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24
223화 제안은 하지 않는다
바그란의 왕도인 로제론은 대 엘브랑데 전쟁과 은광 폐쇄로 최근 침체 상태에 빠져 있었다.
거리에 실업자가 득실거렸고 왕가에서 배급하는 무료 빵을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싸움까지 일어났다.
이런 위기는 자이움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겪고 있었는데, 엘브랑데와 싸우느라 재정을 너무 많이 소모한 것이 컸다.
바그란 왕가가 자이움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쓴 재정이 만 단위를 가볍게 넘었다.
만약 레오볼드가 빌려주지 않았다면 상당한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그나마 바그란은 엘브랑데의 영토에 접한 일부 국가들이 겪고 있는 기근과는 별 관련이 없어 다행이라는 말이 나왔다.
엘프들은 이번에 획득한 땅에 엘드그라실의 가지를 심었고, 그 가지는 약속이나 한 듯 주변의 기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원래 엘드그라실의 가지에 그런 효과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엘프들이 어떤 농간을 부렸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수확을 앞둔 농작물이 말라비틀어지는 피해를 입은 여러 국가에선 항의에 나섰으나 별 의미는 없어 보였다.
이런 이슈에선 자이움이 나서줘야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암투와 내전으로 바빠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마침내 왕도에 등장한 반다스 남작은 소소한 이슈가 되었다.
왕도의 유력자들은 비행선에서 내리는 훤칠한 키의 남자를 눈여겨봤다.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꽤 남자답게 생겼군.”
“운이 참 좋은 남자야. 은광으로 압박 받다가 오하멜 그 멍청이가 혼자 거꾸러졌으니까.”
“글쎄, 비행선에 골리앗을 실어 단숨에 영지로 쳐들어갔는데 그걸 운이라고 할 수 있나 모르겠네.”
“어찌됐든 제대로 된 전투도 없었잖아. 난 그거 인정 못해.”
언제나 그렇듯 소문은 부풀려지고 왜곡되기 마련이었다.
사그리스 은광에 레오볼드에 대한 악의가 덧붙여져 그의 평판은 극히 좋지 못했다.
다만 모두가 그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고 일부 호의적인 시선도 있긴 했다.
주로 혼기가 찬 귀족 영애들이었다.
“가문에 반다스란 성을 가진 사람은 남작 혼자라죠? 그럼 잔소리할 사람도 없겠군요.”
“나이는 다소 들었지만 저 정도면 체격도 훌륭하고 남편감으론 딱 아닐까요?”
“외모도 썩 나쁜 편은 아니고 무엇보다 돈이 많으니…….”
“시골 영지에 처박혀 있지 말고 왕도로 올라와서 생활할 생각은 없을까요?”
일부 대귀족이야 혼처가 정해져 있다지만 대부분의 영애들은 적당한 주변 귀족에게 시집을 가곤 했다.
그게 인맥 형성에도 좋기 때문이다.
영애의 의견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상대가 반다스 남작이라면 가문에서도 큰 반대는 하지 않을 거라는 게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물론 그건 남작이 왕도에 올라와서 생활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서였다.
왕도 로제론에 익숙해진 영애들은 교통이 불편하고 편의시설도 없는 시골 영지에 가길 싫어했다.
최근에는 비행선이 각광받고 있지만 그게 아무나 탈 수 있는 교통수단은 아니었다.
어지간한 영애들도 비행선의 유지 비용을 듣곤 기겁하곤 했다.
‘그런 비행선을 뿔새 마차처럼 타고 다니는 반다스 남작의 재력은 대체 어느 정도인 거야?’
‘암염광산에 부유대륙에 은광에… 작위는 낮아도 돈은 많은 남자야. 이번 기회에 꼭 잡고 말겠어.’
하지만 그와 접점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왕궁에서 온 문관이 그를 곧장 데려가서가 아니었다.
바로 옆에 웬 하녀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옷차림에도 주변 영애들이 못난이로 추락할 정도의 외모를 가졌다.
더욱이 키가 매우 커서 남작과 아주 잘 어울려 보였다.
영애들은 그래 봐야 하녀라고 수군댔지만 그 빛나는 외모를 부정할 순 없었다.
