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culus of Joseon RAW novel - Chapter 245
245화 믿음
1595년 8월.
이공학 지식 정리는 잠시 접어두고, 제도 정비와 법률 제정에 온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공학 지식은 더 정리해봐야 조선 제자들이 따라오기 버거울 것이다. 지금도 숨이 막힌다고 할 지경인데, 이 이상 더 빨리, 더 많이 가봐야 소용이 없을 터였다.
제도 정비와 법률 제정은 내가 미래를 조금 안다고 해서 설치거나 하지 않았다. 어떠한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해도, 이 세상에서 튀어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지독하게 많았다. 나는 그저 시행착오를 겪은 역사를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단순하게 도움이 되는 수준이지,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할 순 없었다.
몇 백 년 뒤를 살아본 나도 아리송하고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하물며 조선 사람들은 어떠할까. 왕이 없는 세상에서 어떠한 통치 방식으로 나라를 이끌어나가야 할지 결정하는 문제는 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해도 어려운 것이었다.
“쉬엄쉬엄하시오. 급하게 하기 보다는 완벽하게 하는 편이 낫소.”
나는 삼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에게 그리 말했다. 그들은 일전의 영유아와 아녀자 살해 사건을 뼈아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매사에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러면서 전쟁과 유사한 상황 발생 시, 국민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는지도 연구했고, 혹시 모를 폐단을 연구했다. 그렇다보니 갖가지 전담 연구소를 만들었다. 연구소는 여러 가지가 만들어졌는데, 법률 연구소, 행정 제도 연구소, 사회문제 연구소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전 세계에서부터 내가 꿈꿨던 연구소도 만들어졌다. 그것은 바로 ‘철학 연구소’였다. 나는 이전부터 이공학과 함께 인문학이 나란히 성장해야 된다고 봤고, 그래서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육성할 국가 전문 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인문학의 근간은 역시 철학이기에 국가 단위의 철학 연구소가 설립이 필요했다. 철학 연구소는 일반 사람들의 삶이 왜 힘든지, 어떤 방향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아름다움(美)이란 무엇인지, 조선이 갖고 있는 특유의 특색은 무엇인지 등등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
“이거 참 기묘합니다. 총리님이 사용하시는 공식 대부분이 제가 알고 있는 제 고향의 글자와 아주 흡사합니다.”
어느덧 조선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된 그레고리 신부가 내가 정리한 수학책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놀라워했다. 알파벳이고 그리스 문자고 여러 가지 서양 문자가 튀어나와있으니 그러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렇습니까? 이거 놀랍군요. 어쩌면 세상은 서로 이어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레고리 신부에게 가볍게 웃어보였다.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가톨릭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포르투갈 출신의 그레고리 신부는 원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임진년에 데리고 조선으로 들어왔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신앙심이 어찌나 깊은지, 매일같이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도 그는 저녁마다 올리는 미사를 빼먹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내가 종교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그레고리 신부는 조선에서 정식으로 포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딱히 가톨릭 신자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과학을 하는 사람이 신을 믿을 수 없다는, 약간은 고집스럽고 유치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것이 맞고 틀리고 간에, 교회나 성당, 절에 가면 이상하게도 어지럽고 거부감이 밀려든다. 아무튼 나는 종교와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종교가 가지고 있는 힘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삶이 괴롭고 힘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모를 때, 종교가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발휘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야 늘 총리님의 지원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레고리 신부는 사람 좋은 얼굴로 한껏 웃어보였다.
“아미타불, 전국 사찰의 주지들과 많은 상의를 했습니다. 그 결과,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괜찮겠습니까?”
“이미 결정한 일입니다.”
휴정(서산대사)은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것이 가톨릭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불교에도 해당되었다.
원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절은 땅 위에도 많았다. 그러다 조선이 건국되고 국가에서 숭불억제책을 펼치면서, 모든 절이 전부 땅 위에서 산속으로 올라가버렸다.
승려들이 품고 있던 한이 제법 컸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다시 땅 위에 절을 세울 수 있도록 허용해줬다. 하지만 전국 승려를 대표한 휴정과 유정은 오히려 지금처럼 절을 산속에 세우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개인의 수양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이미 지어놓은 사찰을 옮길 수 없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절을 하면 되나요?”
“그렇습니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종교의 힘을 믿는다.
비록 얼굴을 모르는 아이들이었지만, 내 자식으로 삼았던 아이들이었다. 자식이 죽었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부모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종교를 가져보기로 했다. 그레고리 신부가 세운 성당에도 가보고, 절에도 가고 있다. 어느 쪽이 내게 맞을지 모르나, 어쨌든 내게 필요한 건 정신적 안정이다.
***
신분제를 철폐하면서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큰 문제는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천민들이 스스로 삶의 방향을 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스스로 ‘어떻게 살아갈까’를 고민하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하는 것을 여간 고역스러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철학 연구소와 각종 인문학 연구소 연구원들, 그리고 이공학 교수들을 전국으로 보내시오. 그들을 각 지역으로 나누어 진로에 관한 강의를 하게하시오. 단, 모든 지역 사람들이 골고루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연구원과 교수들이 지역별로 순회하여 강연할 수 있도록 만드시오.”
그간 쌓아왔던 연구소 연구원들과 교수들을 활용할 기회가 왔다. 정치에서 어느 정도 물러났다고는 하나, 큰 계획은 삼정승을 비롯한 벼슬아치들과 함께 짜나갔다.
