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975
02979 2979화
희망병원에 불어 온 새로운 바람에 가장 환영하는 건 환자들이었다.
흘리는 한 마디도 귀 기울여 주는 친절한 의사.
사소한 아픔도 신경 써 주는 양질의 서비스.
꿈에서나 상상해 본 병원의 모습이다.
그런데 희망병원에선 그게 현실이 되었다.
환자와 보호자들은 문병객이나 지인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처음엔 다들 고개를 저었다.
“의사가 오늘 아침에도 20분 동안 같이 차 마시면서 얘기했다고? ……건강이 많이 안 좋아?”
“간호사가 얼마나 힘들고 바쁜데 같이 산책을 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렇게 소문 내 주면 병원비 할인되나?”
그렇듯 대다수가 믿지 못했다.
그런데 개중 한 명씩은 그런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우, 우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훑고 가네.”
“왜 문병 온 나까지 신경 써? 덕분에 고혈압 조심하란 소리는 고마운데…… 혹시 진료비 따로 달라는 거 아니야?”
“여기 한가해? 아니지. 한가할 리가 없는데…….”
너무 색다른 병원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잦아지며 희망병원에 문의 전화가 급증했다.
“폐질환 진단 받았는데 입원 됩니까?”
“아니, EMR도 보냈는데 입원이 안 된다니요.”
“도대체 얼마나 아파야 입원이 된다는 겁니까?”
참 이상한 항의 전화였다.
하지만 모두가 그 사실을 수긍하고 믿는 건 아니었다.
“희망병원이 그런 병원이면 진즉에 기사가 났어야지.”
“입소문? 그건 믿을 게 못 돼.”
“그래도 병원은 서울이 제대로야. 아무리 유명한 사람들 모아 놔도 지방은 지방이라고.”
한쪽 눈을 가린 이들도 의외로 많았다.
그 어떤 소식이 들려와도 의료진들의 하루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사실 몸이 고되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그 힘들다는 화이트엔젤에서 파견 나온 의사들도 고개를 내저을 업무 강도였다.
“우리는 그동안 천사의 은총 속에서 일했던 거야.”
뼈저린 자아성찰과 함께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런 말이 들려와도 희망병원 의료진들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환자와 보호자가 먼저 웃어 주고, 안부를 물어 준 탓이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차 드시러 오세요.”
“어제 잘 봐주셔서 편안하게 잤습니다.”
그게 바로 활력소였다.
진심 어린 한마디는 없던 힘도 솟구치게 했다. 그들이 보내 주는 작지만 진솔한 미소는 엄청난 중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미소가 또 보고 싶은 마음이 몸을 절로 움직이게 했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어느새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났다.
희망병원의 변화는 오늘도 진행 중이었다.
바쁜 일상이 시작되어야 할 아침 시간.
태수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턱.
문이 닫히지 않게 붙들고 서 있자 그 틈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걸어 나왔다.
가장 먼저 정한준과 이선정 간호사가 손을 붙들고 나왔다.
이어서 정이주와 송현미 간호사, 그다음으로 정다은, 정오현, 정여훈이 후배들과 짝을 맞춰 현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공우혁이 정세준을 안아들고 나왔다.
정세준의 얼굴은 한 달 사이 완전히 달라졌다. 뽀얗게 변한 피부에 홍조도 가볍게 떠올라 너무도 귀여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때 제가요, 형하고 누나한테…….”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얼굴에 가득한 장난기와 짓궂음이 딱 5살인 제 나이로 보였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정서웅이 정희주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스스로 걷고 있었다.
한 달이란 시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재활 치료에 전념한 성과였다.
그런데 그 당당한 걸음도 잠깐이었다.
우뚝.
돌연 멈춰선 정서웅이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이어서 주변을 크게 둘러봤다.
그사이 문을 닫은 태수가 옆으로 다가서서 물었다.
“새로우십니까?”
“네. 모든 게 새롭습니다.”
“병원에 너무 오래 계셨나 보네요.”
태수가 넉살 좋게 말했다.
그 순간 정서웅이 태수를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새로 태어나서 새로운 겁니다.”
