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753
01756 1756화
태수가 사 온 술과 안주를 가운데에 놓고 다섯 사람이 둘러앉았다.
잠시 생각하던 태수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김 선생하고 정 선생은?”
“박 선생님하고 정 선생님은 어디 가셨는지 오후부터 안 보이셨습니다. 김 선생님은 이 간호사님하고 같이 나가셨고요.”
“그럼 신경 안 쓰고 시작해도 되겠네.”
태수는 홍진만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비싼 양주를 꺼냈다.
그걸 본 도성민과 유병태, 송민규와 홍진만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니, 저건!”
“비싼데.”
걱정과 기대가 반반 섞인 눈빛이 쏟아지자 태수가 진하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고생했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야?”
“그건 또 그렇긴 하지. 우리는 쉬지도 못하고 아르바이트라며 불려 다녔는데.”
유병태가 손을 가볍게 비비고 술잔을 들었다.
태수는 그를 시작으로 한 잔씩 따라 줬다.
모두 잔을 채우자 태수가 자신의 잔을 들고 말했다.
“다 알고 있는 얘기지만 고생했고, 앞으로도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해 보자.”
“수고하셨습니다!”
쨍.
가볍게 술잔을 부딪친 모두가 한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크으! 좋다!”
“역시 좋은 술은 목 넘김부터 다르다니까.”
소란스러운 유병태와 홍진만이 수선을 떨며 안주를 집어먹었다.
그런 반면 도성민과 송민규는 차분한 표정이었다.
술 한 잔을 마셔도 이렇게 제각각 성격이 드러났다.
태수가 한 잔씩 더 따르며 말했다.
“술은 많이 사 왔으니까 아주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 보자.”
태수는 말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술을 따르고 또 따르며 쉴 틈을 주지 않고 건배를 청하고 마셨다.
좋은 술의 장점이라면 급하게 취하지 않는단 것이다.
다들 주량도 상당하기에 단순히 술만 마시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었다.
아무래도 직업이 같아서 그런지 의학적인 부분에 대한 내용이 많이 오갔다.
이래서 한 잔, 저래서 한 잔.
연거푸 마시다 보니 아무리 주당들이라 해도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태수가 도성민과 유병태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언제 출국이지?”
“3일 후에.”
“이번에는 어디로 가?”
“그 동네가 언제 미리미리 말해 주는 거 봤어? 인천공항에 가면 한국 지부 담당자가 나와서 알려 주겠지.”
도성민의 말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둘 다 어디로 가게 되든지 건강해라.”
“자식. 우리 건강보다 네 건강이 더 문제야.”
“한국은 안전해.”
“누가 그걸 말하냐? 네가 출동하게 되면 환자 상태가 어떤지 안 봐도 비디온데, 네가 그 안 좋은 상황을 그냥 넘어가겠어?”
도성민의 말에 유병태가 한마디 거들었다.
“난 진짜 놀랐다니까. 총알 하나 날아다니지 않는 나라에서 그렇게 어마어마한 부상을 입은 환자가 발생한다는 게 말이야.”
“대전에서 충분히 경험해 봤잖아.”
“그때는 그냥 멋모르고 달려들었다고 해야지. 요즘 좀 그렇다. 조금씩 의학에 대해 이해가 되다 보니까 무서워지기도 해.”
“음.”
태수가 가만히 듣고 있자 유병태가 한 잔 마시고 이어서 말했다.
“그렇잖아. 레지던트 때는 배가 아프다고 하면 일단 압뻬(충수돌기염)부터 의심했는데, 지금은 머릿속이 헝클어진다고.”
“그건 그래. 배가 묵직하게 아픈지, 쑤시듯이 아픈지에 따라서 원인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도끼 말대로야. 내가 하나를 알아 갈 때마다 기쁨보다 또 내가 모르는 게 뭐가 있을까 하고 겁부터 나니까.”
유병태와 도성민이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송민규가 나지막이 말했다.
“또 병을 알고 있는데도 다르게 증상이 나타날 때도 있고요.”
“그렇지. 송 선생도 경험해 봤나 보네. 그럴 때마다 자괴감이 든다니까. 내가 지금까지 뭘 했나 싶기도 하고.”
