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ruction of the Fortress RAW novel - Chapter 82
82
第十七章 탄생(誕生) (2)
스읏!
석화선생이 유령처럼 내려섰다.
유령처럼…… 아니다. 그가 유령처럼 불쑥 튀어나온 것은 맞지만 은밀히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는 매우 느리게, 생각을 깊이 하면서 나타났다.
결코 유령처럼 나타난 게 아니다.
초옥을 지키는 자들 중에서 그가 나타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 사람은 없다.
“음!”
석화선생이 모옥을 쳐다보면서 침중하게 신음을 흘렸다.
“어떠냐?”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다.
“조용합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조용합니다.”
대답하는 음성에 힘이 들어 있지 않다.
침중한 물음에 침중한 대답이다.
이곳 사람들치고 의술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모두들 기본적인 소양은 갖춰져 있다.
다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의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신의 고통을 자신 스스로 달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의술을 배워야 한다.
이곳 사람들이라면 아무라도 의원을 차릴 수 있다.
당연히 그들도 누미의 상태를 안다.
누미는 조용하다. 고요하다. 평온하다. 임신으로 인한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못한다.
다행인가?
바깥세상이라면 매우 당연하다. 불편함이 없다는 데 다행스럽지 않을 까닭이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특히 누미의 경우에는 다행이 아니다.
혈오가 역혈에 성공했다.
혈오는 세상에 태어날 생각이 없다. 그래서 천천히 자진할 준비를 했고, 이제 드디어 역혈 준비를 마쳤다.
아이는 더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래서 조용한 게다.
태아는 본능적으로 삶을 갈구한다. 손발이 생기면 꿈지럭거리려고 한다. 손을 움직이고, 발을 구른다. 어미 배를 통통 차면서 건강하다고 알린다.
죽음을 준비한 태아는 그럴 필요가 없다.
태아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고통도 없다. 화분에 물이 없거나, 날이 무척 덥거나, 무척 추우면 꽃이 시들 듯이…… 바깥세상이 혈오와 맞지 않는 관계로 시들어가는 것이다. 자연 발생적으로.
그래서 아이는 조용하다.
이제 며칠 안에 누미는 산통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태어나는 생명은 없다. 오히려 어미 목숨까지 빼앗아간다. 생명은 없고, 죽음만 있다.
그 날, 누미는 죽는다.
“방법이 없는가. 우린 정말…… 천형을 받았단 말인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오직 오늘만을 고대해 왔는데…… 역혈이 무슨 말인가. 허허허! 어쩌면, 어쩌면 하늘이 패륜에 노했는지도. 저주를 깨는 방법치고는 너무 잔인하니.”
석화선생이 하늘을 쳐다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팟! 파파파팟!
눈에서 새파란 인광(燐光)이 튀어나온다.
‘으으……!’
저절로 입술이 악물린다.
어금니가 으스러져라 깨물어진다.
세상은 조용하다. 아무도 그녀 곁에서 떠들지 않는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오직 바람 소리, 새소리, 물 흐르는 소리뿐이다. 아니, 또 하나가 있다. 가슴 속에서 들끓어 오르는 분노의 불길, 분노가 활화산처럼 터져나가는 소리가 있다.
‘적벽검문!’
적벽검문…… 적벽검문에 피가 맺힌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문파!
그녀는 적벽검문의 문도다. 분명히 적벽검문의 문도다. 누강에게서 누씨 성까지 물려받았다. 본성을 버리고 누씨라는 새로운 성씨를 이어받았다.
그녀는 엄연히 적벽검문 문도다.
하지만 적벽검문에 가본 적은 없다. 적벽검문 사람들을 만난 적도 없다. 아니, 적벽검문 사람을 만나기는 했다. 소위 사숙이라는 검왕을 만났다.
한때, 그 사숙에게 연심을 품기도 했다.
검왕은 묘한 구석이 있다. 검왕과 같이 있으면 괜히 방심이 흔들린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괜히 자신 혼자 좋았다가 우울했다가 한다.
그런데 그 검왕이 그녀를 혈루마옥에 내던졌다.
검왕이 그녀를 월중수 화천 앞에 내놓았다. 화천이 겁간할 것을 번연히 알면서. 이들의 욕망이 혈오의 탄생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내놓았다.
