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38
00139 139화
동시에 가운을 벗어 임시 우산을 만들고 데리야와 자신을 보호했다.
비좁은 공간에 들어선 두 사람의 눈빛이 순간 마주쳤다.
따질 상황은 아니지만 약간 멋쩍은 건 사실이었다.
약 1분이나 지났을까?
“그만!”
아놀드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오고 동시에 구멍을 두드리는 일도 멈췄다.
하지만 한 가지는 멈추지 않았다.
쿠르르릉.
건물이 기울어지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태수도 시간이 없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다. 가운을 다시 걸치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멍은 들것이 충분히 통과할 정도다.
얼른 들것부터 구멍 밑에 가지런히 놓은 태수가 데리야를 재촉했다.
“아이부터.”
“네!”
데리야도 얼른 태수의 의견에 따라 다시 쿠마리아의 다리를 들었다.
빠르게 쿠마리아를 들것에 실은 태수가 위에 소리쳤다.
“들것부터 끌어 올려!”
“당겨!”
얼굴도 보이지 않는 아놀드의 외침만이 지하실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네 귀퉁이에 줄이 연결된 들것이 서서히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태수의 허리에 이어 머리까지 올라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천정까지 높이는 대략 4미터.
쿠마리아가 누운 들것은 따뜻한 차를 빠르게 마시는 속도와 비슷하게 솟구쳤다.
그리고 곧 쿠마리아가 누운 들것이 구멍을 빠져나갔다.
“오케이! 다음!”
아놀드의 목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태수와 데리야가 얼른 남은 두 개의 줄에 다가갔다. 줄의 끝 부분에 다리를 걸게끔 고리가 만들어진 모습이다.
“올……. 데리야만 올려!”
“네?”
“금방 갈게요.”
태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쿠마리아가 갇혔던 지하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닥터 최!”
데리야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불렀지만 이미 그녀가 의지한 줄은 솟구치고 있었다.
데리야가 구멍 위로 올라온 직후 였다.
먼저 올라온 쿠마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현장을 빠르게 벗어나는 지프만이 멀리 보일 뿐이었다.
닥터 제임스가 아니라 할아버지인 닥터 토프락이 대신 서 있었지만 데리야는 그런 상황은 돌아보지도 않고 아놀드를 다그쳤다.
“닥터 최가!”
“왜요?”
“갑자기 지하실로 들어갔어요.”
“뭐요?”
아놀드의 얼굴이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잠시 멈췄다고는 하지만 건물은 여전히 무너지는 중이다.
“젠장!”
아놀드가 짜증을 부리며 고민했다.
그리고.
꾸욱!
안전모를 깊게 누른 아놀드가 동료들의 눈을 보지 못하고 소리쳤다.
“1분만 대기!”
“이 상황에서 1분이라니요!”
“대기!”
“아놀드!”
“씨발, 그럼 어쩌라고!”
아놀드의 외침에 구호팀들이 움찔했다.
그들도 알고 있다.
모두가 살아야 진정한 구출이다.
그게 아니면 마음에 남을 멍울이 평생을 갈지도 몰랐다.
30초나 지났을까?
쿠르릉!
또 한 차례 건물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더불어 이번에는 눈에 띄게 건물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게 모두의 눈에 보였다.
“어어?”
“피, 피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마음을 다잡고 있던 구호팀원들조차 동요할 때였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유일하게 아놀드만이 태수를 위해 남겨 놓은 줄을 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그도 당장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덜덜.
그가 잡은 줄이 심하게 흔들릴 정도다.
건물이 자신을 언제 덮칠지도 모르지만 절대 줄을 놓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생명이 달린 문제지만 이 밑에 아직 나오지 못한 한 의사의 목숨 또한 이 줄에 달려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1초…… 2초…….
시간이 흘러갈수록 불안과 공포가 몇 배로 불어났다.
이젠 정말 이곳에 서서 버티지 못 할지도 몰랐다.
아놀드는 줄을 잡은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데리야는 구멍에 대고 계속 태수를 찾았다.
“닥터 최! 대답 좀 해 봐요!”
하지만 묵묵부답이다.
다들 정말 미치고 펄쩍 뛸 거 같았다.
아니, 그보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갔다.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 가슴이 뻐근할 정도였다.
그렇게 초조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팽팽!
아놀드가 잡고 있던 줄에서 드디어 반응이 왔다.
“닥터 최?”
“당겨요!”
태수의 목소리가 밑에서 들리자 아놀드가 빠르게 소리쳤다.