반다스 남작의 등장에 이어 란티스 백작과 가신들이 나타났지만 별 이슈는 되지 못했다.
이올린 공주와 정치적 협력 관계라는 소문이 파다해 영지는 버려두고 왕궁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니 이슈가 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이움의 프로잔 후작이 나타남에 따라 왕도 전체가 술렁였다.
“프로잔 후작이라고 하면 자이움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영주죠? 그런 분이 왜 직접 왔을까요?”
“소문에 의하면 아끼는 기사가 이번 전쟁에서 붙잡혔는데 그를 돌려받으려고 왔답니다.”
“저런. 그랜든 경이 붙잡았나 보죠?”
“그랜든 경은 얼마 전까지 왕궁에 있었다는데…….”
“그럼 반다스 남작이 직접 생포한 건가요?”
“남작령에 있던 골리앗이라고 해봐야 시원찮은데 그걸로 베파르급을 상대했다니 대단하죠. 물론 갖가지 함정과 마법을 동원했겠지만…….”
“돈만 많은 게 아니라 무용도 대단했군요…….”
영애들은 뿔새 마차를 동원해 사고라도 칠걸 하고 후회했으나 레오볼드는 이미 입궁한 뒤였다.
왕궁에서 루아드 왕자가 주관하는 미팅이 열렸다.
* * *
프로잔 후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맞은편에 앉은 반다스 남작을 바라봤다.
그의 에테르 감응력은 예상외로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평범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에밀을 사로잡을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 에밀이 실수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남작의 준비가 대단했나?’
바그란의 일개 남작 정도야 가볍게 짓이길 줄 알고 에밀을 파견했는데 설마 사로잡힐 줄은 몰랐다.
속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에밀이 사로잡혔다는 것은 바꿀 수 없었고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프로잔 후작은 에밀을 돌려받는 것까지는 확정된 사안이라고 여겼다.
지금 시점에서 자신과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귀족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다만 이후에도 란티스 백작과 연계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올린은 그렇다치고 의외로 무능한 놈이었어. 설마 오하멜 같은 잔챙이에게 전쟁을 맡길 줄이야.’
직접 나설 줄 알았는데 루아드 왕자의 반발을 신경 썼는지 행보가 너무 소심했다.
설마 비행선에 골리앗을 실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 그런 판단을 내린 거겠지만.
아무튼 그는 졌고 오하멜 자작을 잃었다.
프로잔 후작은 의외로 소심한 그보다는 반다스 남작 쪽이 마음에 들었다.
‘에테르 감응력이야 어쨌든 싸울 줄 알고 돈도 많군.’
정치적인 능력과 배포는 란티스 백작을 상대하는 것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프로잔 후작은 조용히 둘의 협상을 빙자한 싸움에 귀를 기울였다.
“…자네의 승리는 인정하지. 그러나 자작령을 점령하는 건 인정할 수 없네. 적당히 보상을 할 테니 당장 물러나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자작은 죽었고 이미 행정권을 확보했으니까요. 발전 가능성이 꽤 높은 영지인데 지금까지 무능한 지배를 받았다는 게 아쉽더군요. 지금부터 바꿔 봐야죠.”
“가능성이 높은 영지를 내가 버려두었다고 말하는 건가!”
“오하멜 자작이 무능했다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내가 임명했다! 오하멜은 썩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가신이었어! 너는 내 가신을 죽인 것도 모자라 가문 자체를 몰살시킨 거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다 죽이진 않았습니다.”
화산처럼 기세를 뿜어내던 란티스 백작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뭐라고?”
“백작께서 오하멜 자작을 그리 아끼시는지는 몰랐군요.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그의 식솔이 살아 있으니까요. 30명쯤 되던데 원하시면 언제든 돌려드리겠습니다.”
레오볼드가 이렇게 나오자 란티스 백작은 할 말이 없어졌다.
오하멜 자작가가 몰살당했다는 것을 가정하고 그의 잔혹한 술수를 압박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그들을 떠맡아야 하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루아드 왕자는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는지라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신의 가족을 책임지는 것은 군주로서 당연한 일이지. 내가 중재를 할 테니 란티스 백작은 오하멜 자작의 식솔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시오. 그들도 기뻐할 거요.”
