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53
053화
* * *
지친 기색이던 시현의 눈에 빛이 켜졌다.
그가 정색을 하고 단에게 물었다.
“정말이냐, 방법이 있느냐?”
“있을 리가요. 나리님께서도 할 거 다 해보셨지 않습니까.”
단은 회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현이 물고 늘어졌다.
“안 될 일이라도 좋다. 말해보아라.”
“안 될 일이면 말씀드릴 필요가 없지요.”
“그러지 말고… 무엇이든 말해다오. 치풍관 때 보지 않았느냐. 마력석 한 개 두 개가 온강의 운명을 좌우할지 모를 일이다.”
시현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게 나오자 단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그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이 동네는 치풍관보다 사정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설마 여유도 없이 일을 벌이려고요.”
“아니다. 며칠간 보니 윤지관의 마력석 비축량이 겉보기만큼 많지 않다. 지금은 집안마다 위세를 드러내느라 마력석을 풀어 쓰고 있는데, 서로 실상을 숨기니 누구에게 얼마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대로는 막상 화급한 때 큰일이 날 것이다.”
시현이 손을 뻗어 단의 소매를 잡았다. 표정과 목소리가 간절했다.
“무엇이라도 좋다. 막을 방법이 있다면, 최소한 사람들이 현실을 인식할 때까지 시험을 연기할 방법이라도 있다면….”
단은 난처함과 짜증이 섞인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시현이 계속 기다리자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시험을 막는 건 못 합니다. 그 사람들이라고 자기들이 바보짓 하는 걸 몰라서 일을 벌였겠습니까? 뭔지는 몰라도 꼭 시험을 치러야 할 이유가 있는 거예요. 외부인이 나서 봐야 속사정을 모르고는 절대 못 막죠. 다만….”
단은 말을 끊고 흘깃 시현을 보았다.
시현의 진지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단은 포기한 듯 말을 꺼냈다.
“잘하면, 지금보다 덜 멍청한 형태로 진행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말이냐.”
“시험 기준을 바꾸는 겁니다.”
“그것은 이치가 명확한 제도라, 쉽게 손댈 수 없는 일인데.”
시현이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단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십쇼. 마력석을 써서 시험 보는 것 자체가 기준 밖입니다. 원래 상황이라면 격 있는 법술사는 마력석 안 쓰는 것이 불문율 아닙니까?
격 시험에 마력석을 쓴 이가 근 십 년간 여덟 관성 통틀어 딱 둘 있습니다. 명시적으로 금해진 건 아니지만 당연히 부정행위 아니냐고 한참 시끄러웠어요.”
시현이 눈을 깜박였다.
“아, 생각이 난다. 내 서격원 수학 동기 중에 한 명, 그것으로 말 듣던 이가 있었다. 하지만 기운을 어디서 끌어왔느냐보다 어떻게 구현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으냐. 결국 그이는 자격을 인정받았는데.”
“그게 서격원의 공식 입장이었죠. 하지만 그 격에 못 올라서 눈 벌게진 사람들은 다 난리가 났습니다.
다른 관성에까지 소문이 나고, 두 명 중 한 명은 자격 시비로 벼슬자리에서 밀려났습니다. 서격원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길 겁니다.”
“그랬느냐….”
시현은 얼떨떨해하며 수긍했다.
단이 이런 데에까지 박식한 것에 퍽 놀란 눈치였다.
단이 말을 이었다.
“권위를 세우려고 시험을 치는 것인데, 마력석을 쓰면 권위에 금이 갑니다. 서격원도 수험자들도 내심 신경 쓰고 있겠지요.
하지만 마력석으로 격을 얻되 명분과 권위를 완전히 지키고, 지금 온강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서격 제도가 선례로 있다면 어떻습니까. 다들 솔깃해하지 않을까요?”
서격원 사람들은 몰라도 시현은 확실히 솔깃한 얼굴을 했다. 그가 물었다.
“그런 제도가 있다는 말이냐?”
“있지요. 십육왕 시절 전쟁 중에 마력석을 써서 공을 세우고 격을 얻은 이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들은 다 공신이라 자격에 시비가 없었습니다.
법술사 책 중에서… 뭐더라? 이름은 잊었는데 박태구 예가 쓴 책에 사례가 세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서격원에 그 책을 던져주고 지금 같은 난시에 맞는 시험 기준을 새로 세우라고 하세요. 거석을 처치한다든가, 망가진 땅을 복구한다든가, 뭐든 실제적 공훈이 되는 거로요.
