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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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변해버린 서승태의 모습은 서영환과 정현욱에게도 꽤나 충격적이었다.
경악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만 보더라도 명백하게 인간 아닌 존재가 된 그에게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나 그런 반응은 정현욱이 비교적 심했다.
무림에 있을 시절, 남궁세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간지 얼마 후, 그는 세가의 임무를 받고 마인(魔人) 소탕에 나선 적 있었다. 세가의 정예들을 줄줄이 끌고 나간 임무였기에 위험할 일은 조금도 없었다. 행위만 따지자면 이전에도 몇 번씩 해보았던 산적무리 소탕과 별 다를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게 뇌리에 깊이 박혀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토벌 대상이었던 마인이 보여준 기괴한 외양과 미쳐 날뛰던 그 무시무시한 발악 덕분이었다. 놈의 눈은 온통 검은색이었고 전신에는 핏줄이 불거진 채 멀리서도 피부가 저릴 정도의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서승태의 검은 눈을 보고 그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승태 역시 정현욱을 새삼스레 다시 보게 되었다.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 된 덕에 정현욱의 실력이 직접적으로 와닿았던 탓이다. 서영환이야 워낙 전투 시 보여주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화려하니 그 강함을 그럭저럭 잘 체감하고 있었지만, 정현욱의 경우는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보다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한 사람의 외양과 그에 대한 서로의 생각은 조금씩 변했으나, 그들은 여전히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서승태는 자신의 변해버린 종족값으로 이전에는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동쪽…… 조금 멉니다.”
하드샤의 성벽 위에서 지팡이를 들어올린 채 정신을 집중하던 그가 말했다.
지팡이 끝에서부터 약간 떠오른 채 동그랗게 뭉친 검붉은 핏물, 그것은 끊임없이 출렁거리며 밤송이처럼 이곳저곳 삐죽한 가시들을 세워댔다. 그 가시들 중에서도 특히 긴 것이 가리키는 방향이 바로 동쪽이었다.
서승태가 변한 종족, 아크리치 마젤란에 의해 창조된 ‘뱀파이어’는 켈데브렘의 세계에서 살아가던, 또한 켈데브렘의 세계에서 가장 심도있게 연구된 종이다. 또한 그것으로 자신들의 부활을 꿈꾸기까지 했다.
대마법을 시행한 당사자와 연관이 없을 리 없다.
켈데브렘은 사로잡았던 피실험체처럼 종족이 변해버린 것은 아닌 듯했지만 필시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고, 그런 아크리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요새 바깥이군요. 우리가 모르는 통로라도 있었던 듯합니다.”
“……엄한 곳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소리군.”
서영환이 미간을 구겼다. 가장 요주의 인물이 정작 감시하던 곳엔 있지도 않았다니,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온전히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입장에선 달가울 리 없다.
하지만 안 좋은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혼자군요.”
“혼자?”
“그놈이 혼자 있다고요?”
“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혼자입니다.”
“당장 갑시다. 요새 감시는 포기하지요.”
방향과 대략적 거리를 추측할 수 있다면 잡는 것은 금방이다. 놈을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그마치 남색 등급 아닌가? 류한이 아닌 어지간한 국가는 존망을 걸고 전투에 임해야 하는 수준의 괴물이다.
– 이동하겠습니다. –
그림자 악마, 관리자가 서영환의 지시를 받고 순식간에 성 안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하드샤는 서승태가 가리킨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공성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 엄청난 공방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기후나 지형에 관계없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천공성이 이동하는 와중 서영환은 후방으로 돌리던 병력들에게 부지런히 명령을 내렸다.
동쪽에 자리한 이들에게는 대기 명령을, 근처의 인원들에게는 포위망 형성을 위한 대략적인 위치를 지정했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지도 쯤은 통째로 외워버리다시피 했기에 그의 명령에는 거침이 없었다.
“가까워지는 중입니다.”
서승태의 말이다. 놈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는 뜻과 진배 없었다.
슬슬 유렵 지역의 규합이라는 할일도 그럭저럭 마무리되어가는 중이었다. 이 지겨운 대치를 언제까지 이어가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아주 잘 됐다.
총지휘관인 서영환은 물론이고 꽤 오랫동안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을 보지 못한 정현욱도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나름의 각오를 다졌다. 하루하루 긴장을 놓치 못하던 휘하 전투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켈데브렘을 잡는 것이 성공하면 다음 차례는 요새를 파괴하는 일이다. 마침 이번에 규합한 유럽 지역 세력들과 협동하여 작전을 펼치면 그보다 이상적일 수는 없다.
