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40
240====================
싸움은 남의 땅에서
파치지직-!
마법진 안에 갇힌 빛의 소용돌이, 실상은 단순한 마력덩어리가 아니라 정령이라 부를 수 있는 나름의 지성을 갖춘 존재의 모습이다. 갑작스레 소환되어 이리저리 봉인진 안을 돌아다니는 해당 정령을 보며, 레야가 두어 차례 이런저런 마법을 사용했다.
소환된 정령의 속성과 상태 등을 알아보는 간단한 관찰 마법이다. 또한 그것과 소통하는 기능 역시 있는.
마법이 성공적으로 시전되고 레야의 머릿속으로 특정한 의념이 텔레파시처럼 흘러들었다.
정령은 말을 하지 않는다. 말 대신 채널이 연결된 상대의 머릿속에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전송한다. 어떤 면에선 인간의 언어체계보다 더 고등한 소통방식이라 할 만하다.
레야는 이와 비슷한 실험 아닌 실험을 벌써 수십 차례나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가 뭘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섯 고룡의 지식을 이어받은 후신, 마법이라면 어떤 분야를 모르는지부터 따져보는 게 더 빠르다. 그럼에도 이런 기초적인 마법실험을 하고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소환된 정령들의 상태가 영 이상했기 때문이다.
“음……”
혹시 에레도스 시스템 때문인가?
여태까지 백이 넘는 개체를 소환했는데 전부 제대로 말을 들어먹질 않는다.
마치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분명 채널은 연결되었는데 뻔뻔하게 자신의 뜻은 전해오면서도 레야의 뜻은 알아들은 척을 않는다. 그럴 리 없는데도 레야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설마 이 많은 정령들이 전부 특정 존재와 계약이라도 한 것은 아닐 테고, 당췌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가 정령들을 통한 인공지능 시스템의 구현이란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그것이 정령들이 딱히 싫어할 리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정령을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24시간 휴식도 없이 계속해서 대량의 정보를 관리하고 조정해야 하는 일은 정령에겐 아주 쉬운 일이다. 굳이 좋아한다 아니다를 따지면 좋아한다 쪽에 가깝다.
그런데 대체 왜, 정상적으로 소환되어 나타났음에도 그의 뜻을 듣는 척도 하지 않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검증해봐도 소환 매커니즘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가 알던 전통적인 방식에서부터 새로 만들어낸 방식까지 모두 시도해봤으나 결과는 같았다.
정말로 에레도스 시스템 때문인 것인가? 아니면 어떤 대단한 존재나 거대한 세력과 단체로 계약이라도 맺었나? 그게 대체 말이 되나? 그럴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되고?
작정하지 않고서야 제 아무리 대단한 존재거나 세력이라도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설령 할 수 있어도 그럴 이유가 없다.
레야의 눈이 가늘어졌다.
평화적이고 정석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으니, 이제는 정말 한 가지 방법 뿐이다. 다소의 부작용이 있을지라도 원인부터 알아내는 것이 우선.
그래서 레야가 손을 뻗었을 때, 그의 손에서 발현된 마법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파치지지직!
봉인진 안에서 거센 마력의 스파크가 터졌다.
정령이 들리지 않는 비명을 내지르며 여태까지의 평화로운 태도를 버리고 격하게 회오리치기 시작한다. 사방으로 날카로운 마력파를 쏘아내며 발버둥치는 모습은 흡사, 공포영화에서 나오는 악령이 어떻게든 상대를 죽이기 위해 발악하는 것처럼 살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애초에 봉인진을 설치한 이유가 이런 것이었다. 큰 힘 들이지 않고 소환한 정령을 안전하게 제압하기 위해서.
그러나 정말 의외롭게도, 상황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파치치치지지직-! 파칙! 파치칙!
점점 더 거세지는 스파크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발버둥치는 정령의 힘이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고도 모자라 점점 더 강해진다.
레야가 다른 한 손까지 보태어 힘을 더하자, 눈에 보일 정도의 푸른빛 마력이 공간을 진하게 물들이며 마법진으로 흘러들어갔다.
