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480
02483 2483화
그 시간이 조금 더 계속됐다.
태수는 여전히 눈을 마주하려 했고, 베르난도는 피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태수가 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좀 급했나 보다.”
그 말과 함께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손이 자유로워진 순간 베르난도는 재빨리 부엌으로 도망갔다. 낡은 식탁 의자 뒤에 몸을 감춘 채 이자벨이 누워 있는 방을 주시했다.
그 외에는 한 번씩 태수와 팀원들을 힐끔거리는 게 전부였다.
태수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날 때 정민수가 다가와 말했다.
“미안함이 크겠지. 두려움도 클 거고.”
“총 든 강도도 만나 봤는데 소매치기가 대수야?”
“그건 우리 입장이고. 쟤는 이 상황이 얼마나 간 떨리겠어.”
“일단 동주가 병원 전화번호를 모두 알아볼 때까지는 이렇게 대치하고 있어야겠네.”
“아무래도.”
정민수가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태수도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지켜만 봤다.
집 안이기에 언제든지 충분히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강압적으로 다가가지 않는 건 궁지에 몰린 베르난도가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기다리던 김동주가 다가와 자그마한 수첩을 내밀었다.
“형님, 여기 병원 응급실 전화번호입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한데 베르난도 좀 달래 줄 수 있을까? 전혀 위협하거나 그럴 생각 없으니까 얘기 좀 하고 싶다고 의향도 전해 주고.”
“그럼요.”
“고맙다. 얼굴 한 번 본 형이 부탁만 하네.”
“나중에 한국에서 다 돌려받을 겁니다.”
김동주는 많이 편해졌는지 농담을 하며 멀어져 갔다.
태수가 지켜보는 사이 정민수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저 녀석도 은근히 넉살 좋네.”
“타지 생활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지. 그보다, 자.”
“이건 왜?”
정민수가 받아 든 수첩을 들고 의아하게 바라보자 태수가 말했다.
“각자 전화해서 응급실에 데스모프레신, 동결침전제제 있는지 확인하고, 또 VWD 검사도 가능한지 물어보라고.”
“꼭 이런 건 우리 시키더라. 팀장이라고 너무 유세 떠는 거 아니야?”
“그럼 네가 베르난도하고 심도 깊게 대화할래? 나도 내가 전화하는 게 속 편해.”
“……난 패스. 사람 마음 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뻔히 아니까.”
정민수의 대답에 태수가 살짝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난?”
“팀장 일이니까 팀장이 해야지. 우리 같은 평의사들이 이런 거 하는 거야. 응급실에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은 있을 거고. 시작해 볼까.”
정민수는 뻔뻔하게 말하며 슬쩍 태수와 거리를 벌렸다.
태수는 그 모습을 슬쩍 흘겨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여간 저 뺀질이.”
왜 박성민이 정민수를 뺀질이라고 하는지 요즘 들어 깊게 이해가 되었다.
그런 장난 같은 시간은 잠깐이었다.
팀원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휴대폰을 들고 각자 수첩에 적힌 병원 응급실에 전화하고 있었다.
“헬로, 영어할 줄……. 아, 다행입니다. 실은 다름이 아니옵고…….”
“영어 몰라요? 헤이, 스피크 잉글리시……. 노, 라고 할 게 아니라 할 줄 아는 놈을 바꾸라고.”
유병태는 통화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국어로 은근슬쩍 짜증도 곁들였다.
그 외에는 그래도 순탄하게 통화가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그때 김동주가 베르난도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같이 다가왔다.
베르난도는 여전히 쭈뼛거렸지만, 그래도 김동주가 유일하게 대화가 통해서 그런지 조금 덜 어려워했다.
태수는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기에 어느 정도 베르난도의 마음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기다렸다.
곧 두 사람이 태수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김동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데려왔습니다.”
“어때?”
“무섭고 겁나는 거죠.”
“그런 배짱으로 내 주머니를 노려서 여기에 데려오려고 했어? 아, 기왕이면 순화해서 말해 줘.”
태수가 덧붙여 통역을 부탁했다.
