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07
00208 208화
단순한 허풍이 아니라는 건 단지 6개월이란 짧은 기간 동안 동성의료원에서 근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보여줬다.
그리고 지금의 태수는 그때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발전한 상태다.
그동안 투자한 게 아까워서라도 선뜻 손을 놓고 싶지 않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투자에 대한 부분이다.
어쩌면 이번 일로 가장 갈등하는 게 석정현 이사장 본인일지도 몰랐다.
***
며칠이 지난 후였다.
이른 아침부터 홍진만의 얼굴이 밝디 밝았다.
입가에는 흥얼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체체쳇, 제끼라우!”
그 소리에 회진 준비를 이어가던 송민규가 황당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아니, 선배. 개소리라니요? 제가 지금 입으로 비트 쪼개고 있잖습니까.”
“뭘 쪼개?”
“비트 말입니다. 쿵짝, 쿵짝. 모르세요?”
홍진만이 갑갑한 듯이 반문하자 송민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약병이나 잘 쪼개라.”
“아, 이렇게 감정이 메마른 분 밑에서 내가 일을 하고 있다니. 얼른 일과가 끝나야 될 텐데.”
멀리 시선을 두며 중얼거리는 홍진만 모습에 송민규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너 오늘 오프라고 했지?”
“네. 음하하하!”
“치프한테 조르고 졸랐다던 소문이 있던데 말이야.”
“진짜 농담 안 하고 이주일 동안 내내 커피 배달하면서 얻은 귀한 오프입니다.”
홍진만이 무용담을 말하듯이 거창하게 설명하던 중이었다.
뒤에서 홀연히 나타난 태수가 한마디 거들었다.
“1년 내내 오프 없어도 되니까 이번 한 번만 내보내 달라고 통 사정을 했지. 커피는 뇌물이고.”
“앗. 치프!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틀려?”
“그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진짜 오늘 중요한 날이라니까요.”
홍진만의 말에 태수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음악회라고 했나?”
“힙합 콘서트입니다. 오늘 저녁부터 내일 아침까지 광란의 밤을 보내는 그런 아주 의미 깊은 콘서트요.”
“별걸 다해.”
“힙합이니까 가능한 거 아니겠습니까? 불굴의 힙합 정신! 그리고 공주시에서 아주 작정을 했는지 강변공원에서 대대적으로 진행한다는 거 아닙니까. 캐스팅도 아주 죽여줍니다.”
들뜬 홍진만의 말에 태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직 오프가 결정된 건 아니야. 내 조건은 기억하지?”
“네! 오늘 하루 절대 사건사고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불굴의 힙합정신. 기대하지.”
“알겠습니다.”
홍진만의 목소리가 다부졌다.
그만큼 꼭 참여하고 싶은 이벤트인지 평소의 반항기조차 삼킨 모습이었다.
정신없는 하루가 끝을 맺어갔다.
외래 진료가 끝난 직후 홍진만은 이미 사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남은 건 태수의 결정뿐이다.
의국에서 바짝 긴장한 채로 대기한 홍진만의 앞에 태수가 나타났다.
유행이나 패션과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홍진만의 옷차림을 확인한 태수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모자는 왜 삐뚤게 썼어?”
“이거 스냅백이라는 건데요. 원래 이렇게 쓰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래? 그런데 목 안 아프냐?”
태수가 묻자 홍진만은 길게 늘어진 금색 체인 목걸이를 슬쩍 들어 보이며 한마디 했다.
“힙합 아닙니까? 이 정도는 당연한 겁니다.”
“참 힙합이 사람 고생시키네.”
“즐거운 겁니다.”
홍진만의 목소리가 당당했다.
그리고 태수를 향해 기대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이 정도면 오늘 하루 무사히 넘긴 거 아닙니까?’
눈빛으로 물어오는 물음이다.
그 물음에는 빨리 내보내 달라는 재촉도 담겨 있었다.
태수도 그 시선을 느끼고는 지그시 마주 했다.
홍진만은 남들이 보기에는 다소 반항적이고 까칠한 성격이다. 그런데 웃기는 건 레지던트들 중에서 가장 습득 속도가 빨랐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자신에게는 더욱 혹독했기에 당연한 발전이다.
그동안 태수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해 오프 갈 기회를 많이 상실하긴 했다.
이번에 보내주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태수에게 도전하는 끈기와 의학에 대한 열정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부류는 한 번 풀어줘야 또 다시 힘을 내 더욱 의술에 매진할 스타일이다.
