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224
#닥터 플레이어 224화
“앞으로도 지금처럼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간직해 주십시오.”
“……!”
소피아의 눈이 커졌다.
늘 쌀쌀한 평소 표정과 다르게 진심으로 놀란 거다.
물론 레이몬드가 이런 부탁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소피아, 네가 훌륭한 왕이 되어야 내가 안락한 힐러의 삶을 누리지.’
왕자들이 저 모양인 이상, 다음 왕은 무조건 소피아다.
레이몬드는 소피아가 꼭 태평성대를 이루는 위대한 명군이 되길 바랐다. 밑에서 안락한 꿀 빠는 삶을 살기 위해서 말이다.
“과연…… ‘빛’이라더니. 정말이군요, 오라버니.”
레이몬드는 소피아의 입에서 ‘빛’이란 단어가 나오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다만…….”
레이몬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언가 소피아의 기색이 이상했던 거다.
“전하?”
“아니, 아니에요.”
그녀는 어딘지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왜 그러는 겁니까?”
하지만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마세요. 어쨌든 말씀 명심하겠어요.”
그러며 소피아는 사라졌다.
* * *
레이몬드와 헤어진 후, 소피아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백성들을 위한다, 라.”
그녀는 씁쓸히 중얼거렸다.
“불가능한 일이지. 난 곧 죽을 테니까.”
놀라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담담히 생각했다.
‘오라버니의 의술로도 내게 주어진 운명을 바꾸지는 못할 테니까.’
그래, 하늘이 그녀에게 내린 천형은 어떤 치료술로도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만약 이런 운명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욕심을 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가 왕위에 어떤 욕심도 내지 않았던 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어서였다.
어쨌든 레이몬드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녀가 사라져도 레이몬드가 있는 한, 어떤 걱정도 없으리라.
‘조금만 더 버티면 되겠지.’
아직은 무너지면 안 된다.
카이른이 처리되고.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그때 그녀는 모두에게 자신의 운명을 알리고 평안히 마지막을 준비하리라고 다짐했다.
* * *
소피아와의 만남 이후.
왜인지 그날 레이몬드는 황당한 꿈을 꿨다.
왕위에 오르는 꿈이다.
「경배받으십시오, 위대한 왕이여!」
「당신은 위대한 빛이니, 광왕(光王)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레이몬드는 사람들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면서,
‘크하하, 내가 왕이라니. 내가 이렇게 성공하다니! 다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하고 바보같이 웃고 있었다.
물론 개꿈이었다.
꼬끼오!
레이몬드는 부스스 눈을 뜨고 일어났다.
‘……무슨 이런 개꿈을.’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내가 왕이라니. 말도 안 되는. 나는 왕위계승권도 없는 사생아인데…….”
하지만 말을 내뱉는 순간, 곧 깨달았다.
완전한 개꿈은 아니란 걸.
‘이제…… 사생아인 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잖아.’
그간 너무 많은 공을 세워온 탓이다.
또한, 이번에 국왕을 살리기까지 했으니 더는 누구도 그를 사생아라고 반대하지 않을 거다.
“…….”
레이몬드는 침묵했다.
생각해 보니 왕이 되는 게 아예 황당한 말이 아니다.
그는 전해 들은 소문들을 떠올렸다.
백성들은 물론, 상당수의 귀족이 그가 왕이 되길 바란다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긴 이야기였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가볍게 넘길 이야기가 아니었다.
충분히 위험성이 있었다.
“……이러다가 나 왕 되면 어떻게 하지?”
레이몬드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왕이 되면 나름대로 좋은 점도 있긴 하겠지만.’
모든 사람이 그의 앞에 무릎 꿇을 거고. 지금과 비교도 안 되는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을 테다.
휴스톤 왕국이 가난하다고는 하지만, 왕도 가난하게 사는 건 아니니까.
오든이 검소했을 뿐, 원한다면 얼마든지 펑펑 쓰며 살 수 있었다.
왕이 되면, 힐러 로드로서 환자를 위한 대의(大醫)의 길을 실천하기도 더 좋을 테고.
솔직히 조금은 탐이 나긴 했다.
레이몬드는 성공욕의 화신이니까.
정확히는 왕이 누리는 어마어마한 권력과 부귀영화가 탐이 났다!
‘어쩌지?’
레이몬드는 고민하였다.
가볍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만약 뜻을 세운다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론은 금방 났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왕이 되면, 얼마나 바쁘겠어? 일의 노예가 될 거야. 제후 때와는 달라.’
그나마 제후는 힐러의 일과 적절히 병행되었다.
