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25
00126 126화
봉투를 받은 직원은 바로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굿모닝어스와 PKO에서 지급해 준 파견 의료 수당이다.
다섯 달만에 정산하는 거라 그런지 봉투가 너무도 두툼했다.
그런데 두 개를 비교해 보니 태수의 봉투가 조금 더 두꺼운 모습이다.
태수는 생각할 것도 없이 먼저 손을 뻗어 김혁권에게 향한 봉투를 받아들었다.
직원이 그 모습에 살짝 놀랐다.
“어?”
“고생한 분이 많이 받아야죠.”
“아니, 그래도 이건.”
직원이 당황했지만 이미 이야기가 된 김혁권은 반겼다.
“자자, 받고 싶은 대로 받는 건데 뭘 따지십니까. 닥터 최. 고마워요.”
“그만큼 수고하셨으니까요.”
“그건 또 내가 말도 못 하지.”
김혁권은 너스레부터 떨었다.
그러면서도 봉투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줬다.
태수는 그 모습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굿모닝어스 사무실에서 나온 태수와 김혁권이 마주섰다.
김혁권의 얼굴은 두둑한 주머니만큼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아, 이제 진짜 휴가네.”
“고생하신 만큼 편안하게 즐기세요.”
“그럼요. 난 집에 가면 일단 개운하게 씻고 시원한 맥주 마시면서 밀린 TV부터 시청할 겁니다. 나가서 맛있는 음식도 실컷 먹을 거고.”
김혁권의 소박한 희망에 태수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너무도 열악한 시간을 보냈기에 돈이 있음에도 생각하는 건 소소했다.
태수가 피식 미소를 짓는 사이에 김혁권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그건 그렇고, 휴가 끝난 후에 다시 이리로 오면 됩니까?”
“특별한 일이 없으면요.”
“무슨 일이요?”
“한국에 들어간다던지, 아니면 제가 먼저 출발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태수의 말에 김혁권이 고개를 저었다.
“괜히 혼자 찾아갔다가 말도 안 통하는데 고생하지 마시고 부르세요. 부르면 바로 오겠습니다.”
“좀 달라지신 거 같습니다만.”
“전혀요.”
김혁권은 아예 모르쇠로 일관했다.
태수는 그런 뻔뻔함에도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럼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딱 한 달만 쉬고 올 테니까, 닥터 최도 그동안은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리면서 좀 쉬세요.”
“그러죠.”
“자, 그럼 갑니다!”
김혁권은 한 시라도 빨리 자유를 맛보고 싶은지 얼른 멀어져 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고마운 사람이다.
혼혈이라는 태생 때문에 이런저런 차별을 많이 받아 삐뚤어진 성격이지만 심성은 누구보다 따뜻했다.
직접 5개월여 동안 옆에서 겪은 태수였기에 그건 자신할 수 있었다.
그 후 태수는 숙소에 도착했다.
태수의 숙소는 굿모닝어스 건물 2층에 마련된 상태였다. 고생한 태수를 위해 마련한 굿모닝어스 측의 배려다.
숙소에 들어선 태수는 작은 놀라움을 보였다.
이잠바크 진료실에 비하면 별천지였다.
그래 봐야 깔끔한 침대, 테이블과 의자, 조그마한 냉장고, 중고 소파가 전부였다.
이 모든 게 자신을 위해 꾸며졌다는 거에 미소부터 흘러나왔다.
‘참 소소해졌어.’
벌렁.
침대에 누운 태수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아직 밖은 밝은 낮이었고 환자들이 수도 없이 오가는 중이다.
하지만 태수는 지금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황이다.
무턱대고 환자를 보겠다고 설치고 다니는 것도 웃기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피곤했다.
이잠바크에서 벗어나자 그동안 스스로도 모르게 품고 있던 긴장감이 풀어진 모양이다.
단 하루만.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자고 싶었다.
그리고 태수의 소망대로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었다.
오랜만의 숙면이다.
이잠바크에서 날카로웠던 신경이 조금은 무뎌졌다.
***
다음날 태수는 닥터 제임스를 만나기 위해 NGO 건물 바로 옆에 자리한 텐트로 향했다.
환자들로 인산인해였다.
다른 텐트에 비해서도 너무 많았다.
