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47
완벽한 비행이었다.
아, 물론… 탑승과 하차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안녕히 가십시오.”
“…네, 안녕히 계세요.”
신발을 벗고 타려던 바보 같은 장면을 바로 앞에서 직관했었던 승무원이 히드로공항에 내릴 때도 문 앞에 서 있었다.
머쓱한 인사말과 묵례로 화답하고 그녀를 지나친 순간,
‘백우희….’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누나를 향한 분노(?)가 싹 올라왔다.
그때,
“와, 아직도 밝네?!”
한국에서 출발한 지 반나절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찬란한 햇빛이 내리는 영국 땅.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그 광경이 우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국과 영국의 시차 상, 밤낮이 다른 건 당연한 이치지만.
오래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성이 있었던 영국이 아니던가.
이름값이 주는 힘인 걸까.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그곳에 첫 발걸음을 내디디는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백우희 생각이 쏙 들어가면서, 기분이 급 좋아졌다.
– Welcome to London!
공항 이곳저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음성.
그것을 음악으로 삼아 걸었다.
런던 입국심사는 소문대로 까다로운 편이었지만, 당연히 입성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일단 차부터 빌리자.’
최소 일주일 이상은 머물 예정이니, 대중교통보다는 아무래도 운전을 직접 하면서 다니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May I help you?”
“Yeah, where is the nearest Rental Car Office?”
공항 안내 데스크에서 공항과 가장 가까운 렌터카 사무실 위치를 물어본 뒤, 그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
“Done. Here is yours!”
“Thank you. Have a nice day.”
박미영 팀장이 자세히 알려준 꿀팁 덕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차를 대여했다.
아, 그녀의 도움 말고도….
사실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처음 와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갓 도착한 런던에서 이곳저곳을 자신 있게 누빌 수 있는 이유가.
바로….
* * *
특별 가상 세계로 이끌렸던 날.
노파와 나눴던 모든 대화 내용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특히 종장에서 나눴던 얘기는 더더욱 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세히 알려줄 순 없지만, 이 늙은이가 지금 인과율의 대가를 치르는 중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게야. 자네 앞에 진작 나타날 수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네만.」
「인과율의 대가요?」
「끌끌끌. 천계의 절대적인 규율엔, 이유를 불문하고 그저 순응해야만 한다네.」
인과율, 천계, 절대적 규율, 순응.
일상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로 포장된 어려운 말들이었다.
그마저도 노파는 얕은 물에 발만 살짝 담그는 식으로 단번에 의미를 이해하기 힘든 얘기를 시작하였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과정이 가장 난관인 법이지. 그러나, 일단 한번 ‘유’가 창조되고 나면 그다음은 훨씬 수월해지는 법 아니겠나? 뭐든지 말일세.」
우진은 그녀의 말을 귀에 담는 족족, 나름대로 의미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대본 분석으로 훈련된 그는 상대의 말을 분석하는 데에 있어서 누구보다 눈치가 빨랐고, 예리했으니까.
‘일단, 나와 할머니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다이어리다.’
‘여기에, 방금 할머니가 말한 무에서 유라는 말을 적용해보면…?’
「미션 진행도 0프로가 ‘무’, 50프로 달성이 ‘유’라는 말씀이신가요?」
우진의 물음에, 노파의 눈꼬리가 확 올라갔다.
마치,
‘오호, 이놈 보게?’
라는 반응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끌끌끌, 자네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아는구먼. 그동안 가르쳐주고 싶어도 기회가 없어서 답답했거늘. 이 늙은이가 이제야 살 것 같구먼.」
「방금 말씀하신 대로라면, 할머니께는 ‘유’가 실현되는 때가 바로 지금이네요. 할머니께서 이렇게 계약자와 마주할 수 있게 되려면, 계약자가 미션 진행도를 최소 50프로 이상 달성해야만 하니까요.」
「끌끌끌, 정확하네. 이 늙은이로서도 무중생유(無中生有)에 도달한 계약자는 이미 알려준 대로, 자네가 처음이었으니 말이야.」
노파의 웃음에서, 이전보다 더 강단이 넘치는 뉘앙스와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가 웃음을 서서히 거두며 말을 이었다.
