조금 전에 일어나셔서 저희를 깨워 주셨습니다.”
잘하는 짓이다. 경사가 일어나서 전경들까지 깨워야 하다니!
세종은 못마땅한 얼굴로 전경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신경질적인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를 동운이 재빨리 따라갔다.
새벽부텨 잔뜩 기합이 든 맹한 전경을 마당에 그대로 세워둔 채.
“네. 그럼, 리스트 만들어서 좀 있다가 뵐게요.”
“예. 그럽시다. 그리고 최 경사님께 말씀 좀 잘 드려서 회의는 너무 자주하지 말도록 합시다. 입으로 백날 떠들어 봤자 말 안 듣는 사람들이 말 잘 듣는 것도 아니고……”
“네. 그렇긴 하죠. 그래도 저희들끼리 질서가 안 잡히면 시민들을 어떻게 통솔하겠어요. 그러니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규칙을 만드는 건 꼭 필요한 것 같아요. 작년에도 해 보셨으니 잘 아시잖아요.”
그녀처럼 이번에도 연달아 해변 근무를 서는 사람이 또 있었다. 민간자율구조대의 대장으로 작년부터 이곳 망망해수욕장의 안전요원으로 활동 하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전에는 무슨 해병대 전우회 같은 곳에서 활동을 했었다는데 몇 년 전부터 해수욕장 안전요원으로 자원해서 결국 팀장으로까지 올라온 사람이었다. 나이는 마흔을 훌쩍 넘었지만 체력이나 수영 실력 등은 젊은 남자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
“박 순경도 알다시피 작년에는 쓸데없는 회의가 너무 많았어. 뭔 일만 생기면 불러 대는 통에 정작 필요한 때에는 인력이 부족했잖아. 이번에는 제발 그러지 말자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민영도 할 말이 없었다. 작년에 파견되었던 천 경사님은 뻑하면 회의소집이 일인 분이셨다. 나중에는 ‘저분 낙이 회의다’ 라는 소문이 돌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붕어 천‘이었겠는가. 만날 입만 나불거린다고 안전요원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이번에는 그러지는 않을 거예요. 저희 최 경사님은 회의 별로 안 좋아 하시거든요.”
“그래? 그거 다행이구먼.”
민영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 대장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 이따 뵐게요. 대장님.”
“그래요. 있다가 보자고.”
몽골 텐트로 만들어진 민간자율구조대 캠프를 나서며 민영은 따가운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했다. 강세종에는 사무실 정리니, 민간자율구조대 캠프 방문이니 핑계를 댔지만 모두 거짓은 아니었다. 어젯밤에 최 경 사님이 아침에 각 팀별 장들을 소집 했으면 한다는 명령이 있었고, 이곳 분위기를 제일 잘 아는 그녀가 나선 것이었다.
‘그렇다고 사무실 정리까지 내가 할일은 아니지.’
민영은 움푹움푹 파이는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아스팔트 위로 올라섰다. 저기 멀리 해양경찰 깃발이 펄럭인다.
젠장,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녀는 잔뜩 인상을 썼다. 그들이 아침나절 내내 시내를 헤맸을 테니 아마 그녀를 죽이려고 벼르고 있을 것이다.
“뭘 들었는지 몰라도 들은 것을 모두 경험하게 해 주지. 기대해.”
쳇 기대하라고? 뭘? 강세종, 나 건들지 마라. 나, 계획 무지 많은 사람이거든? 전도유망한 순경 앞길을 막아섰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매장되는 수가 있어!
저기 모래사장에 묻어 버리는 수가 있단 말이야!
“자, 여기는 이번 여름해양경찰서에서 근무하게 될 강세종 경사, 그리고 김동운 경장. 그리고 이쪽은 나와 같은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박민영 순경. 전경들은 각자 알아서들 소개해 봐.”
최순황 경사가 간단하게 해경들만 소개를 끝내고 전경들에게 바통을 넘겼다. 이제 겨우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사무실 안은 이번 해변 근무에 파견된 해경 네 명과 전경 네 명이 서로의 소개를 하고 있었다.