드드드드득-
점점 더 반발력이 강해지며 방 전체가 들썩였다. 그러나 아직도 정령이 제압될 기미는 없다.
천하의 레야마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당황하는 사이, 사납게 울부짖으며 발광하던 정령의 몸체를 찢고 이질적인 빛무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레야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 폴 바 르!! –
콰과아아아앙!!
성 전체를 울릴 정도의 고함과 동시에, 급격하게 한계점에 이른 빛이 폭발하며 사방을 빛으로 물들였다.
@
세현은 오랜만에 아엘라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유르미아가 자신의 방에서 낮잠에 빠진 사이, 업무를 서둘러 처리한 그는 아엘라의 방에 찾아가 차를 얻어마셨다.
물론 차만 얻어마신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잠든 사이 금슬 좋은 부부는 무엇을 할까. 많은 일을 하겠지만 둘 사이에는 한동안 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그렇게 한차례 성벽을 쌓아올린 후 씻기를 마치고 마법으로 어느새 깨끗해진 침대에 누워 다정한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때 아닌 고함, 그리고 성의 최상부까지 울리는 진동.
거의 동시에 몸을 벌떡 일으킨 둘이 그야말로 한순간에 옷 입기를 마쳤다.
“유르미아 데리고 천공성으로 가.”
– 알겠어요. –
하필 아래의 용인 본성에 있을 때 일이 터지다니, 아니,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을 때 터져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함께 방을 나온 그는 아엘라와 갈라진 후 아래층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사이에 첫 번째보다 훨씬 더 큰 폭음과 진동이 터지며 성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크게 진동했다. 무너질 것처럼 울려대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마치 성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세현은 허공을 접어 달리듯 순식간에 굉음의 진원지에 도착했다. 그런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아래층 바닥과 윗층 천장을 부수듯 걸치고 생겨난 거대한 붉은빛 포탈과, 그곳에서 뛰쳐나오고 있는 정체불명의 적들, 그 적들을 막아내고 있는 레야의 마법들이었다.
콰과과과광!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는 빛으로 생성된 마법진, 그곳에서 충격파를 뿜어내며 레일건처럼 쏘아지는 마력 투창,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이는 반항조차 못하고 찢겨죽을 만한 강대한 위력을 가진 공격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포탈에서 뛰어나온 것들은 그 투창들을 별다른 피해 없이 막아내고 있었다.
전신에 백색과 검은색 뒤섞인 갑옷을 걸치고 통일된 검과 방패를 들었다. 뒤로는 적당한 두께와 길이를 가진 파충류의 꼬리가 달렸고, 이마 위쪽으로 이십여 센치는 넘을 법한 뿔 한 쌍이 돋아났다. 등 뒤로는 날개까지 달렸다.
용인족들이다.
베이마라와는 달리 이목구비가 훨씬 더 인간에 가까웠고 눈동자는 전부 초록색이다. 그들은 새로 나타난 세현을 발견하고 레야가 쏟아내는 폭풍 같은 공세 속에서도 무기를 겨눴다.
짧은 영창과 함께 뻗어낸 검에서 백색 광선이 쏘아져 세현의 심장을 노린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빛무리는 채 닿기도 전에 소멸했다. 그는 문답무용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휘두르는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공간이 통째로 절단나는 듯한 섬뜩한 소음, 직후 레야의 마법마저 그럭저럭 방어해내던 그것들의 허리가 전부 두 동강나며 쓰러졌다.
마치 폭죽처럼 뿜어지는 대량의 핏물들 사이로 세현은 게이트를 향해 다른 한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꽈드드드득!
사방에서 생성된 자색빛 기운들이 게이트를 둘러싸고 강제로 찌그러트리기 시작한다.
거대한 얼음을 압착하여 박살내는 듯한 격한 소음들이 쉬지 않고 터지는 사이, 레야는 몸이 두 동강나고도 살아서 발악하며 마법을 영창하는 그 정체불명의 용인족들을 철저히 확인사살 해갔다.
