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82
00585 585화
“그건…….”
“당장 그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사람 일은 내일을 모르는 법이니까.”
“염두에 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더 반갑게 봤으면 좋겠어. 비행기 시간 때문에 이만 실례하지.”
스미스는 태수의 대답도 듣지 않고 통화를 마쳤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태수는 멍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내 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하고 죄송하고 그러네.”
아무리 미세스 카프레네의 부탁 때문에 달려왔다고 해도 감사했다.
반면, 좋은 제안을 해 줬는데 거절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태수는 곧 그 마음조차 털어 냈다.
지금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었다.
현재 복무하는 보건의에 맞게 마을 사람들을 더욱 성심껏 진료해야 한다.
나머지는 그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그날 이후 태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낮에는 진료하고, 저녁에는 공부를 했다.
스미스의 수술 영상을 돌려 보며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좀 더 심도 깊게 연구하기도 했다.
그 틈틈이 스트레스를 덜기 위해 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던 중 태수는 의아함을 느꼈다. 시간이 갈수록 이상하게 처음 보는 환자들이 늘어난 탓이다.
환자 기록부에 기재된 주소를 보아하니 주변 마을에서 찾아온 이들이다.
태수는 의아했다.
그런 의구심을 품고 있을 무렵, 이기남 이장이 진료를 받으러 왔다.
여러 차례 태수에게 진료를 받아 건강을 많이 되찾았다. 하지만 고질적인 팔꿈치 통증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진료를 받으러 오고 있었다.
진료 의자에 앉은 이기남 이장은 자연스럽게 팔꿈치까지 옷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환자가 많이 늘었어.”
“다른 마을에서도 찾아오시는 거 같습니다.”
“유명한 의사니까 지들도 진료받고 싶은 거겠지.”
이기남 이장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했다.
태수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이기남 이장에게 물었다.
“뭔가 알고 계시죠?”
“뭘?”
“모르는 척하시면 아프게 봐 드릴 수도 있습니다.”
태수가 으름장을 놓았지만 이기남 이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많이 나아가는데 아프기는 무슨.”
“그러시다면…….”
“눈빛이 왜 그래?”
“글쎄요.”
태수는 빙글빙글 미소를 지으며 살짝 팔꿈치를 틀었다.
동시에 이기남 이장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으윽! 이, 이거 의사가 이래도 되는 거야?”
“엄연히 치료의 일종입니다. 근육과 뼈의 뒤틀림 반응을 보는 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좀 더 틀어야 하는데요.”
태수의 말에 이기남 이장이 식겁했다.
“내, 내가 말했어. 아으윽! 내가 이장 회의에서 말했다니까.”
“역시. 그래도 좀 아프실 겁니다.”
두둑.
태수는 통보와 동시에 팔을 조금 더 틀었다.
“크윽!”
이기남 이장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태수는 개의치 않고 진료 기록서를 작성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뼈하고 근육 모두 많이 좋아진 거 같네요. 근막염도 호전된 거 같고요. 항염제 좀 더 드릴 테니까 계속 드시고요, 무리해서 물건 들지 마세요.”
“일부러 꺾은 거지?”
“아뇨. 반응 보려면 어쩔 수 없었다니까요.”
“끙.”
이기남 이장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았다.
그러나 태수는 더욱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음 진료는 일주일 후입니다.”
“누가 온대? 내가 여기 다시는 오나 봐라. 아이고, 팔이야.”
“약은 꼭 받아 가세요.”
“쥐뿔.”
이기남 이장은 태수를 노려보며 진료실을 나갔다.
절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뒷모습이었지만 태수의 얼굴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니 시골 노인들은 대부분 순박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모든 걸 표현할 뿐이다.
지금은 저렇게 화를 내고 나갔지만 내일이면 다시 하하호호 웃으며 자신을 대할 터였다.
태수는 보건의로 근무하면서 그걸 많이 경험했기에 저런 반응에 무던했다.
진료 기록서를 마무리한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근골격도 어느 정도 치료할 수 있을 거 같네.”
