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576
01579 1579화
커다란 냉장고가 충분히 들어갈 크기의 상자였다.
그 속을 꽉 채운 내용물도 당연히 많았다.
흩어진 게 무언지 지금은 일일이 감상할 틈이 없었다.
태수는 우선 적십자 표시가 된 가방부터 찾았다.
의료 도구는 무조건 적십자 표시였다.
그건 의료인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것저것 정신없이 돌아보던 태수의 눈에 적십자 모양이 새겨진 가방이 몇 개 발견됐다.
그 가방들 겉면엔 굵직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수술 도구.
-보조 물품.
-수혈팩과 약품들.
거칠고 시원시원한 글씨는 박성민의 솜씨가 분명했다.
“선배, 완전 사랑합니다!”
태수는 수혈팩이 든 가방부터 낚아채 숙소 방향으로 뛰며 소리쳤다.
“정민수!”
벌컥!
닫혀 있던 문이 열리자마자 태수는 안으로 들어가며 가방 지퍼부터 열었다.
후두둑!
충격 흡수에 좋은 에어캡에 둘둘 말린 것들이 여러 개 쏟아졌다. 태수는 속이 뻘겋단 느낌이 드는 걸 빠르게 풀었다.
그런 태수의 옆에서 정민수가 고래고래 악을 썼다.
“빨리!”
“하고 있어.”
빠르게 에어캡을 풀자 5개의 혈액팩이 담겨 있었다.
일단 2개만 든 태수가 고개를 들자 정민수가 IV 앞에 대기 중이었다.
태수는 바로 소리쳤다.
“던질게!”
“빨리 던져 자식아!”
정민수가 다급한 눈빛으로 손짓하자 태수가 곧바로 하나를 던졌다.
턱!
공중에서 낚아챈 정민수가 바로 수혈팩을 IV에 연결했다.
그 일이 끝나기 무섭게 태수는 하나를 더 던졌다.
바로 옆에 추가로 연결한 정민수는 재빨리 양손으로 수혈팩을 하나씩 잡고 빠르게 쥐어짰다.
일단 혈액부터 최대한 많이 투여해서 컨디션을 끌어올려야 한다.
수술은 그다음 문제였다.
태수는 정민수의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다.
우선 김혁권의 IV에도 수혈팩을 하나 연결했다. 그리고 다른 에어캡을 거칠게 풀러 수혈팩들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휙휙.
여기저기 에어캡이 날아다녔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수혈팩을 정민수의 주변에 모아 놓으니 양이 제법 많았다.
수혈에 수술, 그 후에 또 수혈까지 진행해도 될 충분한 양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 상황에 필요한 약들도 다양하게 추가되었다.
태수는 그중에서 모르핀을 하나 꺼내 강재범의 IV에 주입했다.
끊임없이 고통과 싸워 온 그에게 작게나마 편안함으로 보답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빈곤에서 풍요로 바뀐 순간 태수와 정민수의 얼굴엔 활기가 넘쳐났다.
“민수야, 계속 밀어 넣어!”
“내가 밀어 넣는 건 엄청 잘하니까 걱정 마!”
“나도 잘 알지.”
“으하하하! 피다. 피야!”
정민수는 얼마나 기쁜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강재범과 연결된 수혈팩이 쭉쭉 줄어들고 있었다. 그만큼 체내 혈액 보유량이 적었단 이야기다.
태수와 정민수는 기쁨을 누르고 의료인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띡!
자동 혈압계를 확인하자 확실히 혈압이 오르고 있었다. 출혈보다 수혈이 더 많단 이야기였다.
아직은 밑 빠진 독이었지만, 그래도 채워야 한다.
“피는 계속 밀어 넣어.”
“걱정 마.”
“그럼 난 필요한 약 좀 투여할게.”
앞서 모르핀을 추가했다.
하지만 그건 환자가 좀 더 괴롭지 않게, 이 상황을 이겨 낼 수 있도록 보조해 주는 역할 뿐이었다.
지금부터 투여할 약은 좀 더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성분들이었다.
비타민 K, 전해질, 마그네슘, 철분…….
그 외에도 지혈과 혈액 생성을 촉진시키는 약들을 순차적으로 투여했다.
중간 중간 자동 혈압계로 확인하니 역시 반응이 좋았다.
“됐어. 이제 혈액만 보충하면 돼.”
“내가 계속 밀어 넣고 있으니까 넌 정리부터 해.”
“당연하지.”
환하게 미소짓던 태수는 사용한 약들을 한쪽에 치우고 필요한 약들을 좀 더 가까이 정리하기 시작했다.