태수도 그걸 알기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일 아침까지 잘 놀다오도록.”
“아자! 치프, 감사합니다. 그리고 완전 존경합니다!”
홍진만은 펄쩍 뛰며 기뻐했다.
그리고 이렇게 얼굴보고 있으면서 흘러가는 시간조차 아까운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벌컥!
홍진만이 문을 열자 그 앞에는 정민수가 서 있었다.
홍진만은 정민수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정 선생. 그럼 수고해. 내일 보자고.”
흥겨운 발걸음으로 지나치려던 그때 정민수가 차트를 들며 불렀다.
“홍 선생, 잠깐만.”
“왜?”
“오후에 입원한 환자 있잖아.”
정민수가 운을 떼자 홍진만의 얼굴에 불안감이 가득 떠올랐다.
“내일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지?”
“물론. 그러니까…….”
정민수가 빠르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환자에 대한 이야기다. 무시하고 오프를 나갈 수 없는 상황에 홍진만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아윽! 젠장.”
짜증으로 가득한 얼굴이지만 홍진만은 정민수와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태수가 작은 실소를 머금었다.
둘이 해야 할 이야기기에 태수가 더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이내 돌아선 태수가 자리에 앉으려할 때였다.
에에엥!
아스라이 구급차 소리가 들려왔다.
전문의들이 막 퇴근한 시간이라 응급실로 가는 소리가 분명했다.
그런데 그 소리가 한 번만 들려오지 않았다.
외과는 동성종합병원에 배치된 건물 중에 앞쪽에 위치해 있었고 층수도 낮다.
주변이 적막하면 자그맣게나마 구급차 소리가 들려오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는 건 태수가 알기로는 처음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띠리릭.
휴대폰이 울려 바라보니 박완용 과장의 전화였다.
태수의 예감이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을 자꾸만 쏘아냈다.
잠시 눈을 좌우로 굴리며 의아함을 들어낸 태수는 일단 통화부터 연결시켰다.
“전화 받았습니다.”
“사, 사고야.”
박완용 과장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평소에도 다급한 환자가 왔을 때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떨림이다.
막연한 불안감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다.
그러나 태수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무슨 사고 말씀이십니까?”
“강변공원에서 대형 하수구가 무너져서 엄청 많이 다친 모양이야.”
“그게 왜 무너……. 아!”
태수는 순간 원인으로 추정되는 일이 퍼뜩 떠올랐다.
대규모 힙합 콘서트가 벌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행사를 보기 위해서 전국에서 인원이 몰려 왔을 일이다.
그들이 모두 강변공원에 올라가자 대형 하수구가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모양이다.
에에엥!
그 사이에도 희미하게 들려오는 구급차 소리.
한두 명 다친 상황이 아니다.
태수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물었다.
“인명 피해 규모는 대략 어떻게 됩니까?”
“나도 모르겠어. 119구급대에서 우리 쪽으로 계속 보내겠다는 통보만 들어왔다고. 중환자가 많아 멀리 못 간데.”
“알겠습니다. 바로 내려가죠.”
태수는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주변을 둘러봤다.
자그마한 통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레지던트들은 조금 풀어진 모습으로 각자 공부할 걸 준비하는 모습이다.
문 앞에는 아직도 정민수와 홍진만이 이야기 중이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태수는 회의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쾅!
그 소리에 마음 놓고 있던 레지던트들이 깜짝 놀랐다.
“헉!”
“뭐, 뭐야?”
자연스레 태수에게 시선이 몰렸다.
태수는 그들의 일일이 둘러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ICU(중환자실)에 누가 있지?”
태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욱 침착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에 레지던트들은 긴장했지만 그 중 송민규는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대답했다.
“안성훈하고 김명철이 오늘 당직입니다.”
“이석현, 강선호.”
태수의 호명에 1년차 레지던트인 이석현과 강선호가 빠르게 대답했다.
“네!”
“이 선생은 ICU 교대해 주고 두 선생 모두 응급실로 내려 보내. 그리고 강 선생은 당직 킵해.”
갑작스러운 근무 교대에 이석현과 강선호가 멍한 표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태수의 말이었다.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몸부터 움직이는 게 이미 습관처럼 배어 있다.
“알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이석현은 ICU로 냅다 달렸다.
그런 반면 강선호는 대답은 했지만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궁금증을 가득 보였다.
그 사이 레지던트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한 번도 태수가 이런 적이 없던 터였다.
