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54
253화 드래곤과 황녀
엘프는 아인종, 그중에서도 인간을 최대의 적으로 여긴다.
그러나 모든 엘프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수나마 대화와 타협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엘프도 있었는데 마르그레타 루스텔 황녀가 거기에 속했다.
그녀는 엘드그라실의 수호자이자 신의 챔피언을 배출한 황가의 일원으로서 황제를 제외한다면 가장 고귀한 혈통이었다.
대부분의 권력이 대의회와 삼재상에게 쏠려 있었지만 그렇다고 실권이 하나도 없는 허수아비라고는 할 수 없었다.
목소리를 내면 주변에선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마르그레타가 모처럼 드리즈덴을 지목해 원로원을 방문했다.
그는 새파랗게 젊은 황족과 대면하고 싶진 않았지만 무시할 수도 없었다.
엘드그라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녀를 무시하면 자칫 계획에 지장이 생길수도 있으니까.
그리하여 원로원의 밀실에서 둘이 만났다.
마르그레타는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황가의 허락 없이 특정한 개인을 공적 1호로 지목한 것은 명백한 월권행위입니다. 그리고 엘드그라실을 함부로 쓰는 것 또한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
시작부터 성급한 공격을 해대다니 이래서 젊은 엘프들은…….
드리즈덴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레오볼드 그자를 공적으로 지목한 것은 원로원이 아니라 켈로디안 재상입니다. 사람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재상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람은 결국 드리즈덴 의원이 아닙니까?”
“그런 의심을 많이 받지요. 어떻게 불식시켜야 할지 저로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또 그렇게 빠져나가려 하시는군요. 원로원의 핵심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바도 아닌데.”
“실례하오나 전하, 원로원 의원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50명쯤 되나요?”
“49명입니다. 얼마 전에 결원이 생겼지요. 소신을 비롯해서 다들 나이가 많습니다. 대부분 대전쟁을 직접 겪었고 이제는 죽을 날만을 받아놓은 처지입니다. 그런 자들이, 무슨 탐욕이 있어서 권력을 탐내겠습니까?”
“하지만 대의회에서 원로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 과도한…….”
“그것은 국부 에일리드 님의 당부입니다. 국사에 있어 중대한 일은 원로원과 상의하라는 그분의 말씀을 잊은 것은 아니시겠죠?”
200년 전 얘기까지 나오니 마르그레타도 할 말이 없어졌다.
드리즈덴은 권력을 나눌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그가 걸어온 300년의 삶은 장난이 아니어서 마르그레타가 무슨 말을 꺼낸다 해도 반박할 준비를 해놓은 게 틀림없었다.
명확한 증거도 없고 해서 그녀는 다른 화제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번에 대의회에서 반다스 섭정에 대한 성토가 줄을 이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블랙 나이트라는 신형 골리앗 때문인가요?”
“대의회의 작은 일입니다. 황녀님께서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인간 왕국들과의 사이가 악화된다면 그보다 안타까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황녀라는 위치에 앞서, 엘브랑데의 구성원 중 한 명으로서 충고를 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뜻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드리즈덴이 참지 못하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 놀라운 발언이 튀어나왔다.
“내가 바그란에 특사로 가겠습니다.”
“특사라… 인간 왕국에 가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반다스 섭정은 백성에게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칙사를 함부로 대하진 않겠죠.”
이렇게 철없는 황녀라니.
드리즈덴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가서 차나 한잔 얻어 마시고 오는 게 목적입니까? 엘프를 죽이기 위해 골리앗을 만드는 자에게 평화는 좋은 것이다, 우리는 더 사랑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렵니까?”
“우리 또한 골리앗을 제조하지 않습니까?”
“필요 이상의 것은 제조하지 않습니다. 벨리알급은 확실히 베파르급보다는 우위지만, 압도할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레오볼드 그자가 만든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기술력이 없어서 그런 골리앗을 제조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건…….”
그녀는 골리앗에 관련해서는 그다지 지식이 없었기에 대답을 망설였고 그 틈을 드리즈덴이 치고 들어갔다.
“인간들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분수를 모르고 주제도 모르지요. 그 교만함으로 에테르 공학을 발전시키다가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잊어버린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죠?”