민영은 자신에게 꽃히는 교묘한 눈길을 의식하지 않으려 일부러 전경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무실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날아든 꼬챙이 같은 눈길은 모두 모여 보라던 최 경사의 명령이 떨어질 때도 그녀를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까칠한 눈길은 여전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충성. 해상병 921기 진지한입니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전경을 향해 최 경사가 물었다.
“몇 살이지?”
“스물셋입니다.”
“음, 좋을 때구먼. 5개월 후에 전역한다고?”
“예. 그렇습니다.”
“이름이 진지한인데 진짜 진지한가?”
“예. 그렇습니다.”
민영은 ‘푹’ 쏟아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 냈다. 마지막 말은 누가 들어도 농담인데 진지한은 농담처럼 듣지 않은 모양이다. 최 경사가 뻘쭘한 얼굴로 진지한을 쳐다보았다.
“하하, 농담이야.”
최 경사는 썰렁한 분위기를 상쇄해 보려고 억지웃음을 지었지만 진지한은 웃지 않았다. 그 덕에 최 경사의 웃음만 어색하게 주변을 맴돌다 잦아들었다.
‘끙, 앞뒤, 꽉 막힌 벽창호 한 놈 들어왔구먼.’
민영은 쯧쯧 혀를 찬 후 눈길을 돌려 세종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그는 이 상황에서 어쩌는지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는 슬쩍 돌아가는 눈길을 다시 황급히 자리로 돌렸다.
‘아! 짜식 집요하네!’
세종이 아직도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안 민영은 ‘끙’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저 자식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뻔하다. 아마, 엉터리 약도로 자신을 골탕 먹인 복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겠지. 저 자식은 나이를 처먹고도 저렇게 뒤끝이 구려? 남자가 대범하지 못 하게시리.
“어이, 다음 소개해 봐.”
최 경사가 명령하자 그 옆의 전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성! 해상병……“
전경들이 차례로 자신을 소개할때마다 민영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째 이름들이 다 저럴까? 마치 성격 보고 지은 이름들인 것처럼 하나같이 사람과 이름이 딱 들어 맞는다.
스물두 살이라는 조용언은 진짜 조용했다. 목소리는 가늘었고 조용조용 내뱉는 말투는 귀를 쫑긋 세워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래 가지고 어떻게 군대는 들어갔는지 정말로 궁금할 정도였다.
전협. 애다.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어나지도 못한 소년이었다. 생긴 건 족제비같이 생겨가지고 나이도 이제 갓 스물이란다. 조용언의 개미 소리를 들은 직후에 듣는 목소리라 그런지 아주 우렁찼다.
“제 신조는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것입니다. 제 꿈은 장차 대한민국의 해경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 경사님과 경장님들을 존경하며 따르겠습니다.”
목소리도 힘 있고, 꿈이 해경이라는 것도 좋다. 그런데 뭐? 여러 경사님과 경장님들을 존경해? 그럼 난?
민영은 잔뜩 눈살을 찌푸린 채 전협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 인간은 강세종을 쳐다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딱 보기에 전협이 존경할 대상으로 점찍은 사람은 ‘꼴통’ 강세종이지 싶었다.
“이재섭입니다. 나이는 스물넷 강남의 최고학군, 경기고등학교 졸업.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들만 다닌다는 서울대학 전자공학부에 최고성적으로 입학. 1학년 수료 후 ROTC로 입대할 예정이었으나 자의로 해군에 지원. 이번 해변 근무를 끝으로 전역할 예정입니다. 이상. 충성”
전협의 소개를 들으며 ‘하, 이번 전경도 특이하네‘ 하는 표정으로 방심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재섭의 소개가 시작되는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름만큼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말끝마다 ’최고’를 부르짖으며 소개하는 품이 ‘나, 이런 놈이야. 그러니 알아서들 기어!’ 하는 것처럼 거들먹거린다. “누가 물어 봤어?”
