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ating Captain RAW novel - chapter (33)
33화 고발-4
작고 푸른 점에서 시작한 인류의 발걸음은 은하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지구 출신이 아닌 이들이 늘어날수록, 자원이 풍부한 행성이 발견될수록, 지구의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그러나 큰 격랑의 시대를 겪고, 자치적인 성격이 강하고 일종의 봉건제처럼 변했지만 그래도 전 인류가 단일 국가 하에 통합된 이후부터는 지구의 존재감은 급격히 상승했다.
전쟁의 상처를 극복해내고 예전의 푸르름을 되찾은 희망을 품은 행성이며, 동시에 은하에서 제일가는 권력을 쥔 인물이 기거하는 성역이 된 것이다.
‘예쁘다.’
주먹만한 크기로 보이는 지구는, 참으로 맑은 청색을 띠고 있어 전후복구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만 21세기와 다른 부분이 있다면, 지구를 쭉 가로지르는 저 굵은 선이었다.
“지구에는 거대 위성 트랙이 있다던데 정말이네요. 이 거리에서도 뚜렷하게 보이다니. 구름이 저기만 없는 걸 보면 기상도 조절하나본데요?”
우주에도 보일 정도로 뚜렷하게 보이는 저 검은 선은 바로 달을 속박하는 궤도 엘리베이터의 트랙이었다.
지구를 처음 보는 두 촌사람들은 푸른 행성을 눈에 각인하려고 하는 건지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21세기의 나는 빙의 이후로, 이곳의 나는 난생 처음으로 와보는 인류의 고향.
밝은 부분은 푸른 바다가 일렁이고, 그늘진 부분에는 우주를 압축한 것처럼 금가루가 뿌려진 아름다운 구슬.
이 시대 사람들이 지구를 보면서 느낄 감정은 물론이고, 달 표면에서 지구를 보았던 인류 최초의 우주인들이 느꼈던 감상 역시 간접적으로 와닿았다.
-우익! 밥! 우익! 줘!
슬라임이 내 바짓가랑이를 죽죽 잡아당겼다. 이 녀석은 보존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나란 걸 알아서 평소에는 네브라랑 놀다가도 밥때만 되면 내게 달라붙곤 했다.
감상이 깨졌잖아. 하기야, 네가 뭘 알겠니.
많이 먹고 쑥쑥 커서 귀쟁이나 많이 잡아주려무나.
-우으이이이익!
옛다 하고 보존식 봉투를 휙 던지니 개껌을 향해 달리는 개처럼 바닥을 구르듯 재빨리 기어갔다.
‘진짜 애완동물 하나 키우는 거 같네.’
다른 선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엔지니어 파비안, 의무관 이나시스, 뺀질이 니베아. 그리고 영영 파괴된 안드로이드들까지.
지금은 없는 선원들을 그리고 있자니 다시금 처한 현실이 성큼 다가와 존재감을 과시했다.
‘1.3조. 2조. 1.7조.’
남은 세 선원의 복구비용이 입 안에서 쓰라리게 맴돌았다.
뒷자리까지 세세히 계산해 합치면 대략 5.2조 크레딧이라는 눈이 뒤집어질 숫자.
거기다가 옵션에 따라 대당 수백억에서 수천억까지 가는 경우도 있는 5성급 안드로이드로 나머지 7명을 채우려면 총 비용이 6조는 가뿐히 뛰어넘으리라.
돈도 돈이지만 또 다른 통증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순위를 둬야 하다니.’
응급환자들 앞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의사의 심정이 이럴까.
마음 같아서는 뚝딱 셋을 살리고 싶지만 거금을 단번에 마련하기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비록 빙의 전에는 진 테일러란 사람의 성격상 사적인 교류가 그리 많지는 않았으나, 늘 선원들을 관찰하던 그의 기억을 나는 안다.
서로 울고 웃으며 일상을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일촉즉발의 사선도 같이 헤쳐 나가며 끈끈한 동료의식으로 이어진 선원들.
한때 살아있었던 이들이 지금은 없고, 이제는 그들에게 살릴 순위를 매겨야 한다는 것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화면의 일부만을 차지하던 달이, 화면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역시 미래세계관이라 이건가.’
익숙한 회색 표면은 온데간데없었다. 온갖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한 표면이 황량한 대지 대신에 건설되어 있었다.
달 전체가 도시화된 것이다.
과거 고요의 바다니 무슨 바다니 하고 이름 붙였던 분지들은 죄다 푸른 수원지가 되었고 온실 돔 안에 구성된 숲이 초록색 물감을 튀긴 것처럼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으, 저거 봐. 어지러워 죽겠다.”
