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282
세번째 시련
플라워와의 첫 접선이 끝났다.
그 날 밤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즉시 침대에 누웠다.
정리할 생각이나 감정이 많았다. 구슬이 플라워라는 것을 알았을 때 몇 번이나 엎어버릴 생각을 했는지 몰랐다.
한 번 느낀 인상은 고치기 힘들었다.
‘세영이는 플라워에게 죽었지. 그렇다면….’
내가 플라워에 들어가면 그런 미래는 없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
그럼 산수유의 미래는, 스승님과 황도 누님, 백도의 미래는 어떻게 일구어 나가야 하나.
미래 생각은 하면 할수록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다.
-똑, 똑, 똑.
가볍게 울리는 노크 소리. 조금 기다리자 거기서 태양이 들어왔다.
“형님.”
“어, 왜 왔어?”
“그냥 이야기나 하려고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대충 걸터앉은 태양이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나는 침대에 누워 덩달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양 손을 모아 머리에 두고, 서로 한참이나 멍을 때렸다.
“형님.”
“응.”
“빈민가 태양 1장부터 9장까지 들려줄까요?”
“필요 없어.”
“쳇.”
잠시 침묵.
“그래서 어쩌시게요? 플라워.”
“글쎄.”
“저는 개인적으로 들어가도 나쁠 건 없다고 봅니다.”
의외의 발언이었다.
지금까진 내 선택에 맡겨왔던 태양이 직접적으로 의사 표시를 해오다니. 나무를 따먹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처음이 아닐까.
“구슬이 때문이냐?”
“아뇨. 미쳤다고 제가 그 년이랑 이야기 좀 나눠봤다고 추천하겠습니까? 형님 성격 잘 생각해보고 하는 말입니다. 형님은 너무 여자를 아껴요.”
“그게 갑자기 왜 나와?”
“조금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차차 설명하자는 거죠.”
그렇게 내가 주변 인연을 아끼는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과거에 가기 전에 만난 인연들은, 이상하게 내 쪽에서 집착하는 경향이 있긴 했다.
이유는…. 이런저런 게 있다.
천마 그 노인네의 훈련을 받아가면서 아픈 와중에 떠올린 게 그 사람들이었고.
애초부터 내 생명은 그녀들이 없었으면 보장되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태양은 내 일을 어느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충고를 해주려나, 생각할 즈음.
“감당할 일이 너무 많으면, 쥐고 있는 몇 개 정돈 포기하는 게 맞을지도 몰라요.”
“그래?”
“……어쩌면 형님이 해야 하는 일들이, 형님의 연인분들에겐 큰 실례가 되는 일일 수도 있구요.”
아마 그렇게 될 일이 많을 거다.
“당장 목령왕의 힘을 뽑아내려면 여자들을 꼬시거나 강제로라도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형님 연인분들이 옳다구나 좋아하겠습니까?”
“아니겠지.”
“그렇다고 선택을 미루면?”
그땐 내가 죽는다.
“반대로 어중간한 태도로 있으면, 그땐 형님의 연인분들의 목숨이 위험하죠.”
“그러니까 그럴 바에 다 버리라고?”
지금까지 쌓아온 관계. 명예. 돈 전부 다 내려놓고.
신분에 이름마저 버린 뒤 이세영이나 진달래, 산수유, 천도는 모르는 장소에서 내가 해야할 일을 하라는 말이었다.
“…쉽게 결정하긴 힘든 일이네.”
“크흐흐.”
내 머뭇거림에 태양이 비웃었다.
“미련한 형님. 제가 왜 형님한테 목령왕 자리를 그대로 맡긴 지 아십니까?”
“뭔데?”
“아~ 이것도 이야기 길어지는데. 요점만 말할게요. 음. 형님은 그래도 그 힘으로 안아 볼 사람이 있잖아요? 시바라는 공주님도 그렇고. 산수유 누님도 그렇고.”
태양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썩 유쾌하게 중얼거렸다.
“근데 저는 진즉에 다 뒤졌거든요.”
어깨를 한 번 으쓱인 태양이 다리를 꼬왔다.
달달달. 몇 번이나 발이 떨렸다. 입술은 새파래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모질지 못해서. 적을 고르지 못해서.”
태양이 말했다.
“형님.”
나직히.