“빨리 당겨!”
그제야 뒤로 조금씩 물러가던 구호팀원들이 얼른 다가와 줄을 사정없이 당겼다.
“으아악!”
“빨리, 빨리 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이었기에 더더욱 스스로를 재촉했다.
정말 정신없이 줄만 당기던 순간이다.
구멍에서 손가락이 서서히 올라왔다.
이어서 태수의 얼굴, 몸까지.
하얀 석회가루가 온몸을 덧칠된 모습으로 태수가 구멍에서 빠져나왔다.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를 순간이었다.
우르릉!
건물의 징조가 심상치 않았다.
지친 얼굴로 쉴 틈도 없이 태수가 건물을 힐끔 쳐다보고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뛰어!”
그 말과 동시에 닥터 토프락, 데리야를 포함해 아놀드와 구호팀원들이 재빨리 내달렸다.
“으아아아악!”
“제발, 제발!”
목소리가 터져라 소리친 그들이 신속하게 건물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거기에는 태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정권에 들어섰다고 판단된 모두가 하나둘 제자리에 멈춰 섰다.
“헉헉.”
모두 거친 숨을 가다듬는 사이였다.
“안 무너졌네?”
태수의 황당한 목소리에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아놀드가 얼른 태수에게 따지고 들었다.
“안 무너졌으면 답니까? 도대체 뭘 하셨기에 사람 애간장을 이렇게 태우신 겁니까?”
“아, 이거 때문에요.”
태수가 쓴 얼굴로 손에 쥔 걸 들어보였다.
잘린 검지였다.
데리야 눈빛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피아니스트.
쿠마리아의 꿈이다.
그걸 위해.
마음과 달리 데리야가 빽 소리쳤다.
“당신은 죽을 뻔 했다고요!”
“그래도 약속했으면 지켜야죠. 그렇죠?”
“…….”
활짝 웃는 태수의 모습에 데리야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러나 표독스러운 눈빛이 어느새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데리야의 눈빛을 본 태수가 슬쩍 시선을 하늘로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때 데리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정말 미친 의사야.”
“공기 좋네……. 읍!”
태수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데리야가 입술을 덮쳤다.
첫 키스의 달콤함?
태수가 먼저 느낀 건 버스럭거림이었다.
데리야의 얼굴에 가득한 석회가루가 입술에도 가득한 모양이었다.
그 순간 모두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슬쩍 좌우로 비켜갔다.
“흠흠. 아무리 연애는 자유라도 이건 좀.”
“장소가 썩 마땅하진 않은 거 같은데…….”
아놀드와 구호팀원들이 멋쩍은 얼굴로 중얼거릴 때였다.
유일하게 한 사람.
닥터 제임스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던 닥터 토프락만이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이익! 이…….”
막 그가 소리칠 무렵이었다.
쿠르르릉!
건물이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무너져 내렸다.
그 소리에 태수와 데리야가 멈칫하며 입술을 떼고는 놀란 눈으로 무너진 건물을 바라봤다.
그때 태수가 나지막이 데리야에게 말했다.
“오늘 운 좋았네요.”
태수가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다.
지금까지 생사를 오갔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맑았다.
태수는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카프레네를 떠올렸다.
“아, 씨발. 더럽게 맑아서 좋다!”
그동안 구멍 속에서 느꼈던 스트레스를 털어버리듯이 태수가 힘차게 외쳤다.
잠시 후 텐트로 돌아온 태수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더 이상 눈을 뜰 체력은 없었다.
***
만 9시간 만에 깨어난 태수가 먼저 느낀 건 극심한 근육통이었다.
“크으윽!”
온몸을 누군가에게 거칠게 두들겨 맞은 느낌이다.
물먹은 솜같이 가라앉는 몸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힘들었다.
태수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펴고, 발끝을 당겼다가 놓는 등. 지속적으로 근육을 움직였다.
움직일 때마다 몸 어딘가가 찌릿찌릿했다.
꾹 참고 지속적인 자극을 주었더니 뭉쳤던 근육이 조금씩 풀려갔다.
잠시 후.
그나마 통증이 가라앉자 태수는 생각이라는 걸 이어갈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뻐근할까?
이유를 찾아가던 태수가 순간 미소를 지었다.
‘아플만 하네.’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다.
이토록 격렬한 근육통을 겪는 이유는 다름 아닌 스스로 팔에 주사했던 염화수시닐콜린(Succinyl-choline chloride) 때문이었다.
