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20
00121 121화
수술 과정과 그 중간에 일어났던 심정지 상황까지 모두 포함했고, 수술 후에 어떤 경과를 보이고 있는지도 이어서 설명했다.
태수가 이토록 자세하게 이야기해준 건 군인에게 보호자는 바로 상관이다. 그리고 커다란 문제로 발전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태수의 설명을 모두 들은 클라크 대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듣기만 해도 고생하셨다는 게 느껴집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수술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뒷일까지 예상하신 모양입니다만.”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태수가 찡긋 미소를 짓자 병실 분위기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클라크 대령도 비슷한 미소를 보이며 태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안 깨어나는 겁니까? 수술이 끝난 지 4시간이 넘었다면서요.”
“예정상으로는 30분 안에 깨어날 겁니다.”
“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경우가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클라크 대령이 조심스럽게 운을 띠웠다.
이제 할 말이 자칫 태수의 의술을 의심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허나 태수는 어떤 질문을 할지 예상했기에 그에 대해서 바로 대답했다.
“아니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죠.”
“일어날 거 같습니까?”
“현재까지 이론적으로는 일어날 확률이 90퍼센트가 넘습니다.”
“나머지 10퍼센트는 아니라는 겁니까?”
클라크 대령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지만 태수는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환자가 평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생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부정적이고 세상에 싫증을 느끼고 있다면 스스로 깨어나길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태수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병장이 그 말에는 발끈했다.
“지금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라이언 상병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닥터에게 무슨 실례인가.”
“죄송합니다.”
병장이 바로 사과하자 클라크 대령도 같이 사과했다.
“닥터 미안합니다. 샘 분대장이 조금 섭섭했던 모양입니다.”
“괜찮습니다. 확률적인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린 거니까요. 그보다 샘 분대장이시라고요? 소개가 늦었습니다. 태수 최입니다.”
태수가 자기소개를 하며 인사하자 샘 분대장은 거수경례를 올렸다.
척!
“샘 병장입니다. 닥터 최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방금 무례했던 점, 다시 사과드립니다.”
“괘념치 마세요. 평소 같이 생활한 분대장이니까 엉뚱한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신 게 당연하니까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라이언 상병은 누구보다 수색대와 PKO를 자랑스러워하는 병사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샘 분대장의 목소리에 힘이 가득했다.
태수는 그런 믿음을 보이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자신에게도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나?
가족 말고는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씁쓸해 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다면 앞으로 만날 수 있었다.
언젠가 서로 무조건 믿어줄 사람을 만난다면 더 없이 좋을 거 같았다.
세 사람이 라이언 상병의 병상을 지키던 시간이 조금씩 길어졌다.
주변에 음료수와 간단한 먹을거리가 놓여 있지만, 그 누구도 음료수 외에는 손 댄 흔적이 없었다.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기다림에 괜스레 시계만 힐끔거렸다.
클라크 대령과 샘 분대장이 도착한지 대략 20분가량 지났다.
라이언 상병이 슬슬 깨어나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좀 더 지겨운 기다림이 이어질 때였다.
“으으음.”
느닷없이 들려오는 미약한 신음소리에 태수와 클라크 대령, 샘 분대장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그때였다.
“음.”
또 한 번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 중 누구도 소리를 낸 사람이 없었다.
그럼?
태수는 직감했는지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라이언 상병 머리맡으로 향했다.
유심히 살펴보니 라이언 상병의 감긴 눈꺼풀 안쪽에 안구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마취에서 깨어날 때 일어나는 자연적인 반응이다.
태수는 침착한 목소리로 불렀다.
“라이언 상병, 라이언 상병.”
태수가 몇 번 불렀지만 라이언 상병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어느새 반대쪽에 서서 걱정 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느껴졌다.
태수는 바로 샘 분대장에게 부탁했다.
“불러보세요.”
“제가 말입니까?”
“마취에서 깨어날 때는 가장 익숙한 목소리가 효과적입니다.”
태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샘 분대장이 조심스럽게 소리 내 불렀다.
“라이언, 이봐. 라이언.”
이어지는 부름에 라이언 상병의 감긴 눈 속이 좀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뿐이 아니라 손가락과 발가락도 조금씩 꿈틀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술이 달싹거리는 듯 하더니 라이언 상병의 눈꺼풀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으으음.”
정신이 서서히 깨어나며 고통도 같이 느끼는지 신음소리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반응이 있는 걸 확인한 샘 분대장이 계속 그를 불렀다.
“라이언, 정신이 들어? 인마.”
“분…… 대장님?”
눈도 제대로 못 뜬 상태로 꽉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알아보겠어?”
“아직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태수가 대신 대답하자 샘 분대장이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네?”
“깨어나는 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서 반응한 거니까, 좀 더 지켜보시죠.”
태수는 혹시 모를 문제까지도 대비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그러는 사이 라이언 상병의 눈이 완전히 떠지고 서서히 초점까지 잡혀갔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들을 느낀 라이언 상병이 눈을 굴려 바라보다 샘 분대장과 시선이 마주쳤다.
“분대…… 장님.”
“알아보겠어?”
“여기가…… 병원…….”
태수는 라이언 상병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병원까지 왔다는 걸 기억하는데 더 이상 어떤 질문도 필요 없었다.