그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도 모르느냐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르그레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예요. 엘프와 인간은 대화를 너무 하지 않았고 오해도 많았어요. 거기에서…….”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들의 운명이란 우리 엘프에게 지배당하는 것이죠. 그런 자들과 대화를 나누려 하시다니 딱하십니다. 차라리 정원에 있는 바위에게 말을 거는 편이 나았을 것을.”
“아무리 비아냥거리셔도 내 결정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레오볼드 반다스 섭정을 만날 겁니다. 직접 만나서 얘기할 겁니다.”
드리즈덴은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엘프 황녀와 인간 귀족의 회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거기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결과가 도출될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으로 반환점을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황녀가 죽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정 그러시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정말인가요?”
순진한 황녀는 자신이 드리즈덴의 마음을 돌린 줄 알고 약간이나마 기뻐했다.
하지만 죽을 날이 가까워 온 드리즈덴은 이번 일을 계기로 인간 세력을 말소할 수 있다는 기대에 들떴을 뿐이었다.
그의 사상은 200년 전 대전쟁을 계기로 확고하게 굳어졌고 더 이상 흔들릴 여지가 없었다.
인간은 엘프의 적이다.
“대화를 하시겠다니 말릴 이유는 없지요. 소신 또한 평화를 원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하지만 레오볼드 그자에게 그럴 의향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박수도 두 손이 맞아야 소리가 날 것 아니겠습니까?”
“공식적인 외교통로를 통해 물어보겠어요.”
“그래선 늦습니다. 소신이 이런 말씀을 드리기에도 좀 그렇습니다만, 우리에게 있어 1, 2년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인간들은 다릅니다. 수명이 짧기에 다들 바쁘게 움직이죠.”
“그, 그런가요? 어떻게 하죠?”
드리즈덴은 고개를 슬쩍 숙였다.
“소신에게 맡겨주십시오. 작은 권력이지만 비공식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 정도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자가 거부했을 경우, 전하께선 포기해 주셔야겠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다스 섭정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만약 그가 엘드그라실을 불태우지 않은 게 사실이라면, 그녀가 무한의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기록한 것들을 공개할 의향도 있었다.
내부에 아군이 드무니 외부에서라도 만들어야 할 게 아닌가?
그가 자신을 이용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마르그레타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포기할 수 없는 자는 얻을 수도 없는 법이니까.
* * *
레오볼드는 아르마로부터 뜻밖의 보고를 들었다.
“마스터, 원로원에서 챔피언 양성계획을 승인했습니다.”
“원로원이? 그 정보는 어디서 얻었어?”
“예전에 바이오칩을 삽입해 둔 섀도우엘프 델피나를 기억하세요? 그녀가 새로운 챔피언 후보가 되었습니다.”
“아하…….”
낚싯대를 드리우긴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대어가 걸린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미끼를 문 생선이 또 있단다.
아르마가 그의 앞에 홀로그램으로 한 여성의 이미지를 표시했다.
“마르그레타 루스텔, 현 엘브랑데 제국의 황녀입니다. 나이는 100세를 조금 넘은 것 같고 특이하게도 다른 엘프와는 사상이 조금 다릅니다.”
“설마 인간과의 화평을 부르짖는 건 아니겠지.”
“정확하세요. 그녀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몇 안 되는 엘프입니다. 다만 대부분의 권력이 대의회와 삼재상에게 쏠려 있어서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와 델피나는 무슨 관계지?”
“그녀가 티렌델과 만났을 때 델피나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대화를 통해 당시 정황을 구현해 보면 이렇습니다.”
홀로그램에서 아르마가 임의로 구현한 영상이 재생되었다.
레오볼드는 황녀와 티렌델이 만나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둘이 내연 관계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대화에서 왕과 신하라는 뉘앙스가 깊게 묻어납니다.”
“하여튼 우리 계획이 잘 들어맞은 모양이군. 저렇게 이를 가는 걸 보면 말이야.”
“후퇴 결정을 미뤄서 부하들을 죽게 만든 켈로디안 재상과 대의회에 대해서도 공공연히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부하가 죽은 거야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쟁에선 비일비재한 일인데 감정이 너무 앞섰군.”