역시 그냥 있을 강세종이 아니시다. 그저 이재섭의 만행에 눈만 휘둥그레 뜨고 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우리의 꼴통, 강세종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이재섭이 눈을 부라리며 세종을 쳐다보자 그가 목소리를 지그시 깐다.
“눈깔아.”
눈썹을 씰룩거리며 여전히 눈을 깔지 않는 이재섭을 향해 세종의 목소리가 더욱 음침하게 울렸다.
“어디 소속이야? 너희 부대에서는 상관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나?”
그 순간, 이재섭의 눈이 슬쩍 아래로 향했다. 하지만 그 표정에는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하는 생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자, 자. 소개는 이쯤에서 끝내고 회의 시작하지. 박 순경.”
“네, 경사님.”
민영은 이재섭과 강세종의 기싸움을 구경하다 최 경사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민자대(민간자율구조대) 대장, 언제 오기로 했어?”
“이번에 활동하게 될 사람들 리스트가 만들어지는 대로 가지고 오신댔어요.“
“그래? 소방서 쪽은?”
“그쪽도 오늘 내로 일정을 만들어서 만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강경사는 지금 나하고 같이 시청에 좀 다녀오지.”
“시청에요?”
세종이 되묻자 최 경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에서 안전요원들을 뽑았다는데 가서 어떤 식으로 운영할 건지 알아봐야지. 아무래도 활동하는 단체가 많으니까 각자 구역을 정하는 게 좋지 않겠어? 박 순경, 작년에도 그랬지?”
”네, 경사님. 작년에는 각 단체별로 순번을 정해서 순찰 시간도 정했습니다.“
“그래, 이런거 저런거, 정할게 한 두가지가 아니야. 그러니 강 경사가 며칠 나하고 같이 다니면서 각 단체별 우두머리들과도 인사를 나눠야지.”
“……”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똥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세종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 경사는 회의를 종료한다는 듯 좌중을 둘러보았다.
”나흘 후면 해수욕장 개장이야. 당분간 우리가 머물 곳이니까 청소 좀 깨끗이하고 해변지리도 좀 알아놔. 그리고 이번 여름동안 고용한 안전요원들 리스트가 내려오는 대로 소집해서 순찰 구역 나누고……할 일이 많구먼. 박 순경이 좀 수고해. 작년에도 여기 근무를 했으니까 잘 알겠지. 순찰정이나 뭐 그런 구조장비들 빠진거 없나 점검도 하고. 참, 이번에는 수상오토바이도 지급되었다고 하던데 몇 대나 지급되었는지도 알아 봐. 알았지?”
“네, 경사……“
최 경사의 명령에 경쾌하게 대답하던 민영은 순간 끼어드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말을 멈추었다.
“그게 왜 그쪽에서 할일입니까?”
“응?”
최 경사가 놀라 세종을 바라보았다. 형식적으로 수첩에 무언가를 끼적이며 잠자코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세종을 쳐다보았다. 세종은 그런 사람들의 눈초리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곧장 최 경사를 응시했다.
“김 경장이 있는데 순경에게 일을 맡기시면 되겠습니까? 몇 안 되는 인원이라도 기강이라는 것이 있는데.”
세종의 잔뜩 비틀린 말투에 최 경사의 얼굴이 순간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목에서부터 붉은 기가 오르더니 얼굴 전체로 순식간에 번져간다.
“어? 어, 그게 그렇게 되나?”
최 경사가 당황해 하며 김 경장과 민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자 세종이 민영에게 무뚝뚝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박 순경이 이곳 사정을 잘 안다고 하니, 구조장비 체크는 박 순경이 해. 그리고 김 경장은 전경들과 같이 사무실 정리와 청소를 좀 하고. 또 순찰 순번은 어떤 식으로 정할지 고민도 좀 하고.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경사님.”
이번에는 김 경장이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 앞에서 민영은……한마디로 새됐다.
어이없었다. 그럼 뭐야? 나 혼자 구조장비 체크하란 말이야? 챙겨야 할 장비가 얼마나 많은데!
강세종, 이 쪼잔한 시키! 약도 잘못 그려 준 복수를 이따구로 하나!