얼핏 듣기엔 그럴듯하지요? 하지만 현실에 적용할 만한 기준을 세우기는 꽤 어려울 겁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놈들이 싸우기 시작할 거고 나리님께서 싸움을 잘만 부추기시면 시험을 연기시킬 수 있습니다.”
단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이야기를 맺었다.
“그사이 석영이 또 나타나거나 거석이 습격해오면 뭐, 좋게든 나쁘게든 상황이 바뀌겠죠. 제 깜냥으론 이 정도 제안이 한계입니다.”
단이 말하는 내내 시현의 눈은 둥그렇게 커져 있었다.
그가 단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너는… 너는… 어떻게 이런 일을 다 아느냐? 대체 어쩌다가 법술사서까지 읽었느냐? 법술사서는 땅인 중에서도 법술사 연구하는 이 아니면 보는 이가 적은데…. 대체 넌….”
단이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어쩌다 알았는지가 중요합니까?”
“아니다. 박태구 예가 쓴 책이라 했느냐? 저택에 이르면 바로 찾아보겠다.”
시현은 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했다.
함씨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서둘러 사람을 불러 할 일을 일렀다.
호란과 단은 별채를 향했다.
호란은 존경하는 눈빛으로 단을 보았다.
땅님들 법술 시험 일까지 잘 알다니. 단은 정말 세상일을 모르는 게 하나도 없었다.
어려운 책도 뭐든지 읽을 줄 안다.
시문 님이 듣고 놀랄 정도였으니 단이 읽은 건 정말 끔찍하게 어려운 책일 것이다.
시선을 느낀 단이 호란을 노려보았다.
“술술 잘도 불었겠다. 앞으로 시문 나리한테 안 할 말은 너한테도 안 할 거야.”
“단은 어떻게 그렇게 똑똑해?”
“칭찬하지 마. 배신자가.”
“왜애. 시문 님이 너무 고생하셔서 불쌍했단 말이야….”
“세상에 불쌍할 사람 다 죽었네.”
투덜대며 걷던 단이 앞쪽을 손가락질했다.
“저 저 골칫거리들 몰려온 거 봐라. 속 편할 날이 하루도 없다.”
단과 호란이 머무는 별채 주변에 사람 여럿이 모여 있었다.
삼재와 관리인 노파에 그 외에도 더 있었다.
단은 갑자기 죽어가는 표정을 짓더니 호란의 어깨에 기대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별채에 다가가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고생하셨다 필요한 것 없느냐 소리가 쏟아지는데, 밥상은 물론 갈아입을 옷에 씻을 물까지 대령해놓아 더 부탁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다들 말 붙일 구실을 주워섬겼다.
삼재와 하늘인들은 호란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고 치사에 치사를 거듭하고 보답할 일이 없냐고 물었다.
관리자 노파는 단에게 호통쳤던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살갑게 굴며 상처에 듣는 약을 달여 오겠다고 자청했다.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시현이 둘을 두고 ‘법도보다 아끼는 내 사람’ 선언을 한 것이 이미 함씨 저택에 쫙 퍼진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시현은 머잖아 윤지관을 떠날 사람인데, 호란과 단에게 잘 보여서 무슨 득을 보겠다는 걸까?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단이 죽어가는 척을 열심히 해서 겨우 사람들을 쫓을 수 있었다.
부상 때문에 쉬어야 한다고, 몸도 씻어야 한다고 사정사정을 해서 돌려보냈다.
청소하고 잔심부름할 종을 보내주겠다는 걸 거절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
숨을 돌린 후 씻으려고 뒤꼍에 간 호란은 좀 당황했다.
씻을 물 담는 중간 크기 물독이 커다란 목욕통으로 바뀌어 있었다.
단이 먼저 물을 쓰고 난 뒤였는데도 사람 하나가 들어가고 남을 물이 담겨 있었다.
설마 정말로 여기 들어가라는 것은 아니겠지.
호란은 바가지로 물을 퍼서 아껴가며 씻고 방으로 돌아왔다.
단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밥상 앞에 앉아 고기만 골라 먹고 있었다.
평소 들어오던 작은 소반 대신 크고 번드르르한 팔각 소반에 좋은 반찬이 가득했다.
단이 놀리듯 물었다.
