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346
제 345화
107장. 협상 결렬 – 3화
끝없이 넓게 펼쳐진 평원.
사방이 탁 트여 있어 숨을 곳 하나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증강우를 기다렸다.
녀석이 정한 장소였다.
진선평에게 통신석을 통해 전달 받은 바에 따르면, 변수가 있을 확률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증강우가 날 위해서 배려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을 줄이려고 안전한 곳을 선택한 것이라고도 했다.
어차피 나는 상관없었다.
설령 증강우가 다수의 병력을 이끌고 온다고 하더라도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주변에 파악해 둔 지형도 꽤 있는 만큼, 텔레포트를 활용해서 얼마든지 회피가 가능하다.
“지구는 괜찮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구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차원 베디세트, 즉 동방 대륙을 볼 때마다 지구가 떠올라서였다.
혹시나 나중에 차원문을 통해 지구로 넘어갔을 때.
내가 아는 지구와 같은 모습이길 바랐다.
애초에 게임 에 들어온 내 삶만 봐도…… 지구가 변한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었다.
바로 그때.
키싱!
눈에 보이지 않아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강력한 살기가 멀리서부터 전해 오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이쪽으로 하나의 인영이 빠르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
살펴보니 온몸을 붉은색 슈트로 휘황찬란하게 감싼 상대였다.
마치 영화 속 슈퍼 히어로를 보는 것처럼 무척 화려한 등장이기도 했다.
“…….”
상공에서 적당히 자리를 잡은 상태를 유지하며 기다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붉은 슈트의 주인공은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멈추더니.
철컥. 철커덕.
얼굴을 가리고 있던 가면을 열어젖혔다.
‘네가 증강우구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
나스 대륙, 그리고 동방 대륙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있는 두 지도자의 만남.
통역 마법은 늘 사용이 가능하기에 대화를 나누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자레드 폰 유칼레스라고 한다. 너희들이 서방 대륙이라고 지칭하는 나스 대륙에서 넘어왔지.”
“자레드 폰 유칼레스. 이름부터 역겹군.”
증강우는 처음부터 강한 적의를 드러냈다. 나를 만나고 싶어 이 자리에 왔지만, 호의 따위는 없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듯했다.
“그래도 통성명은 하지?”
“난 증강우다. 인류 통합 연맹을 이끌고 있는 몸이지. 사실상의 황제라고 해도 무방하겠군.”
“거두절미하고 중요한 본론부터 말할게, 증강우.”
“말해라.”
“더 많은 피를 보기 전에 심판의 창을 내가 보는 앞에서 폐기하도록 해. 그러면 각자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거다.”
“왜 그래야만 하지?”
“이미 얘기했잖아. 더 많은 피를 보게 될 거라고.”
“아니, 내가 묻고 싶은 건 왜 우리가 피를 본다고 생각하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자신 있나?”
“흑살대가 단숨에 내 앞에서 전부 저승으로 떠난 것은 아직 학습이 안 된 모양이지?”
“흑살대는 흑살대고, 네가 종국에 상대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럼 이길 수 없는 이유는 또 뭐야?”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뒤에는 나를 믿고 후견해 주시는 주신 로케발 님이 계시다.”
“아, 신격? 그건 나도 있어. 다들 쉬고 계시는 것 같긴 한데, 내게 가호를 내린 신이 한둘이 아니거든?”
“허풍도 적당히 떨어라.”
“됐고. 나는 확실히 경고했어. 심판의 창을 폐기해. 그리고 정기적인 감시만 수용하면, 각자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을 거야.”
“자레드, 역제안을 하지.”
증강우가 화제를 바꿨다.
역제안이라…….
당연히 좋은 제안일 것 같지는 않았고, 어떤 창의적인 ‘개소리’를 할지 그것이 궁금했다.
“들어는 볼게.”
“네 실력이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모든 군대를 막을 순 없다.”
“그래서?”
“더 큰 피해를 보기 전에 항복한다면 너를 나스 대륙의 ‘왕’으로 인정해 주지.”
“오호, 황제인 나를 한 단계 낮춘다는 건.”
“당연히 황제의 자리에는 내가 올라야 하지 않겠나. 대신 네게 왕의 자리와 풍요로움을 약속하지.”
“뭐, 화끈하게 더 약속할 건 없고?”
“목숨도 당연히 살려 줄 것이며, 네게 소중한 사람들 정도는 건드리지 않는 자비를 보여 주지.”
“나스 대륙의 백성들은?”
“그건 내 백성들이니 내 소관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저항한다면 자유의 날개처럼 되겠지.”
“……개소리를 진지하게 하니까 되게 설득력 있게 들리긴 하는데, 지금 이런 얘기를 하려고 날 찾아온 거야? 좀 더 건설적인 얘기를 할 줄 알았는데.”
“누가 우위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군. 흑살대는 내가 가지고 있는 전력 중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협상 결렬이네, 그렇지?”
“응할 가치도 없는 제안을 하는 네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중히 고개 숙일 기회를 줬거늘.”
“누가 고개를 숙였어야 했는지는 앞으로 지켜보면 알겠지.”
“기어이 내게 대항하겠다는 것이냐?”
“응.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언제 네 부하들이 소리 소문 없이 죽게 될지 모르니까.”
“우리 인류 통합 연맹이 겨우 네깟 놈 한 명에게…….”