카슈미르에서는 정신없이 치료를 해서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들이 많았다.
지금은 환자가 많아졌다고 해도 진료 시간이 충분했기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내과, 외과를 아울러야 하는 보건의였기에 태수의 발전에는 더없는 장소였다.
물론 환자가 다양한 만큼 공부하는 폭도 전보다 더욱 넓어진 게 사실이었다.
태수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 이선정 간호사가 들어왔다.
“이장님이 엄청 뭐라고 하시던데요.”
“하루 이틀도 아니잖습니까.”
“그러게요. 바로 다음 환자 들여보낼까요?”
이선정 간호사가 묻자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해 주세요. 아, 그런데 몇 분이나 대기하고 있습니까?”
“한 20명 정도요.”
“…….”
“계속 찾아오고 계시니까 더 늘어날 거 같은데요. 수고하세요.”
이선정 간호사는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고 멀어져 갔다.
그녀가 하는 일은 처방전을 전달해 주고 주사를 놔주는 정도였기에 그리 힘들지 않은 탓이다.
반면, 태수는?
지금 20명인데 더 늘어나고 있단다.
그 소리가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의사는 혼자뿐이라 결국 모두 태수의 환자였다.
이런 시골 보건소에서 감당할 만한 환자의 수를 넘어설 것 같았다.
순간 태수가 쓴 미소를 지었다.
“이게 보건소야, 신속대응센터야?”
그도 이젠 헷갈릴 정도였다.
환자가 늘어나는 만큼 여러 가지 주사약이나 의료 물품들이 빠르게 동이 났다.
태수는 바로 김석철 주무관에게 전화했다.
“주무관님.”
“아, 최 선생님, 어쩐 일이십니까?”
“저희 보건소에 환자 늘어나고 있는 거 아시죠?”
“그럼요. 다른 마을에서 찾아오신다고요. 꽤나 멀리서도 찾아가는 거 같던데요. 다른 지역 담당자도 황당해하고 있습니다.”
말은 그랬지만 김석철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밝았다.
아무래도 담당하는 지역에 좋은 일이 생겼는데 기분 나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인사고과에도 약간은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런 내심은 숨겼지만 태수가 모를 리 없었다.
태수는 슬쩍 앓는 소리를 냈다.
“이거 뭐, 환자는 늘어나는데 약도 별로 없고 비품도 영 시원치 않고.”
“아이고, 안 그래도 다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련히 해 주시겠거니 하면서도 당장 손에 쥐어지는 게 없으니까 마음이 좀 불안하고 그러네요.”
태수의 말에 김석철의 목소리가 바로 정중하게 변했다.
“그러면 안 되죠. 선생님 하시는 일에 불편함이 없게 바로바로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건 뭐든지 말씀해 주시고, 지역 주민 건강 좀 잘 챙겨 주십시오.”
“그거야 제 일이니까 당연히 해야죠.”
“선생님의 노고를 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뒷일은 걱정 마시고요. 1차분은 오늘 저녁에라도 보내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받아야죠. 그럼 부탁드립니다.”
태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전화기를 내려놓는 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환자가 늘어나니 큰소리칠 일도 생겼다.
김석철의 말대로 의료 물품이 풍족하게 지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수는 그것들을 바탕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을 더욱 성심껏 진료했다.
의료 물품의 양뿐만 아니라 질도 좋아지니 환자가 더 많이 찾아왔다.
“초곡리 의사 선생이 그렇게 용하다며.”
“얼굴만 봐도 병을 딱딱 알아낸다면서?”
“젊은 의사라던데 진짜 대단하네.”
대화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듣자 하니 저기 조씨네 딸이 죽을병이었는데, 그것도 다 살려 냈다 하던데.”
“그런 사람이 여기 왜 있어.”
“보건의잖아. 그러니까 이 촌구석에 와 있겠지.”
“그럼 갈 때까지 열심히 진료받아야겠네.”
“그래서 나도 다녀왔다니까.”
태수의 소문은 초곡리를 넘어서 주변 지역까지 널리 퍼져 갔다.