“어때? 윗전 총애 받을 만하냐?”
“별로….”
“처음이라 어색한 거야. 받다 보면 금방 익숙해질걸.”
“그러겠지. 남이 알아주고 챙겨주는 게 당연해지고. 자기 몫 아닌 거 받기 좋아하게 되고. 나중에는 받는 거랑 뺏는 걸 구별도 못 하는 사람이 되겠지. 추선이나 삼재처럼.”
호란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단은 좀 놀란 표정이었다.
호란은 눈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적수 보듯 노려보았다.
첫날 잘 차려진 밥상을 받았을 땐 고맙고 신기했다. 하란이 생각이 많이 났다.
둘째 날 저녁쯤 되니까 고마운 마음이 거의 안 생겼다.
이제는 상 앞에 앉기도 전에 반찬을 눈으로 고르고 있다.
이런 밥상을 계속 받으면 여행길에서 밥 먹는 게 예전만큼 즐겁지 않을 것이다.
호란은 벌써 윤지관이 싫었다.
이곳에서 받는 대접을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여기고 싶었다.
입어보면 생각보다 잘 맞을 게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시현을 졸라서 북쪽으로 출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사부가 윤지관에 돌아올 것이다.
모들은 큰 성에 모인 사람은 다 흩겠다고 말했다.
사부도 같은 이유로 윤지관을 표적 삼았을 것이다.
아무리 앞길이 급하다 해도, 다른 돌 인간도 아니고 사부가 사람들을 해치러 온다면 호란은 모른 척 떠날 수 없었다.
그리고 사부와 싸우든 안 싸우든, 세상의 종말이 오고 있다면….
자기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데, 자기보다 똑똑한 줄 알았던 땅님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싸움만 하고,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거고….
시문 님이 계시긴 하지만….
생각이 꼬리를 물다 시현에 이르자 어째선지 가슴이 더 답답했다.
세상의 끝 이야기를 했을 때 시현이 지은 표정이 마음에 콱 박혔다.
호란은 더 생각하기가 싫어졌다.
고민할 일이 너무 많은데 고민해서 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상 앞에 앉지 않고 방구석에 처박혔다.
단은 무엇을 짐작했는지 말을 걸지 않고 자기 밥만 먹었다.
* * *
서격원에 간 시현은 해가 진 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호란이 청지기에게 물었더니 아직 서격원에 계시고, 늦어진다 전갈도 왔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그래도 마음이 쓰인 호란은 오셨나 안 오셨나를 보려고 몇 번 더 중문 앞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중간부터 집안 분위기가 안 좋았다.
청지기와 종들의 얼굴이 어둡고 말수가 없어졌다.
중문 안에는 시현을 기다리는 것처럼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밖에서 온 전갈꾼들이 급하게 안팎을 오갔다.
간간이 사랑채 쪽에서 언성 높이는 소리가 들렸다.
시현은 밤중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가 중문 안에 들자마자 조부 함원규가 뛰쳐나왔다.
곧바로 불벼락이 터졌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이번 시험에 무엇이 달렸는지 알면서 네가 이렇게 훼방을 놓아!”
원규는 수염이 곤두설 정도로 분노해 있었다.
그의 고함 소리가 큰 저택에 다 울렸다.
하지만 시현은 태연했다. 그가 공손하게 말했다.
“훼방을 놓다니요. 할아버지께서 제게 이번 시험에 권위가 잘 서도록 도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고심하여 제안하였고 서격원에서도 좋아하니 곧 좋은 방도가 설 것입니다.”
원규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현을 손가락질했다.
“너, 너…. 네가 끝까지 모르는 척! 지금 서격 기준이 바뀌면 혜이 시험은 어찌하자는 것이냐!”
“혜 누님은 출중한 분이니 기준이 어찌 바뀌든 격에 달하실 것입니다. 누님은 다름 아닌 이 함씨 집안을 이으실 분이 아닙니까.”
시현이 말했다.
원규는 분에 찬 나머지 제 정자관을 벗어 힘껏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그가 다시 고함쳤다.
“이 은공도 모르는 것! 저것을 손주라고!”
시현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게 그가 지금 조부에게 지킬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격 시험이란 웃음거리 자체가 다 함씨 집안의 후계자 문제였다.
온강에서 큰일을 치르는데 함원규와 함씨 집안의 뜻이 아니고서는 될 것이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