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93
“과거의 노인장은 손가락질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쓰레기가 맞는데, 왜 이렇게 측은하지?”
“아내분과 자식들이 너무 안타까워.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런데, 나는 과거 노인장의 입장도 이해가 가서… 모르겠다.”
막이 올라서는 순간부터, 작품의 진행은 연출과 작가의 손에서 완전히 떠난다.
그래서 오태협은 공연 중에 보통 관객들의 관람을 일절 방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살금살금 관객석 뒤편을 왔다 갔다 하며 반응을 살피는 편이다.
공연이 끝난 뒤 배우들과 각 팀 오퍼들에게 피드백을 주는 것은 자신의 몫이니까.
오태협과 마설아는 예상했었다.
젊은이가 등장하기 전까지, 관객들은 노인장을 향해 상당한 분노와 혐오감을 가질 것이라고.
김수영과 김형준을 만나기 전까지, 노인장은 관객들에게 인성과 자질이 결여된 무뢰배로서 인식이 됐어야만 했다.
그래서 회상 씬에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물리적·언어적 폭력을 가하는 것도 모자라, 아내가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은 노인장의 모습을 그렸을뿐더러.
진심 어린 사과를 한들, 받아줄 사람도 없고 자식들에게까지 버림을 받는 상황에까지 이르러서야 후회하는 노인장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 정도로 나쁜 사람에게도, 타인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도와줄 기회가 한 번쯤은 찾아온다는 것.
마설아는 이걸 말하고 싶었다.
‘사람 사는 게 별거 있는가.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살아가는 게 곧 사람 사는 것.’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이랬다.
따라서, 빌드업을 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는 관객으로 하여금 오히려 노인장을 멸시하게 했으면 했지.
그를 동정하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기에, 노인장이 폭력을 행사하는 과거 장면들을 일부러 세게 표현한 것이었다.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는 연출의 방향 또한 같았다.
그런데, 대체 왜?
과거 장면을 본 직후의 관객들은 노인장의 와이프와 자식들에게 갖는 안타까움과 동정의 감정을 똑같이 노인장에게도 갖고 있는 거지?
그 이유는 간단했다.
‘배우가 연기를 잘하니까.’
캐릭터를 표현하는 배우의 연기력이 말 그대로 대본 자체를 씹어먹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강식이 오태협과 마설아의 피드백을 무시한 게 전혀 아니다.
이강식은 오히려 그들의 디렉션을 철저하게 따랐다.
다만, 오프닝에서 줬던 노인장의 쓸쓸한 삶의 여운이 너무나도 강했어서.
다시 말하면, 그만큼 연기를 너무 뛰어나게 해서 오히려 대본이 먹혀버린 형국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였으면 정도를 살짝 죽여서 리테이크를 갔을 텐데, 연극이라서 그러지도 못한다.
웃프지 아니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배우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발생하는 현상인지라 말이다.
“하하, 그래도 괜찮은데?”
“저도요. 오히려 이렇게 흘러가니까 더 기대되는걸요?”
“뭐가?”
“우진 씨요. 강식 선배님의 어마어마한 장악력이 지배해버린 무대에서, 우진 씨가 어떻게 힘의 균형을 맞춰나갈지가 궁금하잖아요.”
마설아가 미소 지으며 오태협에게 속삭였다.
그때였다.
– 드르륵.
어느새 극은 중반부로 넘어가고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는 효과음이 나옴과 동시에,
“…….”
환자복 차림의 젊은이가 등장했다.
181화
젊은이와 노인장의 첫 대면.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서 있는 두 인물은 존재만으로도 무대를 빈틈없이 꽉 채웠다.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객석의 시선들이 온전하게 전해졌다.
긴장되는 순간, 의아한 표정을 한 노인장이 적막을 깨었다.
“응? 누구여?”
매번 하얀 가운을 펄럭이며 나타나선 잔소리만 쏟아내는 천적 놈(*주치의), 혹은 따가운 주삿바늘을 찔러대는 간호사들만 찾아오는 병실이었거늘.
같은 환자복을 입은 이가 들어오는 게 대체 얼마 만인가.
그의 입가가 미묘하게 떨렸다.
왠지 모를 묘한 웃음이 지어질락말락 한 탓이었다.
그러나,
“…….”
젊은이로부터 되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노인장이 재차 물었다.
“거, 누구냐니까?!”
“…….”