“다시 공부하겠다고 의학 서적을 펼쳐도 그걸 충분히 볼 시간도 없고요.”
“참 우리도 정신없지.”
마음 편한 사람들끼리 한잔 걸쳐서 그런지 속이야기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태수는 그런 말들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태수를 향해 얼굴이 벌게진 홍진만이 슬쩍 물었다.
“팀장님은 그런 적 없으시죠?”
“없을까?”
“있으십니까?”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 증상들이 모두 머릿속에 있었겠어?”
태수의 질문에 홍진만이 삐쭉거렸다.
“전 그런 줄 알았습니다. 동년배 선배님들과 비교해 봐도 팀장님이 월등하셨으니까요. 지금은 말도 못하고요.”
“자식.”
“웃자고 하는 소리 아닙니다. 진짜 궁금했다니까요.”
홍진만의 말에 도성민이 끼어들었다.
“나도 그건 좀 궁금하긴 했어.”
“넌 또 왜?”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나는 네 대학 시절도 알고 있잖아.”
“…….”
태수가 입을 다물자 도성민이 넌지시 물었다.
“카슈미르에서 2년 반 정도 있었는데, 그때 경험만으로 그렇게까지 포괄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거야?”
“술 마시는데 질문이 너무 심오하잖아.”
“한번 물어보고 싶었어. 나하고 병태하고 야전으로 나가 보니까 네가 얼마나 대단한 지식과 실력을 갖췄는지 더 실감이 났거든.”
도성민의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유병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두 눈은 태수에게 향했다.
대답을 구하는 눈빛들이었다.
결국 질문이 되어 버린 그 말을 다시 곱씹자 자연스럽게 한 인물이 태수의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카프레네.
10년이 넘게 지나도 그 얼굴을 어떻게 잊을까.
얼굴에 잡힌 자잘한 주름 하나까지도 태수의 가슴엔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해 준 처음이자 마지막 조언.
언제나 품고 있는 그 말이 이 순간에 한 번 더 떠올랐다.
“환자를 무서워해라. 손발 떨리는 공포도 느껴라. 거기서 도망치지 않아야 진짜 의사가 된다.”
태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분명한 그의 목소리는 주변에 있는 4명의 의사에게 똑똑히 전달되었다.
전이라면 무슨 소리냐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 말의 의미를 곱씹는 듯 각자 생각이 많아졌다.
“…….”
“…….”
침묵이 흘렀다.
유쾌한 술자리를 만들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하지만 태수도, 다른 의사들도 억지로 분위기를 띄우려 하지 않았다.
평소 술자리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이 어울리는 자리에서도 할 수 없는 대화였다.
이런 순간이 자주 찾아오는 게 아니기에 진지해지고 싶었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는 사이 태수가 술을 한 잔 마시고 이어서 말했다.
“어쩌면 내 모든 행동의 이유가 그 말이 아닐까 싶다.”
“…….”
“도망을 칠 수 없으니까. 우리가 도망치면 그다음은 없으니까.”
태수가 하는 말의 의미는 너무도 무거웠다.
다들 충분히 이해하고 또 수도 없이 겪어 왔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러던 중 홍진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그 말을 누가 한 겁니까? 혹시 제임스 박사님이 해 주신 말씀입니까?”
“아니.”
“그럼 스미스 박사님이십니까?”
“그분도 아니야.”
태수가 고개만 젓자 홍진만이 더더욱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두 분이 아닌 다른 분이시라고요?”
“내 마음속 영원한 스승님.”
“성함이…….”
“꼭 알아야 되나?”
태수가 묻자 홍진만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자식. 긴장하기는. 나중에 때가 되면 더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홍진만은 순순히 물러났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장난을 치든지, 성질을 돋워서라도 답을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상대는 태수였다. 홍진만뿐만 아니라 같이 배웠던 동기들에겐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사이 서로 술을 따르고 받으며 또 한 잔을 마셨다.
탁.
잔을 내려놓은 순간 도성민이 태수를 쳐다봤다.
“하나 묻자. 병태하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무슨 소리야?”