김동주가 바로 이탈리아어로 말했고, 베르난도는 어깨를 좁히고 손을 꼼지락거리며 뭐라고 답했다.
이탈리아어로 말한 답이 김동주의 입에서 다시 한국어로 들려왔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동주야, 그냥 베르난도랑 나랑 대화하듯이 통역해 줄 수 있을까? 그게 모두가 편할 거 같아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동주는 눈치가 좀 있는지 바로 이해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태수는 베르난도를 바라봤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자세를 낮춰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겁내지 않아도 돼.”
“그래도 무서워요.”
베르난도의 대답을 김동주가 실시간으로 통역해 줬다.
그러나 태수는 김동주가 아닌 베르난도만 바라보고 대화한다는 느낌으로 다음 말을 건넸다.
“네가 우리를 데리고 왔잖아. 이렇게 무서운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
“이자벨이……. 이자벨이 아프니까요.”
“언제부터 아프다는 걸 알았는데?”
태수가 묻자 베르난도의 대답을 김동주가 전해 줬다.
“1년 정도 된 거 같아요.”
“어떻게 아프다는 걸 알았지?”
“식탁에 허벅지를 부딪쳐서 멍이 들었는데 한참 지나도 낫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전에는?”
태수가 이렇게 묻는 건 VWD 발병 원인을 찾기 위함이었다.
베르난도는 그런 것까진 모르겠는지 태수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급급했다.
“2년 전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이자벨이 좀 이상했어요.”
“어떤 식으로?”
“잠도 잘 못 자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고……. 뭐?”
통역하던 김동주가 크게 놀라자 태수의 눈빛이 더욱 차분하게 변했다.
“뭐라고 하는데?”
“아무거나 주워 먹었답니다. 말 그대로 아무거나요.”
“동주야, 동요하지 말고 그대로만 전해 주라.”
태수가 나지막이 설득하자 김동주는 놀란 표정을 얼른 지웠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계속 물을게. 지금도 이자벨이 계속 그런 행동을 해?”
“아니요. 반년 정도 지나서는 다시 괜찮아졌어요.”
“음, 이런 질문은 미안한데, 알아 둬야 치료에 도움이 돼서 묻는 거야. 너희를 돌봐 줄 사람이 없었어?”
태수의 질문이 조심스러웠다.
이런 질문은 상대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인 탓이다.
그런 예상이 맞는지 베르난도의 몸이 더욱 비비 꼬였다. 그래도 이탈리아어로 뭔가 말하는 걸 보면 대답은 해 주는 모양이었다.
김동주가 그 말을 바로 통역해 줬다.
“이모와 함께 살았어요. 그런데 이모부가 우리를 싫어했어요.”
“음, 그래서 집을 나왔어?”
“아니요. 그때까지는 학교를 다녔는데…… 어느 날 집에 오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베르난도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태수 또한 자신도 모르게 볼이 꿈틀거렸다.
이 아이들을 놔두고 이사를 갔단 말이다.
그 사실만으로 이모와 이모부가 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을지 충분히 상상이 갔다.
어쩌면 이자벨이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받은 충격으로 이상한 행동들을 많이 했을지도 모른다.
그게 그들에겐 무섭게 느껴졌을 수도 있고, 그게 떠난 이유라고 추측도 됐다.
하지만 그런 아이를 방치한 것도 학대였다.
참 모진 게 사람이라더니.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데도 확실할 건 가족과 어른으로서 하면 안 될 일을 그들은 했다는 사실이다.
태수는 질문한 자신이 더 미안해졌다.
남의 사정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태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랬구나. 그럼 그 이후에는 어떻게 살았지?”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어요.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해도 너무 어려서 안 된다고, 부모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소매치기를 했어?”
태수는 자연스럽게 이어질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런데 베르난도는 예상과 달리 고개를 저었다.
“소매치기한 적 없어요.”
“……그럼 내 주머니를 노린 건?”
“배웠어요. 아는 형이 관광객들 지갑을 뺏으면 돈 많이 번다고 해서요. 그래서 배웠는데…… 소매치기한 적은 없어요.”