“젊은 사람이 귓구멍이 막혔어? 아니면, 벙어리인 게야?”
“…….”
거듭된 질문에도, 젊은이는 노인장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베드로 걸어가더니, 자신이 입고 있는 환자복 매무새를 만지며 가볍게 들고 온 짐을 푸는 게 아닌가.
‘지, 지금 무시하는 겨?’
대충 봐도 손자뻘인 녀석이, 이런 싸가지 없는….
노인장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가 한층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인마!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대답은 고사하고 쳐다도 안 보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예절이여?!”
“…….”
답답한 노인장이 한껏 성을 내었으나, 젊은이는 그가 그러든지 말든지 일절 관심을 주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였다.
두 주연 캐릭터의 컨셉과 성격의 차이점이 첫 만남에서부터 확연하게 드러났다.
노인장의 반응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관객도 있었고, 반대로 젊은이를 보며 감탄하는 관객도 있었다.
왜냐하면, 첫 만남 장면에서 우진이 보여주고 있는 연기의 결은 극 초반부에서 이강식이 보여준 것과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이다.
오프닝에서 주치의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강식은 대사 없이 오로지 표정과 몸짓으로만 캐릭터의 감정을 묘사했었다.
비어있는 벤치 옆자리를 ‘쓰윽-’ 훑은 그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는 지독한 외로움이, 담배를 꼬나물며 입가에 지었던 쓸쓸한 미소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후회가 남겨진 듯했던 연기.
대사가 없는 와중에도 그런 감정들을 팍팍 전달해주는 대배우의 무대 장악력이 관객들을 압도함으로써, 극의 몰입도와 분위기가 점점 높아지던 찰나.
지금 젊은이로서 분한 우진이 이와 같은 결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젊은이는 분명 수 차례 쏟아지는 질문에 전혀 대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침묵에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담겨있다는 느낌을 잔뜩 주고 있었다.
불안하다는 듯 움직이는 눈빛과 어쩔 줄 몰라 하며 떨리는 손을 비롯한 신체가 그걸 방증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표정만큼은 무표정이다.
변화가 일절… 아니, 거의 없다.
무표정이란 틀 안에서 시시각각 눈빛이 바뀌거나 얼굴 근육이 떨리면서 미세하게 달라지는 정도에 불과한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것들을 보며 관객이 받는 감정의 폭은 매우 큰 수준이었다.
젊은이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노인장이 묻는 말에 답을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그가 자신에게 신경을 꺼 주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냥 이 모든 상황 자체가 불편하고 짜증 나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자신에게 친밀하게 다가오려는 이를 쳐내는 것에 있어서도 저게 자의인지 타의인지 구별이 어렵다.
즉, 우진이 젊은이로서 보여주고 있는 현재의 연기를 만약 프레임 단위로 쪼개본다고 하면.
모든 프레임마다 두 가지 감정이 빠짐없이 공존하고 있는 연기와도 같았다.
아직은 관객들을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연기.
“그렇게 버릇없이 행동하니께 젊은 사람이 팔이나 다치고 다니는 것 아니여!”
“…….”
“정말 끝까지 말 안 할 참이여? 정말 벙어리인 거냐고?!”
“…….”
“썅, 맞으면 맞다고 고개라도 끄덕하란 말여! 이런 썩을….”
젊은이에 대한 관객들의 궁금증이 쌓여가는 찰나.
이를 한 번에 말끔하게 풀어주는 답이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 나왔다.
– 드르륵.
문을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할아버지, 잠시만요.”
한 남자가 목만 빼꼼히 밀어 넣으며 노인장을 불렀다.
해결사, 주치의였다.
노인장에게는 ‘천적’으로 통할지 몰라도, 관객의 시점에서는 등장인물임과 동시에 ‘극의 사회자’ 역할도 담당하는 배역이라고 밝힌 마설아 작가의 말 그대로, 주치의의 해설이 이어졌다.
“하이고, 의사 선생님! 내 소중한 담배 뺏어갔으면 됐지,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그런 거 아니니까, 잠시만 저 좀 보시죠. 잠깐이면 돼요.”
단둘이 있을 때는 절대 볼 수 없는 부드러운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말을 하는 주치의의 모습과 더불어,
“…….”
이 와중에도 싸가지 없게 돌아보지도 않는 젊은이의 휘어진 등을 보고 있자니 노인장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콧김을 크게 ‘흥-’ 내쉬며 주치의를 따라나섰다.
