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757
01760 1760화
“그놈 주기 싫으면 김 선생이 알아서 하고. 좌우간 부탁 좀 하자고.”
“알았어요. 그런데 전 두 분이 이런 일로 싸우실 줄은 몰랐어요. 절대 안 싸우실 거 같았는데.”
김아름 말에 태수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어쩌면 내가 너무 편하게 생각해서 실수한 걸지도 모르지.”
“…….”
“그러니까 김 선생이 잘 좀 중재해 줘.”
“그렇게 할게요.”
김아름이 봉투를 쥐자 태수는 미소를 지었다.
태수는 이번 사태의 원인을 알고 있는 박성민에게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박성민도 정민수를 욕했다.
“그 자식은 어째 나이가 갈수록 밴댕이 소갈딱지가 되냐. 나도 안 그러는데 왜 그놈은 쫌생이가 되냐고.”
“제가 편하다고 막대해서 그런 거죠.”
“……그러네. 니가 잘못했네. 가까운 사이일수록 원래 미묘한 선을 잘 지켜야 한다고. 나 봐라. 그 한 걸음을 이렇게 잘 지키는 사람도 없다니까?”
“그렇다고 하고요.”
태수가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자 박성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째 도와주기 싫어지는데.”
“선배는 또 왜 그러십니까? 민수 녀석 최소한 한 달은 더 삐쳐 있을 거 같단 말입니다.”
“알았다고. 하여간 늙은 선배 부려 먹는 재주만 늘어난 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알아서 오프 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
박성민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태수의 어색한 미소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그날 저녁 무렵.
근무 교대가 이뤄지며 간단하게 회의가 진행되었다.
매일 하는 일이라 정민수도 당연히 참여했다. 물론 태수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태수는 그런 정민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곧 회의가 진행되고 박성민이 몇 가지 전달 사항을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태수가 부탁한 걸 진행했다.
“일단 전달 사항은 여기까지. 그리고 근무 짜다가 확인한 건데 정민수, 내일 오프다.”
“저요?”
“그래. 너, 바로 너, 너너너. 너 말고 여기 정민수 또 있어?”
박성민이 여러 차례 지목하며 확신을 주자 오히려 정민수의 표정이 황당하게 변했다.
“저 근무…… 맞게 잘 서고 있는데요.”
“저 자식이 또 버티네. 민수야, 팀장이 말하잖아. 너 하루 쉬라고. 쉬기 싫어? 한 달 내내 굴려 줘?”
“그건 아닙니다만, 갑작스러워서요.”
“아, 겁나게 죄송합니다. 지원팀장 따위가 근무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해서 오류를 범했으니 이 얼마나 하늘이 노하고 땅이 통곡할 일이란 말입니까.”
박성민이 삐딱한 눈빛으로 따지자 정민수가 움찔했다.
그때 눈치를 보던 홍진만이 슬쩍 손을 들었다.
“그럼 제가 쉬면 안 됩니까?”
“진만아.”
“네, 팀장님.”
“앞으로도 쭉 한 손으로 살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 손 내려라.”
“헉!”
홍진만은 깜짝 놀라 들었던 손을 얼른 품속으로 감췄다.
그 모습에 다들 소리 죽여 웃었다.
“큭큭.”
“흠흠.”
엉뚱한 홍진만의 행동을 누구도 경박스럽게만 생각하지 않았다. 악의 없는 까불거림이 오히려 경직된 회의 분위기를 즐겁게 했다.
그러나 박성민은 가늘어진 눈을 되돌리지 않았다.
그 상태로 모두를 둘러보며 나지막이 이어서 말했다.
“요즘 아주 가끔 팀원들이 팀장에게 개기는 모습들이 보이는데, 나하고 태수가 아주 만만들 하시지?”
“……아닙니다.”
“팀장이 당신들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닌 건 맞지만, 최소한 귀찮은 일 대신 해 주면 존경은 아니더라도 존중은 좀 해 주십시다. 응?”
“주의하겠습니다.”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반응들을 확인하고야 박성민의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뭐, 그건 앞으로 지켜보기로 하고. 좌우간 오늘 회의는 이상 끝. 근무 끝난 의료진들은 신속히 퇴근해 집에 가서 발 닦고 잠들도록.”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수도 뒤따라 일어나자 이기준이 슬쩍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야?”
