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38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노크 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류 감독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렸다.
오늘 리딩에서 누구보다 주목을 받은 주인공, 우진이었다.
“어? 아직 안 갔어요?”
“가는 길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우진은 두 사람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에요?”
“선생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우진의 얼굴에는 진중함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서 있지 말고 앉게나. 편히 앉아서 얘기 나눔세.”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가 착석하자 이재순 배우가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묻고 싶은 게 뭔가? 편하게 말해봐.”
“선생님과 했었던 즉흥극에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진은 먼저 대배우의 가르침을 향해 감사함을 표시한 뒤,
“하지만, 그 이후부터 계속해서 왠지 모를 찝찝함이 느껴졌습니다. 준비가 부족했다는 아쉬움에서 오는 감정인 건 알겠지만, 정확하게 짚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즉흥극 직후,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연기 고민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미팅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 연기에 미친 배우임이 틀림없어.’
그 모습에, 류 감독은 이제 놀랍기도 지친다는 표정으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선생님께 여쭙습니다. 즉흥극에서 제가 아쉬웠던 점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손자뻘인 우진의 물음에 이재순 배우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젊은 배우의 눈빛은,
‘연기를 더 잘하고 싶습니다.’
‘부족함을 채우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음이 한눈에 보였으니까.
돋보이거나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가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절대 아님이 딱 봐도 느껴졌다.
연기에 대한 뜨겁고도 순수한 열정.
배울 수만 있다면, 더 잘할 수만 있다면 상대가 누구이건 가르침을 얻으려는 저 맑은 욕심.
이런 배우는 57년 연기 인생에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 이보다 더 예쁜 후배가 있을 수 있을까.
후배의 간절함에, 대배우는 늙은 심장이 어느 때보다 뜨겁게 뛰는 느낌을 받았다.
“하하하!”
이재순 배우가 호쾌하게 웃었다.
웃음의 의미를 류 감독은 알 것 같았다.
이내, 웃음을 거두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느꼈던 점을 간략하게만 말해주겠네.”
“간략하게요?”
“그래. 자네는 왠지 혼자서 답을 찾고도 남을 것 같아서 말이야. 스스로 깨달았을 때, 더 큰 가르침을 얻는 법 아니겠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우진은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냈다.
한 글자도 빼먹지 않겠다는 의지로 귀를 기울였다.
“말해주고 싶은 것은 일단 좋았던 점이야.”
이재순 배우는 기분 좋게 운을 띄웠다.
“신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네는 순발력과 집중력이 참 뛰어난 배우야.”
인정의 의미가 스며들어있는, 기분 좋은 말이었다.
“이렇게 긴장되는 자리에서 한참 선배가 아무런 협의 없이 즉흥극을 시작했는데, 금세 감정을 잡고 맞받아치더군. 매우 놀라웠네.”
대배우의 칭찬에 우진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당근이 있으면 채찍이 있어야겠지. 아쉬웠던 점은….”
우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진정으로 듣고 싶었던 얘기를 하시는구나.
“개인적으로 연기는 결국 눈빛에서 시작해서 눈빛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무엇을 말입니까?”
“배우가 배역에 몰입했는지, 아닌지를.”
이재순 배우의 말에 우진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짧은 찰나였는데, 그것을 단번에 꿰뚫어 보셨단 말인가.
“즉흥극을 시작했을 때, 자네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어.”
“…….”
“머릿속이 텅 비었을 거야.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조차도 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네만.”
“맞습니다.”
너무 정확해서 팔에 소름이 돋았다.
“순간 집중력이 깨졌지만, 그래도 정말 빠르게 몰입해서 잘 받아쳤다네. 하지만, 거기서 또 아쉬움이 하나 있었지.”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함이 우진의 표정에 가득 차올랐다.
“바로, 존댓말일세.”
우진의 머릿속에 느낌표가 띵하고 떠올랐다.
이재순 배우는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 즉흥극 바로 전에 리딩에서 자네는 왕으로서 나에게 반말을 썼고, 나는 신하로서 자네에게 높임말을 썼지.”
“아….”
“즉흥극이라 해서 우리 둘의 역할이 바뀌었는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전히 나에게는 주군이어야 되는 자네가 갑자기 존댓말을 썼어. 그것도 심지어 신하인 내가 반말을 하는데 말이야.”
“…….”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아쉽다고 하는 이유를 이젠 알겠는가?”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돌이켜보니,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말이었다.
즉흥극을 하는 동안의 우진은 절대 온전한 연산이 아니었다.
반은 연산이었을지 몰라도, 다른 절반은 현실 속 백우진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은연중에 이재순 선생님을 온전한 김처선으로 대하지 않았으니까.
현실과 작품의 경계에서, 각각의 영역에 한 발씩 걸치고 있었던 셈이었다.
정말 사소한 디테일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대배우의 가르침.
어디서도 배우지 못한 갚진 피드백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네의 연기는 분명 훌륭했어. 굳이 아쉬운 점을 꼽아보았을 뿐이야.”
“가르쳐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이미 완벽한 사람이 더 완벽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현장에서 봅세나.”
