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22
외전 172화. 칼자루가 없다 (6)
서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번째라……. 나는 분명 세 가지를 준비했는데 말입니다.”
“네 번째 선택지가 존재할 거라, 저는 믿습니다.”
“그건 또 흥미로운 발언이군요.”
느긋하게 자신의 잔을 채운 서필이 손가락으로 잔을 튕겼다.
“나도 바쁘지 않을 때는 제법 술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폭음은 멀리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끊어 마시며 주향을 즐기는 취미가 있지요. 하지만 말했듯, 내게는 시간이 별로 없어요.”
술을 반만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 서필의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
“내가 이 잔을 몇 번 꺾어 마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잔이 다 비워지기 전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냥 속 편하게 세 번째 선택지로 밀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이천상이 툭 뱉었다.
“다섯 번째까지입니다.”
“음?”
“내게 선택지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까지 있습니다.”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뭘 골라도 저는 죽습니다. 세 가지 선택지라 했지만, 결국은 하나입니다.”
“…….”
“정말 세 가지를 주고 싶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백뇌각의 부각주 정도 되는 분이라면 본인 말에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필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어차피 죽는다?”
“사령으로 돌아가면, 이미 위험 인자로 낙인을 찍었으니 암살자를 보내거나 어떤 구실로든 체포를 할 겁니다. 그리고 죽이겠지요. 고로, 첫 번째 선택지를 채택할 순 없습니다.”
“…….”
“군사부의 세작이 되는 선택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진정 하늘이 내린 천재라도 상부에서 보기에는 이제 막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햇병아리에 불과할 터. 지켜보고 말 것도 없이 결단만 내리면 되는 인재인데,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살려 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닙니까?”
“……!”
“고로, 두 번째 선택지 역시 채택할 수 없습니다.”
서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천상이 말을 이었다.
“세 번째 선택지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즉, 부각주님은 뭘 골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선택지를 내밀고서 저를 농락하고 있는 겁니다.”
“……흐음.”
“농락하는 거야 부각주님 자유지만, 적어도 뱉은 말을 지키려거든 결과가 다른 선택지를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걸 건네겠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저도 막 나가는 수밖에 없지요.”
“막 나간다……. 그거참, 우습기 짝이 없으면서도 묘하게 무서운 답변이로군요.”
말을 마친 서필은 가만히 이천상을 바라보았다.
똑같다. 여전히 읽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이놈은 뭔가.’
사람이라면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감정이란 게 엿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감정이 없으면 이런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즉, 이천상 이놈은 멀쩡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읽을 수가 없다. 눈빛, 표정, 분위기 그 어떤 걸 살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티끌만 한 정보도 긁어낼 수가 없다.
“…….”
한참 이천상을 주시하던 서필이 반만 남은 잔을 다시 채웠다.
“당신이 생각하는 네 번째 선택지가 뭡니까?”
“무형의 힘으로 찍어 누르려 하는 사람에게 대응하려면 둘 중 하나밖에 없습니다. 압도적인 칼질로 베어 버리거나, 나 역시 똑같은 무형의 힘으로 대응하거나.”
“오호? 무형의 힘이라는 것은 결국 권력을 뜻하는 것인데, 어떤 식으로 대응하려 합니까?”
“권력은 아니고 인맥입니다. 필요에 따라 종이 쪼가리만도 못해질 인맥이지만, 적어도 당장은 쓸 수 있겠지요.”
“흥미진진하군요. 그래서 뭡니까? 네 번째는.”
“형법당주에게 이곳에 모인 군사부 쪽 인물들을 포박하라는 서신을 보내는 것이지요.”
서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무 죄도 없는 우리를 포박하라고 서신을 보낸단 말입니까?”
“부각주님은 죄가 있어서 저를 죽이려 합니까?”
“…….”
“한 가지 결과를 세 가지 선택지로 쪼개어 압박하시는 분에게, 저 역시 나름의 선물을 드려야지요.”
“설령.”
서필이 또 한 번 잔을 꺾어 마셨다.
“그렇다 한들, 멀쩡히 서신을 보낼 수 있도록 놔두겠습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지금 내 무공은 당신을 압도해요. 아닌 말로 마음만 먹으면 열 합 안에 제압이 가능할 겁니다. 죽일 생각이라면 다섯 합으로도 충분해요.”
실제 결과를 떠나, 이천상은 서필의 자신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럴 가능성이 커.’
서필의 무공은 강하다.
기도를 철저하게 제어하고 있어 그 깊이를 전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천상의 시선으로 서필은 환희원주에 비해 큰 모자람이 없는 고수였다.
대단한 실력이었다. 머리 쓰는 사람들만 모였다는 군사부, 그중 백뇌각의 이인자가 그만한 무공을 연성했다면 각주와 총군사의 무공이 어느 정도일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천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싸운다면 그렇겠지요.”
“도망이라도 치겠다, 이겁니까?”
“목숨 걸린 일입니다. 도망이 아니라 더한 짓이라도 하지요.”
“의외로군요.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도주 따위는 선택하지 않을 사람으로 보았는데.”
“어떤 모습이라도 의외일 수밖에 없지요.”
“음?”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부각주님은 지금, 저라는 사람을 제대로 읽지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
오만하기 그지없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저보다 더 섬뜩한 말은 달리 없을 것이다.
이천상은 서필이 자신의 눈빛과 표정 등을 읽고 최대한 많은 정보를 뽑아 먹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필은 이천상을 제대로 읽지 못했으며, 심지어 본인의 행동을 상대방에게 철저히 읽히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금 두 사람은 끊임없는 승부를 겨루는 중이며, 서필은 지속적으로 패배하고 있었다.
