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08
00511 511화
태수는 표정 변화 없이 나지막이 물었다.
“뭘 가져오신 겁니까?”
“리스트는 여기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건네는 종이를 태수는 바로 확인했다.
수술 세트를 시작으로 압박붕대나 주사제 등.
아침에 적어 보낸 품목 대부분이었다.
“…….”
태수가 조용히 품목만 확인하자 한 명이 조용히 말했다.
“삼척시 보건소에 재고가 없는 것도 있고, 시간이 부족해서 준비하지 못한 것도 있다고 전해 달라던데요.”
“그러네요.”
“저기, 그럼 저걸 어떻게 할까요?”
그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수는 품목이 적힌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얼른 나르고 커피 한잔하시죠.”
“그, 그러시죠.”
“가시죠.”
태수가 앞장서려 하자 남자들이 얼른 만류했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제 보건소인데 제가 해야죠.”
태수는 빙글빙글 미소를 지으며 먼저 몸을 움직였다.
두 남자는 그런 태수를 눈을 끔뻑이며 바라봤다. 김석철에게 전해 들은 성격과 너무 다른 탓이다.
그러나 태수는 원하는 게 도착했으니 그걸로 만족할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보건소 창고가 전에 비해 훨씬 풍족하게 차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환자가 바로 찾아오는 건 아니었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응급 시에 필요한 물품을 이제 조금 구비해 놓았을 뿐이다.
“만사 불여튼튼이라 했어.”
이 정도라면 응급환자가 와도 기본적인 처지는 어느정도 가능했기에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
다만 환자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 건 상당히 지겨웠다. 진료실 문만 바라보던 태수의 시선이 서서히 다른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레를 들고 진료실 내부부터 조금씩 정리하고 닦기 시작했다.
슥슥.
병원은 청결이 생명이다.
무작정 환자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에 이렇게 조금이라도 청소를 하는 게 옳았다.
세균 감염을 단 1퍼센트라도 줄이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다.
사람은 내일을 모른다.
그러기에 준비는 필수였다.
보건소에 출근한 지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환자는 0명.
그 숫자는 이상하리만큼 변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골이라해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환자는 있기 마련이다.
감기.
그리고 가벼운 외상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환자가 없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태수가 중얼거리며 생각을 지웠다.
“울트라 건강맨들이 사는 곳인가 보지.”
그렇게 보건소의 하루는 너무도 평온하게 흘러갔다.
반면 태수에게는 작은 변화가 있었다.
제일 먼저 얼굴이 한결 좋아졌다.
의도하지 않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잘 먹고 푹 쉰 덕분이다. 태수는 매끈해진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 보며 중얼거렸다.
“이러다가 다들 못 알아보겠는데.”
자신이 보기에도 살이 오른 게 보일 정도다.
태수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계속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이곳에 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시골 특유의 정서를 도시 생활에 물들어 잠시 잊었었다.
기억을 되살리던 태수가 아차 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자신도 자리에 주저앉으면 안 된다.
그 생각과 동시에 그는 바로 진료실을 나섰다. 제일 먼저 무료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이경미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잠시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그러세요.”
“혹시라도 누가 찾아오면 바로 연락 주세요.”
“네.
이경미 간호사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태수도 일일이 사정 이야기 하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단지 고개만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보건소를 나선 그가 향한 곳은 초곡리 마을 이장 집이다.
이장의 주소와 전화번호는 비상연락망으로 비치되어 있어 기억하고 찾아온 길이다.
끼익.
대문을 열고 들어간 태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계십니까?”
“누구요?”
50대 중, 후반에 가까운 노인이 조금 경계하듯 태수에게 다가왔다.
태수는 꾸벅 인사부터 했다.
“보건소에 새로 부임한 공중보건의 최태수라고 합니다.”
“아아, 그래요. 이장인 이기남이에요.”
“반갑습니다. 이거부터.”
태수가 음료수 상자를 내밀자 이기남 이장이 쓴 미소를 지었다.
“뭘 이런 걸.”
“첫 방문인데 빈손으로 오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어디다 둘까요?”
“이리 줘요. 거기 좀 앉고.”
이기남 이장은 평상을 가리켰다.
그것만으로도 경계심을 상당히 풀었다는 걸 직감한 태수는 밝게 미소 지었다.
