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5
00035 35화
태수는 그런 그에게 더욱 다소곳한 자세로 마주한 후 어시스던트 자리에 섰다.
일반적으로 어시스던트 자리는 환자를 기준으로 왼쪽이다. 환부에 따라 위치가 달라졌지만 집도의는 오른손잡이가 태반이기에 왼쪽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태수가 자기 위치에 서서 환자를 바라봤다.
환자 눈빛이 미미하게 떨리고 눈동자도 계속 좌우로 움직였다.
낯선 환경에 불안감이 터져 나온 모양이다.
안 좋다.
환자가 계속 불안해하면 마취가 제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마취 중간에 깰 수도 있다.
또한 심장박동수가 불규칙해 마취과 의사가 바이탈을 제대로 관리하기 힘들어진다.
머릿속에 있는 카프레네 기억이 태수를 자극했다.
‘수술전엔 환자를 안정시켜라. 어떤 방법을 써서든.’
태수는 잠시 생각했다.
막말로 ‘안심하세요.’한다고 안심할 사람은 없다.
신경을 계속 분산시켜 수술에 대한 공포를 잊게 하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런 세세한 기억까지 떠올리며 태수는 불안해하는 환자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환자분, 혹시 좋아하는 가수 있으십니까?”
“가, 가수요?”
“네. 아무나요.”
태수의 엉뚱한 질문에 당황한 환자가 눈을 위로 올려 떴다. 반사적으로 무언가 생각할 때 일어나는 신체반응이다.
“강수지 좋아하는데요.”
“배수지는요?”
“네?”
“전 배수지를 좋아해서요. 요즘 ‘수지.’하면 배수지 아닙니까?”
태수가 결론도 없는 엉뚱한 말만 늘어놓자 환자가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건 환자뿐이 아니었다.
수술실에 있는 다른 의료진도 멍한 얼굴로 태수를 바라봤다.
‘이건 무슨 시츄레이션?’
그들 마음에 든 공통 생각이다.
허나 이 대목에서 태수를 질책할 순 없었다.
우선 석재봉 과장이 불러온 인물이었기에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환자가 마취되기 전이었기에 수술실에서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의료진이 다투는 모습이라도 본다면 환자는 더욱 불안해할 일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더 황당한 건 태수와 환자가 대화하는 사이 바이탈 수치가 조금씩 안정을 찾는단 점이다.
엉뚱한 질문에 정신이 팔려 환자가 수술 공포에서 조금씩 벗어난다는 증거기도 했다.
그 결과 치솟은 혈압이 가라앉기 시작했고, 심장박동도 조금씩 안정세를 찾아갔다.
모니터로 확인한 마취과 의사가 다른 의료진에게 눈짓했다.
의료진들도 확인하고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쟤 뭐야?’
어이없어하는 의료진들을 뒤로한 태수는 환자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환자분은 배수지와 강수지. 누가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제가 어떻게 말씀드리기가 좀 그런데요.”
“하긴 두 사람 매력이 워낙 틀리니까요. 그럼 강수지 노래 중에서 뭘 제일 좋아하십니까?”
“아, 그게.”
환자가 막 대답하려고 할 때였다.
황당함을 억지로 털어낸 마취과 의사가 시간을 확인하고 본분에 충실했다.
“이제 마취 들어갈 시간입니다.”
그 소리에 태수가 환자에게 얼른 말했다.
“깨어나시면 알려주시는 겁니다.”
“아, 네.”
“수술 잘 됐으면 한 소절 불러주시는 거고요.”
“그게, 그러니까…….”
환자가 당황해할 때 마취가 의사가 슬쩍 끼어들었다.
“마취 들어갑니다. 환자분 저 따라서 수를 세세요. 하나, 둘…….”
“하나, 둘…….”
환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숫자를 세다 그대로 마취에 들어갔다.
태수와 환자의 대화가 사라진 수술실에는 각종 기계들이 내는 소리로 가득 찼다.
삑, 삑.
마취과 의사가 모니터를 확인하고는 엄지를 슬쩍 들어올렸다.
“굿. 바로 째도 되겠습니다.”
“정말입니까?”
뒤에서 따가운 시선을 보내던 의사가 묻자 마취과 의사는 모니터를 가리켰다.