그 소리에 태수가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그럼 생활은 어떻게 하고, 또 거기에 왜 있었던 거야?”
“심부름 가는 길이었어요. 세차하고, 대신 장 봐 주고, 구두 닦고, 심부름 값 받아서 방세 내고, 빵 사고 그랬어요.”
“…….”
“진짜 소매치기한 적 없어요. 나쁜 짓 해서 잡히면 이자벨 혼자 남잖아요.”
대답하는 베르난도의 눈가가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그건 통역해 주는 김동주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난도를 내려다보던 김동주가 갑자기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그리고 소매로 양쪽 눈을 찍으며 소리 죽여 한마디 했다.
“아…… 씨발.”
“…….”
태수는 그런 김동주를 탓하지 않았다.
같은 마음이었다.
심부름 값이라 봐야 푼돈일 터였다. 그걸 모아서 살아가려면 하루에 얼마나 많이 움직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소매치기가 훨씬 쉽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을지 모른다.
누가 봐도 유혹에 빠지기 쉬운 환경이었다. 그런데 베르난도가 선택한 건 당장의 풍요로움이 아닌 동생이었다.
그런 동생이 아프다는 걸 눈치챘을 때 마음이 어땠을까?
현재 벌이로 병원비는 턱도 없을 테니 막막했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동생을 의사에게 보이고 싶었을 거다.
‘대략 1년…….’
베르난도가 이자벨을 봐줄 의사를 찾아다녔을 시간이다.
얼마나 많은 방법을 동원해 봤을지 태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시기적으로 보면 그때쯤이 태수가 파리 세미나에서 연설했을 무렵이다.
베르난도는 그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했을 터다.
그리고 그토록 갈망하던 태수가 밀라노에 와서 명품 브랜드 패션쇼 참관을 했단 기사를 봤다.
베르난도 입장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나고 싶었을 게 분명했다.
태수는 이제야 여러 가지 퍼즐들이 딱 맞춰지는 걸 느꼈다.
파리의 세미나가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아벨라 수석 디자이너의 삶을 바꿔 놓았고, 이렇게 베르난도와 아벨라의 아픔을 치유할 근거가 됐다.
그러나.
“후우.”
태수는 난데없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부끄러웠다.
그때 파리 세미나에서 한 짧은 연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도 못했다.
그저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 놓는 시간이었고,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낮은 탄성들이 들려왔다.
“흐음.”
“푸우.”
“쯧, 후.”
태수가 그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팀원들 모두 시선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했고, 바닥이나 어두워진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그렇게 제각각이었지만 공통적으로는 표정이 어두웠다. 김동주가 전해 준 베르난도의 사정을 모두 들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거실 분위기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반면 태수는 얼른 정신부터 다잡았다.
같이 휩쓸리면 안 된다.
완벽하게 맞춰진 줄 알았던 퍼즐 중에 조각 하나가 빠졌다.
태수는 다시 베르난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이자벨의 이상한 행동이 반년 정도 지속됐다고 했지?”
“네, 그랬어요.”
“그럼 어떻게 멈췄는지 알고 있어?”
“그건 몰라요. 그냥 이상한 행동을 할 때마다 안아 줬어요. 잘 때도 꼭 안아 줬어요. 그냥 그렇게 했어요.”
“…….”
태수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베르난도의 행동은 어쩌면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정신적인 문제에 가장 진심으로 다가가는 방법이었다.
상처를 억지로 꺼내고 치료하려 애쓰는 게 아니라 그 자체를 감싸 주는 거다.
그게 이자벨이 입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태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VWD의 원인까지도 찾아냈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한 육체적 변화.”
“아마도.”
뒤에서 박성민이 동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난도의 얘기를 쭉 들어 보면 그게 가장 확실하게 접근할 수 있는 원인이었다.
이자벨은 부모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VWD가 발병했다. 그 확률은 정말 재수 없게 걸렸단 표현이 옳을 정도로 극히 낮았다.
어느새 거실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태수는 물론 팀원들도 같은 추측을 했고, 그게 마음을 묵직하게 내리누르고 있는 탓이다.
그때 이선정 간호사가 태수 옆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