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817
01820 1820화
진료실은 차분하다 못해 적막했다.
하지만 모두 넋 놓고 쳐다보고 있는 건 절대 아니었다.
서영우는 계속 IV를 확인하고 간이 혈압계를 눌러 단편적인 정보를 파악했다. 미묘한 변화에 따라 약의 용량을 조절하기도 했다.
태수와 정민수가 중심을 잡고 있어서 그런지 처치가 조금은 과감하게 변해 있었다.
김혁권은 언제든지 필요한 걸 건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두 눈은 태수와 정민수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있었다. 문제가 생기면 표정부터 변하는 두 사람이었기에 그 변화를 주목하고 있었다.
태수는 가이드와이어를 단단하게 쥐고 계속 낚시를 하듯이 풀었다가 당기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혈관이 찢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쓰다 보니 진행이 더뎠다.
무엇보다 아직 대동맥의 어느 부위가 축착 증세를 보이는지 찾지 못했단 게 중요했다.
‘아니야, 여기도.’
태수는 머릿속으로 가이드와이어의 움직임과 혈관을 상상하며 미세한 움직임으로 다룰 때였다.
청진기로 소리를 듣던 정민수가 갑자기 다른 손을 번쩍 올렸다.
태수가 그걸 보고는 눈에 이채를 반짝이며 반응을 보였다.
“어디?”
휙휙.
정민수는 말없이 손짓만 했다. 한쪽 귀로 청진판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어 대답도 조심하는 중이었다.
태수도 알기에 탓하지 않고 가이드와이어를 살짝 당겼다가 다시 놓았다.
바로 정민수의 손이 반응했다.
흔들흔들.
아니란 뜻이었다.
태수는 다시 가이드와이어를 조작했다.
몇 번의 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하지만 정민수는 계속 아니라며 손을 옆으로 휘젓기만 했다.
태수도 갑갑했다.
기계를 이용한 시술이었다면 가이드와이어를 원하는 위치로 옮기기 수월했다. 그럴 수 없어 계속 허탕만 치게 되니 답답함을 느꼈다.
시작부터가 완벽히 갖춰지지 않은 시술이기에 짜증만 낼 순 없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경험이 준 지혜를 생각하며 태수가 인내했다.
짜증을 누르고 차분한 마음으로 계속 손을 움직이던 중이었다.
턱.
가이드와이어의 끝이 어딘가에 걸렸다.
혹시 혈관?
만약 동맥 벽을 건드린 거면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놀란 태수가 가이드와이어를 회수하려 힘을 줄 때였다.
“잠깐.”
정민수의 목소리가 한 박자 빨랐다.
태수가 그대로 가이드와이어를 유지하자 정민수는 손으로 기다리라는 사인을 보내며 청진기에 귀를 기울였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건 감각뿐이었다.
태수는 손끝으로, 정민수는 청각으로.
그렇게 각자 담당하는 부분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민수가 손을 움직여 사인을 보냈다. 검지만 편 상태로 허공을 찌르는 사인이었다.
축착이 일어나는 위치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단 의미였다.
태수는 아주 조심스럽게 가이드와이어를 당겼다가 앞으로 툭 밀었다.
혈관에 자극만 줄 정도로 미미한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정민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뭔가 변화를 파악하려는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여 가며 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한 번 더 검지로 찌르는 사인을 보냈다.
태수는 처음보다 아주 조금 더 강한 힘으로 가이드와이어를 밀었다.
그때였다.
휙!
갑자기 정민수가 청진기를 거칠게 벗으며 재빨리 소리쳤다.
“거기!”
“좋아!”
태수는 가이드와이어 끝에 달린 손잡이를 가볍게 쥐었다. 그건 가이드와이어의 앞부분에 달린 기계 장치를 작동시키는 손잡이였다.
특별한 건 없었다.
특수하게 제작된 철망을 살짝 부풀리는 역할이었다.
그 철망은 혈액에 부식되지 않는 소재였고, 부푼 만큼 공간을 확보해 주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다.
즉, 좁아진 혈관에 원통형 철망을 삽입했단 이야기였다.
그와 동시에 태수는 우선 가이드와이어부터 회수했다.
