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ruction of the Fortress RAW novel - Chapter 194
194
第三十九章 독보(獨步) (4)
정신이 맑다. 환하다.
육신은 아무런 느낌을 전해주지 않는다. 오감이 무력해진 상태에서는 육신 자체를 잊게 만든다.
오직 맑은 빛만 살아남는다.
이런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집중이다. 집중이라는 말조차도 필요 없다. 전체가 올곧이 하나가 되어 흐른다.
내공을 생각하면 기혈 흐름도가 그려진다.
초식을 생각하면 움직이는 육신이 보인다. 일체 잡념이나 망상이 사라진 상태에서, 오로지 움직임만 지켜보는 상태에서 허실이 선명하게 파악된다.
마공관에서는 참 많은 것을 생각했다.
마공관에 소장된 마서를 세심하게 살폈다.
사실 ‘살폈다’는 말도 어폐가 있다. 그저 떠올리기만 했다. 허면 마공들이 물 흐르듯 흘렀다.
툭! 툭! 툭!
어느 마공이나 가로막힘이 나타난다.
잘못된 부분들이다. 가로막힌 부분을 방치하면 육신에 해가 된다. 정신을 타격한다.
마공관 마서들이 정공이 되지 못하고 마공이 된 이유다.
가로막힌 부분들을 제거한다. 제거할 수 없으면 돌아간다. 사실, 돌아가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래도 무공 위력은 별반 차이가 없다.
혈영마공에도 장애물이 많았다. 기혈이 혈영마공 경락도대로 흐르지 못하고 이리저리 꺾였다.
여기서 약간의 시간 차이가 발생한다.
보통 사람은 파악하지도 못할 정도로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검왕 같은 사람에게는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아주 긴 시간 차이가 일어난다.
그래도 종국에는 별반 차이가 없는 마공이 탄생하기에 지켜봤다.
이제는 아니다. 그 차이도 줄여야 한다. 지금 그가 지닌 무공으로는 촌장도 누미도 상대하지 못한다.
파괴!
장애물을 파괴하면서 지나가야 한다.
스르르륵!
물길은 장애물을 피한다. 덮어씌우거나 뛰어넘지 못하고, 무너트리지도 못하고 옆으로 굽이친다.
기혈 경맥도가 그려진다.
원래 혈영마공에서 제시했던 경맥도가 아니다. 고요함이 만들어 낸 정공(正功)이다. 인체에 아무런 탈이 없는, 정신에 충격을 주지 않는 무공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혈영마공에 적벽검문의 무공을 심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또 틀린 말이다.
혈영마공에 적벽검문의 심법이나 초식을 가미하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 말한 것이라면 틀렸다.
혈영마공을 심안(心眼)으로 관찰한다.
이 심안…… 육신이 죽은 상태에서 오로지 정신만으로 보는 심공법(心功法)이 적벽검문 무공이다. 적벽검문 최후최대비처(最後最大秘處)라고 알려진 것이다.
– 적벽검문 최후최대비처.
적벽검문은 사라져도 적벽검문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적벽검문 최후최대비처가 존재하는 한, 적벽검문이 무너졌다고 할 수 없다. 최후최대비처는 반드시 열릴 것이니.
적벽검문 최후최대비처는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원 사람들 모두가 특정한 장소에 무공을 남겨두었다고 생각한다. 또는 온갖 보물을 남겨두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무인 집단을 숨겨두었다고 생각한다.
모두 틀렸다.
적벽검문 최후최대비처는 내 안에 있다.
육신을 잊어버리고, 정신 또한 잊어버리고, 맑은 눈만 존재하는 곳이 최후최대비처다.
맑은 눈은 판단을 하지 않는다. 생각도 하지 않는다.
특정한 무공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조절을 하지는 못한다. 그저 볼 수 있을 뿐이다.
잘했다, 잘못했다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물이 장애물을 파괴하지 못하고 옆으로 흘러간다. 파괴를 원했는데, 피해서 간다.
이 순간,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냥 본다.
다른 마공도 연이어 일어난다. 마공관에서 지켜봤듯이 지금도 지켜본다.
달라진 것은 없다.
그는 마공을 변형시키지 못한다. 심공이 가르쳐준 대로 운용할 뿐이다. 육신에 해가 없고, 정신에 타격이 가지 않는 정공으로. 그것이 싫으면 마공을 수련해야 한다.
