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575
01578 1578화
태수는 잠시 바라보다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네. 이런 상황에 수술이라.”
“…….”
“그런데 우리까지 포기할 순 없잖아. 마지막 순간까지.”
태수의 말에 정민수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때였다. 잔뜩 목이 쉰, 그리고 기진맥진한 목소리가 들렸다.
“닥터…… 정이 포기…… 하면 내 꼴이 뭐가 돼?”
“김 간호사님?”
태수가 얼른 내려다봤다.
김혁권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지만 아직 눈을 뜨진 못했다.
의식은 있지만 일부러 뜨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주 적은 체력 소모라도 줄이려는 의지가 보였다.
가슴이 아파 왔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김혁권이 나지막이 말했다.
“엄청 졸리니까…… 한마디만 합시다.”
“그냥 졸리신 거죠?”
“내가 피 몇 번…… 뽑았다고…… 뒤질 놈으로 보여?”
“그렇게 사람 간 떨어지게 해 놓고 지금 그게 하실 말씀이십니까?”
태수가 나지막이 타박하자 김혁권은 눈을 감은 그대로 옅게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래서 저 사람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잖아.”
“더는 안 됩니다.”
“나도…… 알아요.”
“하.”
태수는 일부러 면박을 줬지만 마음은 또 달랐다.
김혁권이란 존재.
이젠 자신과 떨어뜨려 생각하기조차 싫은 이름이다.
김혁권도 그 마음을 짐작한 듯 희망적인 말을 꺼냈다.
“됐고…… 헬기는 곧 올 겁니다……. 내 귀에 벌써부터…… 소리가 들려.”
“…….”
“진짜 들린다고……. 그러니까 용기를…… 내자고.”
김혁권은 쥐어짜듯이 말을 마쳤다.
그 후로는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기운이 없어 다시 잠든 김혁권을 바라보며 태수는 다시 이불을 정리해 줬다.
“그럼요. 용기를 잃으면 거기서 끝이죠. 안 그러냐, 민수야?”
“후우, 그렇지.”
“그런데 헬기 소리 들려?”
태수의 물음에 정민수가 귀를 기울이다 고개를 저었다.
“안 들리는데.”
“나도 안 들리는데 그냥 그 소리가 계속 상상된다. 귀 아프게 울리는 프로펠러 소리가.”
“…….”
정민수가 침묵하자 태수가 힘을 북돋는 한마디를 꺼냈다.
“곧 현실이 되겠지. 나타나겠지. 저쪽에서도 보내 준다고 했으니까.”
“그래, 믿자. 우리만 개지랄 떨고 있는 게 아닐 거야. 저쪽도 어떻게든 보내 준다고 했다며. 그럼 올 거야.”
정민수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가자 태수가 슬쩍 농담을 건넸다.
“송 간호사님 등살에 못 이겨서라도 보내줄걸?”
“그러네. 거기에 박 선배까지 난리 쳐 봐.”
“소방 본부가 아주 뒤집어지겠지.”
“아, 그 모습이 머릿속에 확 그려지는데. 지금쯤 소방 본부가 아주 난리가 났을 거 같아.”
말도 안 되는 대화였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두 사람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지금은 이런 대화가 너무도 절실했다.
“소방 본부장이 쩔쩔맬 거고.”
“박 선배 허리에 손 올리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송 간호사님은 옆에서 더 하라고 할 거고.”
“다른 직원들은 말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고. 하하하.”
“하하.”
태수와 정민수는 대화하다 크게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정말 일어나고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 희망도 없다면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절망스러웠다.
태수와 정민수는 다시 힘을 냈지만 상황은 점점 더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태수도 이젠 강재범의 옆으로 바짝 다가선 상태였다.
그저 뚫어져라 배액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야를 비우고 헹궜지만 출혈이 다시 그 속을 채우는 중이었다.
빠르다.
생각보다 훨씬 피의 양이 많았다.
태수는 고개를 돌려 강재범의 얼굴을 바라봤다.
푸석푸석하다 못해 꺼멓고, 입술과 눈두덩은 청색증(치아노제)이 발생했다. 피가 너무 모자라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으…… 후. 으…… 후.”
