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865
01868 1868화
예상외의 변수가 많았는지 정민수와 김혁권의 수술복 곳곳에 핏자국이 보였다.
수술이 길어진 이유가 저 핏자국과 연관이 있단 직감이 들었다.
태수가 다가가자 약간 피곤해보이는 정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수술은 잘 끝났어. 이 선생이 뒷정리 좀 한다고 해서 먼저 나와 있는 거고.”
“수술이야 당연히 잘 끝났겠지.”
태수의 심드렁한 말에 정민수가 살짝 폭발했다.
“뭐? 수술 직전에 협박까지 했던 놈은 도대체 어느 동네 누구 씨야?”
“나쁜 놈이네. 그 사람 찾아내면 나도 알려 줘.”
태수가 넉살을 부리자 정민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이놈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건 알아서 하고. 그보다 김 간호사님, 수고하셨습니다.”
태수가 가볍게 인사하자 김혁권이 손을 휘휘 저었다.
“왜 이래요? 언제부터 우리가 그런 인사 주고받는 사이였다고.”
“문제아들이 사고 쳤을까 봐 미리 밑밥 까는 건데요.”
“별일은……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어요?”
태수가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방금까지 옆에 서 있던 정민수가 어느새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야, 어디 가?”
“씻으러.”
정민수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멀어져 갔다.
태수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 김혁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술 시작한 후로 필요한 말 외에는 서로 안 하던데.”
“음.”
“왜, 차라리 잘된 거 아닙니까?”
김혁권의 물음에 태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라면 완전하게 무관심하다고 봐야 될 거 같아서요.”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혁권이 줄줄 이야기를 풀었다.
“서로 아예 남남처럼 생각하는 거 같진 않다고. 남남이 만나 수술하면 그런 호흡은 나오기 힘들지.”
“…….”
“좌우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나도 씻으러 갑니다.”
툭.
김혁권이 태수의 어깨를 가볍게 짚고 지나쳐 갔다.
태수는 그 말뜻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때 수술 텐트 입구로 이기준과 이선정 간호사가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의 모습도 정민수와 김혁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태수가 그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좀 힘들었지.”
“변수가 많았어?”
태수의 물음에 이기준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정 선생이나 김 간호사님이 말하지 않아?”
“몇 마디 하긴 했는데 그 얘기가 나오기도 전에 가 버렸어.”
“폐정맥에 좀 타격을 받았어. 그 때문에 출혈이 심해서 좀 고생했지.”
이기준의 설명은 간단했지만 태수는 머릿속으로 대충 그려 낼 수 있었다.
“폐동맥은?”
“천운으로 비켜 갔어. 나도 신이 있다고 믿어질 만큼 정교하게.”
“진짜 천운이네.”
“그렇지. 아니었으면 여기 도착하기 전에 과다 출혈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테니까.”
“참 살벌한 얘기를 평온하게도 한다.”
태수가 구박해도 이기준의 표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 아, 그리고 인공호흡기를 좀 사용해야 돼서 저 환자는 계속 수술 텐트에 놔둬야 할 거 같아.”
“알았어.”
“들어가서 직접 살펴봐도 좋고. 나도 좀 씻으러 갈게. 너무 엉망이야.”
이기준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태수를 지나쳐 갔다.
그 순간 태수의 코에 피비린내가 강하게 밀려 들어왔다.
동시에 태수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민수보다 피 냄새가 진한데.”
“정 선생님 처치가 끝난 때까지 이 선생님이 잡고 계셨으니까요.”
누구의 목소린지 알기에 태수는 여전히 이기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김 간호사님이 이도저도 아닌 분위기에서 수술했다고 하던데요.”
“맞아요. 두 사람 뭔가 좀 이상해요.”
“좀 더 정확한 느낌을 듣고 싶습니다만.”
태수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한 이선정 간호사의 얼굴은 무척이나 차분했다.
이선정 간호사는 일반적인 수술에서는 별다른 감정 변화가 없다.
그러나 일정량 이상의 피를 보면 극도로 차분해진다.
피 공포증을 이겨 내는 과정에서 엄청난 마인드 컨트롤을 한 결과라고 했다.
