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554
02557 2557화
그때였다.
삑, 삑.
ECG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 또한 안정적이었다.
분명 처음부터 지금껏 쉬지 않고 울리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수술대에 가득한 출혈에 놀란 태수는 이제야 그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흉부 쪽에 서 있던 박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후우. 좀 쉬었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태수가 멈칫했다.
그의 마스크는 물론 헤어캡 곳곳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수술 가운은 구태여 말할 것도 없었다.
다른 인물들은?
태수의 시선이 빠르게 모두를 둘러봤다. 멀리서도 확인했지만 핏자국에서 자유로운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다들 지친 얼굴이었다.
“후우, 후우우.”
“흠, 푸우.”
숨을 고르는 소리만 가득했다.
태수가 들어온 걸 알면서도 쳐다볼 생각도 못했다.
무엇보다 황석찬 회장의 수술 가운에도 피가 곳곳에 튀어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태수는 다시 박성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후우우! 죽는 줄 알았다. 환자가 아니라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죽을 고비를 넘겼다니까.”
“…….”
“조금 전에 겨우 바이탈 잡고 이제 안정 찾았어.”
박성민의 말이 너무 두루뭉술했다.
그런 말로는 전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답답해진 태수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 뒤따라 도착한 정민수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선배, 좀 알아듣게 말씀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 자식이 어디서 눈 똑바로 뜨고……. 이걸 진짜 확! 에그그.”
울컥해 손을 들어 올리려던 박성민이 지레 포기했다. 팔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을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놀라운 변화였다.
자리를 비운 건 2시간이었다. 이 길고 긴 수술에서 2시간은 잠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수술에 이골이 난 베테랑들이 즐비했다.
그들을 이렇게까지 단시간에 녹초로 만들다니, 도대체 어느 정도로 심각했단 의미일까?
태수가 다시 입을 열어 물으려 할 때였다.
스윽. 턱.
옆으로 다가선 누군가 기운 없는 몸짓으로 수술대를 짚었다.
태수가 고개를 돌려 보자 황석찬 회장의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궁금증을 참지못한 태수가 기어코 입을 열었다.
“회장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흐음.”
“회장님.”
태수가 재촉해 부른 순간이었다.
찌릿!
황석찬 회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째려보며 한마디 했다.
“네놈 다그침에 내가 먼저 죽겠다. 한숨 돌리면 어련히 알아서 말할까.”
“으음.”
“거 멀뚱히 서 있지 말고 가서 준비나 하고 와. 후우.”
황석찬 회장은 타박을 한 후 피로 물든 마스크가 부풀 정도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옆에 있는 석재봉 병원장도, 박남일 외과장, 하석준 팀장도 마찬가지였다.
도성민과 유병태는 수술대를 짚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에 돌아보니 간호사들이 선반에 기대어 숨 고르기에 바빴다.
ECG에 집중하는 여성현의 가슴이 계속 들썩였고, IV 담당인 김아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새로 온 인공심폐기사는 모든 걸 불태운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둘러본 태수는 할 말이 없었다.
누가 이 모습을 수술실이라고 말할까.
전쟁이란 악마가 휩쓸고 간 마을의 모습과 흡사할 정도였다.
그때 정민수가 다가왔다.
“김 선생이 환자는 괜찮으니까 준비부터 하래.”
“무슨 일인지 들었어?”
“아니. 그걸 말할 정신도 없어 보이더라. 조금만 쉬게 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더라고.”
“진짜 궁금해 미치겠는데…….”
태수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리 궁금하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붙들고 물어볼 순 없었다.
무엇보다 환자에게 문제없음이 다행이었다.
재촉할 일이 아니기에 태수는 수술실 문 옆에 있던 선반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태수를 비롯한 휴식을 마친 팀원들이 수술 준비를 마치고 수술대로 다가갔다.
수술대와 그 주변은 아직 핏자국이 선명했다.
참담할 정도의 모습을 다시 눈에 담으며 도착한 순간이었다.
이제야 눈빛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 박성민이 대뜸 말을 꺼냈다.
“머리가 안 돌아가니까 의학 용어 배제하고 말할게. 네가 알아서 의학 용어랑 짬뽕을 하든 짜장면을 하든 마음대로 하고.”