“…….”
왕자까지 이렇게 나서니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프로잔 후작은 울화통이 치밀기 직전인 란티스 백작의 얼굴을 재미있게 쳐다봤다.
‘백작의 발언을 이끌어내기 위해 도발한 건가? 그들의 생존 자체를 숨기고?’
자이움이라면 전원 처형하거나 노예로 전락시켰을 것이다.
다만 반다스 남작의 방법도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당장 란티스 백작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도 가신의 식솔을 저버린 군주라는 평을 듣긴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 백작이 물러날 정도는 아니야.’
오브강을 낀 오하멜 자작령은 땅도 넓고 자원도 비교적 풍부해서 누구나 군침을 흘릴 만한 곳이었다.
란티스 백작이 직할령에 편입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오볼드가 한 한마디에 다들 얼어붙고 말았다.
“그럼에도 백작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나는 다른 두 영지를 공격할 겁니다. 이번 전쟁에 참가한 곳이 오하멜 자작만은 아니었으니까요.”
간신히 정신을 차린 란티스 백작이 분노를 가라앉히곤 입을 열었다.
“핀도르 남작령과 다른 영지를……? 진정 나와 싸우고 싶은 건가?”
“명분은 나에게 있습니다. 두 영지는 이번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당사자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백작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끝났군. 설마 백작을 상대로 협박을 할 줄이야.’
놀라운 것은 그 협박이 효과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란티스 백작의 입장에선 핀도르 남작령까지 빼앗기면 반다스 남작령과 마주하게 된다.
어떻게든 완충지대를 두고 싶은 백작으로선 선택지가 없었다.
‘전쟁을 이어갈 수 있다는 건 결코 허세가 아니다. 피해가 거의 없었으니까.’
오히려 근위기사 그랜든의 합류로 영지의 전력이 상승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태도를 보면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용병대까지 합류시킨 게 확실했다.
란티스 백작이 바그란 3세에 탄원하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홀라당 먹어치운 것이다.
프로잔 후작은 재미있는 눈으로 반다스 남작을 바라봤다.
‘제안보다는 협박을 하는 스타일이군.’
환경을 조성한 다음 상대를 끌어들여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을 보면 노련한 야수를 보는 것 같았다.
란티스 백작은 이 미팅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를 요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으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목소리에선 힘이 빠졌고 루아드 왕자는 이미 협상을 마무리한 분위기였다.
“반다스 경의 말은 옳소. 명분도 전력도 확실하군. 하지만 란티스 백작이 이대로 물러설 순 없지 않겠소?”
바그란의 동부를 지배하는 대영주로서 최소한의 체면은 세워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레오볼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루아드 왕자의 입장을 생각해서 양보하기로 했다.
“이번에 획득한 골리앗 10기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자작령에서 나온 1천 골드를 드리지요. 오하멜 자작의 식솔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
생활비 겸 해서 주는 것이니 다른 생각하지 말라는 엄포에 가깝다.
란티스 백작은 그를 노려보았으나 눈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그걸로 입을 닦을 생각인가?”
“선택은 자유입니다.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수틀리면 다시 전쟁이라는 듯한 발언에 란티스 백작은 눈을 감고 말았다.
분위기도 어수선했고 국내외의 정세도 좋지 않아 도저히 전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프로잔 후작이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게 두려웠다.
루아드 왕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백작도 납득한 것 같으니 이번 전쟁은 거기에서 마무리를 짓도록 하지. 서류를 준비할 테니 직접 인장을 찍으시오.”
문관들이 들어오자 회의실 내의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해졌다.
프로잔 후작은 그제야 레오볼드에게 조용히 물었다.
“에밀은 어떻게 되었나?”
“팔다리 멀쩡하고 식사도 거르지 않더군요. 괜찮다고 할 수 있겠죠.”
“그걸 묻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사로잡았냐고 묻는 걸세. 그 빈약한 라움급인가 하는 골리앗으로 싸운 건 아닐 테고.”
“정확하게는 자간급입니다. 그리고 전투에 대한 것은 본인에게 물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번 일에서 손 떼라는 말이군. 내가 순순히 납득할 것 같나?”