마치 감정 없는 인형처럼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런 이선정 간호사의 얼굴만 봐도 얼마나 출혈이 많았는지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선정 간호사는 그렇게 차가운 얼굴로 태수의 질문에 대답했다.
“가까워지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은 느낌.”
“쟤들이 무슨 삼류 소설 주인공들도 아니고요.”
“제가 받은 느낌은 그래요. 확실한 건 서로 밀어내려고만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냉정한 그녀의 평가에 태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럼 도대체 저놈들은 뭐가 문제일까요?”
“제가 그걸 알 리가 없죠.”
“음. 그보다 괜찮으십니까?”
태수의 걱정에 이선정 간호사가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더듬은 후 대답했다.
“내일 아침 되면 괜찮아질 거예요.”
“신경안정제라도 좀 드려요?”
“약 끊은 지 오래됐다니까요. 스스로 이겨 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잖아요.”
“그건 동감입니다.”
“그럼 저도 가 볼게요.”
이선정 간호사가 지나쳐 갔다.
태수는 손을 뻗어 잡으려 생각했지만 결국 잡진 않았다.
지금은 그냥 놔두는 게 오히려 이선정 간호사에게 도움이 될 걸 알고 있었다.
다시 혼자가 된 태수는 지체하지 않고 수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어떤 수술이었는지 태수도 궁금해졌다.
수술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서영우가 ECG와 인공호흡기를 점검하며 수술을 마친 환자를 관리하고 있었다.
태수는 다가가서 바로 인사부터 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그나저나 오늘 햇빛 한번 못 보네.”
“다녀오시죠.”
태수 말에 서영우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이나 나가려고. 오늘은 내가 지켜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여기 있으니까 고요하니 좋기도 하고.”
“정신 건강에는 별로 좋지 않을 거 같은데요.”
그렇게 말하며 수술실 바닥을 내려다본 태수는 질린 표정으로 변했다.
어제와 다르게 수술실 바닥에 넓고 두꺼운 비닐을 깔아 둔 상태였다.
오늘 아침에 땅에 스며든 피 냄새 지우느라 고생했다면서 조치해 둔 것이었다.
그 비닐이 피로 흥건했으니 이선정 간호사가 차가워진 게 당연했다.
사용한 수혈팩이나 수액은 모두 치워져 있었지만, 비닐에 쏟아진 출혈까진 정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서영우가 그걸 바라보고 있는 태수에게 말했다.
“내가 정리할 거야. 한 번에 다 하려니까 너무 힘들어서 쉬엄쉬엄하려고.”
“심각했네요.”
태수 인상이 굳어지자 서영우가 머리를 흔들었다.
“어마어마했지. 아차차! 그보다 문제가 좀 있어.”
“어떤 문제입니까?”
태수가 바로 묻자 서영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수혈팩이 별로 없어.”
“어제 꽤 많이 헌혈을 받았는데요.”
“그걸 어제 오늘 수술에서 모두 썼다는 거지.”
서영우의 말에 태수의 얼굴도 어느새 딱딱하게 변했다.
“상당히 큰 문제네요.”
“옴부르 부족에 한 번 더 헌혈해 달라고 하면 어떨까? 전체 부족민으로 따지면 많이 헌혈해 준 것도 아니라며.”
서영우의 제안에 태수가 난색을 표했다.
“그 수혈팩들 대부분이 마시리 부족민 수술에 사용됐다는 걸 솔직히 달가워하지 않을 겁니다.”
“뭐 어쩌라고. 사람은 살려야지. 그런데 다시 해 달라고 하면 팔 걷어붙이고 다가오진 않겠지?”
서영우가 동조하자 태수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눈을 굴리며 뭔가 생각한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방법을 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그래. 그런데 정 선생 얘기 들어 보니까 마시리 부족 상황이 많이 좋지 않다던데. 어제 다녀온 얘기를 수술 중간에 잠깐 했거든.”
“그렇죠. 그쪽 상황이 좋지 않죠. 기아를 겪고 있다고 해야 할 정도니까요.”
태수의 걱정에 서영우가 왈칵 짜증을 부렸다.