왕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왕이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일이 많아. 왕궁을 떠나기도 쉽지 않고.’
왕이니까.
제후와는 다른 특별성이 있었다.
‘내가 탐나는 건 왕의 떡고물이지, 왕의 어마어마한 일거리가 아니니까.’
권력, 명예, 부귀영화 같은 왕의 단물만 빨아 먹고 싶지, 실제로 왕이 되어 고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 되겠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소피아의 뛰어남을 사람들에게 알려야겠어.’
레이몬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생각했다.
‘난 소피아 밑에서 안락하게 꿀 빠는 힐러가 될 거야.’
왕이 누릴 권세는 탐난다.
하지만 개고생은 하고 싶지 않다.
그게 그의 속마음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왕이 되어 의무 없는 자유로운 권한만 누릴 수 있다면 모를까, 왕 따위 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 목표는 대륙 최고의 힐러이니까.’
아무리 왕이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대륙 최고의 힐러가 누리는 부귀영화에 비할 바는 아니다.
‘휴스톤 왕국이 부자 나라도 아니고. 우리나라 솔직히 가난하잖아. 왕이어도 부귀영화에 한계가 있지.’
반면, 대륙 최고의 힐러가 되면 ‘황제’ 부럽지 않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 순간, 레이몬드는 하나의 목표를 세웠다.
‘소피아를 확실히 왕위에 올릴 방법을 고민해 보자.’
이대로라면, 어어 하다가 왕위 계승자가 될지 모른다.
조금 더 확실히 소피아를 왕위에 올릴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고 난 대륙 최고의 힐러, 부귀영화의 꽃길을 걷는 거야.’
굳게 다짐한 레이몬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이후 며칠이 흘렀다.
국왕 오든의 상태는 많은 호전을 보였다.
심부전도 확연히 좋아졌고, 바이탈도 안정화되었다.
문제는 의식 상태였다.
‘섬망이 오래가네?’
레이몬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든은 여전히 섬망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착란을 겪는지 계속 괴로운 신음만 흘렸다.
‘혹시나 뇌막에 전이가 있었던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일단 뇌에 전이가 있을 크기가 아니었고, 혹시나 해서 연수막 전이를 배제하기 위해 척추액을 뽑아 확인해 보았지만 정상이었다.
오든의 의식 혼돈은 그냥 섬망이었다.
‘환자마다 섬망에서 깨어나는 속도는 다 다르니까.’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깨어나긴 할 거다.
정확한 시간을 몰라서 그렇지.
‘빨리 일어나야, 소피아를 왕세녀로 책봉하는 걸 건의할 텐데.’
레이몬드는 며칠간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소피아를 확실히 왕위에 올릴지.
생각해 보니 간단했다.
오든에게 직접 건의하는 거다!
오든 입장에서도 카이른, 리머튼 따위보다 소피아가 훨씬 좋은 선택지니 거절하지 않으리라.
문제는 오든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회복하고 있으니 일어나는 데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레이몬드는 팔짱을 꼈다.
‘그동안 난 뭐 하지?’
바이탈이 안정되고 났더니 별로 해줄 게 없었다.
섬망 치료?
현대 지구에서도 섬망은 딱히 큰 치료법이 없었다.
도움이 되는 항정신 의약품이 있긴 하지만, 이곳 레이펜타이나에는 없다.
‘비슷한 효과를 내는 약초 추출물을 투약해 볼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약물 투여 말고는 별달리 해줄 게 없었다.
‘마냥 여기서 죽치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아니, 정확히 말하자.
별로 오든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오든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불편해.’
상태가 안 좋을 때는 치료에 매달리느라, 잡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한가하게 있으니 불편한 기분이 잔뜩 들었다.
‘제자님이나 린든에게 맡기고 나는 중간중간 확인만 해보면 될 것 같은데. 뭔가 변화가 있으면 연락을 받고 바로 돌아오면 되니까. 그런데 나가서 뭐 하지?’
고민하던 레이몬드는 번뜩 떠올랐다.
‘할 일이야 많잖아. 환자 치료해야지.’
라팔드 지방에 가느라 수도의 페닌 치료원은 장기간 휴업 상태였다.
그래서 그가 수도로 복귀하기만 기다리는 환자가 많다고 했다.
‘날 기다리던 환자들을 치료해야겠어.’
그리고 또 하나의 용건이 더 있었다.
‘그러면서 귀족 환자들도 봐서 돈도 벌어야지.’
생각해 보니 이곳은 수도.
귀족이 우글거린다.
즉, 도처에 황금이 굴러다니고 있는 거다!