“경사님, 이건 아니죠. 어떻게 경사님이 명령을 내리고 있는데 그 인간 이 툭 끼어들어서는 경사님을 그렇게 물을 먹이냐고요. 그럼 경사님이 전경들 앞에서 뭐가돼요!”
“그게 그렇게 되나? 에이, 뭐 어때? 강경사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 잖아.”
민영은 그저 사람이 좋기만 한 최 경사의 말에 더욱 목청을 높였다.
“아니죠! 경사님! 강세종 경사, 만만히 보시면 안 돼요. 오늘 하는 거 보니까 최 경사님이 조금만 틈을 주면 완전 제멋대로 할 위인이더라고요. 아니, 그래도 명색이 최 경사님이 이번 안전구조대 팀장인데 어떻게 그렇게 한번에 싹 무시하고…….“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지. 아닌 말로 김 경장이 있는데 박 순경에게 지휘권을 넘긴 건 말 안되잖아. 그건 진짜 내가 잘못한 겨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따로 말하면 되잖아요. 꼭 그 자리에서, 어린 전경들이 보는 그 자리에서 그래야 했냐, 저는 이걸 말하고 싶다고요.”
말하다 보니 더 화가 난다. 민영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흥분했다. 자신의 지위는 하찮은 순경일 뿐이니 강세종을 잡아 줄 사람은 최 경사님뿐 이다. 그런데 말을 하면 할수록 최 경사가 자신에게 썩 도움이 되어 줄 것 같지 않아 불안해졌다.
“그러니까 최 경사님이 아예 처음부터 기강을 확실히…… ”
민영이 손바닥에 주먹을 내리꽂으며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어필할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하필, 이런 때에!
Rrrr. Rrrr. Rrrr
“어, 전화 왔네. 잠깐만.”
민영은 최 경사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 것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를 노려보았다.
“오늘 내로 구조장비 리스트 만들어 놓고, 망망해수욕장 안전요원으로 근무할 사람들 리스트도 모두 파악해. 각 단체별 팀장들 만나서 일정을 알아보고 가장 괜찮은 날을 정해서 회의 일정 잡고. 아, 그리고 우리와 직접 연락을 취할 기상예보 담당자가 누군지 알아봐. 그 사람 근무지 전화번호는 말할 것도 없고, 개인 연락처와 주소까지 전부 알아둬.”
오놓 하루 그녀에게 내려진 일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강세종 경사 ‘놈’께서 직접 하달한 명령이다. 누가 들어도 다분히 개인감정이 섞인 지시였다, 구조장비 리스트에 안전요원 리스트까지.
망망해수욕장은 대한민국 최대 해수욕장 중의 하나다. 여름 해수욕장이 개장하게 되면 수많은 단체에서 안전요원을 뽑는다, 해경은 말할 것도 없고 시청, 구청, 민간에서 운영하는 사단법인, 게다가 해병대 전우회나 해수욕장 근처의 주민들이 나서는 순수한 봉사단체들까지……
그 사람들 리스트를 넘겨받아 우리 측 데이터로 만드는 것만 해도 하루 종일 걸릴 것이다. 그런데 구조장비 리스트에 일정 파악까지. 강세종이 날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내린 지시가 분명했다.
“……아이고, 마누라님. 걱정 마시라니까. 걱정 마. 내, 오늘 일찍 마쳐서 회 사갈게. 당신이 먹고 싶다는데 살아서 펄펄 날뛰는 고기들 못 바치겠어? 그래, 아주 싱싱한 놈으로다가. 응. 소주 한 병. 오케이. 알았어.”
사모님이다. 민영은 전화기를 두 손으로 공손히 잡고 통화를 하시는 최 경사님을 보며 눈치를 챘다, 최 경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공처가였다. 본인은 애처가라고 하지만 누가 봐도 공처가다. 어찌나 벌벌 떠시는지 보는 사람이 다 애처로워할 만큼 중증이었다.
“응……나도 사랑해요.”