“제발 계획대로만 되자……”
서영환의 그 중얼거림을 듣게 된 부관 카이마스 사이지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든 게 계획대로만 되어도 가장 이상적인 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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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숲, 커다란 나무들이 무성해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장소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사방에 흩뿌려진 핏물과 정체 모를 껍질 및 살점들이 초록빛 일색이어야 할 숲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참혹한 학살의 현장은 근 백여 미터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이 거미 괴물들의 군집 특성 덕에 단체로 전투에 임했던 탓이다. 그러한 피의 길이 이어진 끝에선,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큰 거인 한 명이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지는 나무에 기대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켈데브렘.
제대로 씻지 못해 지저분해진 외견에도 불구하고 그 눈부신 외모는 전혀 느낌이 죽지 않았다.
타닥- 탁-
그의 앞에 놓인 적당한 크기의 모닥불에서는 거미의 하얀 살점들이 나뭇가지에 꿰어진 채 한창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다.
제 아무리 강력한 영웅이어도 생명체인 이상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더군다나 몸상태가 좋지 않은 만큼 더더욱 많이 먹어야 했다.
요새를 나선 후부터 그는 어마어마한 양의 고기를 먹었다. 익혀먹기가 여의치 않을 때는 생고기를 뜯기도 했다. 그것만이 지상과제인 것처럼 온 시간을 먹는 것에 쏟았다.
덕분에 최악을 달리던 몸은 그럭저럭 괜찮아졌다고 할 만큼 회복되었다.
두 번의 대마법을 무리해서 펼친 만큼, 정말 제대로 된 정양을 하지 않는 이상 영구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타격을 입긴 했지만, 당장 움직이는 것에 지장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몸을 100% 완벽하게 회복할 생각까진 없었다.
마지막 대마법을 무리없이 시행할 수 있을 정도만, 그리고 그에 필요한 적절한 왕의 그릇을 무사히 생포해 올 정도만 회복하면 된다. 그 정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후우……”
익어가는 거미고기를 지켜보던 그는 문득 서영환을 떠올렸다.
그는 여태껏 켈데브렘이 발견한 인간들 가장 훌륭한 왕의 그릇이었다.
정현욱이란 인간도 강하긴 했다. 하지만 서영환의 잠재력이 더 뛰어난 듯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정현욱보단 서영환이 더 적합하다.
생포할 수 있었다면 정말 최선이었을 텐데.
최고의 제물을 바탕으로 온전히 강림한 왕은 비틀린 모든 것을 순식간에 바로잡고 잊혀진 그들의 맥을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과 함께 거미고기로 향했던 시선이 문득, 그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이 손으로 네보니의 목을 꺾었다.
또한 대검을 휘둘러 몸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녀는 피에 대한 욕망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죽이지 않았다면 그가 죽었을 거다. 아직 할 일이 남은 상태에서 그리 허망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
그리고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한 답을 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리 덧없이 죽을 수도 없었다. 어쩌면 이쪽이 더 큰 동기였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목을 물렸을 때 보였던 하늘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때 자신을 살린 것은 정녕 무엇이었을까.
일족의 부활을 위한다는 숭고한 신념인가, 개죽음 당할 수는 없다는 지극히 본능적인 생존욕구인가.
사실 어느 쪽이든 관계없다. 둘 중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중요한지 따질 필요도 없는 문제다.
허나 상황이 이래서인지, 그 별 중요치도 않은 생각을 좀처럼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네보니는 그가 직접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돌봐 키운 제자 비슷한 존재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네보니는 실상 가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가장 약해질 게 분명한 순간에도 곁에 두었다. 그녀가 피의 욕망에 계속해서 시험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러 추억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생크림을 입가에 묻히고 자신을 향해 까르륵 웃던.
그네를 타다가 자신을 발견하고 폴짝 뛰어내려 달려오던.
자신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무예를 단련하며 땀 흘리던.
첫 공훈을 세우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왕에게 직접 포상을 받던.
멸망해가는 세상의 풍경을 등지고 그를 돌아보며 애써 웃어보이던.
“미안하구나……”
어쩌면 그는 자신의 행동이, 타락에 기대어 운명을 비트는 선택이 정녕 옳은 것이었을까 시험해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네보니가 욕망을 이겨내고 그를 무사히 부축해 성지로 데려갔다면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을까.
“내가 미안하구나……”
그는 고개를 숙였다.