태수는 나머지 레지던트들에게 말했다.
“모두 응급실로 내려간다. 인턴들도 불러.”
그 말을 마친 태수는 곧바로 뒤돌아 의국 문으로 걸어갔다.
길을 막고 서 있던 정민수와 홍진만이 얼른 비켜섰다.
그때 태수가 홍진만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가볍게 얹으며 말했다.
“옷 갈아입어. 오늘 공연 취소란다.”
“갑, 갑자기 왜요?”
“내려오면 알아.”
툭툭.
태수는 홍진만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의국을 나섰다.
태수가 나간 직후였지만 레지던트들은 아직까지 멍한 상태였다.
침착하다고 소문난 송민규 또한 지금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한 사람.
정민수는 달랐다.
방금 지나간 태수의 눈빛에서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알아챘다.
카슈미르에서 몇 번이고 경험했던 눈빛.
그때마다 환자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 들어왔다. 정민수의 여유롭던 표정이 빠르게 굳어져 갔다.
헌데 다른 레지던트들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상황이다.
멍한 레지던트들을 일깨워 줄 말은 이거뿐이었다.
“비상! 빨리빨리 움직여!”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정민수의 목소리에 다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비상?
송민규가 바로 물었다.
“비상이라니?”
“일단 출발부터 하세요!”
정민수는 그 말과 동시에 들고 차트를 강선호에게 떠넘기고는 재빨리 의국을 나섰다.
태수에 이어 정민수까지.
그제야 레지던트들은 뭔가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걸 직감했다.
송민규가 얼른 레지던트들을 독촉했다.
“움직여! 넋 놓고 있지 말고 움직이라고!”
“갑, 갑니다!”
“강선호, 인턴 당직실에 연락해서 인턴들 죄다 내려오라고 해. 가자!”
순식간에 송민규를 따라 레지던트들이 발 빠르게 의국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홍진만은 울상이 되어 당직으로 지명된 강선호에게 물었다.
“나도 옷 갈아입어야 되겠지?”
“돌아가는 상황이 그런 거 같습니다.”
“아, 젠장. 젠장. 젠장!”
벼르고 벼르던 시간이 날아가자 홍진만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도 이미 스냅백과 목걸이를 신경질적으로 벗어던지고 가운으로 갈아입은 후 응급실을 향해 뛰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의국을 나선 태수는 열려 있던 응급실 뒷문을 제일 빠르게 통과했다.
태수는 순간 그 자리에 멈칫했다.
환자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쪽으로 옮겨!”
“저쪽에 자리 비었다니까요!”
“이 사람부터 봐 줘요!”
구급대원들이 스트레쳐카를 부리나케 끌며 들어오는 모습들이다.
그런데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응급의학과는 더욱 난리였다.
“과장님. 저쪽에 자리가 부족합니다.”
“반대쪽에 침상 마련하고 빨리빨리 뉘여!”
“알겠습니다.”
응급의학과 레지던트가 부리나케 멀어져 갔다.
박완용 과장은 불안한 눈빛으로 밀려드는 환자들을 바라봤다.
“어쩌라고.”
그 또한 이런 대형 사고는 처음인 모양이다.
몰려오는 환자의 모습에도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태수는 우선 환자들을 지나 박완용 과장에게로 향했다.
“과장님.”
“이 사람아, 왜 이제 와?”
반가움보다 질책이 먼저였다.
얼굴은 급작스럽게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잔뜩 일그러져 있고, 언제나 단정한 넥타이도 길게 늘어진 모습이다.
밀려드는 환자도 문제지만 자신의 불안함과 싸우고 있는 박완용 과장 모습이 애처로운 정도였다.
동성종합병원 아니, 동성의료원 시절까지 통틀어 이렇게 응급실에 환자들이 밀려든 경우가 없었다.
처음 겪는 일이기에 박완용 과장도 갈피를 못 잡은 상태였다.
한편 태수는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냉정할 정도로 차분한 시선으로 박완용 과장의 어깨너머로 몰려드는 환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태수가 물었다.
“현재까지 몇 명 왔습니까?”
“내가 지금 숫자 셀 정신이 있어 보여?”
“…….”
“경상자들이야 어찌저찌 처치하고 있는데 중상자들은 힘들어. 경상자만 돌보고 있는데도 우리 쪽 레지던트들은 지금 완전히 멘붕 상태라고.”
박완용 과장이 신세 한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