태수는 세 사람을 남겨두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할 이야기가 많을 터였기에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이다.
태수가 진료실에 도착해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대고 휴식을 취했다.
“다행이야.”
무사히 깨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라이언 상병의 생명이 끝나지 않은 것에도 감사했고, 그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가 생기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도 마음이 가벼웠다.
한편 태수 스스로는 조금 씁쓸했다.
위중한 환자를 치료할 때마다 생각나는 아픈 과거 때문이다.
이젠 잊을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도피밖에 되지 않았다.
의사로서 가장 많이 경험하게 될 죽음이라는 일에 있어 매서운 예방주사를 맞았다고 하는 게 정답일지도 몰랐다.
하필이면 그 상대가 카프레네라는 게 더욱 마음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흠.”
또 한 번 카프레네를 떠올린 태수의 마음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잠시 태수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리자 상념에서 번뜩 깨어난 태수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끼익.
문이 열린 후 클라크 대령이 천천히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굳은 표정은 사라지고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린 모습이다.
“늦은 시간에 잠도 못 주무시게 하고,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일단 앉으십시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물 한 잔이면 될 거 같습니다.”
클라크 대령이 다 꺼진 소파에 앉으며 말하자 태수는 물부터 챙겼다.
이내 돌아온 태수가 클라크 대령의 반대편에 앉아 물을 내려놓고 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제가 할 이야기가 뭐 있겠습니까? 사실 확인 차 온 건데요. 저보다는 다른 분대원들이 신이 났죠. 지금 병문안 중입니다.”
“그래도 좋으시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정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클라크 대령이 말로만 인사하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앉은 채로 허리를 숙였다.
어색했다.
익숙하지 않은 인사법을 억지로 하려니 로봇이 움직인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태수를 향한 고마움은 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태수는 난색부터 표했다.
“허리 펴시죠. 이러시면 제가 몸 둘 바를 모릅니다.”
“무슨 말씀을요. 천여 명 중에 한 명이라도 PKO의 소중한 재산이자 누군가의 가족입니다. 아무리 감사를 드려도 부족합니다.”
“오랜만에 얼굴 뵙는데 이러시니까 더 난감하네요.”
태수가 슬쩍 인사를 피하자 클라크 대령도 분위기에 맞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다시 뵌 게 석 달이 넘었죠?”
“벌써 그렇게 됐네요.”
“시간이 참 빠릅니다. 저도 그런데 여기 계셨던 닥터는 오죽하셨겠습니까?”
“총알보다 시간이 더 빠르더군요.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태수의 넉살 좋은 대답에 클라크 대령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럼요. 시간보다 빠른 건 세상에 없습니다. 그 시간 동안 참 많이 변하신 거 같습니다.”
“하긴, 피부가 많이 탔죠.”
“그런 외적인 부분도 물론 변화가 있습니다만, 제가 말씀드리는 건 분위기입니다.”
클라크 대령의 말을 들은 태수는 조금 호기심을 느꼈다.
“어떤 분위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라고 할까요. 처음에 뵀을 때는 그저 패기 넘치는 의사였다고 할까요? 지금은 침착함도 느껴지고, 노련함도 생긴 거 같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아직도 숨넘어가는 환자 보면 제 눈부터 뒤집어집니다.”
“그래서 이곳에 자원해서 오셨죠. 전 그게 닥터 최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이곳 생활은 어떠십니까?”
클라크 대령이 부드럽게 다음 주제로 대화를 넘기자 태수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보시다시피 이젠 살만 합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와 보지도 않은 의료인들은 아직도 겁을 내며 꺼려합니다.”
“저라고 쉽게 왔겠습니까?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는 건 저도 압니다.”
태수의 말에 클라크 대령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계속 알아보고 있으니까 좋은 소식이 곧 들어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전 어디로 갑니까?”
“한국으로 가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클라크 대령의 물음에 태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해 본 후에 돌아갈 예정입니다.”
“음. 그런 생각이시라면 나중에 추천해드릴 곳을 찾아 놓겠습니다.”
“이번에도 이런 곳은 아니겠죠?”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
클라크 대령이 크게 웃었지만 아예 생각해 둔 곳이 없진 않은 모양이었다.
차라리 태수는 좋았다.
고인 물은 언젠간 썩는다고 했다.
그 전에 이잠바크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였으면 했다.
석재봉 과장이 기한을 두지 않은 만큼, 스스로도 충분히 단련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클라크 대령은 바로 PKO 베이스캠프로 떠나지 않고 병원에 머물렀다.
올 기회가 없었던 만큼, 이번 기회에 여기 분위기나 환경을 자세히 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라이언 상병을 이송해 갈 생각 때문이었다.
깨어났지만 차도를 좀 더 지켜본 후에 이동하는 게 좋기에 그 때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라이언 상병이 깨어난 지 삼 일째 되는 날 저녁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진료실에는 태수와 클라크 대령이 찻잔을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이젠 하루 일과처럼 자연스럽게 마주한 두 사람이다.
쾅! 두두두두!
멀리서 포 소리와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태수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고 멀리 있는 고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클라크 대령도 태수와 같이 그곳을 바라봤다.
10여 분 가까이 울려 퍼진 포 소리와 총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