“네, 선생님!”
우진은 류 감독과 이재순 배우에게 허리를 숙이고는 이내 자리를 떠났다.
한결 가벼워진 그의 발걸음을 본 두 사람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저 친구, 생각보다 더 좋은 배우가 되겠구만.”
“같은 생각입니다.”
“다음에 저 친구와 작품을 또 하게 된다면, 그때 한 번 더 장난을 쳐보고 싶구먼.”
“짓궂으십니다.”
“자네 그거 아나?”
류 감독의 넉살에 대배우가 순간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태껏 같은 사람에게 장난을 두 번 친 적은 없다네.”
류 감독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친구가 처음이 될 것 같군.”
* * *
우진이 류 감독과 처음 미팅을 가진 후부터 바로 어제 있었던 대본 리딩을 마칠 때까지 흐른 시간은 5개월여.
그동안 우진의 스케줄은 단 세 곳만을 오가는, 단순함의 끝판왕이었다.
집, 연습실, 그리고 액션 스쿨.
– 작품 준비에만 온 신경을 쏟아붓고 싶습니다.
스케줄에 대해서는 소속 배우의 뜻을 가장 우선시하는 플라워엔터테인먼트의 시스템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 죄송하지만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음에 좋은 기회로 다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가 종영 직후에 소화했던 스케줄을 제외하면, 섭외 전화에 대한 매니지먼트팀의 답변은 한결같이 거절이었다.
문제는,
‘일부러 거절하는 거 아니에요?’
혹은,
‘우리한테만 거절하는 건가요?’
등등.
점점 원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우진이 광고 들어왔는데, 그것도 거절해요?”
이민성 차장의 물음에 김태곤 팀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광고인데?”
“S사 커피 광고요. 이번에 신제품 나왔답니다~”
“어? 아이고, 두야. 왜 하필….”
국내 커피 브랜드 1위인 S사.
몇 해 전부터 플라워엔터테인먼트 소속 배우들을 연이어 광고모델로 기용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브랜드였다.
이제 막 떠오르는 소속 신인 배우들에게도 나름 파격 대우를 해주며 세심하게 신경 써주었고.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원하는 다음 모델이 우진이었다.
S사 광고 기획자들과도 친분이 두터운 김태곤이었기에, 거절하기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
“팀장님. 그러지 말고 우진이한테 얘기해보는 게 어때요?”
김태곤이 미간을 찌푸리며 의자에 기대었다.
“야. 작품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한 배우한테 얘기 꺼내는 거 자체가 부담 주는 거야, 임마.”
“그건 그래도….”
“우리 배우를 먼저 생각해야지.”
김태곤의 말에 이민성은,
‘팀장님, 좀 멋진데요?’
라고 말하는 듯, ‘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말만 꺼내 보는 건데 괜찮겠지?”
응?
지금 5초도 안 지났는데 태세 전환이 좀….
“그래. 말만 해보자.”
“팀장님? 한 입으로 두말을….”
“야! 거절할 땐 거절해도 배우한테는 알려줘야지. 안 그래?”
“안 알려주고 거절한 것도 이미 많잖아요.”
“시끄러! 가서 일해, 임마.”
이민성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갔다.
김태곤은 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우진아. 통화돼?”
“네. 말씀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김태곤은 천천히 상황을 설명했다.
혹시라도, 배우가 강요받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진작에 말씀 주시지 그러셨어요. 난처하셨겠어요.”
“아니야. 아무튼,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할래?”
김태곤의 물음에 우진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전 좋아요. 할게요.”
흔쾌하게 수락하는 우진이었다.
35화
스타렉스 차량은 S사 본사로 향하고 있었다.
커피 광고 계약 건으로 미팅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갑자기 웬일이에요? 우진이가 광고라니.”
“그러게. 나도 놀랐어. 그러고 보니 이유를 안 물어봤네.”
준안의 물음에 조수석에 타고 있는 김태곤 팀장은 고개를 돌려 우진을 쳐다보았다.
늘 집과 연습실, 액션 스쿨만 오가며 작품 준비에만 집중했던 그가 광고 촬영을 수락한 연유가 무엇인지.
‘당장 고할지어다!’
라는 듯한 표정으로, 의문을 가득 표출하는 두 사람이었다.
광고 콘티를 확인하던 우진이 이에 화답하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힐링이 좀 필요해서요.”
“힐링?”
“네. 광고 컨셉 보니까 ‘릴랙스’가 키워드더라고요.”
S사의 신제품의 이름은 .
콘티에는 정원이 딸린 한 고급주택 테라스에서 경치를 즐기는 한 남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모던함’, ‘시크함’, ‘편안함’.
총 세 가지 컨셉으로 촬영이 진행될 예정인 콘티.
이름에 맞게 뭔가 편안한 기운이 물씬 담겨 있었다.
“작품 준비하는 동안 너무 힘들었거든요.”
우진의 말에 김태곤과 준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대본 리딩 전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
게다가, 크랭크업(촬영 종료)까지 지금보다 더 치열하게 작품에 임할 것이 뻔히 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