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955
00958 958화
그것도 잠시, 태수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일은 끝이 났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이제 조만간 다시 전국 각지로 흩어지겠지만, 새롭게 진료할 곳에서 지금과 같이 열심히 환자들을 돌보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태수의 말을 바로 이해했는지 공우혁의 표정도 밝게 변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 마냥 슬퍼할 일도 아닌 거 같습니다.”
“최 선생 말이 옳아. 우울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보자고.”
“그게 우리네 정신건강에도 좋고요.”
태수는 마음 한 구석에 있는 불편함을 털어 내고 밝게 미소 지었다.
태수와 공우혁이 대화한 내용은 그날 저녁 모두가 모인 회의실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되었다.
보건의들도 태수와 공우혁의 생각에 동조했다.
“그렇지. 우리는 곧 헤어진다고 해도 마음까지 멀어지는 건 아니잖아.”
“각자 배정받은 지역에 도착하면 어려운 이웃부터 돌보자고.”
“이걸 생각으로만 하지 말고 우리끼리 작은 커뮤니티를 만드는 건 어떨까? 정기적으로 모임도 갖고 봉사활동 같은 것도 하고 말이야.”
“이거 이러다가 사조직이 생기는 거 아니야? 하하.”
다들 반색하며 여러 가지 의견을 기탄없이 제시했다. 여러 의견들이 많이 나왔지만 바로 수용되는 건 몇 가지 없었다.
그중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된 건 커뮤니티를 만들자는 의견이다.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낼 게 아니라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서로 정보도 공유하고 도움을 주자는 취지였다.
태수도 그걸 바랐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먼 미래를 생각하면 이들과 계속 관계를 이어 가는 건 커다란 재산인 탓이다.
탕탕.
공우혁이 가볍게 단상을 두드리며 장내를 진정시켰다.
“자, 아직 시간 있으니까 그 문제는 천천히 조율하기로 합시다. 당장 내일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다들 목소리가 높아.”
“…….”
공우혁이 부드럽게 달래자 회의실은 곧 조용해졌다. 장내를 다시 둘러본 공우혁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앞으로의 일정부터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입원한 아이들이 모두 퇴원할 때까지 우리의 일은 계속 유효합니다.”
“네.”
“혹시 먼저 타 지역으로 이동을 원하시는 분은 저에게 말씀해 주시고요.”
“…….”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지 대답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공우혁도 예상했는지 덤덤한 얼굴로 외과 계열 쪽을 바라봤다.
“남은 아이들 수술은 언제쯤 마무리가 됩니까?”
“외과 계열 수술 스케줄을 보면 이번 주 내에는 수술이 모두 마무리될 거 같습니다.”
“그렇군요. 우리 내과 계열은 수술한 아이들의 차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음 주 한 주 동안 집중 치료를 하면 퇴원이 가능할 거 같습니다.”
“마지막 한 명까지 긴장 놓지 않고 수술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현민이 대표로 각오를 말하자 전 외과 계열 보건의들이 한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젊어서 좋다.
좀 더 세월이 흘러 변할진 몰라도 지금은 혈기왕성한 나이들이다. 그 모습이 차라리 아름다웠다.
조용히 바라보던 공우혁이 내과 계열을 대표해서 말했다.
“저희도 시간에 쫓기지 않고 충분히 회복시켜서 아이들 모두 건강하게 걸어 나갈 수 있게 하겠습니다.”
끄덕.
내과 계열 보건의들도 동감하는지 크게 고갯짓했다. 다들 마지막이라고 풀린 기색은 없었다.
그 외에 몇 가지 공지사항을 이야기한 후였다. 공우혁이 모두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오늘 할 이야기는 모두 끝난 거지요?”
“…….”
다들 좌우를 돌아보며 혹시 누락된 이야기가 있는지 확인했다. 모두 할 말이 없는 것 같자 공우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아, 최 선생님은 오늘 선약이 있다니까 다시 만난 반가움을 내일 퇴근 후에 약속을 잡는 걸로 하죠.”
“우우.”
“방향이 틀렸습니다. 살벌한 야유는 최 선생한테 하세요.”
공우혁이 난색을 표하며 손을 내젓자 보건의들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 이렇게 웃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최고죠. 그럼 퇴근해 볼까요?”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밝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건의들은 태수와 일과 시간 동안 한 번씩 인사를 했기에 크게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인사를 나누기에 바빴다.