한 번 철망을 부풀린 이상 가이드와이어의 역할은 끝이었다. 만약 그 철망이 잘못 설치됐다고 해도 되돌릴 수 없었다.
회수한 가이드와이어를 김혁권에게 건넨 순간 정민수가 청진기를 내밀었다.
탁!
바로 낚아채 귀에 건 태수는 청진판으로 심장 부근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바람이 가늘게 새는 듯한 혈행 소리가 조금은 커졌다.
정확하게 축착증이 발생한 위치에 철망을 삽입하진 못했을 터였다.
그건 태수와 정민수가 아무리 감각에 의존한 시술에 강하다고 해도 확률이 너무도 희박했다.
대신 그 위치와 가까운 장소에 철망을 설치했단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대동맥의 좁아진 부분이 조금이라도 넓어졌을 터였다. 그 증거는 역시 혈행 소리가 커졌다는 거였다.
태수는 한 번의 확인으로 끝내지 않았다.
시간을 충분히 투자해 신중하게 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러는 사이 정민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끝이 약간 붉어졌어.”
휙.
태수의 시선이 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처음 봤을 때 짙은 보라색처럼 멍든 손끝이 짙푸른 색으로 변해 있었다.
혈액이 좀 더 강하게 손끝까지 도달하고 있단 뜻이었다.
귀로 전해 듣는 소리도 최악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태수와 정민수는 아주 사소한 변화까지도 서로에게 말하며 아기에 대한 관찰을 이어 갔다.
30여 분이 지난 후였다.
태수와 정민수가 시술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허리를 폈다.
정민수는 수술 장갑을 벗고 소매로 땀부터 훔쳤다.
“푸우. 일단 안정세로 돌아섰다고 봐야지.”
“역시 아기야. 약간의 치료만으로도 변화가 상당해.”
“진짜 이 정도는 PCI(중재적 시술)로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건데.”
정민수의 목소리가 안타까웠다.
태수도 동감이었지만 현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어쩔 수 없잖아.”
“어쩌자는 건 아니라고. 간단한 문제를 크게 키워야 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야.”
“그건 동감이야.”
“좌우간 당분간은 시간을 번 건가?”
정민수가 묻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을 거야.”
“하긴 정확한 위치에 삽입한 게 아니니까 언젠가는 다시 문제가 발생하겠지.”
“그러니까 수술을 해야 하고.”
“…….”
정민수는 안타까움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김혁권이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수술 준비해야죠.”
“몸 상태가 영 꽝인데.”
“피곤하십니까?”
“나 말고 그쪽 말입니다. 캡틴, 당신 말이야.”
김혁권이 콕 집어 지목하자 태수는 어색한 미소로 인정했다.
“썩 좋은 편은 아닙니다.”
“그렇겠지. 잠이나 제대로 자고 먹기나 제대로 먹었겠냐고.”
김혁권이 아리송한 눈빛을 보내자 태수가 얼른 수습에 나섰다.
“아니요.”
“하여간. 집 나가면 그렇게 고생이라고 말을 해도 안 듣고 쏘다니니. 쯧.”
김혁권이 혀까지 차자 태수가 욱했다.
“제가 그냥 놀다 온 건 아니잖습니까.”
“뭐 그렇게 할 말이 많습니까?”
“……죄송합니다.”
“이건 나중에 현미한테 잔소리 들을 생각 하고.”
“그건 아니죠!”
태수가 얼른 변명하려 했지만 김혁권은 단호했다.
“그건 내 마음이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그래서 바로 수술 준비를 어떻게 하자고? 수술을 진행할 몸 상태가 아닌데.”
“……일단 먹고 좀 자야죠. 아기는 교대로 보는 걸로 하고요.”
태수가 말하자 김혁권이 팔짱을 꼈다.
“그게 끝이야?”
“발전기하고 조명은 저희가 쉬는 사이에 준비될 겁니다. 그거 때문에 제가 그 개고생을 한 걸 지금쯤이면 모두가 알 테니까요.”
태수의 말에 김혁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그렇겠지.”
“늦어도 오늘 밤에는 수술 들어갈 겁니다. 그때까지 다들 최대한 컨디션 관리해 주십시오.”