「겉으로는 한없이 냉정하기 짝이 없는 굴레일세. 그러나, 그 속에서도 분명 기회는 주어진다네. 물론?」
「앞서 말한 것들이 전제가 되어야겠지요.」
「그렇다네. 그 말인즉슨, 자네와 이렇게 재회하였으니 이 늙은이는 지금부터 기회를 얻었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네. 이해가 좀 되시는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제가 할머니께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끌끌끌, 등가교환이고 상부상조인 게야. 이 늙은이는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자네는 배우로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이.」
‘끌끌끌’ 웃기만 하던 노파가 처음으로, 우진에게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였다.
그 숨의 무게감이 느껴져서, 우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어르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토닥여줄 순 없으니….
「이 늙은이에 관한 얘기는 오늘은 이쯤만 해둠세. 또 날이 있을 터이니, 끌끌끌.」
우진이 이해한 바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왜 그런지 상세한 연유는 모르겠으나, 할머니는 현재 천계의 절대적인 규율에 따라 ‘인과율의 대가’를 받는 몸이다.
그 화려한 미사여구는 아마도, ‘벌’이라는 한 글자로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그리고, 그 ‘인과율의 대가’를 굴레라고 표현하는 것 같으며.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다이어리를 통해 모든 미션을 완수해줄 만한 계약자를 찾는 것이고.
계약자가 미션을 진행하는 것에 처음부터 개입해서 도움을 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개입이 가능한 단계, 즉 계약자의 미션 진행도가 50프로가 되었을 때부터 ‘인과율의 대가’를 대체 표현할 수 있는 단어에 ‘기회’라는 말이 추가된다.
즉, 결말이 ‘벌’로 남느냐 아니면 ‘기회’가 되느냐는 전적으로 계약자에게 달려있다는 말로 들렸다.
물론, 여기까지는 전적으로 우진의 입장에서 노파의 말을 합리적으로 추론하고 해석한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아직 알고 싶은 것들이 수두룩하게 남아있고.
풀리지 않은 의문들도 많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우진은 더 묻지 않았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고,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이라 하지 않나.
할머니의 말씀대로, 특별 가상 세계는 앞으로 몇 번이고 열릴 것이니.
그때마다, 적당한 선에서 알아가면 될 것이다.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가자고 속으로 계속 되뇌며 궁금증을 참아냈다.
「끌끌끌, 이 늙은이가 자네에게 선물 하나 줌세.」
「선물이요?」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는 것 또한 당연한 이치라네.」
노파의 말은 우진의 구미를 확 끌어당겼다.
신비한 다이어리로 ‘나’의 삶을 통째로 바꿔준 장본인께서 또 선물을 주시겠다니.
다이어리 말고 또 무슨 신비한 물건을 주시려고….
「끌끌끌, 사실은 다이어리 시스템이 자네에게 주는 것이네만. 이 늙은이가 생색 한번 내봤으이.」
노파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우진의 입가에도 ‘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할머니는 분명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뽐내던 신비한 존재였는데.
말을 섞다 보니 자연스럽게 끈끈한 친분이 쌓인 모양이다.
약간(이라 쓰지만, 상당히) 거리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했던 그녀의 아우라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우진에게 우호적인 기운으로 와닿고 있었으니까.
「하나만 골라보시게.」
노파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갑자기 우진의 눈앞에 메시지 창과 버튼이 나타났다.
「역시.」
「이미 여러 번 봤을 게야.」
「그럼요. 이 하얀 공간에서, 버튼이 빠지면 서운한 법이죠.」
「끌끌끌, 젊은 사람이 이치를 벌써 깨달으신 겐가?」
농을 던지는 말투였다.
어르신의 농담이란, 말의 내용보다 분위기나 억양에서 나오는 건가.
– 스윽.
우진이 메시지 창 앞에 섰다.
그것이 문구를 띄웠다.
【특별 가상 세계에 처음 방문해주신 계약자 ‘백우진’에게 추가 능력을 부여합니다.】
【계약자는 아래 소개된 능력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진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천천히 능력들을 읽어나갔다.
【생략 – 계약자는 가상 세계 속 캐릭터가 부여하는 미션을 생략할 수 있습니다.(1/1)】
【복사 – 계약자는 원하는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가상 세계 속 캐릭터의 모든 감정과 경험, 그리고 대본이나 시나리오의 내용이 그대로 계약자의 몸에 복사됩니다.(1/1)】
【예언 – 계약자가 선택한 시나리오나 대본의 흥행지표를 미리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오차 범위는 +/- 1프로 미만입니다.(-/-)】
그 밖에도, 여러 능력들이 있었다.