소문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널리 퍼진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수술이 필요한 경우도 많았다.
마땅한 입원실이 없기에 당일 퇴원할 수 있는 간단한 케이스만 수술했다.
그조차도 자그마한 보건소에서는 획기적인 일이다.
하지만 태수는 조금 아쉬운 감도 있었다.
혼자 할수 있는 건 정말 간단한 수술밖에 없었다. 주로 부주의로 찢어진 상처를 꿰매는 정도였다.
반면, 수술을 보조해 줄 누군가가 있다면 조금 더 깊은 상처도 수술할 수 있다.
맹장 수술이나 치질 수술 등등.
꼭 그런 수술이 아니더라고 응급한 환자가 왔을 때 위험성을 줄일 수 있다.
사실 김석철에게 넌지시 의료진을 추가해 달라고도 부탁했다.
허지만 기다려 달라는 대답 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 점을 아쉬워하면서 할 수 있는 한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던 어느 날이었다.
한바탕 환자들이 오간 후였다.
대기하는 환자가 없단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제 잠깐 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였다.
끼익.
이선정 간호사가 진료실에 들어와 태수에게 말했다.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누가요?”
“삼척종합병원 외과장님이요.”
이선정 간호사의 대답에 태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찾아 온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의외였다.
그런데 갑자기 외과장이 찾아왔다는 게 의아했다.
손님을 밖에 세워 두는 건 예의가 아닌지라 태수는 이선정 간호사에게 말했다.
“안내해 주세요.”
“잠시만요.”
이선정 간호사가 진료실을 나가고 곧 낯익은 중년인이 들어왔다.
금테 안경이 날카로움을 돋보이게 해 주는 인상이다. 몇 번 안면이 있기에 태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셨습니까?”
“잘 지냈나?”
“저야 똑같죠.”
“그런 것치고는 얼굴이 좋지 않아.”
장일수 외과장은 살갑게 말했다.
전부터 장일수 외과장은 호의를 보였기에 태수도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습니까?”
“다른 마을에서 환자들이 많이 찾아온다니까 그럴 만도 하겠지.”
“그건 어떻게…….”
태수가 말끝을 흐리자 장일수 외과장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료 기록서가 상당히 많은 것만 봐도 알지.”
“아, 이거요. EMR(전자의무기록)도 사용하는데, 이렇게 수기로 작성하는 것도 매력이 있어서 그냥 하는 겁니다.”
“최 선생이 그냥 작성할 리가 있나. 그리고 이 주변에 소문이 자자하더라고. 우리 병원으로 보내 준 환자들도 최 선생 칭찬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말이야.”
장일수 외과장이 계속 칭찬하자 태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제가 뭐 그렇게 대단한 의사라고요.”
“그건 스스로 판단하는 것보다 환자들을 통해 퍼진 소문이 더 신뢰가 가기 마련이야.”
“그래도 부끄럽습니다.”
“어깨 좀 펼 만한데 끝까지 겸손하니까 이거 대화하는 재미가 없어.”
장일수 외과장의 핀잔에 태수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게 최 선생의 매력일 수도 있겠지. 그보다 보건소에서도 자잘한 수술은 진행한다던데, 맞나?”
“제 역량이 닿는 만큼만 하고 있습니다.”
태수의 말에 장일수 외과장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럼 대부분의 수술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시설이 열악해서요. 그리고 단순한 상처 때문에 큰 병원까지 가길 꺼리시는 경우가 많아서 그 정도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보건소에서 그런 수술도 쉽지 않은데, 대단해.”
장일수 외과장의 칭찬에 태수는 계속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저 어색한 웃음만 흘러나왔다.
“하하.”
“자,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술 한잔하면서 하기로 하고. 실은 찾아온 이유가 있어. 환자 이야기이기도 하고.”
장일수 외과장의 분위기가 진지하게 바뀌었다.
태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환자.
그건 언제 어느 때고 태수를 차분하게 하는 단어였다.
쑥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날려 버린 태수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천성이 의사야.”
“아닙니다.”
“그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장일수 외과장은 일부러 말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