앓는 중간 중간 억지로 내뱉는 소리만이 그가 살아 있음을 알려 줬다.
태수는 안다.
이미 생명의 불꽃은 작은 바람만 불어도 훅 꺼질 만큼 너무 약해져 있었다.
태수의 표정도 점점 더 굳어져 갔다.
단순히 힘을 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태수는 반사적으로 시간을 보며 한숨어린 한마디를 뱉었다.
“고작 10분 지났을 뿐인데…….”
“100년은 기다린 거 같아.”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
태수의 물음에 정민수는 눈을 내리뜨며 고개를 저었다.
“너도 모르는데 내가 알겠냐.”
“빌어먹을.”
텅!
태수가 방바닥을 주먹으로 찍었다.
그 모습을 본 정민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순간 두 사람 모두 할 수 있는 응급처치가 없었다.
차라리 자신들의 피라도 뽑아서 줄 수 있다면 한다. 하지만 맞지 않는 혈액을 투여하면 부작용으로 죽음만 재촉할 뿐이다.
게다가 투여할 수 있는 비상약도 이젠 없다.
심지어 깨워서 뭔가를 먹일 수도 없었다. 그러기엔 의식이 없고, 깨어난다고 해도 뭔가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순전히 강재범의 의지에 달린 문제였다.
그걸 알기에 갑갑하다 못해 속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투다다.
헬기 소리?
태수의 귀가 크게 꿈틀거렸다.
“이 소리 뭐야?”
“무슨 소리?”
정민수가 얼른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이 소리 안 들려?”
“……안 들리는데.”
“기다려 봐.”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태수가 얼른 숙소 밖으로 뛰쳐나왔다.
휘이잉!
바람이 태수의 옷을 펄럭거렸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마저도 얼굴을 때려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그래도 태수는 꿋꿋하게 먼 바다를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다.
“…….”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바람 소리만 가득했다.
태수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너무 기대감이 컸을까. 평소엔 들리지 않던 환청이 들린 모양이다.
“젠장.”
그 소리가 진짜 헬기 소리길 바랐는데…….
돌아서는 태수의 발걸음이 너무도 무거웠다.
숙소로 들어온 태수의 축 처진 어깨를 본 순간 정민수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태수는 정민수를 한 번 쳐다본 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금 전 화장실 문을 부수며 조각난 의자 다리들을 모아 난로에 집어넣었다.
어느새 시들시들해진 난로 속 불이 새로운 탈 것이 들어오자 다시 활활 불길을 키우기 시작했다.
지금 이 모습이 난로가 아니라 강재범의 모습이길 간절히 바랐다.
탁.
난로 문을 닫은 태수가 다시 강재범의 옆으로 다가왔다.
정민수가 태수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어.”
“음…….”
“차라리 대야의 피를 다시 넣는 건 어때? 그거라도 하면 조금 더 시간을 끌 수 있지 않을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태수의 말은 냉정했지만 사실이었다.
이렇게 약해진 상태에서 패혈증까지 발생하면 정말 끝이었다. 수술을 하겠단 일말의 희망조차도 날려 버리는 꼴이 된다.
태수의 말에 정민수가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나도 알아. 안다고. 아는데…….”
“나라고 그 생각을 안 해 봤겠어? 나도 너랑 같은 심정이야.”
“……그나저나 떨리는 몸은 어떻게 하지? 이건 단순히 체온을 높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데.”
“그건 나도 몰라.”
태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정말 할 수 있는 게 없다. 혈액 보유량이 턱없이 낮아져 보이는 반응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20분?
그조차도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정말 이젠 가늠이 되지 않았다.
태수와 정민수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진짜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걸까?
매년 으레 일어나는 자연 현상들이지만, 지금처럼 비를 퍼붓는 하늘이 원망스러운 적도 없었다.
이제 의사로서 강재범에게 더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
힘을 내라는 희망의 소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절대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그가 마지막 숨을 내뱉기 전까지는 태수와 정민수, 두 사람 모두 절대 마지막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이 스스로를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어떻게든 헬기만 오면 된다.