“…….”
착 가라앉은 서필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차가워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천상의 목을 꺾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고민입니다.”
“…….”
“당신의 낯가죽을 뜯어 그 속내를 보고 싶긴 한데, 뭘 어떻게 해도 내게 손해일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거든요.”
무서운 사람이었다.
이천상은 지금 이 순간, 서필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무서운 사람은 자신을 숨길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 상대방에게 제 감정을 들켜도 당황하지 않고, 화가 나도 스스로를 철저하게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다.
서필이 딱 그런 부류였다. 그는 분명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분노로 주먹을 들지도 않았고 물건을 던지지도 않았으며 욕설을 하지도, 같잖은 협박도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의 언변.
왜 서필이 군사부에서도 최중요 인물로 손꼽히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속도에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아래에 있는 친구들은 다 놔두고 도망칠 작정입니까?”
“그럴 수는 없지요. 그래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둘 중 하나를 억지로 욱여넣을 생각입니다.”
“이제는 뭐, 선택을 하라 마라 따위의 말이 필요가 없어졌군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 그럼.”
다시 깍지를 낀 서필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물었다.
“의미는 없지만 남은 패까지 다 까 봅시다. 다섯 번째는 뭡니까? 설마 백골신마 장로님이라도 부르려 합니까?”
“환희원과 전쟁을 유도하는 겁니다.”
서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환희원주와 독대했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모종의 거래라도 했습니까?”
“그걸 알려 드릴 수는 없지요.”
“설령 그렇다 한들, 환희원이 군사부의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군사부의 상대는 될 수 없을지 몰라도 천마신교를 상대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
“환희원이 무너지면 천마신교는 그대로 패망합니다.”
순간 서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놀란 것은 대담하게 신교를 들먹여서가 아니었다.
‘알고 있다?’
이천상은 환희원이라는 조직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환희원은 어떤 순간에도 정치적인 노선을 걷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환희원이 어떤 권력자와 함께하는 순간, 신교 재정의 흐름이 바뀐다.
당장 군사부만 해도 환희원에게 지원비를 받는 상황이었다. 위세나 권력만 보면 감히 환희원은 군사부에 비할 수 없겠지만, 환희원이 잘못되는 순간 군사부고 뭐고 다 날아가는 것이다.
이천상은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 죽고 싶지 않으면 이만 물러나라.
실제로 그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이 순간 부차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서필은 이천상이 교내의 각 조직에 실린 이름값과 무게감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 자체에 경악했다.
“누굽니까.”
“…….”
“누가 당신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 준 겁니까.”
“…….”
“백골신마 장로님이 뛰어난 분은 맞지만, 이 정도 식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 자체를 잘 못 하는 분이에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설마 백골신마 장로님이 당신에게 이런 부분들을 다 알려 줬다는 겁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형법당주입니까?”
“저는 그 사람에게 있어 날이 잘 드는 칼 한 자루에 불과합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이천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배워야만 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에 저는 큰 의문을 느낍니다.”
“……?!”
“관찰이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었습니까?”
관찰만으로 깨달았다는 소리였다.
서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고작 관찰 좀 했다고 교내 권력의 흐름을 읽고, 조직의 중요성을 파악할 줄 안다면 정보를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이들은 다 굶어 죽어야 할 것이다.
“나와 장난하자는 겁니까?”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장난 같은 걸 할 만큼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럼 정말로 혼자 깨달았다고?”
“문제라도 있습니까.”
서필은 자신의 말투가 달라진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물끄러미 이천상을 보던 그가 단숨에 잔을 비웠다.
“안 되겠군.”
우우우웅.
잔을 쥔 서필의 손에 은은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무서운 공력이었다. 완벽하게 제어된 내공을 순식간에 집결하는 능력이 그야말로 대단했다.
“다소 무리하는 감이 있어도, 당신은 여기에서 죽이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럴 순 없을 겁니다.”
“도주할 생각인가? 아니면 연막탄이나 독탄 따위라도 가지고 있나? 미안하지만 그런 건 내게 통하지 않아.”
“왜 공격하지 않습니까?”
“……?”
“방금,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났습니다. 그건 부각주님도 잘 알고 계실 텐데 왜 손을 쓰지 않습니까? 공력까지 집결시킨 순간 우리에게 남은 것은 칼부림 외에 없습니다.”
이천상의 말이 옳다. 서필은 이천상에게 살심을 품었다.
한번 결정이 어렵지, 결정이 나는 순간 행동에 들어간다. 서필은 단 한 번도 결정 내린 사안 앞에 고민한 적 없었다.
한데 왜 공격하지 않는가?
이천상의 눈이 잔을 쥔 서필의 손을 향했다.
“마치 밧줄로 묶여 있는 것 같습니다.”
부르르르.
서필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이 힘은?’
스스로 인지조차 못 하는 힘에, 죽이겠다는 욕망을 품고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답은 하나다.
그의 몸과 마음을 단단하게 지켜 주고 있는 마공을, 눈치조차 채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 힘이 파고들어 행동 자체를 억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끼이익.
최상층의 문이 열렸다.
“지붕에서 낮잠 좀 자려 했더니만 이거야 원, 귀가 가려워서 잘 수가 있나.”
하품을 쩍 하며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서필의 턱 근육이 불거졌다.
“……백골신마 장로님.”
“군사부가 당장 움직일 거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한가하게 내 사람들과 밥이나 축내고 있진 않았습니다.”
이천상이 턱으로 잔을 가리켰다.
“한 잔 더 드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