환자가 안정을 찾아가자 태수와 정민수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각자 할 일을 이어 갈 때였다.
투두두.
헬기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태수와 같이 정리를 돕던 정민수가 의아하게 물었다.
“헬기 떠난 거 아니었어?”
“몰라. 정신이 없어서. 안 간 거였나?”
“그러게. 왜 계속 소리가 들리지?”
“내가 나가 볼게.”
태수가 서둘러 자리를 박차자 정민수가 한결 느긋해진 목소리를 냈다.
“같이 나가. 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겼으니까 잠깐은 비워도 되잖아. 들여올 것도 많고.”
“그러자.”
정민수의 말에 태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밖으로 나갔다.
숙소와 등대 사이의 공간은 난리가 났다.
구호품 상자에 담겨 있는 내용물의 종류와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다행히 가방이나 자그맣게 한 번 더 포장이 되어 있어 바람에 날아다니진 않았다.
태수와 정민수는 그걸 놔두고 헬기를 바라봤다.
휙휙!
이제 안전하다고 두 손을 크게 흔들어 인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헬기는 떠나지 않았다.
무인도를 중심으로 크게 빙빙 돌고 있었다.
좀 더 지켜보던 태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저래?”
“모르지.”
“뭘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내려와서 커피 한잔하고 가라고 하든가.”
정민수다운 농담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그만큼 헬기의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계속 지켜보던 태수와 정민수는 이내 몸을 굽혀 가방과 상자를 들기 시작했다. 숙소를 비워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하나씩 메고 들던 중이었다.
띠릭, 띠릭.
어디선가 기계 소리가 들리자 태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헬기가 멀리 있어 프로펠러 소리에 큰 영향을 받진 않았다. 그래서 들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몇 번 더 울리는 소리를 따라가던 태수는 뭔가를 발견했다. 실리콘 재질의 케이스가 씌워진 워키토키였다.
무전기지만 근거리 단방향 통신만 되는 제품이었다.
태수가 그걸 집어 들고 의아하게 바라봤다.
“이게 왜?”
앞뒤를 돌려 보며 궁금함을 자아낼 때 워키토키가 울렸다.
-의사 동생!
그 소리에 태수가 깜짝 놀라 하마터면 워키토키를 놓칠 뻔했다.
자신을 의사 동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김성국 기자가 유일했다.
헬기가 아직 떠나지 않은 것도?
뭔가 직감이 든 태수는 얼른 버튼을 눌러 물었다.
“혹시 형님이 헬기에 계십니까?”
-그럼 누가 있겠어! 여기 시끄러워서 잘 안 들리니까 이해하고.
“형님이 거기 왜 계십니까?”
-동생이 고생하는데 형이 안 와 볼 수 있나. 거긴 어때?
김성국 기자의 목소리에 태수의 눈썹이 위로 솟구쳤다.
“어떠냐고요? 진짜 어떠냐고 물으신 겁니까? 미쳐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환자는?
“죽기 딱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도대체가 말입니다, 뭐 이런 빌어먹을 날씨가 다 있습니까! 진짜 진저리가 납니다.”
태수는 마음속 말을 숨기지 않고 터트렸다.
상대가 김성국 기자라서 가능했다. 다른 기자였으면 이미지 관리상 조금은 자중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김성국 기자는 살살 약 올리는 걸 정말 잘했다.
-그래서 이젠 좀 살 만해?
“살긴 뭐가 살 만해요. 간신히 붙잡아 놓고 있는데. 수혈 끝나면 상황 지켜보고 또 수술 들어가야 됩니다.”
-수술이 가능해?
“해야죠. 어떻게든 해야죠. 언제 그칠지 모르는 바람을 계속 기다릴 순 없습니다.”
태수의 물음에 김성국 기자가 바로 물어 왔다.
-그래도 좀 위험하지 않아?
“이미 충분히 위험합니다.”
-병원에서 수술하는 게 더 안전하지!
“그걸 언제 기다리냐고요. 이미 비장에 농양이 생겨서 부풀어 오르고 있습니다. 그거 그냥 놔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요.”
-왜 나한테 성질이야?
김성국 기자의 한 소리에 태수가 움찔했다.
“형님이 자꾸 물어보시니까. 그런데 진짜 거기 왜 타고 계십니까?”
-동생이 고생하는데 형이 돼서 그냥 지켜만 볼 수 있나. 지금 하는 얘기 잘 걸러서 기사 쓰려고!
“형님이 잘 알아서 하시겠죠.”