“그쪽이나.”
“먹고 잘 거라고요.”
태수가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그러나 김혁권은 강하게 째려볼 뿐이었다. 역시 태수 혼자 반군 캠프에 다녀온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 속에 섞인 원망과 걱정을 알기에 태수는 억울해도 죄인이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날 무렵이었다.
머리맡에서 서영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가서 쉬어.”
“…….”
“이번에는 무기력하게 보고만 있진 않을 거야. 어떤 방법이라도 동원해서 지키고 있을 테니까 가서 쉬고 와.”
서영우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태수는 그런 그가 걱정됐다.
수술 중 마취의는 움직임이 적은 편이었지만 신경을 계속 날카롭게 유지해야 했다.
정신적인 피로감이 어마어마하단 소리였다.
그런데 그가 계속 지켜보겠다고 하니 수술이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스윽.
태수가 입을 열려 하자 김혁권의 손이 가로막았다.
태수의 눈빛이 의아하게 변하자 김혁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 닥터 서에게 맡깁시다. 그리고 내가 중간에 교대할게. 수술할 때 나는 손만 잘 움직이면 되잖아.”
“…….”
“그렇게 하자고.”
김혁권은 협박이 아니라 타이르듯이 태수에게 말했다.
그는 서영우의 말속에서 무언가 느낀 모양이었다.
그건 태수와 정민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서영우를 억지로 끌어내 밖으로 나가면?
그리 좋은 판단은 아니다.
그걸 알기에 곧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서 선생님이 지켜봐 주시고, 혁권 씨가 교대해 주세요.”
“…….”
“저하고 민수는 지금은 도움이 되지 못할 거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끄덕.
서영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태수와 정민수, 그리고 김혁권은 정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거실에 브랜든과 패드릭이 서 있었다.
그들이 먼저 태수를 봤는지 얼른 다가와 물었다.
“아기는 어떻습니까?”
“조금 시간을 벌었습니다.”
“다행입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닥터 최.”
브랜든이 조심스럽게 주변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동시에 정민수와 김혁권이 서로를 쳐다봤다.
상황 판단을 마친 정민수가 태수에게 말했다.
“여기 2층으로 올라와. 계단은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2층? 다 부서졌잖아.”
“텐트 칠 공간은 있더라. 거기가 우리 쉬는 곳이니까 잊지 말고 잘 찾아와. 먼저 올라간다.”
정민수가 손을 흔들고 돌아서자 김혁권이 그 뒤를 따랐다.
한국어로 나눈 대화라 브랜든과 패드릭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정민수와 김혁권의 행동으로 어느정도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태수가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사이 브랜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휘 막사로 모셔 오라는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누가 부른 겁니까?”
“사무엘 중대장님이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왜요, 이번에는 공개 처형이라도 하겠답니까?”
아까의 악감정이 떠오른 태수가 삐딱하게 묻자 브랜든이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우리가 일어나지 않게 할 겁니다.”
“아차, 그러고 보니…….”
“네, 말씀하십시오.”
브랜든이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패드릭의 안색도 살짝 굳어졌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바로 선 태수는 깊게 고개 숙이며 말했다.
“좀 전에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이따가 팀장님에게도 인사드릴 겁니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주신 두 분에게 먼저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태수의 말에 브랜든과 패드릭의 표정이 희한하게 변했다.
이 인사를 받아도 되는 건지, 아니면 직무에 충실했으니 됐다고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모양이었다.
그때 태수가 이어서 말했다.
“어떤 연유로 절 지켜 주셨는지는 압니다. 그래도 그 순간 너무 듬직하고 가슴 벅찼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는 정말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 뿐입니다.”
“…….”
허리를 편 태수가 가만히 바라보자 브랜든이 움찔하며 시선을 슬쩍 돌렸다.
“아니, 자원한 것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총격전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 직감하고 한 일입니다.”
“나중에 꼭 신세 한번 갚겠습니다.”
“돌아가면 한국을 떠날겁니다만.”
“그럼 파병 나간 곳에서 연락 주세요. 적진 한복판이라 해도 적십자 깃발 휘날리며 찾아가겠습니다.”
태수가 진심 섞인 농담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