원래 전신마취제로 쓰이는 염화수시닐콜린을 희석해서 소량만 주입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이 나타난 상태였다.
염화수시닐콜린으로 전신마취한 환자들에게 특히 많이 발생하는 부작용.
그건 바로 수술 후 근육통이다.
그나마도 소량만 주입해서 빨리 풀린 모양이다.
다행히 다른 부작용인 안압이나 복강내압은 올라가지 않은 듯 했다.
태수는 스스로 투여한 주사의 부작용이었기에 누구에게 하소연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고통이 그리 괴롭지만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다른 생각이 먼저였다.
또 하나의 생명을 구해냈다.
그 사실이 태수를 너무도 뿌듯하게 했다.
빙긋빙긋 미소를 짓던 태수가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힘들게 구출한 쿠마리아의 수술 경과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게 없었다.
물론 닥터 제임스가 수술을 해 줬으니 무사하리라는 확고한 믿음은 있다. 그래도 먼저 응급수술을 한 의사로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직 쑤시고 걸렸지만 태수는 억지로나마 몸을 일으켰다.
쿠마리아가 입원한 텐트로 향하던 길이었다.
“어?”
조금 놀라는 소리에 바라보니 데리야가 잰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 태수는 그녀를 보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다고 부끄러워 눈도 못 마주칠 정도는 아니었다.
다가온 데리야가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일어나셨어요?”
“조금 전에 일어났습니다.”
“몸은 어떠세요?”
“보시다시피.”
태수가 어깨를 들썩이자 데리야가 의아한 얼굴로 변했다.
“얼굴이 빨간데.”
“약간 열이 있나 보네요.”
“그럼 가요. 영양제라도 한 대 맞으면 좀 나을 거 같아요.”
데리야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닙니다. 쿠마리아 상태 좀 확인하려고요.”
“저쪽 텐트에 있어요. 같이 갈까요?”
“볼 일 있으신 거 같은데요. 그럼 나중에.”
태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데리야에게서 멀어져 갔다.
대화 몇 번에 조금은 화끈거림이 가라앉는 듯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데리야는 태수를 보고 별다른 감정이 없는 느낌이다.
사고방식의 차이라고 할까?
태수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데리야가 쫓아다녔으면 더욱 골치 아플 일이었다.
‘쿨하니 좋네.’
이윽고 태수는 쿠마리아가 입원한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입원용 텐트는 좌우로 병상이 늘어진 모습이었다.
최대 수용 환자는 20명.
24인용 텐트지만 치료를 위한 의료용 기재가 들어가야 했기에 실제적으로 사용되는 공간은 그 정도였다.
태수의 눈에 16명의 환자만 보였다.
그리고 뒤쪽으로 두툼한 천이 가려져 있다.
그 속이 일종의 집중치료실이다. 의사들끼리는 ICU(Intensive care unit)이라고도 불린다.
간호사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며 태수는 집중치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는 모두 네 명의 환자가 보였고 유독 한 병상만 아이가 누워 있는 모습이다. 그 아이가 바로 태수가 생사를 오가며 구해온 쿠마리아였다.
태수가 다가가자 옆에서 손을 꼭 잡고 있던 쿠마리아의 어머니가 벌떡 일어났다.
퀭한 눈과 까칠한 피부가 간호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또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알려줬다.
그러나 그녀는 태수를 보자 환하게 웃으며 바로 격하게 끌어안았다.
‘어!’
너무도 신속한 쿠마리아 어머니의 움직임에 태수가 그대로 당했다.
꽈악!
가뜩이나 결리는 늑골이 욱신거릴 정도로 강한 포옹이다. 게다가 귓가에 자그맣게 뭐라고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 의미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흔들리는 어깨와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조금씩 축축하게 젖어오는 어깨의 느낌만으로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느껴졌다.
태수도 가볍게 팔을 들어 쿠마리아 어머니를 껴안았다.
토닥토닥.
가볍게 등을 다독이며 태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도 감사합니다.”
태수의 진심이다.
사비의 죽음으로 인한 악몽이 조금은 희석된 기분.
그 기분을 담은 말이다.
격정 어린 인사가 끝난 후에야 태수는 쿠마리아 상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눈으로 쿠마리아를 신중하게 살폈다.
아직 잠들어 있는 상태라 인사는 나누지 못했다. 하지만 고르게 내쉬는 숨소리만으로도 어떤 상황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자세한 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역시 차트가 좋았다.
집어든 차트를 확인한 태수가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