“도대체 이 작은 땅덩이에서 몇 가지 문제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거야. 슬슬 답답해지기 시작하네.”
“그러게 말입니다.”
태수가 수더분하게 대답하자 서영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최 팀장, 너무 짜증나면 다 모르는 척해 버려. 이거 진심이야.”
“하하.”
“웃지 말고. 우리가 무슨 평화 사절단도 아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화해까지 시켜 줘야 돼?”
감정서린 서영우의 말에 태수가 최대한 울컥한 마음을 자제하며 의견을 말했다.
“그건 아니지만 마시리 부족을 더 방치하면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 문제에서 우리가 자유롭진 않겠죠.”
“내가 진짜 이런 소리 하면 안 되는데, 차라리 잔소리 좀 듣고 눈칫밥 먹는 게 속 편하지 않겠어?”
“그게 몸은 편해도 정신적으로는 상당히 문제가 될 겁니다.”
태수 의견에 서영우가 침묵했다.
“…….”
“아시잖아요. 우리 의사들에게 정신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입니다.”
태수의 말에 서영우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나도 갑갑해서 하는 말이라고.”
“그럼요. 저도 압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선생님은 다른 생각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난 왜 빼?”
서영우의 반발에 태수가 간만에 싱긋 웃었다.
“빼는 게 아닙니다. 아마 선생님은 여기에 계속 계셔야 할 겁니다.”
“이 텐트에서 계속 머물라고? 그건 아니지.”
“그게 아니라 여기에 계셔야 할 거라고요. 수술이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르니까요.”
태수가 차분하게 이유를 말하자 서영우가 눈을 몇 번 굴린 후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건 그렇겠지.”
“이후에 일정이 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전까지는 부탁드립니다.”
“내 걱정 말고, 뭘 어떻게 하려는 건진 몰라도 우리 안전까지 위협하진 말라고.”
“그건 절대 안 하죠. 그럼 수고하십시오.”
태수가 돌아서자 서영우의 목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이따가 사식 좀 넣어 줘.”
“엄선해서 좋아하시는 걸로 넣겠습니다.”
“뭐?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갇혀 있는 거 같잖아.”
“하하. 시간 내서 또 면회 오겠습니다.”
태수는 찡긋 미소를 짓고는 수술 텐트를 나섰다.
서영우의 앓는 소리에 이렇게 한 번 웃었다.
그게 아니라면 여유로운 태수도 웃고 싶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태수는 그 후로 일부러 혼자 시간을 보내며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우선 마시리 부족의 문제부터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오랫동안 굶었다면 분명 건강에 이상이 있을 터였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 도와주러 왔는데, 식량만 전해 준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 방문하지 않은 부족들도 찾아가야 했다.
오늘 학교로 등교하던 타 부족 아이들은 의료 봉사단을 눈으로 봤다.
지제이가 나서서 여기까지 다가오진 않았지만, 태수와 이선정 간호사가 옴부르 부족을 찾아가서 진료했으니 절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도 자신들을 기다릴 터였다.
겉으로 드러나거나 잠재된 환자를 파악하고 치료하는 게 의료 봉사단의 목적이었다.
문제는 마시리 부족민들이 이곳 텐트에 입원해 있는 이상 타 부족들이 찾아오지 않는 단 사실이다.
지제이에게는 입원 기간을 짧게 잡았지만, 그건 태수의 예상일 뿐이었다.
정확하게 언제 부족으로 돌려보낼지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다.
결국 이쪽에서 움직여야 했다.
움직이는 건 좋은데, 타 부족을 찾아가서 자세한 대화를 나누려면 통역이 필요했다.
지제이만이 그들과 의료진을 이어 줄 가교 역할이 가능했다.
또 언제 어떤 환자가 찾아올지 모르기에 부족해진 혈액도 채워 놓아야 했다.
태수는 그저 머릿속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의료용 수첩을 꺼내 작성했다.
그 내용을 계속 바라보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중이었다.
태수는 일순간 머릿속이 헝클어지는 걸 느꼈다.
“으.”
편두통인지 한쪽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오른쪽 관자놀이를 슬슬 문지르는 태수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엔 왜 이렇게 크고 작은 문제가 끊이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