애써 손질해 모닥불에 익히던 거미고기가 이제는 거멓게 타들어가며 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침묵에 빠져 고개를 숙인 채였다.
앞만 보고 달려갈 때는 괜찮았다.
그러나 첫 번째 대마법을 실행하기 직전부터 생겨난 심마(心魔)는 그를 차츰차츰, 그리고 확실하게 갉아먹고 있었다.
바로 그런 때였다.
영원히 침묵하며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영웅이 벼락처럼 손을 뻗어 옆에 놓인 대검의 손잡이를 쥔다. 몸에서 뿜어진 광휘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주변의 모닥불을 포함한 모든 것을 거칠게 날려버렸다.
꽈앙-!!
그리고 동시에, 하늘에서부터 내리꽂힌 붉은빛 광선이 어느덧 휘둘러진 대검에 가로막혀 엄청난 충격파를 발생시켰다.
[광휘가… 나의 적을 베어내리라!] 콰드드드득-!내리꽂히던 붉은빛 에너지 광선이 뿜어진 은빛 마력의 칼날에 두 갈래로 쪼개졌다. 양옆으로 갈리진 광선이 엉뚱한 숲을 박살내며 대지를 뒤엎는 사이, 켈데브렘은 엄청난 속도로 땅을 박차고 몸을 피했다.
쭈우우웅-!
그러나 붉은빛 광선 역시 도주하는 켈데브렘을 어마어마한 속도로 추적했다. 하늘에서 쏘아지는 광선의 발사각은 조금만 움직여도 빠른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있다.
좀처럼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가던 켈데브렘의 전방에서 돌연 화염이 치솟았다. 무성한 나무와 풀숲 사이에서 뿜어진 주홍빛 화염이 한순간 모든 것을 불태우며 그를 노리고 일직선으로 쏘아져온다.
푸화악!
은빛 광휘와 화염이 교차하며 둘 모두 스러졌다. 강행돌파를 시도하려던 켈데브렘은 전방에서 수십의 다른 인간들의 기척을 감지하고 급히 방향을 틀었다.
쾅!
대지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거체가 눈 깜짝할 사이에 90도 이상 방향을 튼다. 홍염의 뒤를 따라 날아든 각종 탄환과 마법들은 채 적중하지도 못하고 허공을 꿰뚫었다.
“잡아라!”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추격적인 시작됐다.
켈데브렘은 자신이 몰이당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몸상태가 멀쩡하지 않다지만 그는 여전히 강하다.
작정하고 도망치면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몰라도 일단 이곳을 벗어난 후 다시 몸을 숨기면 될 일.
그렇게 생각하며 가로막는 것들을 요리조리 피해 달려가던 그의 앞에, 별안간 어둠 하나가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휘두른 대검과 검은빛 마법의 수정이 충돌하고 빛이 번쩍였다. 뒤따른 폭음과 진동 사이에서 신경을 긁는 주문소리가 귓가에 꽂힌다.
[비탄에 울고 절망에 잠겨라, 증오가 눈을 가리니 가시밭길을 달려가리라.]빠르게 덮쳐온 어둠이 켈데브렘의 신체에 제멋대로 휘어감겨 움직임에 제약을 가했다. 또한 머리쪽으로 이동하며 시야를 방해하고 귓가에는 찢어지는 비명성과 분노와 증오 가득한 고함성을 울려댔다.
그 중 하나는 언뜻 네보니가 내지르는 절규인 것 같기도 했다.
– 감히…! –
그러나, 분노한 영웅이 전신에서 광휘를 불태우자 엉겨붙던 어둠은 순식간에 스러졌다. 동시에 횡으로 움직인 대검에서 뿜어진 은빛 초승달이 전방의 풀숲과 두터운 나무들을 소리도 없이 동강내며 십여 미터 이상을 쏜살같이 내달렸다.
하지만 그 공격에 적은 당하지 않았다.
어느새 허공으로 점프한 인간 하나가 그를 바라보며 양손 가득히 어둠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짧은 시간, 절대 인간의 것 아닌 마안(魔眼)과 시선을 마주친 켈데브렘이 눈을 부릅떴다.
그 안에 도사린 희미한 무언가, 얼핏 스쳐지나간 보랏빛 거대한 악(惡)의 존재감이 그의 전신 털들을 모조리 곤두서게 만들었다.
============================ 작품 후기 ============================
겨우 3일째이지만 1일1연재를 하게되어 기쁘네요.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한 번 꾹 부탁드립니다. (__)