그렇게 만든 것이 레오볼드였으니 별로 할 말이 없긴 하다.
하여튼 티렌델은 자신의 편인 황녀 앞이라고 안심했는지 대놓고 레오볼드와 켈로디안, 그리고 대의회를 죽일 것이라 선언했다.
옆에 있는 델피나는 그게 가능할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고 마르그레타 황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를 말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황녀가 레오볼드와 대화에 나설 것이라는 정보가 나왔다.
“황녀가… 무슨 생각일까?”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을 조금 완화시키려는 거겠죠.”
“실권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실권은 없지만 영향력까지 0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다른 의도도 있어 보입니다. 접경 지역에 심어져 있던 엘드그라실이 불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네요.”
“세계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군. 그녀와 만나면 우리 쪽에 가지가 두 개 있다는 것도 들키겠는데?”
“가능성은 낮지만 0은 아닙니다.”
레오볼드는 대의회란 작자들이 저 제안을 선선히 받아들였다는 점을 미심쩍게 여겼다.
“공공연히 인간의 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작자들이 대화를 허가할 거 같지는 않은데… 황녀를 이용해 뭔가 꾸밀 계획일까?”
“어쩌면 이참에 황녀를 죽일 생각일지도 모르겠네요. 대의회에게 황녀의 존재란 눈엣가시이니까요.”
“겸사겸사 내게 죄를 뒤집어씌워서 엘프들의 단결을 이끌어내고?”
“대의회라면 충분히 계획할 만한 일이죠.”
엘브랑데가 그를 공적 1호로 지목했지만 그게 모든 엘프가 증오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엘브랑데는 200년 동안 압도적인 힘으로 평화를 구가해 왔다.
접경 지대나 인간 왕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그건 남의 일이었다.
대부분의 엘프는 아마 레오볼드의 이름조차 모를 것이다.
황녀의 죽음으로 엘프 인구 5천만을 단결시킬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여기서는 그들의 계획에 놀아나는 척하면서 황녀를 숨기는 것이 베스트였다.
“어쨌거나 황녀 아닌가? 많은 엘프가 그녀를 차기 황제로 생각하는 건 맞겠지?”
“엘브랑데 황가에 황족이라고 할 만한 엘프가 별로 없어서… 거의 유일하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좋아. 그럼 적당히 당하는 척하면서 그녀를 숨기도록 하지. 미리 거처를 봐두라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마스터.”
“왜?”
“예쁘네요.”
레오볼드는 새삼 마르그레타를 눈여겨봤다.
눈처럼 하얀 피부에 백금발의 머리카락과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눈은 확실히 아름답긴 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스테라에 와서 본 여자들 중 외모 면에서는 가장 뛰어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자의 외모에 큰 가중치를 두지 않는다.
“중요한 건 능력이지. 얼굴만으로 뭔가를 주장해 봐야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이용해먹기 바쁘지.”
힘이 없는 정의는 공허할 뿐이다.
영화나 소설 등에서는 굳건한 의지를 관철해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는 경우가 곧잘 있지만 현실에서는 처참하게 짓밟힐 뿐이었다.
“역시 제가 최고죠?”
레오볼드는 아르마의 얼굴을 쳐다보다 슬쩍 웃었다.
최근 카밀라와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그녀답지 않게 부쩍 투정이 늘었다.
진짜 견제하는 건 아닐 테고 그녀에게도 감정이 생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아르마는 인공지능답지 않게 예전부터 감정을 표출하곤 했었다.
인간과 같이 있다 보니 감정에 대해 배우게 된 것일까?
정작 그녀의 주인은 감정이라곤 거의 없는 인간인데…….
하여튼 아르마가 그의 소중한 존재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그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 확정되진 않았지만 아르마가 최후까지 그의 곁에 남아있으리란 점은 확실했다.
“나한테는 아르마뿐이야.”
그녀는 그제야 만족한 듯 레오볼드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다른 보고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챔피언 양성 계획이란 말이 나왔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방법입니다. 엘드그라실에 모인 영혼을 무한의 회로에 돌려서 신격을 만들고 티렌델에게 주입하는 거죠.”
“그라키에스의 영혼을 카이로스에게 넣은 거나 다름없군.”