닥터 제임스는 외과 중에서도 특히 장에 있어 세계적인 권위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전에서 항상 집도했다.
PKO에서도 그걸 알기에 중증 환자를 주로 이 텐트에 보낸 모양이었다.
태수가 텐트 안으로 들어가 백인 간호사에게 물었다.
“닥터 제임스를 만나러 왔습니다만.”
“누구시죠?”
“닥터 최. 아니, 태수 최라고 합니다.”
“잠시만요.”
간호사는 태수를 힐끔거리더니 이내 멀어져갔다.
기다리는 사이 태수는 환자들을 둘러봤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꽤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환자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옮겨졌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니 몇 팀이 이 텐트 속에서 수술을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카슈미르에 있는 NGO의 핵심이라고 해도 무방했기에 그만큼 많은 의사들이 투입되었다고 생각됐다.
그때 태수에게 조금 전 그 백인 간호사가 다가와 말했다.
“따라오세요.”
바로 간호사가 몸을 움직이자 태수도 그 뒤를 따랐다.
텐트 중간에 쳐진 커튼을 걷으며 들어가자 그 안에는 여러 개의 커튼이 쳐져 있었다.
모두 수술실인 거 같았다.
쉽게 말하면 태수가 서 있는 곳은 수술 대기실 같았다.
그렇게 주변을 파악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수술을 막 마치고 나온 닥터 제임스가 보이자 태수가 다가가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오. 닥터 최. 어제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제야 얼굴을 보는군.”
“죄송합니다. 먼저 찾아뵀어야 했는데요.”
“힘들었겠지. 이해해.”
닥터 제임스의 말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여유롭게 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나야 환영인데, 스케줄이라는 놈 때문에 말이야. 잠시만.”
닥터 제임스는 태수를 기다리게 한 후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내 돌아온 닥터 제임스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어떻게 하나. 또 수술이 잡혀 있어서 말이야.”
“미리 연락 안 드리고 찾아온 제 잘못이죠.”
“아니야. 음.”
닥터 제임스가 잠시 생각하자 태수는 가만히 기다렸다.
곧 생각을 마쳤는지 닥터 제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밤에는 시간이 날 거 같은데 말이야.”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따가 보자고.”
닥터 제임스는 가벼운 미소를 보였다.
낮 시간 동안 태수는 바쁘게 보냈다.
클라크 대령. 브레드 김. 닥터 오즈마 등.
여기서 맺은 인연들을 한 바퀴 돌며 인사를 하는데도 반나절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깊은 밤이 되어야 태수는 닥터 제임스의 연락을 받고 몸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수술실 앞이 아니라 그의 방에 직접 초대됐다.
닥터 제임스의 방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수술 텐트 뒤에 마련된 커다란 텐트 한쪽에 칸막이를 쳐 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모습이다.
태수가 이잠바크에 가기 전에 생활했던 텐트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였지만 늘 소박했다.
카프레네가 닥터 제임스를 높이 샀던 점도 이런 수더분함 때문이기도 했다.
태수는 그런 내색하지 않고 캠핑의자에 앉은 닥터 제임스에게 인사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을, 이리 앉아.”
닥터 제임스는 태수에게도 자신과 같은 캠핑의자를 권했다. 태수가 자리에 앉자 닥터 제임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가볍게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지?”
“영광입니다.”
“그러자고.”
닥터 제임스는 바로 캠핑용 테이블 밑에서 위스키 한 병을 꺼내들었다. 술은 즐기는지 아예 가까운 곳에 둔 모양이었다.
한 잔씩 술이 들어가자 제임스가 먼저 물었다.
“우선 왜 이잠바크라는 험난한 곳에 갔는지부터 듣고 싶은데.”
“그곳에도 환자가 있다는 소리에 결심을 했습니다.”
“환자 때문이라.”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욕심도 있었고요.”
태수의 말에 닥터 제임스가 호기심을 느낀 표정으로 물었다.
“어떤 욕심?”
“한국에서 레지던트가 됐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카슈미르로 왔는데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요.”
“음. 한국 의료계는 위계질서를 중요시하니까. 하지만 숙련을 하기 위해서 환자들을 임상 실험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나?”
닥터 제임스의 싸늘한 물음에도 태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임상 실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럼?”