“누가 더 이익을 가져다줄지 잘 판단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익이라…….
프로잔 후작의 생각이 깊어졌고 레오볼드는 인장을 찍으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기사는 돌려드리겠지만 골리앗은 내가 가질 겁니다.”
“베파르급을 홀라당 삼키겠다는 건가? 간도 크군.”
“결국 중요한 건 재산이 아니라 인재 아니겠습니까?”
“인재라… 틀린 말은 아니지.”
란티스 같은 덩치만 큰 허풍선이보다야 내실 있는 반다스 쪽이 훨씬 나아 보였다.
마침내 협정이 끝났고 프로잔 후작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오볼드 반다스 남작이라고 했나? 여러모로 인상 깊군. 언제 한번 경을 초대하고 싶네만.”
“그럴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하이 나이트는 곧 복귀시키겠습니다.”
“고맙네.”
이로서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레오볼드는 루아드 왕자와 차를 마시기 위해 응접실로 가다가 갑자기 나타난 이올린 공주와 만났다.
그녀는 루아드가 뭐라고 하기 전에 팔을 움직였다.
따귀라도 한 대 올려붙일 생각이었던 모양이지만 레오볼드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처음 뵙습니다, 이올린 공주님. 요즘 왕도의 영애분들은 과감하시군요. 저같이 볼품없는 시골의 귀족에게 먼저 인사를 다 하시고.”
“이… 놓지 못하겠어요?”
이올린은 이를 앙다물고 팔을 빼려 했으나 힘에서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레오볼드는 능글맞은 미소를 짓곤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프로잔 후작 각하의 영지에서 뵙도록 하죠. 그때는 공주님에게 걸맞는 화려한 드레스 한 벌을 선물하겠습니다. 그럼…….”
레오볼드는 손을 놓아준 채 그대로 지나쳤고 이올린은 호흡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지만 뭐라고 하진 못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프로잔 후작과 모종의 약속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드레스까지 선물한다는데 마냥 몰아붙이기에도 좀 그랬다.
뒤에서 구경하던 루아드 왕자는 그의 능수능란함에 혀를 내둘렀다.
‘사람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노는군.’
상황이 받쳐주니 가능한 것이겠지만 애초에 그걸 조성한 것도 반다스 남작이었다.
루아드 왕자는 이번 미팅을 통해 반다스 남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필요성에 대해서 절감했다.
대체 무슨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보여 준 것만 해도 어지간한 귀족들보다 훨씬 나았다.
‘성녀가 용사로 지목한 근거는 있었다는 거겠지.’
어쩌면 진짜 용사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는 그의 목적이 나와 부합하느냐인데… 오늘 그걸 물어봐야겠군.’
내친 김에 충성 맹세도 받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 대가로 자작의 작위 정도면 충분하겠지.
루아드 왕자는 갑자기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사그리스 은광을 빌미로 시작된 영지전이 드디어 끝났다.
실제 전투는 매우 짧았지만 준비 기간과 사후 처리가 상당히 길었던 전쟁으로 양측의 희비가 완전히 엇갈렸다.
란티스 백작 측은 골리앗 10대와 1천 골드 정도를 건지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오하멜 자작의 식솔을 데리고 오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사람들이 보기엔 골치 아픈 혹이나 다름이 없었다.
제대로 된 작위도 영토도 없는 귀족을 어디다 쓸 것인가?
품위 유지는 해야 하니 생활비만 까먹는 밥버러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란티스 백작은 그런 밥버러지 수십 명의 부양을 떠맡았고 말이다.
그에 비해 레오볼드 자작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핵심인 오하멜 자작령을 통째로 삼켰고 골리앗 6대를 확보했다.
왕궁에서 나오는 얘기를 들어 보면 자이움의 프로잔 후작과도 친분을 나눴다고 하니 이익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명성이었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그는 란티스 백작과 대적할 만한 자라는 이름값을 얻게 되었다.
바그란 동부에서 그 이름값은 실로 커서 핀도르 남작이 부랴부랴 인사를 올 정도였다.