어떠한 것은 1회성이었고, 어떠한 것은 횟수 제한이 없어 보이는.
다이어리 하나만으로도 배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능력이 생긴 셈인데.
위에 나열된 능력들 중 하나를 기호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다니.
어마어마한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흐음.”
우진의 마음이 섣불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분명 좋은 능력들인 것은 맞는데, 선택하고 싶지는 않은 느낌이랄까.
예를 들면, 우진의 시선에서 ‘생략’은 정작 캐릭터를 지독하게 분석하면서 연기의 방향성을 잡는 재미를 뺏어가는 능력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복사’는 본인의 노력 없이 날로 먹는 태도를 가장 싫어하는 우진으로서는 더 논할 것도 없었거니와.
‘예언’을 선택하게 되면, 왠지 작품 선택의 폭이 강제로 좁혀질 것만 같았다.
사람이라는 게 완벽하지 않은 법이라, 무의식중으로라도 성적에 연연하는 배우가 되면 어떡해?
눈앞에 최종 관객 수나 시청률이 보이는 삶이라… 감당하기 힘들어질 것 같았다.
결국, 표면적으로는 죄다 좋아 보이는 능력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진이 가진 배우로서의 신념이나 자세와는 아이러니하게도 반대되는 것들 투성이었다.
배역과 대본 분석에 쏟아붓는 노력과 시간을 줄여주는 것에만 국한되는 능력들은, 오히려 독이 될 것 같으니까.
「끌끌끌, 자네가 내켜 하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네만.」
우진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자, 노파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끌리는 게 없는 모양이구려.」
「솔직히, 그렇습니다.」
「끌끌끌, 그렇다면 이건 어떠한가?」
노파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윽고,
‘……!’
우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는 자네가 마음에 들어 할 것 같네만?」
그녀의 손에서 펼쳐진 마지막 능력치의 소개 창.
그 안에는,
【소통 – 모국어를 제외한 한 가지 언어 능력이 계약자에게 귀속됩니다. 해당 언어로 대본을 읽고, 연기하고, 해당 언어로 된 작품을 관람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또한,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과의 소통이 자유자재로 가능해집니다.】
노파의 말대로였다.
우진은 그날, 망설임 없이 이 능력을 선택했다.
선택한 언어는, 영어.
우진이 첫 여행 루트에서 런던을 첫 경유지로 선택한 이유였다.
138화
– 부아아앙!
짐을 찾자마자 곧장 렌트한 미니쿠퍼(Mini Cooper)에 몸을 싣고,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렸다.
석양이 지는 노을과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 그리고 창문에서 흘러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그것들을 벗 삼아, 그대로 숙소까지 내달렸다.
“Check-in, please.”
“Here, Suite Room number 1402. Have a nice day, Sir.”
“Thank you.”
호텔 체크-인 후, 객실로 들어와 짐을 풀었다.
샤워까지 마치고 나서 침대에 누우니, 그제야 잠이 쏟아졌다.
영국은 이제 겨우 저녁에서 밤으로 접어드는 시간이었지만, 한국은 한창 새벽일 터.
시차 적응이 가장 시급하다.
비행기 안에서 이것저것 즐기느라 바빠서 한숨도 자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고.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실컷 돌아다녀야겠다.’
멍하니 침대에 누워 스위트 룸(Suite Room) 천장을 바라보던 우진은,
– 치익, 딱!
문득 몸을 일으켜 미니바에서 꺼낸 맥주 한 캔을 집어 들었다.
“야경 죽이네.”
반쯤 감긴 눈으로 바라본, 커튼 너머로 보이는 런던의 야경.
템스강(Thames River)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도저히 맥주를 곁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경관이 이 정도면 꼭 마셔줘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특히 런던의 랜드마크인 대형관람차 ‘런던 아이(London Eye)’가 유독 시선을 확 끌었다.
‘템스강을 따라 걷는 산책이 아주 유명하다는데….’
‘런던 아이는 무조건 타봐야지.’
라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름과 동시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