“무지하게 안정적인데요.”
“아,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솔직히 너무 어이가 없어서요.”
“저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좋은 방법 같네요.”
마취과 의사가 태수를 바라보며 칭찬했다.
태수는 슬쩍 고개를 저었다.
“그냥 책에서 본 거 따라한 건데요.”
“그 책이 뭔지 나중에 알려주세요. 참고할 게 많을 거 같습니다.”
마취과 의사의 말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릉.
수술실 문이 열리며 석재봉 과장이 들어와 물었다.
“무슨 책인데? 나도 좀 알지?”
“아닙니다. 마취 끝났습니다.”
마취과 의사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태수를 힐끔거렸다.
석재봉 과장도 들어선 순간 뭔가 황당해하는 수술실 공기를 읽었는지 기이한 눈빛을 보냈다.
“오늘은 좀 어수선한 분위기 인거 같기도 하고.”
“그럴 때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건 또 그렇지. 자,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어느새 수술가운을 걸친 석재봉 과장이 집도의 자리에 섰다.
동시에 태수가 큰소리로 인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의료진들이 뒤를 이어 바로 후창했다.
인사.
이건 집도의에 대한 예의기도 했다.
인턴으로 수술을 참관하며 많이 경험했기에 태수가 눈치 빠르게 인사한 일이다.
그 싹싹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스크 사이로 드러난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진 석재봉 과장도 인사했다.
“나도 잘 부탁해요. 그럼 메스.”
석재봉 과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술실 간호사가 수술도구를 건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수술이 시작됐다.
cholecystectomy.
우측 복부를 갈라 간 사이에 위치한 담낭을 제거하는 수술이다.
환자의 살이 날카로운 메스에 갈라지자 모세혈관에서 피가 몽글몽글 솟아났다.
태수는 바로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보비(Bovie, 절개나 지혈에 사용되는 전기기구.)”
손에 알맞게 보비가 잡히자 태수는 전기 자극을 이용해 모세혈관의 출혈을 막기 시작했다.
칙. 칙.
전기 자극으로 인해 살이 타들어가는 냄새가 피어났다.
태수는 개의치 않고 석재봉 과장의 손길에 보조를 맞췄다.
어느 정도 지혈이 되자 태수는 다음 수술기구를 요청했다.
“리트렉터(Retractor, 개흉 혹은 수술부위를 벌려주는 수술기구)”
바로 간호사에게 건네받은 리트렉터로 수술부위를 벌려 시야를 확보했다.
거기까지는 누구나 한다.
석재봉 과장도 지금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느낌이다.
태수는 그걸 몰랐다.
이미 수술에 집중하고 있던 터였기에 자신의 할 일에만 집중했다.
확보된 시야를 통해 보자 간은 보이는데 담낭이 없었다.
“음.”
석재봉 과장 눈빛에 역시나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은 태수가 움직일 때였다. 천천히 벌어진 환자 배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태수가 간을 살짝 돌렸다.
그제야 부풀어 비대해진 담낭 모습이 보였다.
CT로 확인한 그대로 간이 감싸고 있던 모양이다.
그때였다.
삑삑.
기계음이 조금 커지더니 모니터를 보던 마취과 의사가 빠르게 말했다.
“혈압이 올라갑니다.”
그 얘기를 들은 석재봉 과장은 수술부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태수에게 말했다.
“손으로 하지 말고 후크(Hook. 들어올리거나 견인할 때 사용하는 수술기구.)로 하는 게 어떨까?”
“네? 아, 죄송합니다.”
태수가 사과하고 빠르게 다가온 후크로 손을 대신해 간을 들어올렸다.
간이 들린 높이가 확연히 낮아지자 기계음은 다시 조용해졌다.
태수는 동시에 쓴 미소를 지었다.
좀 더 신경 쓰지 못한 터였다.
간을 좀 더 높이 들어도 되지만 너무 갑작스러웠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면 문제가 없었지만 그런 세밀한 손길까지는 확실히 무리였다.
자책하는 태수의 귀에 수술에 집중한 석재봉 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정도는 실수도 아니야. 수술에 집중하도록.”
“네.”
태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석재봉 과장의 손길에 주시했다.