여기저기 먹을 걸 찾아 돌아다니던 이기남 이장은 결국 태수가 사 온 음료수를 권했다.
“뭐 먹을 게 없는 촌구석이라서 이거 드려야겠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사 온 건데, 뭐.”
이기남 이장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태수도 차분한 얼굴로 음료수부터 들이켰다. 다소 자극적인 오렌지 주스라서 입안이 개운했다.
태수가 음료수를 마시는 사이 이기남 이장이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말씀 편하게 하세요. 막내아들뻘 되는데요.”
“그래도 의사 선생님에게 그러면 안 되죠.”
“편하게 하세요. 제가 불편해서 그럽니다.”
태수가 재차 권하자 이기남 이장이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다고 하고. 최 선생이 온 지가 며칠 되었는데.”
“그동안 보건소 정리 좀 하느라 인사도 못 왔습니다. 얼추 정리가 되어서 이렇게 연락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미리 인사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보다 며칠 되진 않았지만 참 조용한 마을인 거 같습니다.”
태수가 슬쩍 칭찬을 하자 이기남 이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마을이 좀 그렇지.”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태수가 넙죽 고개를 숙이자 이기남 이장이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뭐 더 궁금한 건 없고?”
“그게……. 아닙니다.”
태수는 마을 사람들이 왜 보건소에 안 오는지 물으려다 그만뒀다. 초면에 할 만한 질문으로 적절하지 않은 탓이다.
이기남 이장도 그런 낌새를 눈치챈 것 같지만 먼저 말하진 않았다.
그렇게 서먹서먹하고 대화가 자주 끊기는 어색한 시간이 이어졌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이기남 이장이 말했다.
“내가 슬슬 나가 봐야 하는데 말이야.”
“가 보셔야지요. 다음에 보건소에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자고.”
“그럼.”
태수는 깊게 고개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선 그의 표정이 썩 좋진 않았다.
고립된 마을이라서 그런지 마음의 문을 여는 게 쉽지 않았다.
이기남 이장이 이 정도라면 다른 마을 사람들은 더할 듯 했다.
이유야 어찌 됐건 간에 마을 주민들이 보건소를 찾아올 거라는 생각은 당분간 접어 둬야 할 것 같았다.
“좋은 건가?”
태수가 아리송한 기분이었다.
태수는 그날 이후 조금씩 보건소 외관을 다듬었다.
어차피 쉴바엔 좀 더 생산적으로 지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빈 공간에 화단도 가꾸고 싶었지만 참았다.
뭔가를 키우면 잔손이 많이 간다. 아버지가 농사를 오랫동안 지으셨기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일일이 챙겨 주는 성격이 아니라 그런지 상당히 귀찮은 감도 있었다.
태수가 외관을 청소하는 사이에도 이경미 간호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쪽에서 하는 모든 일에 관심이 없어보일 정도였다.
어차피 자신은 돌아갈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태수도 굳이 이경미 간호사를 끌어내진 않았다.
뭐든지 스스로 해야 보람도 있고 즐거운 법이다.
비록 혼자지만 짬짬이 시간을 내 며칠 동안 정리를 하니 보건소 외관도 제법 그럴싸하게 변했다.
미장이나 보수 쪽에는 소질이 없었기에 한 거라고는 꼼꼼하게 청소하는 일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씨년스럽던 보건소가 상당히 깔끔하게 변했다.
할 일이 하나 마무리되자 태수는 또다시 무료함을 느꼈다.
이기남 이장은 아직 코빼기도 안 비추고, 아픈 사람도 여전히 찾아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태수도 이젠 이 분위기에 상당히 적응했다.
오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는 건 웃기는 일이다.
슬쩍 둘러보던 중 태수가 멈칫했다.
보건소에서 길 하나 건너면 바로 바다다.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매일 보는 바다라 오히려 무감각해진 모양이었다.
태수는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손목을 낚아채는 동작을 반복했다.
슬쩍.
자기 손을 내려다본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할 일이 없다면 스스로 놀이거리를 만들면 그만이다.
태수는 낚시를 하기 위해 어떤 장비가 필요한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하석준 팀장에게서 몇 번 세컨드 카를 빌려 낚시를 다녀 봤다.
덕분에 차 안에 준비되어 있는 용품들을 꺼내 쓰기만 하면 되었기에 편안함에 물든 모양이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면 최소한 낚싯대는 필요할 터였다. 결정을 내린 태수는 바로 하석준 팀장에게 전화했다.
