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103
02106 2106화
그런 모습에 로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인내하며 살아오지 않았는지 불쾌함이 바로 얼굴에 떠올랐다.
“이 새끼가 제이하고 에디 때문에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죽고 싶지?”
“죽이든가.”
“이젠 진짜 못 참겠다. 그래, 아주 끝장을…….”
로벤이 허리춤에 꽂아 둔 권총 손잡이를 거칠게 잡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턱.
그의 손을 제지하는 손길이 있었다.
바로 제이였다.
“그만. 알버트! 너도 그만해.”
“…….”
로벤은 제이의 만류에 권총을 잡은 손에 힘을 뺐다.
그러나 알버트라 불린 호리호리한 모습의 흑인 남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인상을 버럭 쓰더니 태수가 아닌 제이를 노려봤다.
“제이, 네가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른 거야?”
“…….”
“이야, 내가 그동안 만만해 보였나 봐. 아니라면 네가 나한테 소리를 지른 이유가 타당해야 할 거야.”
알버트가 스산하게 협박했다.
방금까지 웃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 하나로도 알버트가 이 할렘가에서 썩 유쾌한 일을 하는 걸로 보이지 않았다.
‘저것도 깡패네.’
첫인상이 꼭 맞아떨어지자 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였다.
그런데 알버트가 보통내기가 아닌 듯 단순한 윽박지름에도 제이가 몸을 가늘게 떨었다.
태수는 그 변화를 심드렁한 눈빛과 달리 주시하고 있었다.
제이는 몸이 떨릴 정도로 긴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뒤로 빼지 않았다.
스윽.
태수를 슬쩍 가리며 자신을 내보였다.
그리고 알버트를 애써 마주보며 강단 있게 대답했다.
“닥터 최는 내 손님이야.”
손님?
태수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격상했네.’
아픈 아들을 위해 쥐어짜낸 용기일 터였다.
태수는 좋게 생각했지만 알버트는 아닌 모양이었다.
“손님? 이쪽은 납치라는데. 그리고 내가 전에 말했던 거 같은데. 자꾸 눈에 거슬리니까 조심하라고.”
“…….”
“비켜. 너 말고 닥터 최와 할 말이 있으니까.”
알버트란 남자가 강하게 으르렁거리자 제이의 얼굴에 더욱 강한 긴장감이 떠올랐다.
“안 돼.”
“이 자식이! 너 내가 누군지 몰라?”
“그래도 안 돼.”
“너 진짜…….”
“안 돼. 안 된다고.”
제이는 끝까지 태수를 보호하며 비켜서지 않았다.
태수의 눈에는 정작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제이로 보였다.
나설까?
그런 생각도 했지만 태수는 손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바로 뒤에서 움직임이 느껴진 탓이다.
그 느낌을 받음과 동시였다.
턱.
덩치 좋은 로벤이 태수와 제이 앞을 가로막고 알버트를 향해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버트, 너나 비켜.”
“로벤.”
“그리고 너도 지금 내 눈에 거슬려.”
“제이가 나한테 소리 지르는 거 봤잖아.”
“그래서?”
로벤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알버트가 움찔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다시는 제이한테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알았다니까.”
살기등등하던 알버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기어들어 갔다.
로벤이 그만큼 할렘가에서 무서운 존재란 의미였다.
태수는 그런 건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너무도 어이없었다.
마치 먹이사슬과 같았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고.
또 강자는 친한 약자를 보호해 주고.
겉모습만 바깥세상과 같을 뿐, 속은 역시 상상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태수가 계속 방관하며 관찰하는 사이였다.
로벤이 알버트에게 나지막이 경고했다.
“놀러 가는 거면 계속 가던 길 가.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아, 알았어. 갈게.”
“제이한테 사과는 하고 가야지.”
로벤의 말에 멈칫한 알버트가 눈치를 보며 제이에게 사과했다.
“미안.”
“아니야. 내가 미안해. 내가 괜히 소리쳐서.”
“……좌우간 미안하다고. 그럼 먼저 갈게.”