잠시 민영의 눈치를 보던 최 경사가 기어이 낯간지러운 멘트를 날리신다. 민영은 애써 고개를 외면하고 눈길을 피해 주었다. 순전히 최 경사를 위해서였다. 아니, 솔직히 듣고 있는 자신이 더 민망해서 외면했다.
“어디까지 했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최 경사가 멋적은 웃으며 짓는다. 갑자기 민영은 전의를 상실했다. 최 경사만이 강세종이 공격하는 창을 막아 줄 방패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잘못 짚은 듯싶었다. 아마, 오늘처럼 강세종이 또다시 여기저기 끼어들어도 최 경사는 기분 나빠할 것 같지 않았다, 뭐든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믿는 분이시니.
민영은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됐어요. 제 할 말은 다 했어요.”
아, 이놈의 팔자가 언제쯤 피려나.
“박 순경, 너무 고깝게만 생각하지 마. 다 좋은 게 종은 거 아니겠어? 몇 안되는 동료들끼리 겨우 두 달 근무하는 건데 평탄하고 무사하게 지내자고. 알았지?”
“‘ㅣ……네.”
나도 그러고 싶죠! 정말 저도 그러고 싶다고요! 전 이번에 특진도 해야 한단말이에요!
민영은 정말 울고 싶은 심정으로 푸른 바다를 응시했다.
‘아, 정말 여긴 쓰나미 같은 것 쫌 안 오나? 딱 한인간만 덮쳐줄 만큼 세게 와서 강세종만 쏘옥 집어내 쓸어가 주면 되는데.”
“아, 진짜!”
드디어 민영은 키보드 자판기를 홱 멀어 버렸다. 도저히 화딱지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
왜내가 이래야 해? 다 퇴근한 야밤에 왜 사무실에 혼자 남아 이 청승을 떨어야 하느냐고! 내일이면 해수욕장 개장이니 일이 바빠지겠다고 하더니 남아서 야근하는 사람은 나뿐이잖아.
민영은 일을 잘 분담해서 빨리 끝내고 쉬자고 하던 강 경사의 말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게 잘 분담한 거야? 잘 분담했는데 왜 나만 이러고 있냐고! 이 건 다분히 개인감정이 담긴 복수야! 경사씩이나 된 자식이 속은 어찌나 좀스러운지.
그녀는 씩씩거리며 텅 빈 사무실을 훑었다.
물론 내가 컴퓨터에 좀 약한 건 인정한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지. 비록 독수리 타법이긴 하지만 전 국민의 문서 작성기인 아래 한글도 다를 줄 아는데!
민영은 네 시간동안 자신이 작성해 놓은 화면을 자랑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자랑스러워하던 그 마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분명히 많이 쓴다고 썼는데 왜 이것뿐이지?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마우스를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아무리 굴려 봐도 겨우 두 페이지다. 제길, 네 시간 만에 두 페이지 작성했다!
“나쁜 자식. 지들은 몸으로 하는 일 하고 난 이런 어려운 일이나 주고.”
차라리 나도 그들처럼 구조장비 옮기고 챙기고 돌아다니면서 안전 경계선 점검하라고 했으면 벌써 끝내고 들어갔을 것이다. 책상 앞에 않아서 안전요원 명단 체크하며 문서 작성하는 일 따위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여자라고 배려해 주는 거겠지.”
사람 좋은 최 경사님은 강 경사가 분담한 일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민영은 절대 그것이 ‘배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자식이 누굴 배려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분명 그 약삭빠른 놈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녀가 책상물림 타입이 아님을. 그러니까 제일 골치 아프고 성가신 보고서 작성 따위의 일을 시킨 거지!
민영은 괜히 혼자 씩씩거리다가 휴대폰을 집어 올렸다. 신나는 댄스 음악이 휴대폰에서 흘러나와 빈 사무실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헤이! 안전요원. 잘 지내셔?]
나쁜 년. 이년은 왜 주는거 없이 미울까?
“넌 내가 잘 지낼 거라고 생각하냐?”