“최 선생!”
“배치받고 주변이 정리되어서 이제야 연락드립니다.”
“어디야? 어디로 배치받았는데?”
“강원도의 자그마한 마을에서 보건소 의사 하고 있습니다.”
태수의 대답에 하석준 팀장의 목소리가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 귀한 인재를 빼 가서 기껏 보건소라니. 그쪽 마을 사람들은 참 좋겠지만 말이야.”
“아직 얼굴도 못 봤는데요.”
“그래도 한두 분씩 찾아오시지 않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조용합니다.”
태수의 말에 하석준 팀장의 목소리가 의아하게 변했다.
“그러기 쉽지 않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보다 팀장님, 궁금한 게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뭔데?”
하석준 팀장이 바로 물어 오자 태수는 마음을 조금 가볍게 하고 대답했다.
“낚시를 하고 싶은데 뭐가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낚싯대라도 튼튼한 게 있으면 어떻게 될 거 같은데요.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태수가 묻자 하석준 팀장이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낚시 다녀야 할 정도야?”
“지금은 그러네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들으면서도 모르겠네. 좌우간 낚싯대는 걱정하지 마. 내가 하나 보내 줄 테니까.”
하석준 팀장이 시원하게 말하자 태수는 난감해졌다.
“제가 이거 괜히 전화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소리 말고 거기 주소나 문자로 보내. 많이 낚으면 좀 보내고.”
“눈먼 고기가 많길 바라야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럼 내가 바빠서 길게 이야기는 못하겠고, 조만간 또 통화하자고.”
하석준 팀장의 목소리를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태수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쓴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바쁜가 보네.”
반면, 너무도 한가해 살이 오른 태수다.
나중에 만나면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눈에 선했다.
이틀 후.
태수는 하석준 팀장이 보내 준 낚싯대를 바다에 드리우고 있었다.
보건소까지는 불과 20미터 거리.
이경미 간호사가 소리쳐 부르면 충분히 들을 수 있고, 태수가 언제든지 뛰어갈 수 있는 거리이기도 했다.
어떤 환자가 오든지 몇 초 내에 진료가 가능했다.
“그건 마음에 드네.”
낚싯대를 거치대에 걸쳐 놓은 태수가 주변을 확인했다.
그가 자리한 낚시 의자를 시작으로 각종 낚시 용품과 몇몇 캠핑 용품들이 늘어져 있었다.
초보자인 태수가 사용하기에 충분한 장비였다.
가격을 떠나 태수의 실력을 충분히 배려해서 보내 준 하석준 팀장의 호의였다. 덕분에 태수도 어렵지 않게 낚시를 시작하게 되었다.
바다에 던져 놓은 찌를 바라보니 묘한 긴장감이 서렸다.
태수가 그렇게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는 사이였다.
뒤쪽으로 몇몇 마을 사람들이 지나쳤다
하지만 그뿐이다.
누구도 다가와서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태수는 솔직히 뒤로 누가 지나가는 줄도 몰랐다.
온 신경이 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어라.’
속으로 바라고 또 바라며 던져 놓은 찌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물고기는 그렇게 쉽게 입질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역시 초보인 태수에게 쉽게 잡히지 않았다.
배고픔에 준비해 놓은 간단한 간식을 먹으며 낚시를 즐기던 중이었다.
띠리릭.
휴대폰이 울려 바라보니 정민수의 전화였다.
“오, 정 선생.”
“강원도 보건소로 배치받았다며.”
“그렇게 됐어.”
“목소리가 아주 좋아진 거 같은데. 지금 뭐 해?”
정민수의 물음에 태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낚시.”
“뭐, 낚시?”
“어.”
“야, 이 뭐 같은 놈아! 친구는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고 뺑이치고 있는데 너는 세상 좋게 낚시나 하고 있어?”
정민수가 울컥해 소리쳤지만 태수는 그마저도 미소를 지었다.
“원래 세상이 그런 거 아니겠어?”
“이걸 진짜!”
“거기 많이 바쁜 모양이네.”
“바쁜 정도인 줄 아냐? 아침에 팀장님께 이야기 듣고 이제야 짬 내서 전화하는 거라고.”
그 소리에 태수가 손목시계를 슬쩍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