알버트는 그렇게 대충 수습하며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다시 세 사람이 남았다.
제이는 괜히 죄인이 된 듯한 표정으로 로벤에게 사과했다.
“괜히 나 때문에.”
“됐어. 내가 잘 해결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마.”
“…….”
“에디 보러 가야지. 가자고.”
이번에는 로벤이 한발 앞서 걸어갔다.
제이가 힐끔 쳐다보자 시선을 마주한 태수는 어깨를 들썩이며 로벤의 뒤를 따랐다.
‘복잡한 동네네.’
같은 할렘가였지만 겉과 속이 너무도 달랐다.
태수의 감상은 그뿐이었다.
서로를 향한 이해관계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후로도 걸어가는 동안 몇 명이 더 로벤과 제이에게 인사했다.
까칠한 알버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좋게 좋게 인사했다.
그러면서 태수에 대해 슬쩍 묻기도 했다.
의사란 대답에 눈빛부터 달라지는 게 보였다.
할렘가에서 의사를 찾기 힘든 탓이다.
무면허 의사도 있지만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전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태수를 쳐다보긴 했지만 딱히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들을 지나치고, 또 건물을 지나쳤다.
그러고 나서야 태수는 허름한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제이가 슬쩍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깁니다.”
“…….”
태수는 대답 없이 크게 둘러봤다.
5층 높이에 곳곳이 페인트가 벗겨져 있고, 콘크리트에는 금이 쩍쩍 가 있었다.
지어진 지 30년은 충분히 넘은 듯한 모습이다.
거기다 자세히 보면 총알 자국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창문이 깨져 테이프로 대충 보수해 놓은 집도 많았다.
오면서 본 거지만 할렘가의 집들은 대부분 이렇게 오래됐다.
이런 살벌한 동네에 어떤 기업이 투자할까?
관광객이 오가는 할렘가 초입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는 일부러 찾아오지 않을 듯싶었다.
태수가 좀 더 자세히 둘러보던 중이었다.
툭.
뒤에서 미는 느낌과 함께 어느새 다시 뒤에서 쫓아오던 로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경 왔어? 빨리 들어가.”
“…….”
태수는 힐끔 쳐다봤지만 대꾸하지 않고 아파트로 걸어갔다.
그냥 상대하기 싫은 거다.
그걸 로벤도 느꼈는지 태수의 뒷모습에 대고 살벌한 눈빛을 뿌렸다.
다시 제이의 안내를 받은 태수는 3층으로 올라왔다. 복도식 아파트라 몇몇 집을 거쳐 어느 한 집에 도착했다.
“잠시…… 들어가시죠.”
문을 연 제이가 태수에게 정중하게 손짓했다.
태수는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방 2개에 화장실 하나, 그리고 자그마한 거실이 있는 구조였다.
태수도 매년 미국에 왔기에 대충 감이라는 게 있었다.
이런 연식의 아파트에 이런 구조라면 볼티모어 시내 한복판에 있다고 해도 월세가 비싸지 않을 터였다.
하물며 이런 음산한 할렘가 깊은 곳이라면 오죽할까.
태수는 제이의 생활수준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들을 병원에 데려가지 못한 이유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에디, 에디.”
제이가 다른 방으로 향하며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태수는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갔다.
로벤은?
풀썩.
어느새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 소파에 자리했다.
익숙한 모습을 보니 집에 자주 오는 모양이었다.
로벤을 뒤로한 태수는 곧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책상과 침대, 그리고 옷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걸려 있었다.
그리고 침대에는 흑인 아이가 누워 있었다.
그 아이가 에디였다.
제이를 닮아서 그런지 볼살이 꽤나 통통했다.
귀엽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태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에디의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흐으, 흐으…….”
숨소리가 낮고 빨랐으며 괴로웠는지 이불이 거칠게 구겨져 있었다.
무엇보다 태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에디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가느다란 핏자국이었다.
호흡에 문제가 없는 걸 보니 토혈이었다.
토해 낸 피의 양도 적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다행이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태수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져 갔다.