“잘 들어가.”
“내일 뵙겠습니다.”
인사하는 소리로 회의실이 가득 울렸다.
처음엔 어색한 목소리들이었지만 이젠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힘든 일을 겪어서 그런지 동지애로 가득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보건의들이 퇴근길에 오르는 중이었다. 태수의 곁으로 조현민이 다가왔다.
“최 선생, 잠깐 시간 있나?”
“네. 말씀하십시오.”
“다른 게 아니라 모레 흉부외과 수술에 집도를 좀 부탁할까 해서.”
조현민의 부탁에 태수는 수더분하게 승낙했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요. 혹시 까다로운 수술입니까?”
“그래서 부탁하는 건 아니고, 흉부 수술이 계속 잡혀 있어서. 교대로 집도를 하고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다들 지쳐 가는 거 같아서 말이야.”
“듣기만 해도 쉽지 않은 일정이네요. 그럼 말씀하신 수술은 제가 집도하도록…….”
태수의 말이 마무리되기 직전이었다. 성재경이 불쑥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나 번갈아 바라보며 나무랐다.
“잠깐, 거기까지. 최 선생, 나랑 상의도 없이 그렇게 승낙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
“아, 그게…….”
“그리고 조 선생, 누구 마음대로 최 선생한테 수술을 부탁하나?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지.”
성재경의 말에 조현민이 바로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최 선생이 외과도 아닌데.”
“외과가 아니라니? 처음에 외과로 들어왔으면 마지막까지 외과로 끝나는 거지.”
“그건 억지지. 최 선생이 외과 전문의 자격증만 있어? 흉부외과 전문의 자격증도 있으니까 당연히 흉부외과 수술을 부탁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지금 조 선생이 말하는 게 억지야. 지금도 최 선생은 엄연히 외과 소속이라고. 우리 쪽 수술도 남아 있는데 최소한 상의를 해서 스케줄을 조율해야지.”
“그래서 최 선생이랑 상의하고 있잖아.”
조현민과 성재경의 입씨름이 길어지자 태수가 나섰다.
“잠시만요. 두 분 모두 좀 진정하세요.”
“…….”
“…….”
성재경과 조현민의 입이 다물어질 때였다. 공우혁이 아직 퇴근하지 않았는지 세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최 선생은 엄연히 따지면 지금 외과도 흉부외과도 아니야.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난치병 수술이 끝난 상태라 대기 중인 의사라고.”
“그건 저도 처음 알았네요.”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거니까. 좌우간 성 선생이나 조 선생이 싸울 게 아니고 최 선생한테 스케줄을 상의해야 한다는 이야기야. 선택은 최 선생이 하는 거고.”
공우혁이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 줬다.
그제야 태수가 입을 열 기회가 왔다.
“그렇다는데요.”
“그래도 최 선생은 외과지.”
“이젠 흉부외과도 된다니까.”
성재경과 조현민은 쉽게 양보할 생각이 없는지 틈만 나면 투덕거렸다.
살짝 입장이 난처해진 태수는 더 끼어들 틈이 없어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때, 태수가 이상한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눈이 조금 커졌다. 성재경과 조현민이 아직 투덕거리는 중이라 그는 공우혁에게 물었다.
“공 선생님, 이기준 선생이 안 보이는 거 같던데 혹시 수술 중입니까?”
“이 선생? 아…… 먼저 전출 갔어.”
금시초문인 말에 태수가 살짝 놀랐다.
“다른 곳으로 갔다고요?”
“보건복지부에서 공문이 내려온 날 저녁에 날 찾아왔었어. 먼저 전출 신청을 해도 되냐고. 그래서 그러라고 했지.”
공우혁의 말에 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랬더니요?”
“그 자리에서 바로 전출 신청서 써 주던데. 아침에 상부에 제출하니까 마침 자리가 비는 보건소가 있어서 그날 오후에 출발했어.”
“혹시 왜 전출 신청을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끝난 마당이고, 위험한 환자도 없는데 계속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고. 같이 어울리던 보건의들도 오늘 아침에 떠났고.”
그 말을 듣고야 태수는 몇몇 보건의들이 보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과 별다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 아쉬움도 없었다.