“조금 우려되는 게 있다면 데이터가 쌓였고 신격을 직접 만들 것이므로 전투력이 상당히 올라갈 거라는 점입니다. 티렌델도 카이로스보다는 강하고요.”
“발가드와 비슷할지도 모르겠어.”
하나면 모를까 델피나까지 날뛴다면 레오볼드가 아닌 이상 버티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레오볼드는 이쯤 해서 지갈레온을 내세울 필요성을 느꼈다.
바그란도 적당히 안정되었고 이제 쭉쭉 인프라를 깔면 되니 크게 문제점은 없을 것 같았다.
“지갈레온의 정체를 드러내면 발작하는 건 누가 있을까? 엘브랑데를 제외하고.”
“인간들도 크게 동요할 겁니다. 바라크 황태자는 설득할 사람이 주위에 있으므로 마스터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정도에서 그치겠지만 판그랄 대공이나 노스윈드 연합은 대놓고 비판하겠죠.”
“그럼 갈등이 만들어지겠군. 드래곤이 있는데 대놓고 쳐들어올 간 큰 놈은 없을 테고…….”
“지갈레온의 성격을 조금 바꾸면 서부 영지나 갈리스토를 공격할 때 명분이 생길 겁니다.”
“…설마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식으로 포장하자는 건 아니겠지?”
“겁쟁이에 허세만 부리는 본판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보다는 낫겠죠.”
“하긴 수호룡이 저렇게 가벼운 성격이어선 곤란하지.”
700년 가까이 저러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성격이 바뀔 리도 없으니 철저히 포장하는 게 나았다.
레오볼드와 아르마는 먼저 서부 영지를 집어삼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에 들어갔다.
타운젠트 후작을 비롯한 대영주 몇 명은 아직까지 노예를 부리고 있으므로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면 될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끝난 뒤 그는 지갈레온을 따로 불렀다.
“네 모습을 드러낼 때가 왔어.”
“드디어.”
지갈레온은 감격한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의 존재를 바그란 사람들에게 드러낼 생각을 하니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 힘을 드러낼 때가 왔군. 흐흐, 지갈레온 앞에 모두가 무릎을 꿇겠지? 어, 적당한 영지를 다스리는 게 좋을까? 가능하면 부유한 곳이면 좋겠는데.”
“그 점에 대해선 숙지해야 할 게 있어.”
“뭔데?”
둘은 쑥덕거리며 항후의 계획을 나눴고 지갈레온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정의와 평화를 외쳐야 한다고? 왜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 서부 영주들을 압박할 수 있으니까. 섭정이 나서는 것보다는 모양새가 좋다는 얘기지. 바그란을 완전히 통일하려면 이게 제일 빨라.”
폭력으로 정복하는 방법도 있지만 쓸데없는 피를 흘리게 된다.
“난 그런 거 생각해 본 적도 없어. 안 맞는다고.”
“맞고 할래, 그냥 할래?”
“아, 알았어.”
가끔은 폭력이 가장 빠른 방법일 때도 있는 법이다.
지갈레온은 투덜거리면서도 아르마가 짜준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은근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대전쟁 이후 처음으로 아스테라에 나타난 블루 드래곤 지갈레온, 타운젠트 후작을 비롯한 서부 대영주들이 비인간적으로 노예를 부리는 것에 분개해 날개를 떨쳐 일어나다… 근데 대전쟁 당시에도 노예는 있었는데? 아스테라 역사상 노예는 없었던 적이 없다고.”
“그래? 그럼 잠을 자다가 깨어난 젊은 드래곤으로 하자. 강력한 힘을 가진 대신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걸로 하면 될 거야.”
“흐음…….”
“그리고 덤으로 엘브랑데의 황녀를 납치해 주면 베스트겠지.”
“뭐? 제국의 황녀를 납치해야 한다고?”
크게 흥분하기에 그것만은 안 된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역시 드래곤의 본분은 공주를 납치하는 거지!”
“그런 일이 자주 있었나?”
“내가 어렸을 때엔 레어에서 아버지가 그런 얘기를 자주 해주셨지. 공주를 납치하더라도 재산이 좀 두둑한 왕국을 골라야 한다고 말이야. 공사를 많이 하는 곳이 좋다나?”