– 이건 말도… 안 돼! –
죽어가던 용인족 중 하나가 그렇게 신음처럼 외친다. 대답 대신 날아든 백색의 마력 투창이 놈의 머리통을 박살내며 완전히 숨을 끊는다.
게이트는 더 이상 덩치 큰 용인족들이 건너오기 힘들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렇게 얼추 상황이 마무리되는 듯하자 세현이 레야를 쳐다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나도 모르겠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긴데, 내가 전에 정령을 사용한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 –
“그 연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 아무리 소환해도 정령들과 소통을 할 수 없더군. 내 지식으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 그래서 원인을 알아내고자 조금 격한 방법을 썼는데, 갑자기 폭주하는 정령을 제물로 게이트가 생겨났다. 아무래도 소통이 안 됐던 원인이 정말 말도 안 되지만 이놈들…… –
끼이이이이이이잉-!!
갑작스레 둘의 대화를 끊어내며 고막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굉음이 울렸다. 근원지는 거의 다 닫혀가던 붉은빛 게이트!
그것은 놀랍게도 세현의 압력을 버텨내더니 오히려 약간이지만 크기를 불렸다.
“……이것 봐라?”
세현이 인상을 쓰고 한 층 더 힘을 가하자, 더 거대한 소음과 함께 방 전체가 들썩이며 자잘한 충격파가 연속으로 발생했다.
– 빌어먹을. –
레야조차 견디기 힘들 엄청난 소음, 그가 마법을 펼쳐 소리를 줄이려 시도했으나 공기가 아닌 마력을 매질로 퍼지는 아예 다른 종류의 소음이었기에 좀처럼 통제가 되질 않았다.
– 전원 대피!! –
레야는 소음을 죽이는 것을 포기하고 되레 자신의 목소리를 더 키워 사방에 명령을 내렸다. 아무래도 흘러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
그 사이 세현은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다루는 싸움에 꽤 고전하는 중이었다. 그가 이 세상의 신이지만 제 아무리 신이라 해도 모든 분야에 능통할 수는 없다. 그나마 신이니까 전혀 구조와 원리를 모르는 마법적인 게이트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건너편에서 그를 상대로 힘싸움을 벌이는 존재의 실력이 심상치 않다. 그러나 꼭 안 좋게 볼 것만은 없는 것이, 세현은 그 상대의 수를 낱낱이 살피며 점점 더 요령을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얼추 대등하던 싸움은 일 분 정도가 흐른 후부터 그에게 기세가 넘어왔다. 더 강렬해지고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자색빛 의형기가 잠시나마 크기를 넓혔던 붉은빛 게이트를 이내 종이박스처럼 찌그러뜨려간다.
다시 수십여 초에 달하는 힘겨룸 후, 결국 게이트는 완전히 닫혀버렸다.
손을 털어내며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쉰 세현이 다시금 곁에 선 레야에게 시선을 던졌다.
“용인족들이었지?”
– ……아마도. 말이 하다 끊겼는데, 내가 정령을 소환하는 곳의 정령들이 전부 이놈들과 이미 계약을 맺은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모든 상황이 설명이 돼. –
“그러면 혹시 짐작가는 곳이라도 있나?”
– 있지. –
별로 기대하고 던진 질문이 아닌데 예상 외의 대답이 돌아온다.
– 메 헤브아 스툰. –
“아.”
용들의 성지.
세현이 사용하는 회상과 지배의 모래시계를 만들어낸 곳.
“레야, 네가 한 일은 그냥 정령 하나를 조금 괴롭히려 든 것 뿐 아닌가? 그런데 용들의 성지라는 곳에서 다짜고짜 게이트를 만들어내더니 공격을 가해온다고? 혹시 내가 도착하기 전에 무슨 대화라도 있었던 거야?”
– 아니. 그런 건 없었어. –
이후 레야는 짧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 아무래도 성지의 용들은 엄청나게 호전적인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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