“제가 형님을 왕으로 인정한 건, 힘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다지 제가 이루고 싶은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한 말이다. 목태양 이 녀석에게 약간의 꿍꿍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하던 내 의심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저처럼 미련하게 살지 마세요.”
목령왕의 힘을 이어받은 존재.
어쩌면 나와 마찬가지로, 이 녀석도 세계수와 플라워 사이에 여러 일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 목소리에는 요즈음 잘 볼 수 없는 진정성이 묻어나왔다.
사뭇 회한에 짙은 태양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 * * * * * *
세 번째 시련은 나에게도 제법 익숙한 개념의 수업이었다.
멘토. 멘티.
처음 백도와 만나고 딱복이니 물복이니 말싸움을 할 때가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지잉, 지이잉-]다시 모습을 드러낸 카메라 아티펙트들이 공중을 떠다녔다.
이젠 이것도 익숙해져서 렌즈에 내 가면이 비추자 슬쩍 고개를 숙여 인사해 주었다.
참가자는 어느덧 자릿수가 달라졌다. 몇 번의 시련만 더 거쳐가면 숲지기 선발전도 끝을 맞이한다.
아직 한 달하고 조금 더 지난 것 같은데. 상당히 선발전의 진행이 빨랐다.
‘플라워가 일을 준비할 틈도 없게 하려는 건가.’
정신을 차리고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
앞에는 참가자의 수 만큼이나 많은 A, S급 헌터들이 교황의 앞에 줄지어 있었다.
“너희들은 막 재능을 개화하기 시작한 젊은 피들이다.”
한창 이어지는 연설. 교황의 말을 따라 주위 헌터들이 고개를 작게 숙였다.
“그리고 이 위에 있는 영웅들이. 오래전 선발전에 있었던 너희와 같은 신동들이었지.”
이전 숲지기 선발전에 참가했던 헌터들이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들 역시 과거에는 그보다 더 경험이 많은 헌터들에게 가르침을 구했을 것이었다.
“가르침은 이어진다. 위대한 마법도, 검술도. 삶의 지혜와 세계수님의 가호도.”
그 마지막 말을 끝으로 교황은 단상에서 내려왔다.
“앞선 숲지기들이 그러했듯. 어린 숲지기 역시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이제는 그 힘을 이앙할 차례다.”
헌터, 영웅 등등. 뛰어난 힘을 가진 인물들이 자리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멘토의 선정은 완전히 자유로웠다.
우선 첫 번째와 두 번째 시련을 본 멘토들이 알아서 멘티들을 선별하고 선택하는 과정을 거친다.
자신의 능력이 멘티에게 도움이 되는가, 혹은 자신이라면 이 멘티에게 더 좋은 조언을 할 수 있는가가 주요한 기준이 된다.
그렇게 멘토들이 선택하면 그다음은 멘티들의 차례.
멘토들의 능력을 보고, 그의 시련과 수업을 받아보고 싶다고 생각하면 승낙하면 세 번째 시련 성립이다.
선택을 받지 못하면 어쩌나,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
이 자리에 올라온 것 자체만으로 재능이 입증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건 그렇고.”
나는 받은 안내문을 펼쳐 헌터들의 이름들을 확인했다.
아는 이름들도 있고, 최근 인터넷을 많이 돌아다녀서 기사같은 걸로 들어본 사람들도 많았다.
TV 속 예능을 보면 항상 게스트로 출연하곤 하는 국가 대표나 유명한 헌터.
그리고 정말 길드에서 실력파로 입증이된 헌터 등등.
“……S급이 왜 이렇게 많아?”
A급도 많이 섞여 있지만, 내가 본 것만 해도 S급이 마흔 명은 넘게 보인다.
목령왕이랑 천마 이전에는 얼마나 많았던 거지.
하긴 한국에서도 한 둘이 아닌데, 전세계에서 몰려드니 당연히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많은 건 당연했다.
세계적인 대회라 그런지 인물 섭외력도 장난이 아니다.
-팔랑, 팔랑.
종이를 넘기면서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기를 한참.
누군가 내 옷깃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여.”
익숙한 톡 튀는 목소리. 고개를 돌려 보니 땅딸보 한 명이 히죽대며 서 있었다.
참피나무다.
“왜 여깄어요?”
“시발 있으면 안 돼?”
“이런 대회 싫어하시는 거 아니였나.”
종이를 몇 장 더 넘겨보니 손에 브이자로 하고 있는 참피의 증명사진이 떡 하고 박혀 있었다. 그 옆에는 엘레나. 그녀가 싫어하는 인물이다.