그 뒤로 수술은 그리 어렵지 않게 마무리 됐다.
수술시간은 고작 30여분.
일반 담낭제거술에 비하면 조금 오래 걸렸다. 하지만 환자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는 걸 감안한다면 빠른 축에 속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의사는 태수를 조금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사이에 석재봉 과장이 수술부위에서 손을 땠다.
“자, 이쯤하면 된 거 같고, 마무리는 정 선생이 해줘요.”
“네. 과장님.”
뒤에 있던 의사가 대답하자 석재봉 시선이 태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최 선생은 나랑 같이 나가지.”
“네.”
태수가 대답하자 석재봉이 마지막으로 수술실내 의료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 고생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의료진이 깊숙이 인사하자 손을 들어 격려해주며 석재봉 과장이 수술실을 나갔다.
뒤를 이어 태수도 따라 나갔다.
수술 가운과 장갑, 마스크 등을 버리는 통에 도착한 두 사람이었다.
석재봉 과장이 수술 장갑을 벗으며 태수에게 말했다.
“잘했어. 아주 침착했고.”
“아닙니다. 과장님이 제 실수까지 다 커버해주시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 거 같습니다.”
“설마 내가 자네한테 완벽한 조치를 바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라도 욕심은 났습니다.”
태수의 말에 석재봉 과장이 가볍게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하나하나 또 배워 가면 되겠지.”
“그럼.”
“같이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정희의료원 레지던트 과정에 합격한 순간이었다.
“아자! 감사합니다!”
“인사 받을 정도는 아니고, 앞으로 힘들겠지만 많은 경험을 하길 바라지.”
허나 대답하는 석재봉 과장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함박웃음으로 가득한 태수는 이상한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식사할 때부터 뇌리를 자극한 그 느낌이다.
‘도대체 뭐지?’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타다닥!
수술실 입구에서부터 쏜살같이 달려온 의사 한 명이 석재봉 과장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일레우스(ileus, 장폐색증)입니다!”
“일레우스?”
“게다가 마비성입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환자 중에 그런 사람 없었잖아!”
석재봉 과장의 얼굴에도 다급함이 가득 떠올랐다.
일레우스.
장이 특히, 소장이 부분적 혹은 완전히 막힌 경우를 뜻한다.
마비성 장폐색증일 경우에는 자칫 지체하다가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수술만이 해답이다.
순간 떠오른 기억에 태수 얼굴도 굳어져갔다.
그때 의사가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응급실에 다른 환자 보호자로 도착했는데 갑자기 쓰러져 검사해보니까 그런 상태였답니다.”
“지금 어디 있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지금 수술해주실 분이 교수님 밖에 없습니다!”
의사의 말에 석재봉 과장이 애써 침착성을 되찾으려 했다.
지금 막 수술을 마치고 나왔다고는 하지만 큰 수술은 아니었다.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었기에 석재봉 과장이 판단을 마치고 다급하게 물었다.
“수술방은?”
“5번입니다.”
“바로 가지. 최 선생. 자네도.”
석재봉 과장은 태수를 챙겼다.
태수도 상황을 바로 인지했다.
어시스던트를 맡기기는 솔직히 미숙한 손길이다. 하지만 마비성 일레우스라면 초를 다투는 응급상황이다.
누구의 손길이라도 빌려야 할 때다.
석재봉 과장은 태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헌데 태수는 바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 때문이다.
잠깐 고민했지만 태수는 이내 응급상황을 알려준 의사에게 물었다.
“혹시 그 환자 과거 병력 좀 알아봐 주실 수 있습니까?”
“과거 병력이요? 아니, 그보다 그쪽은 누구신지?”
낯선 태수 얼굴에 의사가 의아함부터 보였다.
동시에 몸을 움직이던 석재봉 과장이 뒤돌아 태수에게 물었다.
“과거 병력?”
“원인이 없는 병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에 어떤 수술을 했는지 안다면 좀 더 접근이 용이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음?”
석재봉 과장 눈빛이 순간 돌변했다.
그냥 그런 인턴을 보던 눈빛이 아니었다.
자신이 기대했던 무언가가 충족된 그런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본 태수가 오히려 멈칫하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