“…….”
“최 팀장님, 박 팀장님, 그리고 모든 분들…… 여러분들이 저와 아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정서웅의 말 속에 감성이 가득했다.
태수는 어깨를 슬쩍 털어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어후, 너무 그러시니까 막 닭살 돋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거 안 통하네요.”
태수는 자신의 넉살 신공이 막히자 어정쩡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정서웅의 표정과 눈빛은 여전히 진지했다.
“누워 있는 동안 아이들과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요.”
“음.”
“아니, 아닙니다. 제가 아직 어리다고 외면했던 이야기를 이런 기회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던 거겠죠.”
정서웅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속에 자신에 대한 자책이 조금 담겨 있었다.
그걸 눈치챈 순간 이번엔 태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
“서로 아프기 싫었던 거죠. 또 대식구인 만큼 나보다는 아이들을, 또 동생들을 돌보는 게 더 중요했을 겁니다.”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정서웅이 인정하자 태수가 잔잔한 미소로 덧붙여 말했다.
“때로는 ‘나도 힘들어.’라는 말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가족이라 못하는 게 아니라, 가족이라서 할 수 있는 말들이 있잖습니까.”
“네. 그렇더라고요. 그동안 가족이라서 담아 뒀던 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번에 다 하셨죠?”
“전부 말하고, 또 들었습니다. 이렇게 편안해질 정도로요……. 그렇지, 희주야?”
정서웅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가볍게 정희주를 어르며 아빠의 행복한 미소를 보여 줬다.
그 감정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정희주가 해맑게 웃으며 밝은 옹알이를 했다.
“꺄하.”
그 소리를 들은 태수가 힐끗 눈짓하며 말했다.
“보십시오. 희주가 이렇게 밝게 웃는 걸요.”
“네. 전에는 이렇게 웃는 일이 드물었는데, 요즘은 곧잘 웃네요.”
“전 아기가 참 좋습니다. 아기는 숨길 줄도 모르고, 거짓말을 하지도 않으니까요. 특히 이렇게 웃는 모습은 환장하죠.”
태수의 뜬금없는 표현에 정서웅이 실소를 내뱉었다.
“풋! 흠흠, 죄송합니다.”
“아니요. 환장하는 게 사실이니까 웃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기를 좋아하시는 분이 왜 아직…….”
정서웅이 뭔가 말을 꺼내려 하자 태수가 얼른 막아섰다.
“제발요. 저 요즘 조용해서 아주 행복하거든요? 부디 제 행복을 깨지 말아 주십시오.”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얼른 주변 눈치까지 봤다.
정서웅은 태수의 과거에 대해 조금 들었는지 어설피 웃어 보였다.
“하하, 다 때가 있는 거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보다 갑자기 이런 말씀 죄송한데…… 어제 최종 결정 내리셨다고요.”
태수가 조심스럽게 묻자 정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로펌 제 담당 변호사랑 오랜 대화 끝에 결정 내렸습니다. 합의 없이 밀고 나가는 걸로요.”
“제시한 합의금을 다 합치면 상당하다고 하던데요.”
“사실 흔들렸죠. 그런데 회장님 덕분에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음, 그러셨군요.”
태수는 정확하게 몰랐지만 민감한 내용이라 대충 수긍했다.
그런데 정서웅이 오히려 하나씩 짚어서 말해 줬다.
“집도 구해 주시고, 직장도 잡아 주시고……. 참 염치도 없이 거부하지 못하고 덥석 받았지 뭡니까.”
“저희 회장님이 좀 화끈하십니다.”
“지금 당장은 합의금이 더 클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아이들이 절 어떻게 생각할까요.”
정서웅 말에 태수가 움찔했다.
“음.”
“자신들 때문에 자존심도 팔아 버린 아버지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
“그건 싫습니다. 제 자존심 세워 주시려 회장님이 더 신경 쓰신 것도 알고 있고요.”
정서웅이 계면쩍은 얼굴로 말하자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정당하게 세운 뜻은 지켜져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민사 판결까진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종결되면 여윳돈이 좀 생길 거라고도 하시더라고요.”