[왜? 잘생긴 기동대원들과 생활하는데 잘 지내야 하는 거 아냐? 그 남자들 잘 생겼지? 내가 인터넷에서 사진 봤는데 진짜 잘 생겼더라. 그 강세종인가 하는 남자는 조각이던데? 조각! 야, 그 남자 내가 찜했으니까 건드리지 마라. 하긴 너하고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더라만. 깔깔깔.]
안 그래도 열불 나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데 이 계집애가 아주 부채질을 하고 있다, 부채질을.
“인터넷? 그 인간이 인터넷에도 떴냐? 왜?”
[야, 너 아직도 몰라? 넌 내가 정보 안 물어 주면 세상하고 등질 애야. 어째 그렇게 정보가 더뎌? 더디길.]
“난 그런 정보 따위 없어도 잘살았어.”
[그래서 네가 안 되는 거야. 너, 그거 모르지? 원래 안전요원 파견근무 나갈 사람은 네가 아니었다는 거] “뭐?”
이게 무슨 소린가!
민영은 너무 놀라 의자에서 자빠질 뻔 했다. 아니, 이게 무슨 공룡 발가락 빠는 소리란 말인가?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아니었다니? 그럼 내가 다른 사람 대신 왔단 말이야?”
[휴우. 내가 이런 말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네가 하도 세상을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서 해 줘야겠다. 넌 좀 긴장도 하고 좌절도 하면서 살아야 할 필요성이 있어. 지가 둔하니까 다른 사람도 다 자기 같은 줄 알고…… 쯧쯧. 나도 며칠 전에 알았는데, 사실은 원래 이다빈 순경이 해변 근무로 내정되었었대.]
“이다빈?”
이다빈 순경의 웃는 얼굴이 민영의 머리를 스쳤다. 늘 웃고 다니는 어린 여순경이지만 민영과 달리 똑부러지고 야무진 여자였다. 스물네 살의 어린 아가씨답게 청순한 여자가 똑똑하기까지 하니, 동료들이나 상관들의 예쁨을 한봄에 받는 순경이었다. 그렇게 썩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웃는 표정만큼은 애교가 철철 넘친다. 오죽하면 그녀가 처음 임용되어 파출소로 왔을 때 별명이 ‘새벽이슬‘이었겠는가. 뭐, 생긴 게 꼭 이슬만 먹고 살게 생겼다나, 뭐라나. 그것도 새벽에 맺히는 이슬만.
그런데, 그런데 그녀가 내정되어 있었다면서 왜 내가 온 거지?
[그래, 이다빈 순경. 걔가 어떻게 알았는지 이번에 해변 차출 안전요원에 지가 포함된 걸 알아낸 거야. 야, 웃기지 않니? 순경 단 건 너보다 느린데 어째 너보다 정보가 더 빨라? 걔가 그거 알고 소장 집에 쳐들어갔잖아. 과일이랑, 술이랑 사들고 가서 소장 사모까지 있는 데서 못 간다고 울고불고했단다. 아휴, 어찌나 찐득이처럼 달라붙는지 소장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대. 게다가 걔가 애교가 좀 많니? 소장 사모가 걔 살살거리는 거에 완전히 넘어가서 소장한테 보내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대잖아. 그러니 소장인들 별수 있어? 결국 제일 만만한 널 보낸 거지.]
아아, 이 거지발싸개 같은 인간들을 모조리 쓸어서 어디, 무인도에라도 갔다 버리고 싶다. 옹기종기 모여서 지들끼리 잘살라고.
“황지연.”
[왜? 왜 목소리는 깔고 그래? 네 실체를 알고 나니 힘이 쫘악 빠져?]
이년은 나보다 날 더 잘 안다.
“난 왜이럴까?”
[글세, 나야 모르지.]
“나, 이러고 계속 살아야 하니? 갑자기 세상 살기가 싫어진다.”
[알아서 하셔.]
나쁜 년. 친구가 죽고 싶다는데 말리지는 못할망정.
“끊자.”
[왜? 죽으려고?]
독하고 매정한년.
“아니.”
[그럼?]
“밥 먹으러 가려고.”