네브라가 주변을 보고 인상을 썼다.
달 정거장 주변에는 온통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우주 광고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여긴 규제가 없나? 보통 이런 건 우주선 경로 방해로 법에 걸리던데.”
[아, 저건 광고가 아니라 일종의 역사 유적이에요.]관련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던 우주 시대 초기에 우주를 그저 맘대로 쓰기만 하면 되는 공간으로 인식했던 당시 상인들의 인식을 재현한 것이란다.
그 말대로, 우주 공간에 떠 있는 게 아니라 거대한 특수 유리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
[밖을 보니 다 도착한 모양입니다.]화물선의 선원 숙소에 있던 정보부 요원 발러의 연락이 내게 들어왔다.
“아 예. 이만 나오시죠. 출구 쪽에 계시면 바로 나가겠습니다.”
네브라가 얼른 슬라임을 주워들어 가방에 쑤셔 넣었다.
저 슬라임의 스캔이 안 되는 특성 때문에 소행성대의 까다로운 검역 절차도 간단히 통과할 수 있었다.
“너 절대로 나오면 안 돼. 안 그럼 살처분 당한다? 무슨 말인지 알지?”
-우익!
긍정인지 아닌지 모를 대답과 함께 정체불명의 외계생명체는 순순히 가방 안으로 들어갔다. 지퍼 끝이 살짝 벌려놓은 걸로 보건대, 저기로 밖을 보는 모양이다.
“언니. 간수 잘 해. 제발. 손가락 잘못 까딱해도 바로 감옥행인거 알지?”
“내가 전직 경찰이다. 그런 것도 모르겠니?”
“언니 문제는 알면서도 한단 거야.”
에나가 방긋 웃으면서 말로 명치를 때리자 네브라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아. 아직 나가진 않으려고요. 시간 좀 걸릴 겁니다.]내 옆에서 벌어지는 난리법석을 모르는 홀로그램 통신 너머의 발러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우리는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 달 상공 정거장에 화물선을 주차했다. 그리고 달과 지구에서 지켜야 할 전화번호부 뺨치는 두께의 책을 전달받았다.
전자문서가 아니라 책이라니. 인류의 고향이니 그만큼 아날로그 감성이 유행인 걸까?
[어지간한 건 제가 알려드리겠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어기게 될 수도 있으니까 한번 쭉 훑어보세요.]앤젤라는 AI답게 이 두터운 책 내용을 바로 저장할 수 있어서 우리 셋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행동도 아니고 말도 조심해야 돼?”
“경범죄 목록은 다 외우고 있었다 생각했는데, 여기는 범주가 왜 이리 넓어?”
투덜거리면서 경찰의 의무는 힘들다고 중얼거리며 책자를 정독하는 네브라.
“지구 전체가 환경보호구역이라 대기권으로부터의 진입이 금지라니. 역시 인류의 고향……”
“함장님. 지도 봐요. 이야, 진짜 죄다 다채롭네요. 한 행성에 이렇게 다양한 지형과 기후를 가진 건 드문데. 언니 이거 봐.”
규칙보다는 관광객에게 제공되는 안내서와 지구 설명 부분에 더 관심을 갖는 에나.
‘별 걸 다 지키라 하네. 책자에 버젓이 있는 걸 보면 사법(死法)은 아니겠고.’
‘지형이 많이도 변했네. 전쟁이라도 있었나? 뭔 구멍이 이렇게 많이 뚫려 있, 한반도가 사라졌어! 한반도가!’
그리고 21세기와는 너무나도 달라진 지구 상황에 기겁하는 나.
그 와중에 발러 요원이 통신을 걸어왔다.
[책자 받으셨지요? 힘드실 겁니다.]책자라 불릴 수준을 넘어서 사전이던데요. 내리는 데 시간 걸릴 거라는 게 이런 의미였어?
[저도 그거 완독하고 머리에 새기는 데 제법 걸렸습니다.]허허 웃으면서 코 밑을 훑는 발러가 제법 얄미웠다.
***
머리가 지끈거리는 규칙을 대충이나마 암기하고, 타이탄과 소행성대에서 행했던 수속과 검역보다 훨씬 까다로운 수색을 거치고 나서야 진 일행은 달 표면에 진입할 수 있었다.
관광지화된 달에 세워진 온갖 건물들이 내뿜는 화려한 불빛들이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관광을 즐길 시간은 없었다.