“에휴, 헛소리나 들으려고 내가 여길 왔다니. 시간이 아깝군.”
파앗!
증강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텔레포트로 현장을 빠져 나왔다.
녀석을 모욕하기 위해서 선보인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애초에 증강우와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지금의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증강우의 목적이나 목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는데,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증강우는 나스 대륙을 단순하게 합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아래 종속시키기를 원한다.
어쩌면…….
예전의 이카젤라처럼 신에게 바칠 제물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충분히 해 볼 만한 추측이다.
나는 증강우에게 네 부하들을 노릴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확실하게 풍겨 두었다.
증강우의 약점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나는 단독 행동을 하면서 내 안전만 챙겨도 되지만.
증강우는 자신뿐만 아니라 부하와 정예 부대의 안전까지 모두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전장이 나스 대륙이 아닌 자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더욱 신경이 많이 쓰일 터.
나는 대화의 본질에서 벗어나 논점을 흐리는 말을 해 놓음으로써 그에게 충분한 혼란을 심어 주었다.
“독고다이. 예전에 에서는 내 콘셉트이기도 했지. 단독 행동의 무서움을 보여 주겠어.”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공포감은 증강우에게 충분히 심어 준 듯하다.
이제 남은 것은 놈들의 기준으로 봤을 때, 껄끄러운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암살자가 되는 것. 생각보다 많은 혼란을 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 * *
얼마 후.
“돌출부의 형태로 있는 방어선은 전부 포기하겠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인원을 배치하는 자체가 묏자리로 만드는 형국이라.”
“나 역시도 좋은 생각이라고 보네. 방어선이 많아도 지킬 인원이 적으면 아무 의미가 없지.”
자레드와 베르하드 그리고 진선평은 기존의 거점을 버린 채 서쪽으로 꽤 멀리 후퇴해 있었다.
흑살대는 자레드에 의해 전멸했으나, 이어서 청위군과 백련대가 진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규군까지 모두 움직이면서 상황은 심각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무신경했을 자유의 날개가 이제 최우선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현재 우리 나스 대륙은 다가올 전쟁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많은 시간을 벌수록 나스 대륙은 안전할 수 있을 겁니다.”
“임무가 막중하군요.”
“만약 결계가 심판의 창에 의해 열리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자유의 날개 단원들을 우리 대륙에 받아들일 의사가 있습니다.”
자레드가 일찌감치 마음속으로 정리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정말 감사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럴 일이 없도록 저희는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앞서서 피를 흩뿌리며 죽어 간 동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진선평의 의지는 결연했다.
하지만 자레드가 그 말을 해 준 것만으로도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뻤다.
사실 앞이 보이지 않던 자신들의 투쟁에 자레드와 베르하드가 나타난 덕분에 밝은 빛을 보게 됐다.
이대로 조용히 흘러갔다면, 언젠가 자유의 날개는 모두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졌을 터였다.
“두 분께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고견을 들려주십시오.”
“이미 나는 짐작하고 있기는 하다만, 그래도 다시 한번 들어 보지.”
“우선 베르하드 님은 진선평 님과 함께 최대한 서쪽에 방어선을 구축해 주십시오.”
“어쨌든 서쪽으로 갈수록 인류 통합 연맹의 입김이 약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부터 단독으로 행동합니다.”
베르하드는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오랫동안 자레드를 곁에서 보아 온 만큼, 그의 뜻은 굳이 안 들어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독이라 하시면…….”
“증강우와 그 친위 세력들이 머물고 있는 첨탑. 그 주변을 모조리 초토화시키고 첨탑으로 들어갈 겁니다.”
“……!”
진선평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군이 아닌 ‘적’으로서 첨탑에 들어간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첨탑에서 증강우와 대면하기 위해 열 가지 시련에 도전하다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하거나.
아니면 시련을 극복하고 증강우를 만나 일대 격전을 치르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후자의 결과를 얻어 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증강우를 암살하겠다고 들어갔던 자들은 모두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침입자를 방지하기 위해 첨탑 내에 만들어진 시련은 ‘신’이 만든 것으로 알려지는 시스템으로서.
여간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첨탑 내부에서 각성자가 개입할 수도 있었다.
즉, 시련을 공략하는 도중에 갑자기 나타난 적을 상대해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들어온 ‘적’도 다시 되돌아나갈 수는 없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기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첨탑에 들어가시면 저희는 그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도움에 대한 고려 없이 홀로 들어가려는 계획이지요.”
“첨탑의 시련은 지금껏 생존자가 전무한 극악의 도전입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진선평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했다. 너무 적극적이다 못해 무모하다는 생각까지 들어서였다.
“어차피 첨탑과 증강우의 꿈을 박살 내지 않으면, 우리 나스 대륙은 끝내 전화에 휘말리고 말 겁니다.”
“자레드 님…….”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황제로서 나는 내 영토와 내 백성이 불길에 사라지는 것을 결코 보고 싶지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아는 모든 것을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고해 주실 수는…….”
“안 될 것 같네요. 진선평 님의 말씀은 늘 중요하게 새겨듣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아닙니다.”
자레드가 웃으며 답했다.
이미 결연한 의지로 굳어진 자레드의 결심은 확고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를 잡을 수 있으랴?
그래서 멀리 돌아가는 방법보다는 적의 핵심을 찌르는 정공법을 선택할 생각이었다.
승산은 충분히 있다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