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213
#닥터 플레이어 213화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솔직히 3왕비에게는 큰 유감은 없었으니까.’
3왕비는 최소 그를 직접 학대하진 않았다.
그러니 다른 이들과 비교해 감정이 훨씬 덜했다.
‘만약 다른 유감 있는 이였다면, 이렇게 간단히 치료하러 나서지는 못했겠지.’
그래, 예를 들면 국왕 오든.
국왕 오든이 중병을 앓으면 이렇듯 쉽게 나설 수 있었을까?
글쎄,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한 말로 그러지 못할 것 같다.
그도 감정을 가진 사람이니까.
어쨌든 레이몬드는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성자 같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힐러. 그저 환자를 위할 뿐입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
비네트는 그제야 레이몬드에 관한 소문을 떠올렸다.
‘그분은 그저 빛입니다.’
흘려들은 이야기다.
아니, 아들 리머튼 때문에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하지만 이 순간 깨달았다.
레이몬드는 정말 ‘빛’이란 걸.
비네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합니다. 아니, 너에게 정말 미안하구나.”
레이몬드는 눈을 크게 떴다.
하대였다.
그를 후작이 아닌, ‘레이몬드’로 부른 것이다.
즉, 과거의 잘못을 배다른 ‘어머니’로서 사과하는 의미의 말이었다.
‘아.’
레이몬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흔들렸다.
처음이었다.
이런 사과를 듣는 건.
과거 상처를 줬던 인물 중 아무도 그에게 진실한 사과를 한 이가 없었으니까.
“……아닙니다.”
레이몬드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최선을 다해 치료하겠습니다.”
* * *
왕비의 간절한 바람으로 수술은 빠르게 진행하기로 하였다.
소식을 들은 테른 후작이 달려왔다.
테른 후작은 레이몬드를 보고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당연했다.
그간 잔뜩 적대했는데, 누이동생을 치료해 주겠다니.
‘치료를 반대하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테른 후작도 레이몬드만이 왕비를 치료할 유일한 희망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레이몬드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했다.
“그간의 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요?”
“전 지금 힐러로 이 자리에 와 있는 거니까요. 후작님께서도 오늘만큼은 다른 건 다 잊고 왕비마마만 걱정해 주십시오.”
테른 후작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레이몬드가 진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정말 마마를 낫게 할 수 있는 거요?”
레이몬드는 신뢰를 주는 음성으로 답했다.
“네, 가능합니다.”
테른 후작은 그 말에 무슨 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와 3왕비는 우애가 깊은 남매였다.
그런 만큼 그간 큰 마음고생을 하였다.
3왕비가 말라 비틀어갈 때마다 그의 가슴도 타들어 갔는데, 치료해 주겠다니.
“……감사하오, 진심으로. 난 그대를 적대했는데.”
레이몬드는 물끄러미 테른 후작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좋은 관계는 아니었지.’
테른 후작이 정계 뒤편에서 열심히 자신을 음해했음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내 호구가 될 몸이니까.’
앞으로 뜯어낼 이득을 생각하니 마음이 넉넉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나중에 최대한 호구를 뜯으려면 미리 좋은 인상을 만들어놔야겠지.’
레이몬드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환자 앞에서는 오로지 환자만 생각합니다. 그러니 다른 이야기는 하실 필요 없습니다.”
“……!”
테른 후작은 입술이 희미하게 떨렸다.
레이몬드의 진심(?) 어린 말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도대체…… 이런 이가 있다니.’
어쩔 수 없이 한 인물이 비교되었다.
리머튼이었다.
‘리머튼 전하는 어머니가 어떻게 되든 신경도 쓰지 않는데.’
그뿐이 아니다.
지금 리머튼은 티류 지방에서 저지른 실책으로 근신 명령을 받아 추하게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궁지에 몰리니 추한 본성이 나온 것이다.
아들은 이런데, 그들이 원수처럼 대했던 자가 이렇게 그녀를 위해 주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레이몬드를 적으로 여기고 있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안심하십시오, 마마. 한숨 푹 주무시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겁니다.”
레이몬드는 늘 수술 전에 환자에게 하듯 꼭 숨을 잡아주었다.
그런 레이몬드의 따뜻한 모습이 테른 후작의 가슴에 다시금 깊이 파고들었다.
“곧바로 수술을 시작하겠습니다. 후작께서는 밖에서 기다려주십시오.”
테른 후작은 병실에서 나가기 전, 레이몬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레이몬드는 굳건한 힐러의 눈빛으로 왕비의 혹을 보고 있었다.
‘페닌 후작은 리머튼 전하의 적. 하지만 그가 왕비마마를 치료해 주면…… 난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한단 말인가?’
테른 후작은 깊이 고뇌했다.
* * *
레이몬드는 최선을 다해 수술에 임했다.
호언장담한 것처럼 마냥 쉬운 수술은 아니었다.
‘V자 절개법은 흉터가 최소화하는 대신, 병변의 노출이 어려워지니까.’
또한, 침샘 종양은 특히 주의할 게 있었다.
안면 신경이었다.
얼굴의 근육을 움직이는 신경이 침샘을 지나간다.
까딱 실수하면 그 안면 신경을 다치게 할 수 있었고, 그러면 치명적인 후유증이 남게 된다.
안면 마비가 오는 것이다.
반드시 피해야 하는 합병증이었다.
또한, 혹을 제거 후 뺨이 함몰되는 걸 막기 위한 처치도 해야 했다.
레이몬드는 고도로 집중해 손을 움직였다. 다행히 어떤 합병증도 없이 수술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통증이 심하진 않으십니까?”