“제 휴대폰에는 여러 임상 사례들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사례들과 비교해 가장 적절한 치료를 했습니다.”
태수의 말을 들은 닥터 제임스 표정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숙련기간은 숙련기간이야.”
“그건 맞습니다만. 배우지 않고, 또 익히지도 않았는데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또 그렇지.”
“또한 지금까지 환자를 대할 때 제 양심에 비춰 한 번도 진심이 아닌 적은 없습니다.”
태수의 말이 끝나자 닥터 제임스 얼굴에 작은 미소가 흘렀다.
“그럼 내가 사과해야겠는데.”
“아닙니다. 전 이런 이야기를 들어주실 분이 계셔서 기쁩니다.”
“그렇다면 이런 자리를 자주 만들어야겠는데.”
“감사할 따름이죠.”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술병이 점점 비어져 갈수록 두 사람의 대화는 깊이를 더해 갔다.
그러던 중 닥터 제임스가 빈 잔에 술을 채우며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에 자네가 그의 마지막을 지켜줬다고 했나?”
질문을 마친 닥터 제임스가 태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애잔함이 가득했다.
태수도 카프레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했다.
서로 안부 묻듯이 할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어느 정도 속에 술이 찰 때까지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태수는 술을 한 번에 비운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랬군.”
닥터 제임스는 쉽사리 말하지 못하고 애꿎은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이 주제가 그만큼 무거웠다.
태수는 그때 상황을 다시 이야기해 주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그러니까…….”
태수의 이야기가 조용한 텐트를 나지막이 울렸다.
긴 이야기다.
하지만 닥터 제임스는 단 한마디도 흘려듣지 않았다. 간간히 술을 거칠게 들이켜긴 했지만 태수의 말에 어떤 토도 달지 않았다.
그렇게 태수의 이야기가 서서히 끝을 맺어갔다.
“……그렇게 됐습니다.”
태수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곱씹어보던 닥터 제임스가 조금 묘한 느낌을 받았는지 진중하게 물었다.
“그럼 미세스 카프레네가 자네를 만나러 한국에 왔다는 건가?”
“네. 그때 유언과 결혼반지를 전해드렸습니다.”
태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닥터 제임스가 득달같이 물어왔다.
“그 다음에는?”
“네?”
조금 놀란 태수가 움찔하며 반문했다.
닥터 제임스가 순간 쓴 미소를 지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데 뭔가?”
닥터 제임스의 얼굴에 조금은 덤덤한 궁금증이 떠올랐다.
반면 태수는 운은 띄웠지만 조금 망설여졌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까?’
닥터 제임스가 어떻게 받아드릴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또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웠고, 결정적으로는 순순히 인정해 줄지도 망설여졌다.
태수의 고민이 깊어지자 닥터 제임스가 외려 물었다.
“사람 궁금하게 해 놓고 왜 말이 없지?”
“죄송합니다.”
“탓하려는 건 아니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가 더 궁금하단 말이야.”
닥터 제임스는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며 질문을 유도했다.
태수도 더 고민하기 보다는 마주하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거 같았다.
이내 태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자그마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탈칵.
케이스를 연 태수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때문입니다.”
“이건!”
닥터 제임스의 눈빛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케이스 속에 자리한 금반지.
그게 어떤 반지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빠르게 손을 뻗어 반지를 세세하게 확인한 닥터 제임스가 번뜩 고개를 들어 태수에게 물었다.
“이 반지, 왜 자네가 가지고 있지?”
“미세스 카프레네에게 받았습니다.”
태수 말에 닥터 제임스 눈빛이 한 번 더 흔들렸다.
“정말인가?”
“네.”
“그랬군. 그랬어.”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하던 닥터 제임스는 천천히 반지를 케이스에 담아 다시 태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태수에게 말했다.
“정말 미안한데, 오늘은 이만 돌아가 줄 수 있겠나?”
태수는 그 말에 아차 싶었다.
역시 보여주는 게 아니었나?
솔직히 후회도 됐다.
카프레네의 기억 속에서 자주 엿볼 수 있던 닥터 제임스였기에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안 좋게 나왔다.
씁쓸했다.
태수도 이렇게 된 이상 할 이야기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미안하네. 그냥 혼자 술이 마시고 싶어졌어.”
닥터 제임스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