올 거다.
늦지 않게.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기 전에 꼭 올 거다.
부질없는 바람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유일한 구명줄이다.
그 희망을 품고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숙소에 고요함이 이어질 때였다.
드드드.
미약한 소리가 들리자 태수가 어이없는 듯 실소를 머금었다.
“하도 빌어서 그런가? 또 환청이 들리네.”
“이번에는 나도 들린다. 진짜 사람이 간절히 원하면 별일이 다 생기나 봐.”
“그래. 너는 오죽……. 뭐?”
태수가 눈빛을 반짝이자 정민수가 얼른 마주 봤다.
두두두.
조금 더 커진 소리.
멀리서 울리는 듯한 그 소리에 태수가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두두.”
“그래, 맞아. 두두두.”
“나가 볼게!”
“나도!”
태수와 정민수는 동시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쏜살같이 숙소 문으로 뛰었다.
벌컥!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고 나온 두 사람이 사방을 빠르게 둘러봤다.
그때 태수의 시선 저 끝에 자그마한 점이 보였다.
점점 커지는 점.
투다다.
선명해지는 프로펠러 소리.
태수가 그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헬기!”
“어디? 어…… 어! 온다. 온다!”
“민수야!”
“태수야!”
태수와 정민수는 동시에 얼싸안고 소리쳤다.
“으아아아!”
환희의 순간도 잠시, 태수와 정민수는 나란히 서서 헬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헬기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정민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헬기 밑에 저거 뭐야?”
“구호품?”
“엄청 길게 늘여 놓은 거 같은데. 떨어뜨리고 돌아가려는 모양이야.”
“바람이 이렇게 부니 이송은 절대 못하지.”
태수의 말이 옳았다.
이송은 애초부터 꿈도 꾸지 않았다.
그리고 강재범은 이송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실망은 없다.
구호품에 필요한 것들만 담겨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때 태수가 정민수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서 환자 상태 확인하고 있어.”
“알았어. 넌 수혈팩부터 꺼내서 갔다 줘.”
“오케이.”
“간다.”
툭.
정민수가 태수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고는 다시 숙소로 들어갔다.
그도 이 기쁜 상황을 만끽하고 싶을 터였다. 하지만 누군가는 자리를 지켜야 하기에 들어가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그사이에도 헬기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투두두!
이젠 프로펠러 소리에 귀가 울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행복했다.
평소라면 너무도 신경을 거슬리는 소리였을 텐데, 오늘만큼은 저 소리가 천상의 멜로디처럼 감미롭게 들렸다.
온몸이 찌릿찌릿한 느낌!
한없이 만끽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태수의 환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벌컥!
숙소 문이 열리더니 정민수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상태 안 좋아!”
“젠장!”
정신을 바짝 차린 태수의 눈빛이 돌변했다.
기쁨은 좀 나중에, 일단 구호품부터 내려야 했다.
헬기는 곧 등대 앞까지 다가왔다. 직선거리로 따져도 2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조차도 멀었다.
태수는 웃옷을 벗어 빠르게 머리 위로 흔들었다.
이 정도라면 조종사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응급 상황을 자주 경험한 사람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신호이기도 했다.
“제발. 빨리 내려. 일단 내리라고!”
태수는 계속 웃옷을 흔들며 소리쳤다. 들리지 않아도 간절한 표정이라도 알아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 다급함이 통했는지 헬기의 움직임이 조금 달라졌다. 조심스럽게 접근하다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
푸다다다!
헬기가 태수의 머리 위쪽으로 다가왔다. 끈에 묶인 구호품은 태수를 향해 정면으로 날아왔다.
흔들흔들.
30여 미터 상공에 있는 헬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역시 상공의 기류가 너무 강해 헬기도 위태위태했다.
그걸 직감한 태수는 고개를 들어 헬기를 쳐다보며 두 손을 크게 아래로 내리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냥 내리란 뜻이었다.
헬기 조종사 또한 뜻을 알아들었는지 구호품이 곧 바닥으로 떨어졌다.
콰앙!
대략 10미터 높이에서 떨어진 구호품 상자는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내용물이 사방으로 튀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