“뭐가?”
“정 선생이 갑자기 오프 받는 거 말이야. 요즘 두 사람 좀 날카로운 거 같던데, 그게 영향이 있는 건가?”
이기준은 눈치가 너무도 빨라 태수를 당황하게 했다.
“무슨.”
“아예 관련이 없는 거 같진 않은데.”
“스케줄 관리가 내 소관도 아닌데 왜 그렇게 끼워 맞춰.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밤새 응급 대기나 잘해. 간다.”
태수가 멀어져 가자 이기준은 뭔가 짐작한 듯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태수는 응급 대기를 하며 힐끔힐끔 휴대폰을 쳐다봤다.
김아름이 잘하고 있는지 궁금함으로 가득한 눈빛이었다. 당장 전화하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다.
그런 태수의 옆에 김혁권이 슬쩍 다가왔다.
“정 선생 삐친 거 때문에 아주 고생이 많으십니다.”
“어? 그걸 어떻게…….”
“이 캡틴은 또 왜 이래? 내가 그걸 모를 사람이야? 두 사람을 얼마나 지켜봤는데.”
김혁권의 말이 사실이었다.
놀란 태수가 오히려 멋쩍어졌다.
“김 선생까지 동원해서 풀어 주려는데, 김 선생한테서도 연락이 없네요.”
“그보다 닥터 정이 그렇게 쉽게 삐칠 인물이 아닌데.”
“이번에는 제가 좀 심했습니다.”
“빅 픽처를 한번 그려 보라고. 그동안 그렇게 같이 지냈으면 그 정도에 섭섭해하지 않을 걸 누구보다 잘 알 거 아닙니까.”
김혁권이 갑갑한 표정으로 말하자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왜 삐친 척하는 겁니까?”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가끔 관심 받고 싶을 때.”
“설마요. 그놈 수준이 그거…… 밖에 안 되기는 해도, 그건 좀 억측이신 거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알고 계시고. 그럼 난 좀 더 쉬러.”
김혁권이 태수에게서 멀어져 가며 가느다랗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참 주변에서 속이기 쉬운 스타일이야.”
험담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태수가 한번 믿기 시작한 사람에겐 한없이 정을 주고, 또 믿음을 보이는 걸 지적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도 태수에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휴대폰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기다림 속에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태수는 일어나자마자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역시 김아름에게서 연락이 안 왔다.
아직도 삐쳐 있는 걸까?
태수도 이젠 방법이 없었다.
그냥 낚아채서 휴게실에 몰아넣고 한바탕 싸움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결심한 태수가 출근해 성호종합병원 정문을 막 지나는 순간이었다.
빠라밤.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상대를 확인한 태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민수였다.
어제 그렇게 간을 졸이게 하더니.
전화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그런지 태수의 미소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반색하며 받기에는 또 간 졸이고 걱정했던 시간이 아까웠다.
“흠흠.”
태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헛소리 말고 네 진료실로 와.”
“진료실?”
“화이트엔젤. 지금 거기 있으니까 빨리 오라고.”
뚝.
전화가 끊어졌다.
그 순간 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기애애한 대화를 하려면 휴게실도 나쁘지 않은데 굳이 진료실을 찾아갈 이유가 없던 탓이었다.
태수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방향을 돌려 화이트엔젤로 향했다.
끼익.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은 정민수의 뒤통수가 보였다.
참 실했다.
그냥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동안의 그의 삐침을 정리하는 순간이었기에 일단 참았다.
태수가 소파 옆으로 돌아 맞은편에 앉았다.
정민수는 그런 태수를 빤히 바라봤다.
“…….”
“…….”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인턴 때 처음 만나 지금까지 10여 년이란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그중 오늘 두 사람의 시선이 제일 팽팽했다.
이런 시간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태수가 먼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정민수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지더니 침까지 튀기며 웃었다.
“푸흐흐흐! 으하하하!”
“갑자기 뭐야, 이 자식은?”
“중매래, 중매. 그렇게 튕기고 튕기더니 이젠 그런 사람들까지 찾아오냐? 으하하!”