“S급 많지? 최근 좀 찍어내서 그래.”
“아. 그렇구나.”
“98년 기준으로 헌터증 색깔이 조금씩 밝아지는데. 그보다 더 오래된 놈들이 진짜 실력자다.”
“근데 왜 기준이 98년입니까?”
참피의 말에 내가 의문을 섞어 답하자, 그녀는 입꼬리를 피식 올리며 자기 헌터증을 내보였다.
검은색에 약간 보라색이 섞인 헌터 신분증. 상단에 발행 날짜가 98년으로 찍혀 있었다.
그냥 자기가 98년 출신이라 그런가 보다.
“그래서, 멘토 해주시게요?”
“미쳤냐? 내가 너한테 가르칠 게 어디 있다고 내가 네 멘토를 해? 우리 산수유라면 모를까.”
혹시나 했는데 아니었나.
자기 허리에 양손을 놓은 참피는 콧바람을 내뿜었다.
대체 어떤 성장기를 겪어오면 이런 유아 체형이 될 수 있는 걸까.
머릿속에 잠시 그 생각이 스쳤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기로 했다.
“…뭐. 그리고 너는 이미 임자 있어. 산수유도.”
“임자요?”
“얼마 안 가서 알게 될 걸. 아, 마침 오고 있네. 저기 봐.”
참피의 손가락이 오른편을 가리켰다.
덩달아 눈을 옮기자 경쾌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복장이 눈에 띄었다.
새하얀 구두를 치마폭 안에 감춘 기다란 드레스와, 검은색 나비 인장.
자신의 얼굴을 가릴 정도로 커다랗고 새하얀 모자는 꼭 마녀를 연상시킨다.
개화기 유럽을 연상시키는 의복이었다.
신기한데, 신비하다. 현대의 의복을 입은 다른 멘토와 멘티를 곁에 두고 있음에도, 딱히 이렇다 할 괴리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만큼이나 의복을 잘 소화하고 있다.
이런 느낌을 백도에게서도 한 번 느껴본 적이 있었다.
여성은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또각또각. 여유를 가진 걸음으로 몇 발자국.
“그럼 난 간다.”
“아니 그래서 저 분이 누군데요?”
“몰라?”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어야지.
저런 복장을 입을 법한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선 코스프레에 미친 아오리밖에 없다.
참피는 시큰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그 여자를 가리켰다.
“현자.”
현자. 세피로트의 나무.
지식을 관장하는 세계수의 보호자.
참피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 선 여자는, 불어오는 바람에 멈춰서 손을 올려 모자를 억눌렀다.
챙이 살짝 들려지며 그녀의 얼굴이 내 눈 안에 들어왔다.
은발의 반묶음 머리에 웃는 상. 마치 공작의 부인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슬쩍 웃어왔다.
“안녕하세요. 이시헌 참가자.”
키가 상당히 커서, 다른 여자들처럼 나를 위로 올려다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보다 큰 건 아니고 꽃발을 딛으면 정확히 시선이 닿을 키다.
현자 세피로트. 들은 적은 있다.
외모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 처음 봤지만.
“혹시 멘토 자리 남았나요?”
“…아. 예.”
모습에 정신을 팔려 멍을 때렸다.
현자는 내 반응에 가볍게 손을 올려 웃고는, 내 뒤에 있는 참피는 바라보지도 않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이시헌 참가자가 마법사이기도 하니까, 제가 멘토를 했으면 하는데. 어떨까요? 다른 멘토님들 이야기도 들어보실래요?”
이윽고 해 온 말은 마치, 이번밖에 기회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상냥하긴 한데 듣고 있다 보면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다.
현자.
세계 최고의 마법사이자 학자. 그리고 지식인.
가장 강한 사람을 꼽으라 할 때는 사람마다 의견이 갈리는 반면, 마법의 최고를 말할 때는 모두가 입을 모아 한 사람만을 말한다.
……말해서 무엇할까.
지금 당장 내가 쓰는 공간 마법도 이 여자의 작품이다.
원리부터 발현까지 모두 현자가 직접 일궈낸 것들이다.
나는 그것을 따라간 것 뿐.
이 상황에서 찾아볼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갑시다 멘토님.”
현자라는 작자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 이름값은 현대에는 천마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이건 못 먹어도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