검왕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다.
검왕은 화천에게 죽임을 당했다.
검왕이 당하는 마당인데 아비인 누강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 마음은 있었다고 해도 무공이 따라주지 않는다. 무공 격차가 너무 크게 벌어져서 그 어떤 암습도 통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뚫어야만 했다.
화천의 겁간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그의 죽음을 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녀 곁에 적벽검문은 없었다. 적벽검문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서…… 큿큿! 정말 이것뿐일까?
그녀는 요즘에 들어와서야 이런 일련의 행동들 속에 어떤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그녀의 몸, 몸뚱이가 이 빌어먹을 화혈역심공에 특화되어 있다.
녹천의 한음천강기도 태어나기 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혈루마옥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무공을 한 몸에 지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무리에 정통한 고수들이고, 이 무공들을 창안해 냈으며, 주구장창 사용해 온 사람들이니 그들 판단이 옳을 게다.
허나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어떤 때는 진실이라고 보였던 것이 껍데기에 불과할 때도 있다. 분명히 하늘이었는데 알고 보니 땅일 수도 있다.
혈루마옥 사람들의 판단은 틀렸다.
그녀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일, 증평과 녹천의 무공을 한 몸에 수련해 냈다. 아주 자연스럽게, 능숙하게…… 물 흐르듯이 줄줄 펼쳐낼 수 있다.
하물며 그녀는 성취도도 높다.
화혈역심공을 알게 된 것은 임신하기 백여 일 전, 일 년이 안 된다.
한음천강기는 더 짧다. 혈오가 역혈을 한다 싶을 때부터 수련했으니 반년밖에 안 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두 무공을 자연스럽게 펼쳐낸다.
그녀는 혈루마옥의 무공을 배우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다는 요미검체라서 가능한 일일까?
아무리 요미검체라고 해도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된다.
그녀는 이곳에 꼭 맞는 부품이다.
그녀가 혈루마옥에 하나의 부품으로 끼워졌을 때, 혈루마옥은 완성된다.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그녀가 요미검체라고는 하지만, 무공을 배우기에 최상의 신체라고 하지만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무공을 술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화혈역심공이 부담 없이 받아들여질 때부터 그 점이 수상쩍었다.
헌데 이제는 깨달았다.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녀는 적벽검문에 의해서 이곳에 던져졌다.
누강이 자신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적벽검문의 누군가가 그녀를 찾아냈고, 그녀를 누강 앞으로 이끌었다. 바보 같은 누강은 자신 앞에 던져진 여자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것뿐이다.
그녀는 마군에게 사로잡혀서 마공관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검왕과 처음으로 만났다.
검왕과의 첫 만남이 매우 자연스럽다.
그런데…… 정말 마공관에서 검왕과 만난 것이 처음 만난 것일까?
그녀는 자신을 혈루마옥으로 밀어 넣은 사람이 검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처음, 자신을 발견했던 사람도 검왕일 게다. 누강 앞으로 슬그머니 내세운 사람도 검왕일 것이고.
검왕, 그는 자신을 이용했다.
검왕이 밉다. 검왕이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검왕이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혈루마옥으로 밀어 넣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것이 검왕에게 무슨 득이 되는지는 아직까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혈루마옥이 애타게 기다리던 최적의 부품을 혈루마옥에게 내밀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알겠다.
‘적벽검문!’
검왕에 대한 분노는 적벽검문으로 이어진다. 부화가 하늘 끝까지 치솟는다.
꿈틀!
문득, 혈오라고 부르는 아이가 몸을 뒤튼다.
그녀는 손을 들어 아이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배를 만졌다.
혈오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혈루마옥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아이이지만 아이의 운명을 생각하면 차라리 이대로 자진하는 것이 낫다.
허나 그렇게 되면 그녀 역시 죽는다.
그녀는 죽을 수 없다.
‘미안.’
그녀는 배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잠시 적벽검문에 대한 원한을 뒤로 밀쳐놓는다.
지금은 분노만 떠올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후우!’
깊은숨을 내쉰다. 그와 동시에 단전이 활짝 열리면서 뜨겁고 차가운 두 가지 기류가 동시에 일어난다.