“1년을 기약했지만 솔직히 여기 남으라고 하면 남을 생각도 있어. 기왕 도움이 될 거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게 좋잖아.”
도성민의 말에 유병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한국에 들어온 후로 몇 번 얘기해 봤는데, 확정적인 건 아니지만 가능성은 열어 놓고 있어.”
“음.”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모든 면에서 네가 경험이 많으니까.”
유병태가 태수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쪼르륵.
태수는 옅은 호박빛 양주가 차오르는 걸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다 곧 결정을 내렸는지 도성민과 유병태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나가.”
“나가?”
“그래. 나가라고.”
태수가 재차 같은 답을 내 주자 도성민과 유병태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중 도성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니가 남으라고 할 줄 알았어.”
“나도, 나도. 여기 상황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니까.”
“아무리 의료진들이 추가되었다고 해도 실력의 편차가 있어서 제한적인 부분도 있고.”
두 사람이 번갈아 말했지만 태수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준 건 고마운데, 너희들 발전에 있어서는 마이너스야.”
“왜?”
“한국은 의료 시설이 상당히 잘되어 있는 나라 중 하나야. 뒤돌아서면 병원이 보일 정도로.”
“그거야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자 태수가 이어서 말했다.
“외국은 달라. 중동이나 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고, 남미나 남북극 쪽도 의료 환경이 열악하잖아.”
“음, 인정.”
“거기서 몸으로 익혀야 습득이 빨라. 이번에 너희들도 출동하면서 느꼈을 거 아니야.”
“…….”
태수의 말에 도성민과 유병태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그들에게 태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조언을 이어 갔다.
“처음 계획한 대로 1년 채우고 돌아와. 이번에 들어가면 아마 전과는 또 다른 느낌일 테니까.”
“어떤 면에서 다른데?”
“환경이 다르면 병도 다르고 증상도 달라져. 응급 의료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다양한 경험이잖아.”
“그건 그렇지.”
인정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태수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또 수도 없이 밀려드는 환자들과 씨름하다 보면 훨씬 멋있어지지 않을까?”
“무슨 말인지 알았어.”
“이번에 들어가면 반년 정도 있다가 들어오겠지. 그때까지 한국은 잊어. 니들 없어도 잘 돌아가니까.”
태수의 농담 섞인 말에 도성민과 유병태가 실소를 터트렸다.
“하하. 그건 또 그렇지.”
“내가 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긴 하지.”
그때 태수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럴지 몰라도, 나중에는 너희들이 있고 없고에 따라 크게 달라져야지.”
“…….”
“그리고 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어.”
태수가 찡긋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유병태와 도성민의 눈빛이 조금은 날카롭게 변했다.
“그래. 언젠가는 우리도 중심에 서야지.”
“그러려고 떠날 생각을 한 거니까.”
두 사람의 말을 듣던 태수가 술병을 들었다.
“또 인사하겠지만 지금 먼저 할게. 잘 가고, 죽어라 익히고 또 배워서 돌아와라.”
“자식. 기대해. 응급의료대, 아니 성호종합병원에 최태수 말고도 괴물 의사들이 나타났단 소문이 돌게 해 줄 테니까.”
도성민이 호기롭게 말하며 잔을 들었다.
쨍.
태수와 유병태, 그리고 도성민이 강하게 잔을 부딪쳤다.
더 이상 나누는 말은 사족이었다.
부딪치는 잔의 힘으로, 또 서로를 바라보는 단단한 눈빛으로 마음이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렇게 한 잔 더 마신 후였다.
다시 잔을 채우려는 사이 송민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팀장님, 저도 나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그 소리에 태수가 힐끔 쳐다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송 선생은 안 돼.”
“네?”
“usmle(미국 의사 면허증)부터 취득해야지.”
“아! 그렇죠.”
송민규가 예전 일을 떠올리며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런 그를 보며 태수가 이어서 말했다.
“내년에 응급의료대가 좀 더 안정되면 UCLA 쪽으로 다시 갈 수 있게 할 거야.”
“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요.”
“그렇다고 나까지 잊고 있을 순 없잖아. 내가 보냈었는데.”
“지금까지 기억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송민규가 인사하자 태수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