“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흐음, 너 나가고 20여 분 정도 지나서였어. 갑자기 다시 부정맥이 시작됐고……. 도저히 안 되겠다. 도끼야.”
박성민이 토스하자 도성민이 바로 이어서 말했다.
“호흡이 뚝 떨어지면서 양쪽 폐가 첫 번째 원인으로 지목됐어.”
“폐? 거기는…….”
“그래. 너하고 민수가 양쪽 폐혈관들 모두 2개씩 연결해 놨지. 지금도 그 상태 그대로고.”
“…….”
태수는 미간을 좁히며 듣고만 있었다.
반면 도성민은 말하는 것조차 힘든지 쉰 소리를 냈다.
“폐혈관이 아니라 폐 속이 문제였어.”
“혈전?”
“그래. 자잘한 혈전들이 폐 속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도성민은 지친 자신을 달래며 설명을 이어 갔다
들을수록 태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양쪽 폐의 안쪽에 위치한 혈관들이 일부 협착하여 발생한 응급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연쇄적인 문제들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일전에 태수가 응급처치한 경정맥이 결국 다시 부풀어서 파열되고, 폐부종의 심화와 협착이 겹쳐 혈흉이 발생했단 내용까지 짧고 간결하게 말했다.
그리고 도성민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희들이 혈관을 추가하지 않았으면…….”
“이상한 소리 말고.”
“진짜야. 부정맥 수준이 아니라 심정지 직전까지 갔었어. 간신히, 정말 간신히 안 멈췄고. 그건 보조 혈관이 시간을 벌어줘서였다고.”
“흐음.”
듣는 것만으로 아찔함을 삼켜야 했다.
앞서 심장을 대수술한 김선미는 심정지가 오면 회생하기 어려웠다.
그건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가만히 듣던 박성민이 덧붙여 말했다.
“도끼 말이 맞아. 혈관들을 추가로 연결해 놓지 않았으면 심장 밖으로 밀려나오는 피를 폐가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 버렸을지도 몰라.”
“요행이었는데요.”
“때로는 요행이 정석보다 나은 법이니까.”
“그래서 응급처치 내용은요?”
태수가 핵심을 묻자 박성민이 미미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
“저기 밀어놓은 거 안 보이냐?”
“어디……. 아.”
태수는 바로 그 의료기계를 알아봤다.
PCI(경피적 관상동맥 중재술) 등에 사용되는 시술 기계였다. 초음파 모니터를 이용해 혈전을 뚫거나 혈관을 넓히는 용도로 사용한다.
그 시술 기계 곳곳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태수가 입을 열었다.
“풍선확장술을 활용하신 모양입니다.”
“그거 준비하는 사이에 경정맥이 목 안에서 터졌고. 그건 황 회장님이 바로 메스로 갈라서 피 빼내고 지혈까지 진행하셨어.”
“회장님이요?”
“그렇다니까. 거기다 얼마나 신속, 정확, 과격, 화끈하신지. 그때…….”
박성민이 이어서 말하려 할 때였다.
턱.
둘 사이에 황석찬 회장이 끼어들더니 박성민을 나무랐다.
“언제까지 떠들 건가?”
“제, 제가 지금 핵심을 딱 말하려고…….”
“뭐라?”
“……죄송합니다.”
박성민이 꼼짝 못하고 사과했다.
황석찬 회장은 더 나무라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반대로 돌려 태수를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경정맥 파열은 내가 수습했고, 그사이에 박 팀장이 좌우 폐를 풍선확장술로 혈관을 뚫었다.”
“네.”
“저기 도 선생은 덩치에 비해 소심해 내심 걱정했는데, 막상 응급 터지니까 불도저가 되더라.”
황석찬 회장의 애매한 칭찬이 들려왔다.
웃음이 절로 나올 내용이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태수는 표정을 감추며 말문을 열었다.
“저래뵈도 도 선생이 응급 상황에선 앞뒤 안 가립니다.”
“좌우간 도 선생이 혈흉과 폐부종까지 한 번에 제거했어. 맺혔던 피가 터져 나오면서 여기저기 튀어 꼴이 저렇게 더 스산해졌지만.”
“안 그래도 외적으로 살벌한데 지금은 꿈에 볼까 무서울 정도입니다.”
“친구인 네놈이 그런데 나는 오죽할까.”