거기에 비하면 자작이라는 작위는 소소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오하멜 자작령에서 일하던 드워프 불토른도 레오볼드 반다스 자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이니 가겠네. 난 오하멜의 아버지와 계약을 했던 거지 자네와 계약을 한 게 아니니까.”
불토른은 거의 20년 동안 오하멜 자작령에서 봉사를 해온 드워프였다.
원래는 이미르 공화국에 있어야 했을 그가 어떤 이유로 바그란의 영지에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나이가 꽤 많아 150세에 가까운 그는 다른 관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레오볼드는 순순히 승낙해 주었다.
“붙잡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으니 이번 달 임금까진 쳐드리죠.”
레오볼드는 그에게 은화가 든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거 고맙군.”
불토른은 검댕이 묻은 얼굴을 찡그리더니 주머니를 잡아챘다.
그대로 돌아갔으면 인연이 끝났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이 건설되고 있는 골리앗 격납고와 계류장을 서성거렸다.
이미르 공화국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신기술이 적용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다 보니 궁금했던 것이다.
레오볼드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엘윈 등과 이야기를 나누기 바빴다.
“리빙메탈이라는 거야. 데노바를 통해 수입한 건데 원래는 엘브랑데에서 나온 거지.”
“엘프들이 용케 수출을 허가했군요.”
“데노바에서 힘 좀 쓴 모양이야. 이번에 드래곤 때문에 박살이 났는데 애석한 일이지.”
“형태가 바뀌는 걸 보니 굉장하던데요. 모르면 순식간에 당하겠어요.”
“사실 진짜 중요한 건 이 금속의 특성이야. 아스테라에 존재하는 그 어떤 수단으로도 파괴가 어려워.”
“와우. 그건 처음 듣는군요.”
“아까 테스트를 해봤는데 고로 온도를 아무리 올려도 녹지가 않는다더군. 대단한 금속이야.”
“그 정도면 대마법진 없이도 충분한 거 아닙니까?”
“나중에 스테피나가 오면 시험해 봐야지.”
드워프는 엘프에 이어 귀가 밝은 종족으로 유명하다.
땅굴만 파서 돌아다니다 보니 지하에서 나는 소리에 민감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는 리빙메탈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미안하네. 방금 리빙메탈이 뭐 어쨌다고?”
레오볼드는 땅딸막한 드워프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떠나신 줄 알았는데… 엘윈, 잠깐 저기 가서 이야기하지.”
“아, 예.”
없는 사람 취급하는 태도에 불토른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드워프 앞에서 금속 이야기를 하다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흔히 이야기하길 드워프는 태어나서 울기도 전에 망치를 잡는다고 한다.
아스테라 대륙에선 흔한 선입견이지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미르 공화국에선 망치가 모루를 두들기는 소리를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으니까.
아스테라에 존재하는 모든 금속을 다루지 못하면 드워프 대장장이가 아니라는 소리까지 있을 정도였다.
불토른은 더 참지 못하고 레오볼드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자네 잠깐만! 나와 이야기 좀 하지.”
“무슨 일이십니까?”
“방금 리빙메탈 어쩌구 말이야! 고로 온도를 아무리 올려도 안 녹는다고? 세상에 그런 금속이 어디에 있나?”
“아… 리빙메탈에서 그런 특성이 보이긴 했죠. 확실한 데이터를 위해선 테스트를 더 해봐야겠지만요.”
“그걸 내가 해주겠네.”
“예? 그걸 외부인에게 맡기고픈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 능글맞은 태도에 불토른이 폭발했다.
“젠장! 여기에 눌러앉으면 되는 거 아닌가? 자네와 새로 계약하지! 그럼 되겠나?”
레오볼드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쪽으로 오셔서 계약서를 작성하시죠.”
“그 리빙메탈이란 것부터 보여 주면 안 되겠나?”
“나중에 얼마든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참, 이번에 비행선의 에테르 추진기도 살짝 개량을 했는데…….”
“뭐? 귀쟁이들의 도움도 없이 그걸 개량했다고?”
둘은 시끄럽게 이야기하며 멀어져갔고 엘윈은 그제야 사정을 이해했다.
아무래도 영주의 머릿속에 제안이라는 단어는 없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