허나 이것 또한 최후최대비처에서 빠져나온 후에 선택할 문제다. 심공법 안에 있을 때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멍하니 지켜보는 것이 모두다.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지켜봤다.
그가 펼쳐낼 수 있는 최강 무학들이 줄줄이 지나간다. 현재, 그의 내공과 감각으로 펼쳐낼 수 있는 최강 무학들…… 경락도와 움직임이 지나간다.
예전에 비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맑게 지켜보던 눈마저 사라진다.
이제는 암흑이다. 보는 눈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다. 새까만 어둠이 밀려온다.
“후웁!”
숨을 깊이 들이켰다.
퍼뜩 눈이 떠진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벌떡 일어났을 때처럼, 세상이 낯설게 다가온다.
“아! 일어나셨어요!”
유화아가 활짝 웃으면서 반겼다.
음악삼귀도 보인다. 입술이 새까맣게 타고, 눈이 붉게 충혈된 채 그를 내려다본다.
“아이구! 꼭 죽은 줄 알았습니다.”
“정말입니다. 숨이 완전히 멎었었어요. 심장도 뛰지 않고. 그래서 운명하신 줄 알았죠.”
음악삼귀와 사귀가 서둘러 말했다.
검왕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일단은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함이고…… 이들이 말한 상황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심공법은 육신을 완전히 죽인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뿐이 아니다. 아예 심장까지 고정시켜 버린다.
그런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일단 죽음을 경험한다. 죽음이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된다. 본인 스스로 숨이 멎는 것까지는 느껴지니까. 죽음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다.
검왕이 지닌 무공 전부를 되돌린 순간이 매우 길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목이 마르군. 물 좀 갖다 줘.”
검왕이 깨어나서 한 첫 말이었다.
촌장에게 패했다.
누미에게 패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절대가 되었다. 번복하고 싶어도 번복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다시 싸우면? 또 패한다.
최후최대비처에서 모든 무공을 돌이켜봤다.
변한 게 없다. 마공을 생각하면 장애물이 불쑥불쑥 일어나는데, 그 중 어느 것 하나 부수지 못했다.
심공법 속에서는 부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세상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심공법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제시했다.
무공을 더 강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요소는 남아있다.
마공을 마공으로 수련하는 것이다. 마공을 정공으로 순화시키지 말고 원래 그대로 수련하면 지금보다는 훨씬 강해진다. 마공에서는 장애물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공을 수련한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지 못한다.
마공이 정공보다 반드시 강하다는 보장도 하지 못한다. 마공이 가리키는 대로 따라갔지만 정공으로 순화시켰을 때보다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심공법은 모든 부분에서 최상의 결과만 제시한다.
검왕은 고민했다.
마공을 수련한 결과 몸과 정신만 망치고 무공은 예전보다 못해질 수도 있다. 허나 분명한 것은 이대로는 촌장이나 누미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공을 수련해야 하나?
검왕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공조식에 돌입했다.
기혈을 끊는다. 오감을 끊는다. 그러다 보면 몸은 어느새 깊은 곳에 들어가 있다.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굉장히 평온하고 아늑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기분 좋은 곳이다.
텅!
한순간, 심장이 떨어져 나간다.
“후웁!”
큰 숨을 들이켜면서 운공조식을 풀었다.
그의 운공조식은 여느 사람들의 운공조식과는 많이 다르다. 운공조식에 들었을 때, 그의 육신은 철저하게 무방비 상태가 된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달려들어도 방어하지 못한다.
육신은 아픔을 자각하게 되어 있다.
뱀이 와서 깨물면 앗! 하는 느낌이 든다. 불이 닿으면 뜨겁다는 느낌이 일어난다.
이것이 육신이 하는 일이다.
육신이 이런 일을 게을리하거나 하지 않으면 큰일이 벌어진다. 자칫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검왕은 이런 상태로 들어갔던 것이다.
육신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직 안만 들여다본다. 무공만 본다.
무공은 몇 번이고 말했다.
정공! 장애물을 부술 방법은 없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마공을 마공답게 수련해야 하는데…… 심공법은 길을 일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상태로 부딪치면 똑같은 결과만 반복될 뿐이다.
“후후후!”
