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33
제 333화
103장. 동쪽으로 떠날 준비 – 3화
출발 일자가 결정됐다.
이틀 후 정오.
이유는 간단했다.
나스 대륙의 시간으로 정오가 되는 시점은 동방 대륙에서는 자정이 되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낮보다는 밤에 이동하자는 것이 베르하드의 생각이었고, 나 역시 그것에 동의했다.
‘동방 대륙까지 일이 잘 마무리 짓고…… 헤이즈와 함께 지구로 가서 가족을 만나고 싶다.’
내 생각은 확고했다.
이제는 배우자가 된 헤이즈와 함께 지구로 가서 아버지와 여동생을 만나 인사도 하고.
그간의 다사다난했던 일들을 믿든 말든 미주알고주알 얘기하고 싶었다.
그런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과거에는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늘 가슴 한쪽이 먹먹한 느낌이었는데.
적어도 지금은 통로가 열려 있는 상황이었다. 망할 동방 대륙 때문에 길이 잠시 막혀 있어서 그렇지.
어쨌든 황도로 돌아온 나는 부지런히 동쪽에 방어선 구축을 하도록 황명을 내렸다.
곧바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었지만, 지금부터 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베르하드나 카스트로는 1년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나는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당장에 성마 대전만 해도 의 역사대로면 1424년에 벌어졌어야 할 일이었지만, 실제로는 1419년에 일어나지 않았던가?
모든 상황은 ‘반드시’ 보수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준비해야 그보다 나은 상황일 때 이점이 생기니까.
* * *
출발 이틀 전의 밤.
헤이즈와 아찔하고도 짜릿한 밤을 보낸 나는 그녀와 함께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내가 동…… 이라고 운을 뗀 시점부터 헤이즈는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한 듯 웃으면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는 헤이즈가 슬퍼하거나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폐하의 넓은 마음속에는 폐하 한 분만 계시는 것이 아니잖아요. 저는 이해할 수 있어요. 아니, 그런 분이시란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사랑했는걸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보다도 내 입장이 되어서 나를 이해해 준다는 것이 너무 기뻤다.
그런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말을 하면서, 사지(死地)로 떠나겠다는 남편을 잠자코 보내야만 하는 그녀가 아닌가?
입장을 바꿔서 만약에 헤이즈가 동방 대륙으로 떠나겠다고 하면 나는 과연 웃으며 보내 줄 수 있을까?
아마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가지 못하게 말렸을 것이다.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헤이즈는 내 모든 생각과 걱정을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었다.
“미안해, 헤이즈.”
“아니에요, 폐하. 저는 차원이나 시공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아요.”
“어떤 것을?”
“다가올 위험을 미리 대비하지 못하면, 더 큰 해일이 돼서 찾아온다는 것을요.”
“음…….”
“폐하께서는 북부의 작은 크리비아 소영지를 다스리던 시절부터 늘 미래를 대비하셨어요. 호르구스 영주, 바트만 영주, 신데르스 왕국의 일들. 이 모든 것에 폐하는 미리 움직이셨고, 결과는 늘 최고였죠.”
헤이즈의 말에 지난 과거의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자레드 지뢰를 터뜨려 마요르카 영지군을 몰살시키고, 아크론과 호르구스를 척살했던 일.
처음에는 넘지 못할 산이었지만, 훗날에 확실하게 짓밟아 버린 미세리아 영지의 카프리.
이제는 모두 망자(亡者)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뿐이었다. 승자는 나였으니까.
헤이즈가 내 얼굴을 사랑스럽게, 그리고 부드럽게 쓸어내린 뒤.
입가에 쪽, 하고 입술을 맞추고는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저는 폐하의 결정을 믿어요. 폐하께서 떠나야 한다고 마음을 먹으셨다면, 그것은 심사숙고 끝에 내린 위대한 결정이신 거예요.”
“헤이즈, 고마워.”
“다만 황후로서, 폐하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이것 하나만 허락해 주세요.”