황석찬 회장은 좀 더 딱딱한 분위기를 이완시키려는 말을 건넸다. 그만큼 당장 환자에게 문제가 없단 뜻과 같았다.
알지만 태수는 방심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흉부 사정은 이해했습니다만, 복부는 어떻게 된 겁니까?”
“…….”
스윽.
황석찬 회장은 대답 대신 턱짓했다.
그와 동시에 석재봉 병원장의 목소리가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절제 중에 간문맥이 터졌어.”
“위험하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혈관을 이으려고 했는데, 장시간 와파린 투여로 출혈이 멈추질 않더라고.”
“음.”
태수는 복부 주변에 가득한 혈흔의 원인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박남일 외과장이 이어서 말했다.
“결국 출혈 잡는 데에 모두가 매달려야 했지. 흉부와 복부가 거의 동시에 문제가 터진 상황이었고.”
“동시에요?”
“흉부 응급처치가 끝나기 전에 복부 문제가 터졌으니 동시라고 봐야지.”
“듣기만 해도 아찔하네요.”
태수가 몸서리를 치자 가만히 있던 하석준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아찔? 여기 쏟은 피가 우리 피야. 환자가 쏟는 걸 보는 우리 심정이 이 흩뿌려진 혈액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
“좌우간 그렇게 간문맥이 터지는 바람에 신장하고 비장까지 영향을 받았어. 호르몬 작용은 물론 소변 배출까지 완전히 정지 상태였다고.”
“어후.”
태수는 자신도 모르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왔다.
응급처치 도중 심정지 직전까지 몇 번을 오갔을까.
수술대에 선 의사들이 얼마나 고함치며 응급처치를 진행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심정지를 어떻게든 막으려 여성현과 김아름, 인공심폐기사는 미친 듯이 움직였을 터였다.
그게 2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태수는 겨우 2시간이란 생각부터 깡그리 지웠다.
초응급 상황에서 2시간은 하루 종일 수술하는 것보다 더 체력 소모가 심했다.
그걸 이겨 낸 이들이다.
지치는 게 당연했다.
태수는 문득 그들을 둘러봤다.
일순간 일선으로 돌아온 황석찬 회장부터, 원내에 유일무일하게 내, 외과의 기본 과정을 섭렵한 김아름까지.
교대할 땐 그들의 등장이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자 오판이었다.
이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없었으면?
지금 이렇게 가볍게 대화할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증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개인적인 욕심은 빠르게 거둬들였다. 이번 수술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촬영중이다.
나중에 조용히 확인해 보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태수는 머릿속 정리를 끝내고 석재봉 병원장에게 물었다.
“그럼 복부는 어디까지 진행된 겁니까?”
“정작 중요한 간암에 대해서는 별로 손을 쓰지 못한 상황이야.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이 이젠 급박해졌으니, 원.”
“그래도 환자가 살아 있잖습니까.”
“그건 당연한 거잖아.”
“정말 고생하셨고,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뒷일은 제가 진행하겠습니다.”
태수가 나서자 석재봉 병원장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래. 이런 애기 듣고 의욕이 올라오겠지. 그런데 간암이 그렇게 만만한 상태가 아니야.”
“저도 개복할 때 얼핏 봤습니다. 잠깐 수술도 했고요.”
“나도 아는데, 더 심해.”
“얼마나……. 아니, 제가 직접 보겠습니다. 정 선생.”
태수가 낮은 목소리로 정민수까지 찾았다.
기왕 살필 때 한 번에 함께 확인해서 이후 진행 시간을 줄일 목적이었다.
그때 유병태와 대화하고 있던 정민수가 바로 다가왔다.
“병원장님, 고생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하고 또 죄송합니다.”
“지금 그런 얘기 할 땐가.”
“그럼 나중에 다시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정민수가 밉지 않게 능청을 떨었다.
그건 일순간이었다.
대화를 마무리 짓는 순간 정민수의 표정이 날카롭게 변했다.
태수는?
이미 간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김혁권이 옆에서 수술 도구를 건네주고 또 자신도 같이 돕고 있었다.
푸석푸석한 간을 향한 태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걸 봤는지 정민수는 송현미 간호사가 내미는 수술 도구를 들며 물었다.
“어디까지 진행됐어?”
“많지 않아.”
“어디……. 이런.”
정민수는 태수가 확보해 놓은 간을 들여다보고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