“그건 받아도 창피하지 않은 돈입니다.”
태수가 단언했으나 정서웅 얼굴은 영 밝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분에게 전 염치도 없이 받기만 하네요.”
“편하게 생각하세요.”
“죄송한 마음에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단 말씀도 드렸고요.”
정서웅이 내뱉는 씁쓸한 말에 태수가 미간을 좁혔다.
“큰 실수 하셨네요. 혹시 역정을 내진 않으시던가요?”
“아주 대노하셨죠. 아주아주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듣기만 해도 아찔하네요.”
“저는 오죽했겠습니까. 잔뜩 얼어 있는데 슬쩍 손을 잡아 주시며 그러시더군요.”
정서웅이 뜸을 들이자 태수가 바로 물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마음고생 많았다고요.”
“…….”
“그 고생 값이라고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정 갚아야겠다면 아이들이 잘 크는 모습으로 보답하라고도 하셨고요.”
“흐음.”
태수가 묵직한 탄성을 흘렸다.
그때 못다 한 말이 있는지 정서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성적이 SKY가 아닌, 행복이 SKY인 삶을 알려 주란 뜻 깊은 말씀도 들었고요.”
“그거 명언인데요?”
“전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는데, 역시 좀 다르시네요.”
정서웅의 묘한 얼굴로 바라보자 태수가 얼른 말을 돌렸다.
“그래서 그 뜻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네? 하하하.”
태수는 황당함도 잠시였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만 화기애애한 게 아니라 다른 의료진들과 아이들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현관이 북적북적한 느낌이 가득할 때였다.
부웅.
현관으로 정민수의 차가 다가왔다.
차종은 보건의 끝나자마자 구입한 벤이었다.
그 벤은 곧 모두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정민수가 차를 빙글 돌아서 다가오더니 정서웅에게 키를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이거…… 진짜 받아도 됩니까?”
“제가 드리는 거 아닙니다. 전 정확한 건 모릅니다. 아는 건 정서웅 씨 차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
“아무튼 이제 제 손은 떠난 겁니다.”
정민수가 재빨리 빈손을 들어 보였다.
그래도 정서웅의 얼굴엔 미안함이 가득했다.
보다 못한 태수가 나섰다.
“애들이랑 어딜 가려고 해도 인원이 많으니까 차는 필수입니다. 그리고 트럭은 너무 낡아서 폐차했잖습니까.”
“그건 그 카센터 사장님이 폐차하라고…….”
정서웅이 슬쩍 태수의 매형을 언급했다.
관계를 밝히지 않은 터라 태수는 얼른 그의 말을 막아 버렸다.
“그분이 한 말은 무조건 정답입니다. 대충 들어 보니 난리도 아니었던데요.”
“뭐, 좀 안 좋긴 했습니다.”
“그러니까요. 차는 안전제일입니다. 그러니까 잘 정비된 차가 중요한 거고요.”
“그야 뭐…….”
정서웅이 뭔가 더 말하려 했다.
그때 태수가 얼른 시간을 확인하는 척하며 정민수에게 눈짓했다.
“어? 정 선생, 우리 너무 오래 나와 있는 거 아니야?”
“그래도 배웅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지.”
“그렇긴 한데……. 아, 아닙니다. 흠흠.”
태수가 슬쩍 눈을 찡긋하자 정민수도 똑같이 했다.
이럴 때 어떻게 사인 한 번 주고 받지 않아도 죽이 척척 맞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가는 대화를 들은 정서웅은 아차 한 얼굴로 얼른 권했다.
“들어가십시오. 저희야 가면 되는데요.”
“그래도 나왔는데 배웅은 해야죠.”
“안 그러셔도 된다니까요.”
“여기서 이렇게 계속 저희 붙잡으시면 좀 곤란합니다.”
태수는 슬그머니 넉살을 얹었다.
하지만 정서웅도 그리 쉽게 수긍하진 않았다.
결국 몇 번 입씨름 끝에 승자가 결정됐다.
웃음 가득한 태수의 얼굴만으로도 누가 승리했는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