“무엇을?”
“나스 대륙 동부에 방어선 건설 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실 것으로 알아요. 제가 그 현장에서 역부들을 독려할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그건…….”
“이 청을 받아주시지 않으면, 저도 떠나시지 못하게 폐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거예요!”
힘주어 말하는 헤이즈에게서는 남다른 결의가 느껴졌다.
말은 분명 한껏 누그러뜨린 듯한 장난스러운 어조를 띠고 있지만, 느껴지는 것이 달랐다.
자신도 황후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이야기 같았다.
맞다.
그녀는 이제 황제의 하녀가 아니라 이 나라의 국모(國母)다.
내가 함부로 부려도 되는 하찮은 존재가 아닌, 존중해 주어야 하는 국가의 중요한 한 축인 셈이다.
“그래. 내가 없는 동안 잘 부탁해. 네가 있다면 모든 역부들도 힘을 내서 일에 전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까다로우신 분들의 성격을 좀 더 맞춰 드릴 수도 있을 것 같고요!”
헤이즈가 피식 웃으면서 얘기하는 것이 아마 블랙 드래곤 카스트로를 뜻하는 것 같았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카스트로는 다른 동료들에게는 무척 시크하고 차갑게 굴었다는데.
이상하게 헤이즈 앞에서는 쭈뼛거리면서 얼굴이 잔뜩 붉어져서는 맥을 못 췄다고 한다.
아마도 헤이즈의 무한 긍정 기운과 천사 같은 성품이 블랙 드래곤의 차가운 마음에 공명을 일으킨 모양이다.
어쨌든 헤이즈가 현장에 있어 준다면야 나는 100%, 아니 200% 안심이었다.
혹여 생길지 모르는 부상자를 돌보는 데에도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폐하, 한 가지 진지하게 여쭤보고 싶은 얘기가 하나 있어요. 꼭 솔직하게 답해 주셔야 해요.”
살짝 분위기가 진지해졌을 뿐인데 왠지 질문의 무게가 보통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뭘까.
“말해 봐. 내가 너에게 솔직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솔직하겠어?”
“폐하와 저, 우리…….”
“응.”
“사랑스러운 아이는 얼마나 보고 싶으세요?”
“아.”
그 순간, 나는 머리가 띵하는 느낌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아기가 싫어서도, 헤이즈의 질문을 황당하게 여겨서도 아니었다.
헤이즈를 너무 사랑해서 결혼했고, 당연히 2세 계획도 세워야지 하면서도…….
아이를 몇이나 낳고 어떻게 육아를 할지 구체적으로는 전혀 생각한 바가 없었던 것이다.
“폐하를 쏙 빼닮은 예쁜 아이를 낳고 싶어요. 폐하의 얼굴을 볼 때마다 꼭 신을 조각으로 빚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남 말 할 처지는 아니거든, 헤이즈. 너처럼 예쁜 여자는 이 세상에 없어.”
“왜 없어요! 클로이 여왕님, 이자벨 언니, 엘라 단장님, 레나, 미아……. 너무 예쁜 동료들인 걸요?”
“전혀. 대륙에서 조금 발품 팔면 그렇게 생긴 사람들 많아.”
나는 자리에 없는 그녀들을 열심히 디스했다.
괜찮다. 원래 듣지 못하는 곳에서 하는 게 험담이니까.
“호호. 사랑해요, 폐하.”
“나도 사랑해.”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꼭…….”
“응?”
“폐하를 재우고 싶지 않아요!”
“갑자기?”
한 차례 뜨거운 시간을 보낸 이후로 소강상태에 접어드는 듯했던 우리는 또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황도의 밤은 무척이나 길었고, 우리의 뜨거운 숨결은 아주 잠시도 식을 줄을 몰랐다.
* * *
촤아아악-. 촤아아악-.
거칠게 불어오는 나스 대륙 동쪽의 바다, 나스카디아해의 파도가 나와 베르하드를 반겼다.