[죽고 싶다는 것이 밥은 목구멍으로 넘어가?]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대. 먹고 나서 고민하련다.“
[넌 먹고 죽어도 때깔은 안 고울 거야. 네가 원래 좀 까맣잖아.]
민영은 더 이상의 대화는 무리라는 판단 아래 일방적으로 폴더를 닫아 버렸다. 그리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심란하다. 남의 땜빵으로 온 고생길 한가운데서 홀로 남아 사무실을 지키고 있자니 인생이 무상하다.
“에잇!”
민영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혼자 사무실에 앉아 이 청승을 떨어! 배 째!
펑크가 나버린 자전거를 끌고 터널터널 시골길을 걷던 민영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지연에게 세종이 왜 인터넷에 떴는지 들어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 이다빈 순경 땜빵용이었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강세종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숙소에 컴퓨터 있었나?’
없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사무실에 나가서 인터넷을 뒤져야 할 것 같다.
민영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전거 타고 달릴 때는 이렇게 멀지 않았는데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려니 진짜 멀다. 투덜투덜. 하염없이 자신의 가여운 인생을 주절거리며 걷던 그녀는 어느새 민박집의 불빛이 보이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도 끝이 있는 거지. 내가 겪는 이 고행도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스스로를 너무 잘 추스른 민영은 기운 찬 걸음으로 대문을 두드렸다.
탕, 탕, 탕,
‘아, 이놈의 숙소는 벨도 없어!’
덜컹.
녹슨 빗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은 순간, 민영은 문을 두드리려 올렸던 손을 멈추었다.
끼이익.
무슨 전설의 고향도 아니고, 대문 열리는 소리가 음침한 것이 딱 구미호가 사는 집 같다.
그런데 말이다. 참 삶은 재미있다. 이 시점에,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 딱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장난이란 알인가. 시킨 일, 마무리 짓지도 못하고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숙소로 돌아왔는 이문을 열어 준 사람이 바로 그 일을 시킨 당사자라니. 박민영. 참 재수 더럽게 없다.
웃통을 벗어젖힌 채 인상을 잔뜩 쓰고 서 있는 그를 민영은 마주 노려 보았다.
“대문 부술 일 있나? 힘 좋은 건 다른 데 가서 자랑해.”
말뽄새하고는! 내가 힘 좋은데 지가 보태준 거 있어?
“하도 안 열어 줘서요. 대문이랑 현관이랑 오죽 멀어야 말이죠. 뭐, 훔쳐 갈 것도 없는데 대문은 왜 잠갔대요?”
지 할 말만 하고 돌아서는 세종은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신경질적인 대꾸에 걸음을 멈추었다. 따박따박 대꾸하는 민영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돌아보았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은 ‘순경‘이 하늘같은 ‘경사‘한테 대든 거다.
아! 그렇군. 박 순경이지. 첫날 약도로 날 물먹인 그 박 순경. 경장과 경사를 한번에 KO시킨 그 박순경!
세종은 보란 듯이 몸을 돌려 팔짱을 척 꼈다. 팔의 근육이 불끈 솟아오르며 단단하게 굳는다.
아놀드 같다. 그 힘 좋게 생긴 영화배우. 튼실한 어깨며 팔. 바지허리 선위로 보이는 탄탄한 배까지.
민영은 입안에 가득 고이는 침을 겨우 삼키며 눈에 힘을 주었다. 다리가 풀리니 눈도 풀리려고 한다.
“박 순경”
음침하게 목소리를 깔아서 부르긴 왜 불러? 내가 그런다고 무서워할 줄 알면 오산이야!
“왜, 왜요?”
젠장, 더듬었다. 절대 겁나는 거 아닌데 왜 더듬지? 그래도 목소리는 꽤 컸다.
“시간 있나?”
헉! 왜? 내 시간은 왜? 어디 끌고 가서 패려고? 야아! 너, 고등학교 때는 그래도 정의파였잖아. 힘없고 약한 사람들은 안 건드렸잖아. 나, 이래 봬도 여자야!
“글쎄요. 시간이 ……“
이번에는 더듬지는 않았다. 그런데 약하다. 여차하면 도망가려고 주변을 살피다가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시간 있으면 물 좀 뿌려.”