밖에서 병실 문이 재차 닫히기 전에 틈으로 재빠르게 흘겨본 젊은이의 마지막 모습은 여전히 ‘등’이었다.
뭐, 아무튼.
주치의에 손에 힘없이 이끌려 나온 벤치.
마지막 남은 소중한 담배 한 갑을 빼앗긴 그 장소였다.
그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이곳으로 데려오다니, 정말 ‘천적’답게 무지막지하구나!
“아, 뭔데 그려?!”
이골이 잔뜩 난 목소리로, 노인장이 말했다.
그러자, 주치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김형준 환자 때문에요.”
“김형준? 아, 방금 들어온 저 싸가지가 바가지인 녀석 이름이 김형준이여?”
“맞아요. 욕은 하지 마시고요.”
“내가 언제 욕을 했다고 그려?”
“방금요. 싸가지가 바가지냐고 하셨잖아요.”
“아니, 그게 왜 욕이여?!”
“내일부터 제가 할아버지 일일 회진 횟수 2번씩 추가….”
“아, 알았어! 안 할게, 안 하면 될 거 아녀!”
노인장이 다급하게 양손을 휘저었고, 주치의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괴팍하거나 까다롭게 보이는 환자를 아주 간단하면서도 유하게 대하는 주치의의 천연덕스러운 자세와 화들짝 놀라며 혼비백산하는 노인장의 액션이 관객들의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주치의가 입을 열었다.
“김형준 환자, 자폐증을 앓고 있습니다.”
“자, 자폐증?”
“네. 쉽게 말씀드리자면, 겉모습은 어엿한 성인이지만 실제 정신연령이 여섯에서 많아 봐야 여덟에 불과합니다.”
웃음기가 완전히 가시기도 전에 주치의는 젊은이에 관한 정보를 쏟아내었다.
‘와, 대박! 자폐증 환자를 연기하고 있던 거였어?’
‘눈이 시종일관 움직이길래 뭔가 했는데, 지적장애라는 걸 듣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소름….’
‘디테일 진짜 쩐다.’
그제야 노인장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무표정과 달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초조함을 드러내었던 젊은이의 행동 특성을 이해한 관객들은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다그치고 소리를 지르시면, 김형준 환자로서는 굉장히 불편할 겁니다.”
“…….”
“불편한 정도를 넘어서, 공포로 다가오겠죠. 방금 할아버지께서는 유치원생 아이한테 소리를 지르신 거와 같아요.”
주치의의 조곤조곤한 설명을 듣자마자, 노인장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비루하고도 질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절대 지울 수 없음을 알기에, 내면 깊은 곳 어딘가에 숨겨놓고 최대한 꺼내지 않으려 애썼던 과거의 기억.
이를 한 단어로 간단하게 말하면, ‘후회’였다.
“여섯에서 여덟이라, 허허….”
별안간 덮친 기억을 되짚어보니, 딱 그즈음이 아니겠는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보고 싶은 아내.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손찌검을 했었던 때가,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 아이에게도 그랬던 때가 말이다.
첫째의 나이가 딱 젊은이의 정신연령과 일치했을 즈음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절대 용서하지 못할 과거가 자신의 목을 옥죄는 느낌이 들어 아찔해졌다.
노인장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등에선 어느새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네, 의사 양반.”
“네, 할아버지. 모르셨을 테니 이해합니다만, 앞으로는 조심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김형준 환자 보호자 분께서도 이 부분을 굉장히 걱정하셨습니다. 비용 때문에 4인실을 택하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최대한 사람이 없는 병실을 원하셨거든요.”
“…내 병실이 좀, 아니 많이 조용하제. 지독할 정도로 말야.”
“같이 쓰시게 됐으니, 웬만하면 방금 말씀드린 점들 참고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알겠으이.”
노인장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심술이 가득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럼, 가시죠.”
주치의가 부드럽게 손짓했다.
그때였다.
“잠시만, 의사 양반.”
“네?”
“혹시 말이여. 정말 미안한디….”
미안하다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대체 뭔 부탁을 하시려고?
주치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인장이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과자 하나만, 사줄 수 있을랑가?”
“네? 과자요?”
“보면 알겠지만, 이 늙은이가 돈이 한 푼도 없어. 저짝 매점에서 과자 하나만 사줘. 부탁함세.”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노인장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이야.
주치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가시죠.”
“허허, 고마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