인적도 없는 곳에서 베르하드를 만났다.
보는 눈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지켜보는 눈이 있을 때를 대비해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타트라 넥스도 넉넉하게 10기 정도 챙겨 왔고요.”
“그 다크 엘프 녀석이 난놈은 난놈인 모양이구나.”
“기계에 어두우신 베르하드 님을 배려해서, 베르하드 님 전용 기체는 인공지능을 좀 더 섬세하게 탑재했다고 합니다.”
“망할 다크 엘프.”
“하하, 필요하시면 언제든 얘기하시죠. 아공간에서 다소곳하게 주인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베르하드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경직된 분위기를 풀었다.
서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긴장을 한 모습이었다.
나도 동방 대륙만큼은 경험이 단 1g도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예전에 대균열이나 나스 대미궁에 가던 때와는 시작점부터가 다른 것이다.
정답지가 없는 백지 상태에서 시험을 보는 느낌이었기에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베르하드 역시 과거에 동방 대륙을 탐사했던 것이 아주 짧은 기억인 상황.
그래서 작정하고 그들의 세계로 ‘침투’하는 이번 행보가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듯했다.
“일단 결계를 넘어가면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것은 대양의 몇몇 섬에 구축된 시설일 것이다.”
“차원 결계를 무너뜨리는 파괴 장치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결계를 넘어온 자들은 그 장치를 ‘심판의 창’이라고 했다. 동방 대륙의 지도자라는 놈들이 오래전부터 명명한 이름이라고 하더군.”
“심판이라……. 누가 누굴 심판한다는 건지. 기가 차는 이름이긴 하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일단 출발하시죠. 플라이 마법으로 안정적인 이동을 하면, 예상 시간에 딱 맞게 도착합니다.”
“그래, 가자.”
드디어 이동이 시작됐다.
나스 대미궁으로 가는 서쪽 바다는 무척 많이 다녔지만.
동해, 즉 나스카디아해로 향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이번만큼은 결계 너머의 세계에서 동료들의 든든한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
물론 동료들 이상으로 믿음직한 베르하드가 곁에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인원이 두 명인 만큼, 신중하고 조심해야 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1시간 동안.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망망대해를 가르며 날아갔다.
중간에 바다 괴수가 등장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몇 번 멈추기도 했지만.
일전에 아스모칼라가 내게 호되게 당하고 산산조각이 나서 죽은 덕인지 바다는 조용했다.
이윽고 도착한 결계 앞.
늘 그랬듯이 위아래로, 또한 좌우로 끝없이 펼쳐진 결계가 우리를 반겼다.
“카스트로의 말에 따르면, 천 년 전에는 이 결계가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지. 즉…… 둥근 세계를 따라 동쪽으로 쭉 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지. 한 바퀴 빙 돌아서 나스 대륙의 서쪽으로 올 뿐이다. 이 세계에는 나스 대륙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아.”
“그렇군요.”
전생에 과학 시간에 배웠던 판게아가 떠올랐다. 초대륙 말이다.
나는 대항해시대에 유럽에서 신대륙을 발견한 그런 그림을 생각했지만, 여긴 아닌 모양이었다.
“어쨌든 결계가 드넓은 대양을 집어삼킨 꼴이 됐다. 원래 우리 차원의 바다가 있을 자리를 다른 차원이 먹어 버린 것이 아니냐.”
“차원과 차원이 천년 그 이전처럼 돌아간다면, 잃어버린 바다도 되찾을 수 있겠네요.”
“그렇겠지. 어쩌면 천년 전과는 다른 새로운 바다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그 사이에 융기(隆起)한 신대륙이 생겼을지도 모르고.”
“혹은 우리와 분리되어 살고 있는 또 다른 생명체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
베르하드의 말에 나는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쳤다.
과연 차원 간섭으로 인해 잃어버린 바다와 새로운 세계에는 무엇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