“그랬군요.”
“덕분에 흉부외과가 좀 힘들어졌지. 그래도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남아 있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서 조 선배가 저에게 집도를 말씀하신 거였네요.”
“당장 가용한 인력이 좀 부족하니까 최 선생의 등장이 무척 반가웠을 거야.”
공우혁의 이야기가 끝난 순간 성재경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도 그렇지요. 외과에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이렇게 통보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공 선배가 말했잖아. 최 선생은 이제 외과 소속이 아니라니까.”
“회의할 때도 외과에 앉아 있던 거 몰라?”
“그건 익숙한 자리니까 앉아 있던 거지. 그리고 외과는 아직 의사도 많은데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자.”
조현민이 아쉬운 소리까지 했지만 성재경도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도 좀 쉬자. 그동안 최 선생 없어서 힘들었다고.”
“진짜 너무하네. 외과는 수술도 거의 끝나 간다며.”
“그쪽도 매한가지 아니야?”
“사람 참 양보를 모르네.”
두 사람의 입씨름이 여전히 계속되자 결국 태수가 나섰다.
“이러지 마시고요. 내일 차분하게 수술 스케줄부터 다시 확인하시죠. 시간을 조율하면 양쪽 다 수술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태수의 해결책이 탁월했는지 성재경과 조현민이 띄엄띄엄 말을 맞춰 이야기했다.
공우혁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기 급한 것만 생각하니까 시야가 좁아지지, 이 의사들아.”
“흠흠.”
“헛기침하면서 고개 돌린다고 달라지냐고. 좌우간 최 선생은 독단적으로 결정해도 되니까 저 화상들이 하는 말에 휘둘리지 말고 필요하다 싶은 수술에 참가하도록 해.”
공우혁의 말에 태수가 바로 대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푹 쉬어서 힘도 넘치고요.”
“수술 너무 좋아하지 마. 그게 뭐 좋은 거라고.”
“그동안 전 푹 쉬었잖습니까. 다들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다면 제가 좀 바쁘게 움직이면 된다는 거죠.”
“그렇지. 거봐. 최 선생은 이렇게 생각하는데, 둘이 그렇게 싸우면……. 됐다. 내가 말을 말자. 내일 보자고.”
공우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멀어져 갔다.
태수는 조현민과 성재경을 바라보며 재차 말했다.
“내일 스케줄부터 다시 조율하는 걸로 하시죠.”
“그렇게 하자고.”
“그럼 전 오늘 선약이 있어서 먼저 실례합니다. 내일 뵙죠.”
태수는 두 의사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몸을 움직였다.
생각해 보니 이건 기쁜 일이었다.
다들 또래 의사들 중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을 가진 보건의들이다. 그들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입씨름까지 한다는 게 기분 좋았다.
한편으로는 이들과 함께하는 가슴 뿌듯한 시간이 곧 끝난다는 데 대한 아쉬움도 들었다.
퇴근길에 오른 태수는 주차된 차에 올라탔다.
바로 시동을 걸려다가 멈칫했다. 아무래도 이기준에 대한 일이 마음에 걸린 탓이다.
태수는 더 시간 끌지 않고 휴대폰을 들었다.
뚜루루.
몇 번 신호음이 울리더니 곧 이기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를 한 걸 보니 군병원에 도착했나?”
“어떻게 된 거야?”
“공 선생이 이미 이야기했을 거 아니야.”
이기준의 목소리는 너무도 덤덤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히지 않았다.
궁금한 건 역시 직접 물어보는 게 정답이었다.
“꼭 그렇게 빨리 전출을 갔어야 했어?”
“이게 내 마음이 편해.”
“얼굴도 보지 않고 갈 정도로 급한 건 아니었지.”
“…….”
청산유수 같던 이기준의 목소리가 일순간 끊어졌다.
태수는 그런 그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이유가 뭐야?”
“글쎄. 지금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데.”
“그럼 나중에 들어야지.”
“궁금한 거 아니었어?”
이기준의 놀란 목소리와 달리 태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대답하기 싫어하는데 억지로 듣고 싶진 않아. 그리고 네 나름대로 이유는 분명히 있을 테고.”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고마우면 다음에 술 한잔 사.”
태수가 말하자 이기준은 슬쩍 뒤로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