‘호구 환자 뜯기…… 아니, VIP 환자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가동할 때야!’
레이몬드는 상상해 보았다.
수도 귀족들을 호구로 만들어 떼돈을 버는 미래를.
‘이제 정말 슈퍼 리치가 머지않았어.’
그리고 단순히 돈만 버는 게 아니었다.
‘이건 카이른의 힘을 꺾는 일이 될 거야.’
그는 미리 카이른의 지지자 중 의술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파악해놓았다.
적지 않았다.
‘일가족 중 아픈 사람이 없는 이는 별로 없으니까. 의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많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최대한 자신의 편으로 데려올 거다.
‘충분히 가능할 거야. 놈이 국왕 전하가 쓰러졌을 때 벌인 실책으로 흔들리는 지지 귀족이 많다 하니.’
카이른의 힘은 지지 귀족에게서 나오는 터. 최근 잘못으로 입지가 축소된 상태에서 지지 귀족의 이탈까지 일어나면 뼈아픈 타격이 되리라.
‘해보자. 돈도 벌고 카이른의 힘도 꺾는 거야.’
레이몬드는 결연히 다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닌 후작?”
재상 갈먼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수도의 환자들을 치료하러 가겠습니다.”
“수도의 환자들을?”
“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받는 환자들이 있을 테니까요. 그들을 치료하고 싶습니다.”
레이몬드는 안타까운 척 표정을 지었다.
“또한, 귀족분 중에도 제 치료를 기다리던 분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분들도 치료해 드리고 싶습니다.”
재상 갈먼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긴, 저게 레이몬드이지. 어떻게 말리겠나?’
레이몬드에게는 국왕 오든뿐 아니라, 어떤 생명이든 소중하리라.
레이몬드야말로 박애 정신의 진정한 화신이니까.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손길을 기다릴 환자가 있을 텐데, 무작정 말릴 수가 없었다.
‘전하의 상태도 많이 괜찮아지신 것 같으시고.’
“알겠네. 대신, 국왕 전하의 상태에 변화가 있으면 바로 돌아와야 하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의 치료가 가장 중요함은 잊지 않고 있으니까요.”
국왕 오든이 무사히 깨어나야 막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레이몬드는 국왕 오든의 치료에도 소홀할 생각 없었다.
‘국왕도 치료하고, 돈도 버는 거야! 가자, 슈퍼 리치의 세계로!’
그렇게 파이팅 넘치게 병실을 나가는 순간이었다.
레이몬드의 눈에 국왕 오든의 얼굴이 들어왔다.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신음.
그렇게 오든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레이몬드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착란을 겪고 있기에 저렇듯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평소 냉랭한 오든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던 그의 모습과 전혀 달라 낯설었다.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착란을 겪는지는 당사자 말고는 알 수가 없으니.’
이건, 레이몬드도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오든, 스스로 회복할 수밖에.
그래도 한마디 하였다.
힐러로서.
“어서 일어나십시오.”
레이몬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오든이 저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화가 났다.
평생의 원수가 속절없이 무너져 있는 모습을 보는 느낌이다.
그래서 말했다.
이번엔 아들로서.
“어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십시오.”
걱정이 아니었다.
사사로이 걱정할 정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저 레이몬드는 어서 오든이 회복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과연 오든이 과거의 잘못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레이몬드가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지금 오든은 단순한 섬망에 빠진 게 아니란 것을.
심마(心魔).
지고한 경지에 이른 초인들.
소드 마스터나 아크 메이지가 특별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때 찾아온다는 심마가 섬망에 함께 섞여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국왕 오든은 일반적인 섬망과 다르게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에게 찾아온 심마의 정체는 바로 ‘과거’였기 때문이다.
그는 혼돈 속에서 끝없이 되풀이하는 ‘과거’를 직면하고 있었다.
국왕의 책무라는 미명하에.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끝없이 반복하고, 반복해 보게 된 것이다.
특히 가장 괴로운 장면은 바로 이것이었다.
레이몬드.
그의 무관심 속에서 레이몬드의 가슴이 시커멓게 썩어가던 모습이 끝없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벗어나려 하였지만, 착란은 끝이 나지 않았다.
무저갱의 지옥처럼 오든의 발목을 붙들고 끝없이 가슴을 꿰뚫었다.
* * *
한편, 왕궁의 2왕자궁.
카이른은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이제 더는 가만히 두면 안 되겠군.”
카이른은 가루약을 꺼내었다.
‘그들’이 건네준 가루약.
그는 이 약을 통해 한 가지 섬뜩한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레이몬드 놈을 나락에 떨어뜨릴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