“그, 그래…….”
아무튼 지갈레온은 정의와 평화의 드래곤으로 알려지는 것에 그럭저럭 만족한 것 같았다.
제국의 황녀를 납치하는 건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드래곤이 할 짓은 아니지만 어차피 몰래 하는 거니까 큰 상관은 없었다.
이제 엘브랑데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 * *
엘브랑데는 데노바를 통해 레오볼드에게 은밀히 연락을 해왔다.
내용인즉슨 귀중한 분이 그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레오볼드는 모르는 척하며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단, 장소와 일정은 내가 정하겠소.”
“참고로 말씀드린다면 그분의 이름은 마르그레타 루스텔. 제국의 황녀 전하이십니다.”
황족임을 드러내는 것은 그녀의 위치에 걸맞은 행사를 준비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레오볼드에겐 그럴 의향이 없었다.
“설사 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내 방침은 달라지지 않소. 장소는 바그란의 왕궁이고, 비행선은 한 척으로 제한. 그리고 대단한 행사는 없을 거요.”
“…자이움에서도 그걸 좋게 생각할까요?”
“그건 당신이 걱정할 바가 아니오.”
시장은 얼굴을 굳혔지만 윗선에서 이미 추진하라고 내려온 것을 엎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일이 진행되었고 자이움에서도 이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바라크 황태자는 그 소식을 듣고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엘브랑데의 황녀가 반다스 백작을 만난다고? 우리는 그 소식을 엘브랑데에서 들었고?”
“워낙 급하게 진행된 사안이라 내부정리가 안 된 것 같습니다, 전하.”
프로잔 후작이 무마하려 애썼다.
하기야 통신이 연결되어 있지도 않으니 연락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라크 황태자는 레오볼드와 대화한 끝에 오해를 풀었다.
“그건 그렇고 통신구를 보낼 테니 받으시오.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내게 먼저 보고하도록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황태자는 일단 지켜보자는 쪽으로 입장을 정한 것 같지만 자이움의 다른 세력들은 그렇지 않았다.
판그랄 대공을 비롯해서 여러 귀족들은 제국 황녀와의 회담을 반다스 백작이, 그것도 바그란에서 치르는 게 말이 되냐고 노발대발했다.
―백작은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제국 황녀의 방문은 처음 있는 일인데 그걸 쥐꼬리만 한 바그란에서 하겠다니!
―심지어 비행선은 한 척으로 제한되고 별다른 행사도 않겠다고 합니다. 이건 황족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그들의 주장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아무리 적대적이더라도 외교관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암묵의 룰이었고 상대가 황녀라면 오히려 극진히 예를 갖출 필요성이 있었다.
대단한 권력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황녀라는 위치는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레오볼드는 공식석상에서 한마디만 했을 뿐이었다.
“이번 행사에 대해서는 황녀도 동의했습니다.”
당사자가 동의했다니 다들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엘브랑데 황녀의 방문은 자이움은 물론이고 바그란과 주변 국가에까지 상당한 파란을 일으켰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엘프와의 오래된 적대관계가 해소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적지만 존재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시간이 흘러 마르그레타 황녀가 소수의 기사와 시녀들을 대동한 채 비행선에 올랐다.
엘브랑데의 함대는 접경 지대까지만 그녀를 호위할 예정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 왕국에서 무슨 일이 터지면 그것은 레오볼드의 책임이라는 뜻이다.
마르그레타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당히 들뜬 표정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엘브랑데를 떠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영토가 꽤 넓으니 그럴 만도 하지.”
레오볼드는 시비리 위성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거센 바람에 흩날리는 걸 보며 지시를 내렸다.
“지갈레온의 등장이 알려질 때쯤이면 돌아갈 수는 없겠지. 적당히 타이밍 맞춰서 등장시켜.”
그리고 얼마 후 접경지대에서 부유대륙 선단이 황녀가 탄 비행선을 인계받았을 때였다.
바그란의 수도 로제론에 드래곤이 나타났다.
거대한 푸른 날개가 하늘에 드리워지자 시민들이 경악했다.
“드래곤이다! 드래곤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