정민수가 자지러지게 웃자 울컥한 태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걸 그냥 확!”
“그래서 뭐 어쩌라고. 웃기는 건 웃기는 거야. 크하하!”
“그래, 웃어라. 차라리 놀림감이 되는 게 내 속이 편하지.”
태수가 툴툴거려도 정민수는 한없이 웃어 젖혔다.
아무리 긴 웃음이라도 끝은 있는 법이었다.
무려 5분이나 웃어 젖힌 정민수가 이제 좀 진정되는지 배를 붙잡고 말했다.
“아이고, 배야.”
“그렇게 웃기냐?”
“그게 아니라, 중매야 그렇다고 쳐. 아름이까지 끌어들여서 내 기분 풀어 주겠다고 설친 니가 더 웃기다고.”
“말도 안 하려던 자식이.”
태수가 울컥해 바라보자 정민수가 한마디 했다.
“이번 주까지만 삐친 척하려고 했어.”
“누가 믿어.”
“믿든가 말든가 그건 네 자유고. 어떻게 데이트 비용까지 찔러 줄 생각을 했냐?”
“시끄러워. 다 웃었으면 일어나. 상황실 올라가야지.”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정민수가 얼른 손짓했다.
“아니야. 그거 때문에 여기로 오자는 건 아니었어.”
“그럼 뭔데?”
“너 사람 한 명만 만나 봐라.”
그 소리에 태수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얘는 또 왜 이래? 너도 중매 서냐?”
“누가 여자 만나래? 할아버지야.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
“누누이 말하지만 내가 이성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태수가 제대로 듣지않고 말하다가 멈추자 정민수가 정색하며 손을 한 번 크게 휘저었다.
“야, 내 말 듣고나 있어?”
“……그런데 갑자기 왜? 도대체 어떤 할아버지?”
“어제 대학로에 연극 보러 갔거든.”
“주연이 그 할아버지란 거야, 뭐야?”
태수가 뚱하니 묻자 정민수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할아버지가 주연이었어. 그리고 단원도 혼자였고.”
“도대체 그런 연극은 어떻게 찾아서 보는 거냐?”
“전에 예림 씨가 전시했던 전시관 근처야. 밥 먹고 산책이나 할 겸 걸어가다가 호객하는 할아버지를 발견했고.”
정민수의 엉뚱한 말에 태수가 살짝 귀찮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래서?”
“티켓으로 용돈 벌이 하시나 보다 하고 샀지.”
“네 성격상 기왕 산 거니까 돈 버리기 싫어서 들어갔을 거고.”
태수의 말에 정민수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돈을 써도 이유 없이 낭비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너나 나나.”
“그래. 둘 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던 때의 버릇이 남아 있는 건 아니까 그만하고. 좌우간 연극을 봤다고.”
“음.”
“구구절절한 건 내가 말하는 것보다 니가 가서 직접 보는 게 좋을 거 같아.”
탁.
정민수는 티켓까지 내밀었다.
그런 정민수의 행동에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경우가 한 번도 없던 탓이다.
“최소한의 설명은 해 줘야지.”
“음…… 아니야. 니가 가서 직접 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설마 환자야?”
태수의 물음에 정민수가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럼 네가…….”
“난 아직 보건의 소속이니까. 물론 하 팀장님은 내가 부탁하면 들어주시겠지. 그런데 네가 직접 그 연극을 한번 봤으면 싶어서 추천한 것이기도 하고.”
“…….”
“휴게실에서 낄낄거리면서 할 얘기는 아니라서 이쪽에서 보자고 한 거야.”
정민수의 말에 태수가 티켓을 집어 들고 잠시 고민했다.
“음.”
“눈 딱 감고 가서 봐 봐. 가급적이면 빨리 가면 좋겠다.”
“…….”
“보면 내가 왜 이러는지 넌 알 거야. 먼저 일어난다. 올라오든가, 가 보든가 알아서 결정하고.”
정민수는 부탁을 했지만 강요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수는 그런 그의 말에 가슴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사이 정민수가 문을 닫고 나갔다.
탁.
문소리를 들었지만 태수는 티켓을 계속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