-그동안 환자 말고 또 뭐가 부족했어?
김성국 기자가 물어 오자 태수는 또다시 울컥했다.
“없는 게 한두 갭니까? 먹을 게 없어서 저하고 민수하고 하루 종일 굶었습니다. 발전기가 멈춰서 전기도 안 들어와요!”
-어떻게 버텼어?
“말도 마십시오. 오래 얘기할 상황은 아니니까 나가면 그때 술 한잔 사 주세요!”
-뭐 하고 싶은 말 없고?
김성국 기자의 질문에 태수가 별 생각없이 대답했다.
“배고파 뒤지겠습니다!”
-얼른 밥 먹고, 환자도 잘 보살피고. 나중에 육지에서 보자고!
김성국 기자의 말이 끝나자 태수는 헬기를 바라보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헬기는 그 후로 한 번 더 섬을 돌고 멀어져 갔다.
날아가는 뒷모습이 흔들리는 게 태수의 눈에도 보였다. 이런 기상 조건에도 찾아와 준 그가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졌다.
돌아서려던 태수는 멈칫했다.
“송 간호사님은 왜 안 오셨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의아했다.
잠시 후.
숙소 한쪽에 구호품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많은 가방을 모두 풀어 보진 못했다.
몇 개 풀어헤친 가방이 있었고, 그 속에서 나왔는지 전투식량부터 과일과 반찬 통조림, 환자를 위한 각종 죽들도 있었다.
태수와 정민수는 전투식량을 2개씩 펼쳐 놓고 허겁지겁 먹었다. 4인용 식탁이었지만 의자는 2개뿐이었다.
어느새 마지막 수저를 뜬 두 사람이 동시에 숟가락을 내려놓고 의자에 깊이 등을 기댔다.
“푸우.”
“으아! 이제 좀 살겠다.”
두 사람은 볼록 튀어나온 배를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쫄쫄 굶었다가 먹는 밥은 역시 꿀맛이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굶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태수가 좀 더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 정민수가 뭔가를 식탁에 올렸다.
“디저트 먹어야지.”
“그거 과자야?”
“초콜릿도 있어. 여기 음료수.”
“이야, 우리 살쪄서 나가겠다.”
태수의 말에 정민수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고립됐으면 이런 맛이라도 있어야지. 좀 늦었지만 이제라도 즐겨야 하지 않겠어?”
“동감. 그런데 환자는 괜찮다고 했지?”
태수는 여전히 강재범을 걱정했다.
그 마음을 잘 알기에 정민수가 얼른 대답했다.
“네가 열심히 나르는 동안 내가 확실하게 살펴봤지. 수혈이 팍팍 되니까 확실히 바이탈이 좋아졌어.”
“김 간호사님는?”
“물론 좋지. 좀 있으면 깨어나실 거 같아.”
정민수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됐네. 그럼 됐어.”
“그보다 환자 회복하면 바로 수술하는 거야?”
“그때까지 기상이 가라앉지 않으면.”
“그 시기는 언제로 잡고 있는데?”
“내일 아침.”
태수가 바로바로 대답하자 정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좋겠다. 여기서 일단 수술해서 출혈은 완전히 잡아 놓자고.”
“일단 쉬고 있어. 난 무전 좀 하고 올게.”
“송 간호사님한테 말 잘해라.”
“안 그래도 그게 제일 걱정이라고.”
태수는 한 차례 부르르 떨며 숙소를 나섰다.
쌔애앵!
불어오는 바람이 이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시원하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수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식탁을 치우던 정민수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왜 그냥 돌아와?”
“무전기가 먹통이야.”
“아, 전기!”
정민수도 그제야 그 사실을 기억해 냈다.
이렇게 되면 외부와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그사이 태수는 쌓여 있는 구호품으로 향하며 말했다.
“차라리 잘된 걸 수도 있어.”
“그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아시겠지.”
“일단 정리 좀 할게. 그거 치우고 환자하고 김 간호사님 한 번 더 봐줘.”
말을 마친 태수가 가방을 하나씩 열었다. 큰 구호품은 확인했지만 자잘한 건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나씩 열자 예상보다 더 다양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핫팩, 좋지. 고체 연료, 이건 쓸 만하고, 로션은 왜 넣은 거야.”
하나씩 가방을 열며 확인하던 태수가 어느 순간 손을 멈췄다.
정민수가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지 바로 물었다.
“왜, 뭘 발견했는데 멍하니 있어?”
“이거.”
태수가 몸을 돌려 양손에 있는 물건을 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