자그마치 황제의 부름이다. 시간을 지체하는 건 불가능하다.
일행은 발러의 안내를 받아 곧장 달의 내부로 들어갔다.
인간의 발생지를 지켜볼 수 있는 좋은 관광지로써의 떠들썩한 표면과는 달리, 지하는 정반대로 조용하고 차가웠다.
지하로 진입하자마자 일행을 반긴 것은 딱딱하고 거무튀튀한 철골이었다.
화려한 지상과 대비되는 냉정하고 무거운 시설이 층층이 존재하고 있는 모습은, 마치 아무리 아름다운 미녀라고 해도 내부는 살점과 뼈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연상케 했다.
일행은 금속 원통 형태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빠르게 내려갔다. 사방이 은백색 금속으로 막혀 있어 통조림에 갇힌 식재료의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분위기가 지상과는 많이 다르네요.”
“왜냐면 여기는 지구로 들어가는 유일한 육로니까요.”
진에게 대답하는 발러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규칙은 숙지하셨지요? 길에 표시된 경로대로만 칼같이 가셔야 합니다.”
달의 지하는 통째로 삼엄한 군사기지였다.
“지구가 무슨 천국이라도 되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입국이 까다로운 걸 보면요.”
“천국이라……”
진의 농담에 발러는 뭔가 씁쓸하게 중얼거렸지만 정작 진은 정신을 딴 데 놓고 있었다.
그는 지구의 현 인구가 20억에 불과하다는 거라던가, 안내서의 지구 지도에 포탄구멍처럼 호수가 이곳저곳 생겨났단 것 등의 의문들을 머릿속에서 휘젓느라 바빴다.
오래 전에 바르닥 전쟁보다 훨씬 큰, 인류 역사를 관통한 거대한 우주 전쟁이 있었으니 덩달아 피해를 본 거라는 막연한 추측뿐이었다.
‘넌 알아?’
[아뇨. 지구에 관한 건 데이터 베이스에 없네요. 인터넷 검색이라도 하고 싶지만 여긴 외부 전파가 차단된 데라서. 아잇, 이 슬라임이 진짜! 아, 계기판을 밟고 다녀서요 헤헤. 달 표면에서 지구 정보라도 좀 더 찾고 올 걸 그랬나봐요.]‘함선에서는 안 되나봐?’
[본체는 함장님이랑 있고 함선에는 제 원 역할인 관리기능만 옮겨놨거든요. 저도 전파 차단 때문에 처음 알았네요. 그런데 무슨 기술인지 안 알려주실 건가요? 분명 전파가 차단되어서 제가 아예 함선 상황을 몰라야 하는데. 그것만은 되다니 말이죠.]흑백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은 군사기지를 쭉 내려간 엘리베이터는 드디어 마지막 층에 도착했다.
땡
삼엄한 곳의 엘리베이터 치고는 그 알림음이 1500년 전과 별반 다르진 않았다.
“저게 바로 달 궤도 엘리베이터입니다.”
거기에는 우주선만한 검은 원통이 있었다. 주변에 금속과 고무로 이뤄진 관들이 덕지덕지 붙은 모습이 메두사의 머리카락을 보는 듯했다.
웅웅거리는 엔진음이 동굴 같은 내부에서 마구 울렸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찬바람이 피부를 훑었다.
휴양지처럼 아름다운 푸른 행성으로 가는 길목이었지만, 쾌활한 안내인 대신 엄숙한 군인들이 진 일행을 마중 나왔다.
그들은 정밀 스캐닝을 통해 한 번 더 몸수색을 실시했다.
스캐닝은 그들 역시 받았다. 의심암귀가 뇌리에 낀 진이 그들 모두가 인간이 맞나 확인한 것이다.
앤젤라의 스캔과 페로몬 감지가 있으니 문제가 있다면 먼저 알려줄 테지만 진은 수동적으로 있을 생각이 없었다.
“통과.”
노란 화살표로 바닥에 표시된 경로를 이탈하는 즉시 총알이 날아올 것 같은 경직된 분위기에 에나는 몸을 움츠렸고 네브라는 혀를 내둘렀다.
발러는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르자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며 손을 내밀었다.
“제게 허락된 건 여기까지입니다. 지구로 내려가시면 다른 요원이 안내를 해줄 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하. 별거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지구에 도착하면 이걸 꺼내보시면 됩니다.”
편지봉투였다. 역시 정보를 처리하는 기관답게 아날로그적이었다.
질문할 새도 없이 발러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어쩐지 그 뒷모습이 도망치는 것처럼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