스르륵!
두 기류는 전신 경맥을 휘돈다.
이 부분에서 혈루마옥 사람들은 틀렸다.
그들은 화혈역심공과 현음천강기는 섞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상호 견제할 수는 있다. 또 음양기를 이용하면 상호 보충하는 것도 가능하다.
화혈역심공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 한음천강기를 보내준 것도 상호 보완하라는 의미다. 물로 불을 다스려서 혈오를 정상적으로 탄생시키라는 의미다.
이 생각은 맞다. 또 틀렸다.
천지(天地), 화수(火水), 남녀(男女)…… 극명하게 음양으로 갈리는 것들은 하나로 섞이지 못한다.
일체(一體)가 불가능해진다.
물과 불이 만나면 둘 중에 하나는 소멸된다.
그런데 그녀는 이런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일체를 이룬다. 마음으로 이룬 일체가 아니라 몸으로 일체를 이룬다. 반남반녀가 된다. 음양인간이 된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면서, 남자이고 여자인 사람이 된다.
두 무공이 그렇다.
화혈역심공과 한음천강기는 하나로 섞였다. 그러니 전혀 다른 새로운 무공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무공의 성질 속에선 화혈역심공과 음한정수의 정수가 배어있다.
양쪽 성질 중에서 어느 것 하나만 구별해서 드러낼 수 있다. 또 일체를 이뤄서 한꺼번에 드러낼 수도 있다.
음이 드러날 때 양은 보완역할을 해준다. 양이 드러날 때, 음은 안으로 갈무리되어서 양을 보충한다. 둘 중 어느 한쪽이 드러날 때 다른 한쪽은 뒷받침을 단단히 해준다.
양쪽 모두 드러나지 않을 때, 두 진기는 섞이지 않고 몸을 유유히 휘돈다. 양쪽 모두가 드러날 때, 두 기운은 완벽하게 합일되어서 전혀 다른 새로운 기운을 형성한다.
물과 불이 만나서 불이 되기도 하고, 물이 되기도 하고, 물도 불도 아닌 새로운 기운이 되기도 한다.
이 기운들이 혈오를 휘감는다.
스르르르르륵!
아이는 어미의 영양분을 먹고 자란다.
어미가 무엇을 마시고 먹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골격 형성이 좌우된다. 살이 붙는다. 어미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아이의 성품도 결정된다.
혈오는 누미의 생각과 기운을 물려받는다.
스르르륵!
그녀는 자신의 기운을 혈오에게 투입했다.
아이는 잠잠하다.
석화선생이 염려하는 것처럼 자진을 하는 중이 아니다.
혈오는 역혈에 실패했다. 그녀로 인해서.
혈오는 두 기류에 심취하여 절반쯤은 수면 상태에, 절반쯤은 최면상태에 빠져있다. 의식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면 가사 상태에 빠져있다고 봐야 한다.
스르륵!
무형의 기운이 유형의 기감이 되어서 아이를 어루만진다.
그녀는 아이가 둘둘 감고 있는 탯줄을 풀어냈다. 아이가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지극히 예민하게 경각심을 곤두세우고…… 천천히 조금씩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탯줄을 풀었다.
이 작업은 꽤 오랫동안 지속해왔다.
석화선생이 아이를 포기했을 무렵부터 그녀는 이 작업을 했다.
그때부터 아이는 조용하다. 움직이지 않는다.
혈루마옥 사람들에게는 조용함이 불길한 조짐으로 보이겠지만, 오직 이 방법뿐이다.
아이는 태어난다.
혈루마옥 사람들이 원하는 아이인지 아닌지는 논외로 한다.
하물며 그녀는 아이가 정상적인 몸으로 태어나는 것조차 관심이 없다. 무조건 태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만큼 아이에 대한 애착이 강한가? 아니다. 아이에 대해 모성애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더 잔인하게 말한다면 아이가 사산되어도 무방하다.
그녀는 아이를 배 속에서 떼어내고 싶다.
오직 그것만 바란다.
지금으로써는 아이를 살살 달래서 세상 밖으로 밀어내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루만진다.
아이야, 나와.
어미가 잘해줄게.
잘 보살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