“……괘, 괜찮습니다, 후작.”
이후 수면에서 깨어난 왕비는 한참을 주저하더니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치료는 성공적으로 된 것입니까?”
레이몬드는 빙긋 웃어 보였다.
“네, 그렇습니다. 거울로 확인해 보겠습니까?”
왕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여전히 그 흉측한 혹이 남아 있을까 봐, 거울을 보기가 두려웠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거울을 바라봤다.
“……!”
그리고 왕비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정말로 없었다.
그녀를 갉아먹던 신의 저주가.
그 끔찍한 혹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꿈인가?’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이 잘 못 된 거면 어떻게 하지? 헛것이면? 눈을 감고 떴더니 다시 혹이 생기면?
그런 생각이 머리를 흐트러트렸지만, 아니었다.
과거의 아름다웠던 그녀의 얼굴이 거울 속에 분명히 자리하고 있었다.
또르르.
비네트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채 자각하기도 전에 울음이 흘러나왔다.
“흐, 흐윽. 흐윽.”
그간의 설움, 고통이 한 번에 터져 나왔고, 레이몬드는 왕비의 체면을 배려해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왔다. 크리스틴이 남아 그녀를 위로했다.
밖으로 나오니 테른 후작이 딱딱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페닌 후작.”
굳은 표정과 낮게 깔린 음성.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화라도 난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속으로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테른 후작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눈물 흘린 걸 레이몬드에게 티 내지 않기 위해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날 따라오시오.”
테른 후작은 휙 등을 돌렸다.
레이몬드는 직감했다.
바라던 보상 타임이 도래했다고!
* * *
테른 후작은 자신의 저택으로 레이몬드를 데려갔다.
“왕비마마를 치료해 주어 고맙소.”
“아닙니다.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테른 후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차를 들어 찻잔에 따랐다.
“난 그간 생각해 왔소. 누구든 마마의 병을 치료만 해준다면, 어떤 보답이라도 하리라고.”
테른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게 설마 그대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테른 후작은 차를 레이몬드에게 직접 건네주었다.
“어쨌든 정말 고맙소. 그대가 우리 남매에게 베푼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 거요. 바라는 것이 있다면 뭐든 이야기해 보시오.”
레이몬드는 바짝 정신을 세웠다.
‘중요한 순간이야.’
고작 몇 푼의 치료비로 끝내느냐, 아니면 두고두고 등골을 빼먹을 호구로 만드느냐. 지금 이 순간에 달렸다.
‘일단 테른 후작을 ‘친구’로 만들어야 해. 그래야 호구를 뜯을 수 있어.’
레이몬드는 힐끗 테른 후작의 얼굴을 살폈다.
한바탕 눈물 흘렸는지 빨개진 눈동자.
하지만 표정은 딱딱했다.
역시 왕국을 호령하는 제후.
쉽지 않은 상대임을 단번에 직감할 수 있었다.
‘더구나 아직 그와 나는 적대 관계이니.’
치료 한 번으로 모든 안 좋은 관계가 해소되는 건 아니다.
그러니 가장 급선무는 지금 기회를 살려 테른 후작을 그의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내가 바라는 친구 관계는 한쪽이 아낌없이 베푸는 일방적 친구 관계이지만.’
테른 후작을 그런 ‘소중한 친구’로 만들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해온 터.
미리 준비해 온 각본대로 입을 열었다.
마침, 응원하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환자와 백성을 위해 나서고 있습니다!] [스킬, ‘협상의 기술’이 발현됩니다!] [스킬, ‘언변’이 발현됩니다!]“사실 후작님께 바라는 게 있습니다.”
“뭐든 말씀하시오. 모두 다 들어주겠소.”
시원한 말과 다르게 전혀 녹록한 표정이 아니었다.
어수룩한 부탁을 하면, 호구를 잡기는커녕 어떤 이득도 보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레이몬드는 먼저 미끼를 던졌다.
“페닌 치료원에서 얼마 전 개발한 약을 구입해 주십시오.”
“약?”
“병충해 제거 약입니다. 아마 후작님께 필요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
테른 후작의 눈이 커졌다.
병충해!
최근 그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창고를 불태워 식량이 모자랐는데, 하필 식량을 좀 먹는 벌레까지 퍼진 것이다.
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부족했던 식량이 더욱 감소하였고, 영지민이 굶을 위기에까지 처했다.
더구나 이 상황은 그가 자초한 거였으니 바늘방석이 따로 없었다.
병사까지 동원해 벌레를 제거하려 해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딱 필요한 이런 제안이라니?
“정말 병충해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이오?”
“네, 고대의 지식을 통해 약을 제조했습니다.”
의학 지식을 이용한 살충제 제조!
이전 시도했던 연구 중 하나였다.
만약 효과적인 살충제를 개발하면 식량 생산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적인 성과는 못 봤지. 난관이 많아서.’
가장 큰 난관은 대량 생산이었다.
레이펜타이나의 약초, 독초를 이용해 어찌어찌 벌레를 죽일 살충제를 구현하긴 했다.
하지만 약초를 이용한 살충제는 대량 생산이 불가능했다.
‘대량 생산이 안 되면 농사에도 큰 도움이 안 돼.’
그런 이유로 개발한 살충제는 고이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번 테른 후작의 사태를 듣고 테른 후작을 낚을 ‘미끼’로 쓰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쓸데가 없어 창고만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쓸 수 있게 되다니.’
물론 이건 미끼일 뿐.
더욱 크고 커다란 호구를 뜯어낼 계획이었다.
‘난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될 거야.’
레이몬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