이번에 보낸 이공학 교수 중에는 천민 출신 야장 천음산도 포함되어 있었다.
“야장과 제련에 많은 인재가 필요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소질이 보이는 자들을 찾아내 튼실하게 육성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천음산은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힘없는 천민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느덧 그는 긍지 높은 교수가 되어 있었다.
천음산은 교육원에서 야장 기술을 가르치는 일뿐만 아니라, 각지에 세운 공장의 공정과정을 검토하고 시찰하는 일까지 겸하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이제 그의 지위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높아졌던 것이다.
아마 본인의 능력 하나만으로 천민에서 고위 공직자로 일약 출세한 좋은 사례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사람들 중에는 그가 살아온 자취를 따라가고 싶은 자들도 왕왕 나올 것이다.
또 다른 사회적 문제는 고용 시장의 변화였다. 그간 양반들은 천민을 사유재산으로 판단해 재산 증식을 도모하기도 했고, 드넓은 농지를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경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분제 철폐로 더는 그런 방식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다소 불만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일할 사람이 부족했다. 젊은이들 중 상당수가 전쟁에 동원된 것도 있지만, 각종 공장이 세워지면서 가용 노동력이 그쪽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양반들 중에는 땅만 많이 갖고 있고, 경작지를 놀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노동자들의 선택지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임금이 점차 인상되는 문제도 발생했다.
“경작 수용이 불가능한 농지를 국가에서 대여하는 건 어떻습니까? 농지를 대신 국가에서 경작해 일부는 소작한 농민에게 주고, 일부는 세곡으로, 나머지는 원래 땅 주인에게 돌려주면 되지 않나 싶습니다. 전에 총리님이 시행했던 ‘농업공무원’도 비슷한 취지이지 않습니까.”
“이는 임금을 적게 주려는 작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만약 줄 능력이 없다면 도태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로 땅이 갈 겁니다.”
“전국적으로 임금을 맞춰야 됩니다. 어느 분야는 임금이 높고, 어느 분야는 임금이 낮으면 쏠림 현상이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조정과 각종 연구소 내에서는 오늘도 요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도 내 나름의 결론을 갖고 있긴 했다. 하지만 내가 먼저 말하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최대한 말을 아끼는 중이다.
그들 나름대로 한두 번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해낼 것이다. 그것이 나라의 힘이기 때문에.
그리고 신분제를 철폐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여진족 사람들도 관리로 등용하게 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기회는 공평해야 되기 때문에, 최대한 지방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을 관리로 등용했다.
그 지역 유지를 그대로 관리로 수용하면 편하긴 하다. 하지만 그럴 경우, 자칫 중앙과의 연계나 통일된 행정체계 구축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지방에서 관리를 등용하되, 반드시 중앙으로 불러들여 일정 기간 동안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굴러가는지 관찰하게 한 뒤에야 돌려보냈다. 그리고 지방 행정으로 경험을 쌓되, 관할 지역을 순환하게 했다.
현재의 체제가 이렇다보니, 일본인과 여진족 출신 중에 조정 안에서 활동하는 자들이 꽤 많았다.
그 중에서 이근영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아 확인해달라며 보낸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나와 마주하는 내내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소곳하게 앉아만 있었다.
“내가 자네를 한 가지 시험해 봐도 되겠는가?”
“무엇을 말이옵니까?”
나는 내 잔에 탁주를 채우고, 상대방의 잔에도 술을 채우려했다. 그러자 상대는 재빨리 잔을 들어 공손하게 내가 주는 술을 받았다.
“자네는 권력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
상대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고는 하나, 그의 눈알이 아주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한 번 자네 생각을 읽어볼까?”
“…… 제 생각이라 하면…….”
그는 살짝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일별했지만, 내가 얼굴과 눈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이내 고개를 숙여버렸다.
“내가 알려주지. 자네는 말이야, 권력이란 주머니에 차고 있는 옥 정도로 생각할 게야.”
“…… 무슨 말씀이신지…….”
“권력이란 앞서 걷는 자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이지 않나. 그 주머니가 헤지고 헤져 너덜너덜해지면, 그 옥은 밖으로 튀어나올 테고, 그러면 주우면 될 일 아니겠는가.”
“…….”
“자네는 권력이란 쟁취하여 갖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면 줍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게야. 안 그런가?”
“…….”
“나는 말이지. 아직까지는 옥을 흘릴 생각이 없네. 그리고 자네가 줍는 것 또한 원하지 않지. 다만, 그 옥을 쪼갤 생각일세. 누구든 옥을 쥘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조각만 줍게 되는 것이고, 모든 옥 조각을 모아 원래의 옥을 만들더라도, 그 과정이 쉽지 않도록 만들 것이란 말일세. 내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겠나?”
상대는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는 척했다. 그런 다음 천천히 입을 열어 이렇게 대답했다.
“…… 욕심부리지 않겠습니다.”
그의 손은 연신 부들부들 떨어댔다.
이근영의 보고에 따르면, 일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김천일과 최경회의 군사를 반 정도 해산하여 조선으로 보냈다. 치안 총괄을 맡았던 박몽열마저 조선으로 넘어왔다. 그 바람에 일본 내에서는 은밀히 나를 밀어낼 세력이 형성되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근영은 일본에서 올라온 여러 보고를 토대로 눈앞의 남자가 나를 밀어낼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지목했던 것이다.
“욕심부리지 않겠다는 말, 기억하도록 하지.”
나는 술잔에 술을 비웠다. 그러자 눈앞의 남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비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