검왕은 실소를 흘렸다.
결국……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었다. 이번 혈루마옥 사건을 정리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던 게다.
“이제는 편하게 지낼 수 있겠군.”
죽음에서 돌아온 후, 두 번째로 한 말이다.
정사대전이 의외로 길어지고 있다.
“뭘 망설이는 거지?”
“거기 떼거리들로 모여 있잖아. 막상 모이고 보니 겁이 나나 보지. 한 번 붙었다 하면 어느 한쪽이 아작 나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거잖아. 쉽게 붙을 수 있겠어?”
“그래도 승산이 있으니까 싸움을 건 거 아냐?”
“검왕인가 뭔가 하는 놈이 싹 빠졌다나 봐.”
“검왕이? 왜? 어디로?”
“낸들 아냐.”
사람이 둘만 모이면 정사대전으로 수군거렸다.
검왕은 그들이 하는 말로 무림정세를 파악했다.
그가 지금 들은 말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지만 대충 윤곽은 잡을 수 있게 해준다.
정사대전이 아직 유효하다.
혈천성 성주가 제법 약속을 잘 지켜주고 있다. 또한 무당파 장문인도 약속대로 해주고 있다.
궁금한 점은…… 누미 일행이 어디로 사라졌느냐 하는 것이다.
강호로 나간 누미가 혈겁을 일으킬 줄 알았다. 헌데 조용하다. 어디서 피 보라가 일어났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녀도 정사대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인가?
아니다. 그녀는 아주 큰 판을 계획하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검왕은 누미가 취할 행동을 예측한다. 검왕 또한 누미처럼 한때는 절대강자가 되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절대강자가 취할 행동을 안다.
소림사를 공격하는 것? 망설이지 않았다.
무당파를 공격한다는 것?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사대전? 솔직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혈천성이 협조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것이 절대강자의 움직임이다.
누미가 그런 행동을 취하고 있다. 그녀는 지금…… 정사대전을 향해 가고 있다.
그녀의 적은 누구인가? 정인가, 마인가?
정사 모두다. 혈천성도 적이고, 무당파도 적이다. 정사대전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검을 휘두르려고 한다. 싸움을 하는 게 아니라 전쟁을 벌일 생각이다.
충분히 가능하다. 누미에게 중평이 따라붙었다면!
녹천은 많이 손상되었다. 혈루마옥에서 나온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죽었다. 적벽검문을 공격할 때 죽었고, 내분으로 죽었고, 검왕과 싸우면서 죽었다.
녹천주도 죽었고, 화천도 죽었다.
그래도 녹천은 여전히 강하다. 녹천 무인들 개개인이 절정고수나 다름없다. 그들 개개인이 십마와 맞선다. 혈천성주를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다.
더욱 무서운 점은 중평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점이다.
검왕이 녹천을 상대할 때, 중평은 쥐죽은 듯이 숨어 있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체 무림사에 개입하지 않았다.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한 채.
그들이 누미에게 붙어 있다면 이번 정사대전은…… 무림 패배가 확실하다.
“밥들 다 먹었으면 출발할까?”
“역시 정사대전입니까?”
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빠르게. 눈치 볼 것 없으니까. 가장 빠른 말을 준비해서 전력으로 질주해야겠어.”
“그런 점이라면 걱정마십쇼. 이놈들이 누굽니까. 하하! 음악오귀 아닙니까. 남의 것을 빼앗는 데는 이놈들보다 나은 놈들이 없습죠. 금방 빠른 말을 가져오겠습니다. 하하하!”
음악삼귀가 웃으면서 사라졌다.
검왕은 유화아를 쳐다봤다.
유화아는 검왕이 깨어난 직후부터 산을 내려온 지금까지 검왕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늘 검왕만 쳐다봤다.
예전에는 그녀도 마음을 숨겼다. 허나 이제는 숨기지 않는다. 아예 대놓고 쳐다본다. 누가 보건 말건, 체면조차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검왕이 무심히 말했다.
“그렇게 좋아?”
“네.”
“그만 봐. 얼굴 뚫어져.”
“전 지금 마음을 뚫는 거예요. 검왕 마음을. 그 마음속에 귀선부 이령이 있다는 것 아는데…… 그것마저 뚫어보려고요.”
“훗!”
검왕이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