그사이 제이도 에디의 볼을 타고 흘러내린 핏자국을 발견했다.
“이, 이게 뭐야? 오, 에디! 에디…… 정신 차려 봐. 나 보여?”
“데…… 데디.”
“그래. 아빠야. 아빠가 지금…….”
제이가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휙!
태수가 재빨리 다가왔다. 자세를 낮춤과 동시에 눈으로 에디를 샅샅이 훑으며 제이에게 말했다.
“제이, 따뜻한 물수건 좀. 페트병에 물도 떠 오고.”
“괘…… 괜찮은 거죠?”
그의 물음과 동시였다.
휙!
거칠게 고개를 돌린 태수가 에디를 강하게 바라보며 최대한 자그맣게 다그쳤다.
“빨리.”
“…….”
“이대로 시간만 허비할 건가?”
“……바로 가져올게요.”
긴장하던 제이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방 밖으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로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무슨 일이야?”
“에디가…….”
제이가 설명하는 목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태수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픈 아이를 마주한 이 순간부터 그 외의 일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인질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부터는 의사다.
환자는 아프고, 또 어리다.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못할 나이였다.
그 작은 몸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가슴부터 아파 올 터였다.
태수는 다른 누구보다 그 아픔을 더 강하게 느꼈다.
할렘가에 들어온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제이의 부정에 이끌린 것도 사실이지만, 아이가 아프단 소리에 돌아설 수 없었다.
이렇게 직접 찾아와 보니 이유야 어찌 됐건 잘했단 생각부터 들었다.
문제는 아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단 거였다.
두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태수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아무것도 없어도 두 손이 있었다.
또 눈과 귀, 코 등 자신의 모든 감각이 바로 의료 도구를 대신할 수 있었다.
일단 바이탈부터 확인해야 했다.
혈압을 눈대중으로 파악할 재주는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맥박과 체온 정도는 확인이 가능했다.
태수는 바로 두 손가락을 뻗어 에디의 경동맥을 가볍게 짚었다. 맥박과 체온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툭툭.
맥박의 강도와 1분간 뛰는 횟수를 속으로 가늠했다.
몸은 약간 따뜻한 정도.
미열이 있는 걸 보니 이 작은 몸으로도 원인 모를 병을 이겨 내려 싸우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새 태수의 두 눈은 에디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감길 듯한 눈꺼풀을 힘겹게 올리고 있었다.
그 가물가물한 눈부터 마주했다.
첫 느낌이 맑았다.
할렘가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이 보였다.
태수가 참 좋아하는 눈이었다.
그래서 환하게 미소 지으며 알고 있는 걸 일부러 물었다.
“이름이 뭐지?”
“에…… 디요.”
“혹시 내가 누군지 알아?”
“아니…… 요.”
에디는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로, 또 메말라 꺼끌꺼끌하게 일어난 입술로 대답했다.
무엇보다 태수를 경계하지 않았다.
제이와 함께 왔단 걸 알고 있단 의미였다.
아들에게 이렇게 신뢰받는 아버지라면 제이도 역시 태수의 추측대로 나쁜 삶을 살지 않았을 거라 추측했다.
그런 감상은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태수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에디의 의식 레벨을 확인했다.
“난 아빠 친구야. 의사고, 이름은 최태수. 내 이름이 뭐라고 했지?”
“최…… 어려워요.”
“그럼 이렇게 불러 줄래? 닥터 최.”
“닥터…… 최.”
에디가 힘겹지만 명확하게 따라 하자 태수가 미소 지었다.
“그래, 잘했어. 그동안 많이 아팠을 텐데 잘 견뎌 냈고.”
“데디…… 한테 짜증…… 많이…….”
“아프면 그럴 수 있어. 그런데 진짜 아빠가 싫어서 짜증 낸 건 아니잖아.”
“네……. 사랑하는…… 아빠예요.”
에디는 제이에 대해 말하며 애써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비록 힘겹고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 왔지만 눈빛과 목소리로 진심을 가득 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