좀만 움직여도 확 내빼 버리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물 뿌리라는 말에 확 깼다. 민영은 놀란 눈으로 그가 마당 한편에 있는 수돗가로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업드려 뻗쳐를 한다.
“뭐해? 이리 와서 물 좀 뿌리라니까.”
등목? 지금 나한테 등목 해 달라는 거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웬 등목? 그것도 멀쩡한 욕실 놔두고 무슨 등목이야?
아! 저 자식은 왜 저딴 걸 나한테 시키고 지랄이야!
촤아아악!
시원한 물줄기가 매끈한 남자의 등으로 쏟아졌다. 예년보다 빨리 찾아 온 더위에 해수욕장 개장 시기마저 앞당겨진 날씨를 보니 해가 떨어진 저녁이라고 해도 별반 달라질 것은 없었다. 때 이른 열대야 현상이 벌써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만큼 공기는 텁텁하고 후끈했다. 더구나 밀폐된 사무실에서 더운 선풍기 바람만 열심히 쏘이다가, 설상가상으로 자전거 타이어까지 펑크 나는 바람에 울퉁불퉁 시골길을 열나게 걸어왔던 그녀로서는 지금 눈앞에 업드려서 찬물 세례를 방고 있는 강세종이 여간 부러운 것이 아니었다.
정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그녀도 웃통을 벗어 던지고 그 자리에 업드려 ‘나도 뿌려’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닥 남은 여자로서의 조신함이 그것만은 주저하게 만들었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서 이 매끈하고 섹시한 남자의 등에서 자유로워져 실내에 있는 욕실에서 마음껏 물세례를 받고 싶은 것이 다였다.
남자 등이 섹시하다고 느낀 적은 맹세코 처음이다. 내가 아무리 남자에 굶주린 노처녀지만 아무 남자 등이나 보고 섹시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수많은 19금 관련 영상을 두루 섭렵했지만 그 어느 배우의 등에서도 이런 감홍을 받지는 못했다.
진정 감탄스러웠다. 두 팔로 상채를 지탱하느라 힘이 들어가서인지 날카롭게 솟은 어깨죽지는 매력적인 악마의 날개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고 그 아래로 선명하게 그어진 척추의 올곧은 선, 역삼각형의 반듯한 몸채. 이 모든 것이 가로등 아래에서 질은 갈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좌르륵.
다시 한 번 더 물을 끼얹었다. 잠깐 손을 떠는 바람에 물이 바지 허리선을 조금 적셨다. 그래도 강세종은 별 반응 없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리로 섬광 같은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귀신에 씌기라도 한 것인지 그 순간에 민영은 이성을 버렸다. 오직, 본능과 욕구에만 충실했다.
댔다고 말하는 그의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홱 돌아 버린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그의 엉덩이 쪽으로 가져갔다.
갑자기 몸에 물기가 느껴지자 일어서려고 하던 그가움찔 다시 몸을 뻗친다. 그 순간, 그녀는 일을 저질렀다.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바가지를 기울였다.
촤아악!
아! 난 머리 따로 몸 따로란 말인가!
차가운 물이 바지춤을 흥건히 적시는 순간, 강세종이 ‘억‘ 하는 신음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그제야 민영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했다.
‘아물사. 잰 경사고 난 순경이지.’
아, 이런 생각은 좀 빨리빨리 해 주면 안 되는 건가? 왜 몸보다 머리가 더 먼저 굼떠! 왜 내 몸은 머리가 시키는 대로 안 하고 제멋대로 움직이냐고!
민영이 서론한 살이 되는 지금까지 생존전략으로 내세운 것이 있다면 ‘안 되면 후퇴!’다. 그리고 이 순간이 그녀에게는 자신의 생존전략을 써먹을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뛰었다. 바가지를 바닥에 홱 내팽개치고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대문을 지나 펑크 난 자전거를 타고 오던 그 시골길을 마구 달렸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기색 같은 것은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달리고 달렸다.
포레스트 검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